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운이 _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겨운이 - "새운아, 네가 자랑 안해도 다 알아줄테니 기다리고 있어."

겨운이가 1년을 넘게 엄마를 졸라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지 이제 두어 달.
언니가 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도 같이 해야하는 것으로 아는 새운이, 피아노도 역시 언니랑 한날 시작해서 겨운이 만큼이나 재미있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매일 둘이서 나란히 피아노 가방을 들고 피아노를 배우러 가는 것도 좋았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레슨을 받고 다른 한 사람 레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나란히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악보를 읽을 줄 알게 되면서, 모르던 노래도 악보만 있으면 보고서 바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은 너무나 신기하여, 자려고 누워서 집에 있는 동요 전집 책에 있는 노래들을 겨운이 한곡, 새운이 한곡, 번갈아 가며 노래 부르고 노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다가, 늦게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고 한밤 중에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이상해서 주무시다 말고 나오신 할머니께 꾸중을 듣도 했다.
언니가 30분 연습하면 새운이도 30분, 언니가 치는 곡은 새운이도 혼자서라도 쳐보곤 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정말 싫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이다. 집에 손님이 오셨다하면 아빠나 엄마는 겨운이와 새운이를 불러서 손님 들으시게 피아노좀 쳐보라고 하시는거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긴 해도 모르는 사람 앞에 불려나가 치는 것은 정말 싫었던 겨운이에 비해, 새운이는 어디 피아노 치는 것을 뽐낼 기회가 없나 기다리기나 했던 것 처럼 아빠께서 피아노 쳐보라는 말씀 하시기가 무섭게 피아노 앞으로 가서는 이 곡 저 곡 아무거나 신나게 치고는 칭찬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새운이를 보며 속으로 '유치해, 유치해.' 를 연발하고 있는 겨운이에게 으례히 동생이 저렇게 잘 치는데 언니가 가만 있으면 되겠냐는 부추킴의 화살이 돌아오고 그러면 새운이에 이어 겨운이도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를 안 치고 빠져 나올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그날 역시 낮에 손님이 오실거라는 아빠의 말씀을 듣고 이번에 겨운이는 미리 새운이를 불러 당부했다.
"새운아, 있다가 손님 오시면 아빠께서 또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실지 몰라. 그러니까 인사만 하고 우리 손님 앞에 얼씬도 하지 말자. 알았지?"
겨운이는 우리가 눈 앞에 안 보이면 피아노 쳐보라고 시키시는 것도 잊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응, 알았어."
건성인 것 같지만 어쨌든 새운이의 대답을 듣고 겨운이는 일단 안심하고 방에서 읽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점심 때가 좀 못 되어 손님이 오시는 소리, 엄마 아빠께서 맞으시는 소리가 들리고, 겨운이는 의례 하던 대로 새운이를 데리고 현관으로 인사를 드리러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른 손님 뿐 아니라 어린이 손님도 있는 것이다. 아빠의 손님인 아저씨의 아들인 듯 한, 겨운이와 새운이 또래의 남자 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 아이와는 인사도 나누기 전에 겨운이는 아저씨께만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새운이도 따라 들어오나 싶었는데 책을 읽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새운이가 보이지 않는다. 같이 온 남자 아이에게 호기심이 생겼던지 새운이는 손님께서 앉아 계신 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부엌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또 피아노 쳐보라는 소리 들으려고 쟤가!' 
겨운이는 불안해지면서 기껏 미리 일렀건만 저러고 있는 새운이가 못마땅했다. 새운이를 불러서 다시 다짐을 받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겨운이 역시 손님이 계신 마루를 가로질러 가야했으므로 방에서 꼼짝도 못하며 불안해하고 있던 중, 아니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피아노 건반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니, 세상에, 새운이가 선 채로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 몇개를 뚱땅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손님에게 보란 듯이.
"피아노는 누가 치는거니? 네가 배우고 있니?"
손님께서 물으시는 소리가 들리고 아빠께서는 겨운이와 새운이 둘 다 배우기 시작한지 몇 달 되었다고 대답하시고,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옆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던 새운이에게 요즘 배우는 곡을 한번 쳐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새운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피아노 책을 펼치더니 요즘 배우고 있는 바이엘 곡을 치고, 이어서 동요도 한 곡 신나게 치는 것이다. 겨운이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결국 각본대로 겨운이도 마지못해 한 곡 치고 들어오는데, 제대로 연습이 된 곡이 아니라서 실수를 많이 했고, 그것이 더 부끄러워 얼굴도 못들고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겨운이 마음 속엔 이건 모두 새운이 때문이라고 원망이 가득하다. 새운이가 그러겠다고 대답을 안했다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두는건데, 그랬다면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하면서 치지 않았을텐데. 창피하고 부끄럽고 속이 상했다.
이런 겨운이 마음도 모르고 새운이가 방으로 달려들어와 흥분이 가뜩한 얼굴로 겨운이에게 말을 전해준다.
"언니, 저 아저씨가 나와보래. 언니도 나도, 피아노 아주 잘 친다고 칭찬해주셨어." 
'그 아저씨, 피아노 잘 모르시나보구나. 내가 얼마나 많이 실수를 했는데.' 
겨운이는 아마 그 아저씨 앞에서 잘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흡족하게 치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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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05-1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매는 자라면서 라이벌도 되고, 친구도 되고, 때로는 웬수(?)도 되면서 관계를 배워가지요. 저랑 언니도 그랬구요. 겨운이와 새운이 이름도 참 예뻐요~~

hnine 2009-05-11 21:20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매로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좀더 공감이 갈 내용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