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은 그믐달, 그러니까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세계라고 할까? 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단순하게도 해가 지고 나면 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믐은 정반대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역설. 잠깐 동안이라도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아마도 영혼을 온전히 탕진했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둠을 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믐달을 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 순수하다 못해 불안하게 된다. 장강명의『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속도감 있게 읽다보면 이러한 불안함의 정체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시간의 뒤틀림 때문이다.


사실 패턴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소설 속에서 남자.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평생을 전과자라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보통 가해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패턴을 단순하게 하거나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달이 천천히 기울면 강물 또한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치료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렇게 패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패턴의 결과에 대한 흔적을 조금씩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패턴으로 눈이 멀어 있을 때, 작가는 덧없이 흘러가는 패턴을 흔들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가슴에 ‘우주 알’을 품고서 말이다. 우주 알은 정체가 모호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 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알게 된다. 지난 날 살인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남자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질긴 운명을 뚝뚝 끊어내지 못한다. 세상과 달리 어머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가 아님을 호소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처럼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니게 되는데…….


작가는 남자를 희생하면서 거짓말을 완성한다. 소설 곳곳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곧 폭발할 것 같지만 남자는 거짓말을 굳이 바꿀 마음도 없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어 생긴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는 계속되고 결국에는 또 다른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만다. 거짓말은 시간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아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는 거짓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냥 마무리하려고 한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면 시간은 뒤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는 그래서 고통을 멈추게 해주는 그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믐이 없는 삶이란 이미 굳어져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믐이 있다고 해서 과거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큼 되돌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에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148).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거짓말이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아닌 삶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순서’가 없이 페이지가 섞이면서 말이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토록 남자가 거짓말이라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 아니면 된다. 


도대체 이 무슨 사랑의 착시(錯視)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풍당당(威風堂堂)!

삶을 둘러보면 지천벽(至天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만약에 이런 위풍당당함이 없다고 한다면 하늘에 닿는 다는 이름과 달리 몇 미터 높이의 절벽에 불과하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지천벽과 절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굴복이 아니라 오히려 지천벽이라는 곳이 왜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는가라는 의뭉스러움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위풍당당함은 삶의 존재감이라고 충분히 여겨질 만하다.

 

 

모든 것이 무너지며 사라지는 시대에 성석제의『위풍당당』과 함께 봉래산 아래 강마을에 들어선 까닭은 "가족이 뭐나요? 아자씨?"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봉래산은 금강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금강산은 봄에만 봉래산으로 불리는데 이곳 봉래산은 해발 사백여 미터에 불과한 사시사철 봉래산이다. 그런데 이곳 봉래산에 봉(鳳) 대신에 여섯 구성원들이 놀랍게도 한 가족을 이루며 산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어서 그들을 정작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다. 하지만 이곳 강마을에 들어온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더 이상 유전이나 혈연은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강(江)은 피(血)보다 강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들은 위풍당당한 식구가 되었다.

 

 

여섯 구성원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사연들은 하나하나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과장된 도덕적인 굴레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던 소희였으나 공개된 남편의 유언장에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이 없음을 알고 한낮 남편 인생의 ‘조화’(造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현주건물방화범’이 되었다. 이 소설의 사건을 만든 새미는 더욱 치명적이다. 가짜 아버지들에게서 성폭행을 당하는 욕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의 소설 속 인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에게 굳이 죄목을 붙이자면 ‘가출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출범들이 정(情)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유사 가족이 된다는 고달픔은 일부분이다. 피가 끓도록 아픈 느낌은 밋밋할 정도다.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이 찐하다. 이유인즉 이 소설의 화자가 다름 아닌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인 성석제이기 때문이다. 성석제만의 독특한 해학은 소설 속 사건들과 어렵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칠맛이 난다. 더구나 감칠맛의 정체가 ‘똥맛’이라고 할 정도로 꽤나 극적이다. 정말이지 똥맛을 제대로 알아야할 만큼 정신이 바짝 든다. 이러한 똥맛 때문에 강마을에 나타난 조폭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조폭이라는 위풍당당함으로 버텨온 세월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성석제는 이 소설에서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위풍당당한 식구'일 것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고 해서 꼭 바람(風)같은 평화를 고집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각이 생긴 느낌이라고 할까? 조폭들의 황당한 자기 모순을 희희화하면서 성석제는 '강 같은 평화'를 말하고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강, 이것이 강의 법도이며 진정한 위풍당당함 이다. 그래서 일까? 4대강을 파헤치는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죽음의 군대라고 조롱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위풍당당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 일곱 살,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다. 누군가 열일곱 살에 대해 묻는다면 위로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떠들어대도 정작 열일곱 살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위험한 폭발물이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시선은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은희경은『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오늘날 열일곱 살이 겪고 있는 열등감을 파괴하지 않았다. 작가 말대로 열일곱 살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열일곱 살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자 속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이것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상자를 내던지는 부주의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했다.

 

작가에게는 열일곱 살이 이미 지나간 생(生)이겠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나가야 할 생이었다. 지나감은 지나가야 함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그것은 하나의 생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에서 열일곱 살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를 자극했던 그 미묘함은 ‘카프카의 책’들이었다. 작가는 마치 열일곱 살을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으며 카프카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카프카는 빠지지 않았다. 만약 카프카가 없다면『변신』도 없으며 결국에는 열일곱 살은 지루함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 ‘변신’의 도화선은 열일곱 살 연우였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변신』에 나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았다. 그곳에서 연우는 자신의 방에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이전에 살던 방의 주인이 누구일까? 두려웠다. 자신의 거울과 똑같은 길이와 너비를 가졌던 사람을 상상하는 것도 만남이라고 하면 만남일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몸을 숨긴 채 바라봐야 했던 것도 낯선 만남에서 오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을 둘러싼 수수께끼에서 정작 연우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다만 거울 속 두 개의 얼굴은 전혀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국 청소년 독고태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열일곱 살의 상처들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소년 시절에 연우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그의 소년 시절은 곪아버렸다. 그때부터 연우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다워야 한다는’ 말이 열일곱 살이 된 지금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것은 곧 연우의 생활을 하나하나 조각냈다. 그러나 독고태수는 달랐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미스터 심드렁’이라고 다짜고짜 내뱉는 말투도 그렇고 힙합 스타일의 헐렁한 반바지도 그렇고 알듯 모를 듯한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도 그렇고 완전히 비호감이었다. 자신에게 곤란하고 귀찮은 ‘긴팔원숭이’로 여겨졌던 독고태수였지만 그의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한 순간 전율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심장이 마구 뛸 줄이야…….

 

<소년을 위로해줘>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울 수 있어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글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 말야

 

무엇다워햐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우리는 진짜보다 더 강한 척해야 하므로

 

남자스러움? 연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가령, 중학생이었던 연우는 육교 아래에서 돈을 뜯겼을 때 자신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엄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육교 아래로 끌려갔을 때 내 주머니에는 이천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뺏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치사함, 그리고 그런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후진 세상이라니.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정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만만한 데에 화풀이를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한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힙합이 연우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연우가 열일곱 살 때문이었을까? 클래식과 발라드보다는 힙합이 열일곱 살 세대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며 꿈과 희망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힙합이 가지고 있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사람의 모든 DNA에 내재된 리듬 때문일까? 이를 증명하듯 이혼한 엄마의 애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 재욱 형에 ‘힙합의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선율이 차지하는 절대적인데 힙합은 선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막강한 선율을 배제해버린 채 음악의 완성을 추구하는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힙합의 혁명성을 깨닫는 순간 연우는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더 이상 비겁해질 필요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위로했다.



한편, 거울 속 또 다른 얼굴이었던 민기훈이 거울의 맞은편 벽에다 낙서한 흔적을 알게 된 연우는 무심코 그림을 완성해보았다. 그러자 날개를 활짝 핀 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이 거울을 보자 마치 자신의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는 듯 했다. 민기훈이 그렸던 동물은 다름아닌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와 발톱 그리고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란다. 황금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그리핀! 무엇보다도 독고태수로부터 들었던 <소년을 위로해줘>를 부른 사람이 ‘G-그리핀’와 얽히면서 연우는 민기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이었던 민기훈이 정통 음악이 아닌 마이너나 언더를 즐겼다는 것을. 이러한 의문은 채영을 만나면서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기훈과 채영 사이에서 제 삼자에 불과한 연우였다. 채영은 연우를 보면서 기훈을 언제가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연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우가 카프카를 닮았으며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힙합, 카프카는 ‘소년의 감수성’이다. 다시 말하면 열일곱 살의 어두운 저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이편과 저편은 힙합이 이전 음악과 구별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팝이든 포크든 록이든, 블루스든 주어가 나인 노랫말은 무수히 많다. 바람, 구름, 들꽃을 노래해도 거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긴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이나 브람스의 애잔한 선율에도 나의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힙합은 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토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 실패한 연애 이야기 등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서열화된 교육제도의 모순,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까지, 꾸밈없이, 솔직하게, 거침없이, 때로는 생경하고 과격하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달린다.’에 있었다. 요즘 같은 문명인들에게 달린다는 것은 원시인으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냥 걷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달려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것이 ‘절제’때문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절제란 재미있어도 그만둘 줄 아는 힘, 귀찮아도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다. 연우는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통제하지 못해 마구 달리고 싶었다. 몸속에서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문제아로 찍혔던 태수는 빨간 불이라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이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빨간 불을 모조리 파란 불로 바꾸면서 말이다.


 

은희경의『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 있듯 연우, 태수라는 소년들이다. 그리고 채영이라는 소녀도 있다. 이들 모두는 열일곱 살이기 때문에 그들의 연령대를 위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년의 감수성’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과 아웃사이더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에는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폭력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살갗에 와 닿았다. ‘인생은 내 안의 freedom. It’s twisted 난 나로서 움직여.’ 만약 문제가 안 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소설을 ‘사랑이 식은 힘’으로 섰다고 고백했다. 사랑이 식는다고 외면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은 위로받아야 한다. 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할까, 어떤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숨 가쁘게 달리던 차들은 멈춘 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녀 혼자만이 횡단보도를 만보객(萬步客)마냥 걷고 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도시인이 만보객으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리라. 허공을 걷는 것이다. 혹은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네바 강을 배회하는 혼란스러움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슬픔에 대해서는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만이 자신의 슬픔을 우울하게 위로할 뿐이다. 정말일까?

6년 만에 김영하는 신작 소설집『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6년동안 작가가 세상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세밀하게 펼쳐놓고 싶었던 같았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21세기 삶은 도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듯 정차(停車)된 것만큼이나 번잡하며 그 간격이 좁아지는 데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도시에서 버림받는 자들의 가혹한 운명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망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타락은 우리들의 진짜 삶일까? 도시인의 타락을 바라보는 김영하의 시선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E. A. 포우 말대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치울 수 있는 장르인 단편소설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만으로 이미 소름이 돋았을’거라는 박민규의 엄살은 아주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산문은 벼락같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따분하지 않다는 것이며 쿨하다. 굳이 우리 시대의 굴곡이 무엇인지 또박또박 따지지 않았다. 그의 날렵한 산문은 작가 말대로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조용히 깃든 이 내밀한 유쾌’함에 우리들 가슴이 몹시 흔들리게 된다.

세상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상실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 어딘가에서는 분명 멈출 수 없는 붕괴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갈수록 건조해지고 탁해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전혀 꿈꿀 수 없는 신비로움이었다.「로봇」에서 수경은 황사 때문에 모래폭풍이 부는 도시를 ‘멋진걸’이라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는 실로 공평한 재난’이라고 했다. 수경의 상실감은 돈을 받고 사장과 이상한 관계를 맺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수경에게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로봇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사랑하는 대상 즉 수경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을 들려주었다. 즉, 제1조. 인간을 헤쳐서는 안 된다, 제2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봇3원칙 딜레마에 빠질 때도 있는데 수경이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랬다. 그러자 남자는 떠나고 만다.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수경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것은 분명 로봇3원칙의 딜레마였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과 달리「밀회」에 나오는 남자는 스스로를 ‘해파리’라고 했다. 허파를 갈망했던 남자는 ‘공기의 그 허약한 물질성마저 그리워’ 했다. 그 남자는 공기의 힘으로 세상을 유영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해파리일까, 궁금했는데 아마도 허파 때문이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공기를 많이 마실수록 투명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밀회」에서 이 남자는 제목대로 ‘밀회’를 하고 있다. 해파리의 밀회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파리가 마신 공기는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았다. 사랑일까, 비극일까? 라는 진부한 혹은 경건함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밀회」의 두 남녀에게 ‘정신적 정당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것은 밀회를 나누는 여자의 남편이 앓고 있는 ‘카푸그라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감정이 농후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남편에게 여자는 가짜 아내에 불과했다. 가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밀회를 나눈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이혼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욕망의 이면에는 친밀감이 사라진 외로운 존재의 꿈이 담겨져 있었다. 즉 밀회는 단순한 바람이 났다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인간의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기인한 감정의 칵테일 같은 것’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악어」는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허약하고 별 볼일 없는 작은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변성기(變聲期)가 찾아오면서 그의 일생은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모두에게 자기 생애 가장 슬픈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변성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변성이 목소리로 끝나지 않고 변성(變性) 즉 악어(鰐魚)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악어의 정체는 뭘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성기를 겪는 남자에게 악어(樂語)가 되는 것은 최고의 복수일 것이다. 비록 어느 순간 악어(惡語)로 나락하게 될지라도.

만약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악어(惡語)를 말한다면「퀴즈쇼」에 나오는 동국처럼 실패하고 말 것이다. 동국은 ‘퀴즈쇼’에서 마지막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국의 경쟁자였던 은이의 담담한 얼굴과 마주치며 전혀 뜻밖의 오답을 말해버렸다. 은이는 동국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동국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이코패스의 희생자로 성장한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그때의 불행으로 스물 살에 벌써 다 늙어버렸다는 그녀의 입에서 동국에게 ‘소양강 댐’이라는 시시한 말을 그냥 던진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집에서 운명의 모호함에 대한 또 하나의 막막함은「조」였다. 작가는「조」를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타락해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른 채 서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증폭하고 있다. 그럴 때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조」에는 필리핀에서 양봉업을 하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양봉업자에게 필리핀은 아마도 천국일 것이다.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약삭빠른 벌들이 필리핀에 겨울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살 갉아먹는 타락은 비극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도시인들의 가짜 사랑, 타락, 성적 욕망이라는 내면의 고통을 영화처럼 찍어내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영화같다고 하는 것은 바흐친의 따르면 ‘일상예찬론’이다. 그만큼 동시대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명예살인」에 나오는 ‘작은 뾰루지로 시작한 트러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퀴즈쇼」에 나오는 ‘인간은 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소설들의 반전(反轉)에는 타인의 마음을 충분히 상상해보게 했다. 김영하가 말하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은 뭐랄까,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찬란한 채찍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범신의『은교』를 읽었습니다. 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가 열일곱 살의 한은교를 사랑해서 놀랐습니다. 나이든 사람에게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70대의 사랑이 젊음을 갈망한다면 허영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파스칼이『팡세』에서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했지만 그건 위대한 철학자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정작 우리들에게는 셰익스피어 말대로 ‘분별력 없는 광기’여서 유치찬란해 보였습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황량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 늙은 소나무가 있는 집에 사는 이적요는 오히려 침묵을 깨뜨리면서 자신이 극적으로 살았던 삶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씻어내기 위해 파릇한 은교를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의 불협화음이 이 정도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는 이기적인 마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사랑이 사치스럽다고 불만을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요의 사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은밀했습니다. 관능,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다닥 불꽃 튀는 젊은 사랑만 뜨거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랑에 대해 이적요는 으레 그럴 줄 알았던 것 마냥 ‘멍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서지우가 멍청한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서지우는 은교를 사이에 두고 스승인 이적요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서지우는 쓰디쓴 자괴감을 참아야했습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감수성이 없었던 서지우는 이적요가 말한 관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던 서지우에게 은교는 어디까지나 은교였습니다. 반면에 이적요에게는 은교는 젊은 신부였습니다. 서지우가 꿈꾼 사랑이 ‘편안한 의자’였다면 이적요는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었습니다. 서지우가 보기에 미친 불꽃은 위험했습니다. 이적요가 한은교의 젊음을 더듬어 보게 할 만큼 타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둘의 사이를 간섭하면서 스승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이적요에게 버림만 받았습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사랑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은 70대의 남자입니다. 사랑을 감당하기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또 한쪽은 젊다고 할 수 없는 40대의 남자입니다. 그들이 스무 살도 안 된 은교에게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는 행동들은 사랑을 탕진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은교를 사랑하는 것은 거대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이적요가 자신의 집에 놓여져 있는 의자에서 잠든 은교를 보면서 ‘쇠별꽃’ 같다고 했을 때 사랑은 발화되었습니다. 그 순간 은교의 몸짓 하나하나는 불멸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사람과 몸짓 중에서 어느 것이 많은 것인가? 고심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몸짓이 많다고 한다면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란 쿤테라는 몸짓이 적다고 했습니다. 몸짓이 적은 이유는 그만큼 사랑의 고통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은교』에서 이적요가 은교를 쇠별꽃 같다고 하면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는겠는가’라고 절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지는 것도 사랑의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니 만지고 싶은 게 너무도 당연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데도 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적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70 노인의 성욕이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만져야 할지 모른다는 변명보다는 왜 만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처럼’ 절절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쇠별꽃 같은 몸짓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까요? 남들에게는 처녀의 숨결이 별 것 아닌 것이 이적요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로 불리는 자신의 낡은 코란도 차로 서지우를 죽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체온으로 꿈틀대는 관능을 모르는 자에 대한 마땅한 죗값이라고 하였지만 사랑을 주는 자의 쓸쓸함이라고 하겠지요. 죗값이라고 하기에는 남녀가 사랑하다 보면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보려고 애쓴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욕망이라는 것에 늘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적요에게 충직했던 당나귀가 끝내는 살인당나귀가 되고 마는 것은 질투의 마음의 극에 달한 이적요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가 말대로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 것이어서 자기 무덤을 파고 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것들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의 좋고 나쁨을 떠나 ‘우주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좀 더 편하게 사랑에 매혹당할 수 있습니다.『은교』에서 박범신은 사랑의 매혹덩어리가 ‘관능’이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이상한 힘이 생기면서 사랑이 발화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관능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은-교’라는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달콤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했습니다.『롤리타』에서 험버트가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에서 롤리타를 불렀듯이『은교』에서 이적요는 은-교를 부르면서 혀끝이 달콤하다고 했습니다. 혀끝이 달콤한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인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