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 살,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다. 누군가 열일곱 살에 대해 묻는다면 위로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떠들어대도 정작 열일곱 살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위험한 폭발물이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시선은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은희경은『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오늘날 열일곱 살이 겪고 있는 열등감을 파괴하지 않았다. 작가 말대로 열일곱 살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열일곱 살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자 속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이것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상자를 내던지는 부주의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했다.
작가에게는 열일곱 살이 이미 지나간 생(生)이겠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나가야 할 생이었다. 지나감은 지나가야 함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그것은 하나의 생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에서 열일곱 살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를 자극했던 그 미묘함은 ‘카프카의 책’들이었다. 작가는 마치 열일곱 살을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으며 카프카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카프카는 빠지지 않았다. 만약 카프카가 없다면『변신』도 없으며 결국에는 열일곱 살은 지루함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 ‘변신’의 도화선은 열일곱 살 연우였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변신』에 나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았다. 그곳에서 연우는 자신의 방에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이전에 살던 방의 주인이 누구일까? 두려웠다. 자신의 거울과 똑같은 길이와 너비를 가졌던 사람을 상상하는 것도 만남이라고 하면 만남일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몸을 숨긴 채 바라봐야 했던 것도 낯선 만남에서 오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을 둘러싼 수수께끼에서 정작 연우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다만 거울 속 두 개의 얼굴은 전혀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국 청소년 독고태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열일곱 살의 상처들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소년 시절에 연우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그의 소년 시절은 곪아버렸다. 그때부터 연우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다워야 한다는’ 말이 열일곱 살이 된 지금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것은 곧 연우의 생활을 하나하나 조각냈다. 그러나 독고태수는 달랐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미스터 심드렁’이라고 다짜고짜 내뱉는 말투도 그렇고 힙합 스타일의 헐렁한 반바지도 그렇고 알듯 모를 듯한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도 그렇고 완전히 비호감이었다. 자신에게 곤란하고 귀찮은 ‘긴팔원숭이’로 여겨졌던 독고태수였지만 그의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한 순간 전율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심장이 마구 뛸 줄이야…….
<소년을 위로해줘>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울 수 있어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글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 말야
무엇다워햐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우리는 진짜보다 더 강한 척해야 하므로
남자스러움? 연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가령, 중학생이었던 연우는 육교 아래에서 돈을 뜯겼을 때 자신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엄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육교 아래로 끌려갔을 때 내 주머니에는 이천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뺏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치사함, 그리고 그런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후진 세상이라니.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정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만만한 데에 화풀이를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한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힙합이 연우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연우가 열일곱 살 때문이었을까? 클래식과 발라드보다는 힙합이 열일곱 살 세대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며 꿈과 희망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힙합이 가지고 있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사람의 모든 DNA에 내재된 리듬 때문일까? 이를 증명하듯 이혼한 엄마의 애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 재욱 형에 ‘힙합의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선율이 차지하는 절대적인데 힙합은 선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막강한 선율을 배제해버린 채 음악의 완성을 추구하는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힙합의 혁명성을 깨닫는 순간 연우는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더 이상 비겁해질 필요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위로했다.
한편, 거울 속 또 다른 얼굴이었던 민기훈이 거울의 맞은편 벽에다 낙서한 흔적을 알게 된 연우는 무심코 그림을 완성해보았다. 그러자 날개를 활짝 핀 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이 거울을 보자 마치 자신의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는 듯 했다. 민기훈이 그렸던 동물은 다름아닌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와 발톱 그리고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란다. 황금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그리핀! 무엇보다도 독고태수로부터 들었던 <소년을 위로해줘>를 부른 사람이 ‘G-그리핀’와 얽히면서 연우는 민기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이었던 민기훈이 정통 음악이 아닌 마이너나 언더를 즐겼다는 것을. 이러한 의문은 채영을 만나면서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기훈과 채영 사이에서 제 삼자에 불과한 연우였다. 채영은 연우를 보면서 기훈을 언제가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연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우가 카프카를 닮았으며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힙합, 카프카는 ‘소년의 감수성’이다. 다시 말하면 열일곱 살의 어두운 저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이편과 저편은 힙합이 이전 음악과 구별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팝이든 포크든 록이든, 블루스든 주어가 나인 노랫말은 무수히 많다. 바람, 구름, 들꽃을 노래해도 거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긴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이나 브람스의 애잔한 선율에도 나의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힙합은 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토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 실패한 연애 이야기 등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서열화된 교육제도의 모순,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까지, 꾸밈없이, 솔직하게, 거침없이, 때로는 생경하고 과격하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달린다.’에 있었다. 요즘 같은 문명인들에게 달린다는 것은 원시인으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냥 걷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달려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것이 ‘절제’때문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절제란 재미있어도 그만둘 줄 아는 힘, 귀찮아도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다. 연우는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통제하지 못해 마구 달리고 싶었다. 몸속에서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문제아로 찍혔던 태수는 빨간 불이라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이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빨간 불을 모조리 파란 불로 바꾸면서 말이다.
은희경의『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 있듯 연우, 태수라는 소년들이다. 그리고 채영이라는 소녀도 있다. 이들 모두는 열일곱 살이기 때문에 그들의 연령대를 위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년의 감수성’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과 아웃사이더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에는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폭력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살갗에 와 닿았다. ‘인생은 내 안의 freedom. It’s twisted 난 나로서 움직여.’ 만약 문제가 안 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소설을 ‘사랑이 식은 힘’으로 섰다고 고백했다. 사랑이 식는다고 외면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은 위로받아야 한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