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부터 얼마나 피아노가 배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1970년대이니,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지만, 요즘 말로 나의 로망이었음이라. 엄마께서는 쉽게 허락을 안하셨고, 몇년을 조르고 졸라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겨우 레슨을 받게 되었다. 하루 하루 피아노를 배워나가는게 너무 좋아서,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보다 훨씬 더 해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진도가 훨씬 빨랐다. 그러나 나는 그때 진도가 빨리 나가고 어쩌고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른손, 왼손, 그 다음에는 양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어가는 과정들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던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 피아노 배우기만큼 나에게 배움이 즐거움 그 자체였던 적이 있었나 싶다.
늦은 나이에 혼자 떠난 유학 생활. 인터넷은 커녕, 기숙사 방에는 TV도 없었다. 가자 마자 구입한 CD플레이어와 가져간 책 몇 권이 전부. 아무 할 일이 없던 주말에는 주중에 못느끼던 '혼자'라는 생각이 예전에 느껴본 적 없는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아리게 했다. 눈물이 막 나려고 할때의 그 가슴 통증 같은 것이, 눈물이 나지 않을 때에도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치고 들어왔다. 어느 주말, 할일 없이 교정을 어슬렁 거리다가 문득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학교 음대 건물 옆을 지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봤다. 그리고 비어있는 피아노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쳐봤다. 이후로, 주말에 내가 하는 일은 혼자 기차타고 여기 저기 미술관이나 박물관 구경다니는 것 아니면 한나절 피아노 뚱땅거리는 것이 되었는데, 한때 취미로 배워두었던 피아노가 그렇게 나에게 위로가 되어줄 줄은 몰랐다. 어떤 친구가 그때 피아노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다독여 주었으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신 없이 사는 몇 해 동안 피아노를 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아이가 크면 꼭 음악을 알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꼭꼭 다지고 있었다. 앞으로 아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그것이 큰 위안이 되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에게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피아노를 구입해놓고, 아이에게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건반을 직접 눌러보게도 하면서 흥미를 가지게 하느라 애쓰기도 했다. 아이가 일곱살이 되던 작년에 드디어 아이 입에서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번 나는 아이 손을 잡고 레슨을 다녔고,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리고 오는 그 일이,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이도 즐겁게 잘 배워오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아이의 연습하는 태도가 예전같지를 않고, 엄마인 내가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져 오기 시작해왔다. 연습을 시킬 때마다 몇 번씩 알려줘도 모르는 것 하며, 그러면서 딴청을 피우고, 연습 해라, 오늘 레슨 날이다, 일일이 챙겨서 시키는 것에 나도 모르게 지쳐갔다. 자연히 연습시키면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화도 내고, 피아노 연습하다말고 아이가 우는 일도 빈번해지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지 딱 1년이 된 어제, 나는 아이에게 피아노 이제 그만 배우자라는 말을 했다. 네가 너무 힘든가보다, 좀 쉬었다가 다시 배우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하기로 하자, 배우는건 너인데, 엄마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래가면서. 아이는 고개를 숙인채 아무말도 안하고, 나는 피아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ㅡ, 집에서는 그런지 몰라도 레슨 받을 때에는 재미있게 잘 하고 있다고. 남자 아이들이 대체로 자발적으로 연습하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다고 그러신다. 그러면서 다음에 하신 말이 갑자기 내 가슴에 팍 하고 꽂혔다. 여기서 피아노를 그만 두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럴 때에는 좀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고. '기다려주기'. 난 대체 누구의 기준으로 아이가 흥미없어 한다, 가르쳐줘도 잘 모른다, 이럴 바에는 그만 두는게 낫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전화를 끊고 아이와 마주 앉아 다시 얘기를 나누어보았다. 자기는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싶단다. 눈물이 글썽글썽.
기다려준다는 것. 어떤 과정을, 또는 관계를, 무슨 이유에서든지 끝내는 것이 낫겠다, 끝내자, 일방적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대를 내려 놓고, 한발 물러서서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을 깨우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