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쿄 타워>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웬지 계속 못보고 자꾸 딴 짓을 하게 된다.
영화가 지루하거나 재미 없어서가 아니다.
왜그런지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아직 반도 못보았는데 어떤 가슴 뭉클한 장면에 이르게 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pause를 누르게 되는 것이다.
참, 한심한 아줌마 같으니라구.
이런 물러터진 마음으로 어찌 살아나가누, 쯧쯧 

오래 전, 해질 무렵의 하늘을 보면서, 떨어져 있는 가족들 생각에 역시 가슴이 뭉클, 눈물이 찔끔 나던 때 생각이 난다. 그당시 내게 있어 가족이란 그렇게 애뜻함이 연상되는 그런 단어가 아니었다.  모두 자기 할 일들에 바빠 communication 이라고는 거의 되지 않고 있던 우리 가족, 그저 동일 장소에서 밥 먹고 (각자) 잠을 잔다는 것뿐, 서로의 걱정과 고민이 전혀 공유되지 않는 상황, 내가 집을 떠나온 것은 바로 그런 때였음에도.
아마, 그래서였나? 그렇게 해질 무렵만 되면 눈물이 나던게. 

이보다 더 전에, 학교 실험실에 있을 때였다. 하루 종일 안되는 실험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A동 1층에 있는 실험실에서 B동 3층에 있는 자동 판매기까지 가서 커피를 뽑아 들고, 다시 A동으로 돌아오기 위해 구름다리를 건널 때, 해가 지고 있는 모습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름다리에 잠시 팔을 얹고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 보곤 했다. 그러면 그냥 모든 것이 서글펐다. 지금의 갑갑한 내 상황도 그렇고, 이렇게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런 것까지 떠올리기도 했고,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라, 마음이 정착할 곳 없이 이리 저리 떠도는 모든 사람들이 동지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내 마음은 한마디로 외로움, 그거였다. 

또 해가 지는 이 시간.
영화 도쿄 타워를 오늘 계속 볼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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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9-06-10 21:00   좋아요 0 | URL
해 넘어가는 시간을 이렇게 감상에 젖어 지켜보는 것은 가끔씩만 하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는 뿌듯함으로만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 뭐하시나요? 저는 라디오 메이의 볼륨을 높여요 들으면서 일하고 있어요 ^^

프레이야 2009-06-11 00:38   좋아요 0 | URL
오늘 좋은 사람 몇이랑 한 잔 하고 들어왔어요.
낮에는 매실도 땄어요. 정말 좋으신 분의 집에 초대되어
그집 정원에서요. 매실도 알이 굵은 종이 있고 알이 작은 종이
따로 있더군요. 잎도 크고 작고 다르구요.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색깔이 예쁜줄도 새삼 처음 느꼈어요.
비온 뒤라 그런지 깨끗하게 씻겨서 더 그랬던가 봐요.^^

hnine 2009-06-11 09:41   좋아요 0 | URL
좋은 저녁 시간을 보내셨네요.
매실 철이지요. 매실을 사다가 설탕 재워보기는 했는데 직접 따본 적은 없네요. 색깔도 참 싱그럽지요?
저 지금은 양희은 강석우의 여성시대 들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ㅋㅋ
 

 -겨운이의 일기- 

'아빠는 이 정도가 나에게 적당량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내주시는 걸까?'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 겨운이는 매일 아빠가 내주신 영어 숙제를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무조건 외워라'는 것이 아빠가 말씀하시는 영어 공부의 왕도. 매일 단어 외우기,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 본문 외우기 숙제를 내주시고는 밤에 퇴근하신 후 겨운이를 부르셔서 테스트를 하신다. 중학교에 채 입학하기도 전에, 방학다운 방학은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어 겨운이는 못내 아쉽기도 했지만, 이제 초등학생이 아닌 어엿한 중학생이 된다는 자부심으로 아쉬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침에 부모님께서 모두 출근하시고 나면 그림도 그리고 TV도 보고 책도 읽고 친구들과 놀며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하며 시간을 보내는 새운이를 볼 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매일 테스트를 위해 영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긴장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과 비교하면 말이다. 

중학교 입학 기념과 함께 영어 공부라는 숙제 말고 아빠로부터 미리 선물로 받은 것도 있다. 바로 책상 위에 놓고 듣는 아담한 라디오 이다. AM/FM  겸용 라디오라는데, 엄마가 가끔 뜨게질을 하시며 듣곤 하시던 안방의 라디오 말고, 겨운이 자신만의 전용 라디오가 생긴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책상에 앉음과 동시에 라디오를 켜고 듣는 새로운 취미를 즐기게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따라서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밥 먹는 시간 외에 거의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겨운에게, 라디오는 친구 역할을 톡톡히 해주게 되었다. 예전처럼 밖에 나가 친구들과 뛰어놀지 못해도 심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전의 주부 대상 프로그램부터 오후의 가요 프로그램, 저녁 때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심야의 영화 음악 프로그램까지, 시간마다 진행자가 바뀌고 대상층이 바뀌고, 틀어주는 노래가 틀리니, 어쩌면 매일 같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색다른 재미가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 겨운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내오던 것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조금 두려운 느낌도 드는, 묘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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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6-04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궁금한데 정말 겨운이 세운이가 누구여요?

hnine 2009-06-04 15:30   좋아요 0 | URL
제 마음 속의 아이들이어요 ^^

2009-06-04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9-06-04 19:36   좋아요 0 | URL
저 혼자 막 꾸며서 쓰는 이야기인데, 비공개 카테고리에 쓰면 이상하게 더 잘 안쓰게 되더라고요 ^^ 그래서 그냥 생각날 때 마다 마구 써서 올리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안그래도 쓰다보면 제 느낌이나 목소리가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해요.
 

 

    

 

 

 

 

 

  

작년 생일에 내가 골라서 동생이 사준 책이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 않아 내키는 날에만 아무데나 펴서 내키는데까지 읽고는 했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의 DVD가 나왔다는 것을 kitty님으로부터 듣고 뜸들이기를 몇달.
오늘 드디어 이 책의 DVD를 갖게 되어 어디 한번~ 하면서 디스크를 하나 꺼내 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월광'피아노 소나타가 배경 음악으로 깔리니 마음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몰입시키는 효과가 있다. 화면에는 표지 그림 처럼 붉은 색 물감이 천천히 확산되어 가는 모습이 펼쳐지고. 사이먼 샤마의 나레이션이 시작되고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옆에서 함께 보고 있던 녀석이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 몰입하려던 나를 깨놓고 만다.
"느낌은 그림과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지. 그게 느낌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야."
어디서 들은 말일까. 자기 말로는 듣고서 하는 말 아니라지만. 


모두 잠 들고 혼자 남은 시간, 로스코 편을 보았다.
80여분 분량.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 않고 보고 나서, 그 다음에 책의 그 부분을 펼쳐 책장을 넘기니, 아~ 이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이렇게 보는거구나, 이렇게 봐야겠구나.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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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5-2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마련하셨군요!!!!!!!!!!!!!!!!!!!!!!!!!!!!!!!!!!!!!!!! 경축드리옵니다!!!!
로스코두 좋구 피카소두 좋구 아웅 다 좋아요. 저는 요즘 다시 고전에 빠져 앞의 4개(카라바지오, 베르니니, 렘브란트, 다비드)가 특히 좋았어요. 뭔가...그 수백년 전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꼭 옆집 사람 이야기처럼 다가온달까...베르니니두 그렇구, 렘브란트도 그렇구,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다시 보면 느낌이 정말 다를 것 같아요.

hnine 2009-05-23 16:41   좋아요 0 | URL
Kitty님 덕분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영국에서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박사후 과정 연구원으로 세달동안 내가 있던 연구실로 파견나와 있던 Isabelle을 연구실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저 타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플러스, 객식구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서 Isabelle이 의식적으로 더 연구실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군다거나, 더 어울리려 든다거나, 그런 타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일까, 또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참으로 성향이 다르더라는, 내가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겪어 보고 알게 된 것, 그것도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파티 비슷한 자리에서 영국식 유머에 대한 얘기였는지 아무튼 무슨 얘기인가가 오가던 중 우리 연구실의 최고참인 테크니션 영국인 할머니 (인자한 할머니 보다는 터프한 할머니에 가깝다) 가 그나마 친절하게 Isabelle에게 "너희 프랑스 사람들과는 참 틀리지?" 라고 말했더니 Isabelle의 대답, "당신이 프랑스 사람을 알아?" 
허걱~


아래 영화 소개를 보며 문득 그날 일이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직 한편도 보질 못했으면서 내 머리속에는 어떤 선입관이 언제부터 미리 들어와 앉아있다.
보고 싶은 영화로 찜. 

  

위의 Isabelle은 애초 예정했던 세달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어 우리 연구실에 있는 동안 나랑 참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서로 동갑이기도 했고, 성격이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못하는) 나의 그 멋없는 성격과,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변덕이 심하지 않으며, 영화와 박물관, 미술관 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이 다행히 조화를 잘 이룬 덕이었다. 어디다 내 놓아도 꿋꿋하게 잘 살아나갈 것 같은, 씩씩한 그녀의 눈에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맺히며, 예전에 한동안 사귀던 연인이 왜 갑자기 자기를 떠났는지 아직도 자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벌써 10년 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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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5-1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던데.
뭔가, 좀 더 괜찮은 댓글을 달고 싶은데 요샌 어찌된게 댓글을 달려다가도 손이 툭 떨어져버리는 것만 같아선. 정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우가 참 많죠.

hnine 2009-05-11 20:05   좋아요 0 | URL
저도 Arch님 서재 가서 페이퍼 다 읽고도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할지 몰라 멀뚱하게 그냥 나오는 때가 얼마나 많다구요. 심각한 듯 한데 언제나 웃음 나올 대목이 숨어 있는. ^^
전 이렇게 찜 해놓고도 꼭 본다고 장담 못해요.

새초롬너구리 2009-05-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영화제목이란 은근히도 무척이나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전 영화 제목때문에 어제 드디어 [타인의 취향]을 보았지요.

과연 '잘'안다는게 뭔지 모르겠어요.

"니들이 게맛을 알아?"란 말, 그건 진짜게가 아닌 게맛의 성분이 더 많은 음식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열광시키잖아요.

hnine 2009-05-11 20:08   좋아요 0 | URL
새초롬너구리님, 잘 안다는게 뭔가 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뭔가를 안다고 말하면 그건 정말 잘 아는거 아닐까요^^
사실 "네가 날 알아?" 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그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나,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어요.
<타인의 취향>이라, 정말 제목때문에 끌릴만한데요.

하늘바람 2009-05-1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면 슬퍼져요. 왜냐면 그냥 영화같지 않고 삶같아서요.

hnine 2009-05-11 20:0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렇게 리얼한가요?

2009-05-11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1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2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1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기다리고 있어요.
이사벨, 그녀에게 왠지 끌리네요. 연약하고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속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ㅎㅎ

hnine 2009-05-12 21:37   좋아요 0 | URL
이사벨은 우리가 떠올리는 프랑스 여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아주 당당하고 씩씩하고 독립적인 여자였어요. 제 성격을 딱 뒤집어놓은 듯한~ ^^
어떻게 우리 둘이 그렇게 친할 수 있었나,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이 페이퍼 쓰고 나니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네요.

L.SHIN 2009-05-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과 프랑스는...오랜 전부터 사이가 그닥 좋지는 않았죠. 오래된 골의 유전이랄까..
하지만 역시 누군가 나에 대해 잘 아는 것 처럼 떠들면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죠.^^

hnine 2009-05-12 16:40   좋아요 0 | URL
그런걸 알고 나서 보니 양국의 국민성도 참 많이 틀린 것 같고요. 제가 아는 프랑스 사람이란 위의 Isabelle뿐인데 그녀의 예를 들어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더라 하고 얘기하면 안되겠지만요. 휴~ 조심스러워라 ^^
 

새운이 _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겨운이 - "새운아, 네가 자랑 안해도 다 알아줄테니 기다리고 있어."

겨운이가 1년을 넘게 엄마를 졸라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지 이제 두어 달.
언니가 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도 같이 해야하는 것으로 아는 새운이, 피아노도 역시 언니랑 한날 시작해서 겨운이 만큼이나 재미있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매일 둘이서 나란히 피아노 가방을 들고 피아노를 배우러 가는 것도 좋았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레슨을 받고 다른 한 사람 레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나란히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악보를 읽을 줄 알게 되면서, 모르던 노래도 악보만 있으면 보고서 바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은 너무나 신기하여, 자려고 누워서 집에 있는 동요 전집 책에 있는 노래들을 겨운이 한곡, 새운이 한곡, 번갈아 가며 노래 부르고 노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다가, 늦게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고 한밤 중에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이상해서 주무시다 말고 나오신 할머니께 꾸중을 듣도 했다.
언니가 30분 연습하면 새운이도 30분, 언니가 치는 곡은 새운이도 혼자서라도 쳐보곤 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정말 싫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이다. 집에 손님이 오셨다하면 아빠나 엄마는 겨운이와 새운이를 불러서 손님 들으시게 피아노좀 쳐보라고 하시는거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긴 해도 모르는 사람 앞에 불려나가 치는 것은 정말 싫었던 겨운이에 비해, 새운이는 어디 피아노 치는 것을 뽐낼 기회가 없나 기다리기나 했던 것 처럼 아빠께서 피아노 쳐보라는 말씀 하시기가 무섭게 피아노 앞으로 가서는 이 곡 저 곡 아무거나 신나게 치고는 칭찬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새운이를 보며 속으로 '유치해, 유치해.' 를 연발하고 있는 겨운이에게 으례히 동생이 저렇게 잘 치는데 언니가 가만 있으면 되겠냐는 부추킴의 화살이 돌아오고 그러면 새운이에 이어 겨운이도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를 안 치고 빠져 나올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그날 역시 낮에 손님이 오실거라는 아빠의 말씀을 듣고 이번에 겨운이는 미리 새운이를 불러 당부했다.
"새운아, 있다가 손님 오시면 아빠께서 또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실지 몰라. 그러니까 인사만 하고 우리 손님 앞에 얼씬도 하지 말자. 알았지?"
겨운이는 우리가 눈 앞에 안 보이면 피아노 쳐보라고 시키시는 것도 잊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응, 알았어."
건성인 것 같지만 어쨌든 새운이의 대답을 듣고 겨운이는 일단 안심하고 방에서 읽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점심 때가 좀 못 되어 손님이 오시는 소리, 엄마 아빠께서 맞으시는 소리가 들리고, 겨운이는 의례 하던 대로 새운이를 데리고 현관으로 인사를 드리러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른 손님 뿐 아니라 어린이 손님도 있는 것이다. 아빠의 손님인 아저씨의 아들인 듯 한, 겨운이와 새운이 또래의 남자 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 아이와는 인사도 나누기 전에 겨운이는 아저씨께만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새운이도 따라 들어오나 싶었는데 책을 읽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새운이가 보이지 않는다. 같이 온 남자 아이에게 호기심이 생겼던지 새운이는 손님께서 앉아 계신 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부엌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또 피아노 쳐보라는 소리 들으려고 쟤가!' 
겨운이는 불안해지면서 기껏 미리 일렀건만 저러고 있는 새운이가 못마땅했다. 새운이를 불러서 다시 다짐을 받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겨운이 역시 손님이 계신 마루를 가로질러 가야했으므로 방에서 꼼짝도 못하며 불안해하고 있던 중, 아니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피아노 건반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니, 세상에, 새운이가 선 채로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 몇개를 뚱땅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손님에게 보란 듯이.
"피아노는 누가 치는거니? 네가 배우고 있니?"
손님께서 물으시는 소리가 들리고 아빠께서는 겨운이와 새운이 둘 다 배우기 시작한지 몇 달 되었다고 대답하시고,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옆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던 새운이에게 요즘 배우는 곡을 한번 쳐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새운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피아노 책을 펼치더니 요즘 배우고 있는 바이엘 곡을 치고, 이어서 동요도 한 곡 신나게 치는 것이다. 겨운이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결국 각본대로 겨운이도 마지못해 한 곡 치고 들어오는데, 제대로 연습이 된 곡이 아니라서 실수를 많이 했고, 그것이 더 부끄러워 얼굴도 못들고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겨운이 마음 속엔 이건 모두 새운이 때문이라고 원망이 가득하다. 새운이가 그러겠다고 대답을 안했다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두는건데, 그랬다면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하면서 치지 않았을텐데. 창피하고 부끄럽고 속이 상했다.
이런 겨운이 마음도 모르고 새운이가 방으로 달려들어와 흥분이 가뜩한 얼굴로 겨운이에게 말을 전해준다.
"언니, 저 아저씨가 나와보래. 언니도 나도, 피아노 아주 잘 친다고 칭찬해주셨어." 
'그 아저씨, 피아노 잘 모르시나보구나. 내가 얼마나 많이 실수를 했는데.' 
겨운이는 아마 그 아저씨 앞에서 잘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흡족하게 치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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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05-1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매는 자라면서 라이벌도 되고, 친구도 되고, 때로는 웬수(?)도 되면서 관계를 배워가지요. 저랑 언니도 그랬구요. 겨운이와 새운이 이름도 참 예뻐요~~

hnine 2009-05-11 21:20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매로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좀더 공감이 갈 내용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