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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위징아
빌렘 오터스페어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1월
평점 :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요즘 우리 집은 ‘둘째 한글 깨치기 대작전’에 들어갔다. 아니,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듯하다. 내가 어릴적 한글을 수월하게 깨쳤기에 한글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큰아이나 작은아이도 모두 한글 깨치는 과정이 힘들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주고 또 봤는데도 왜 한글을 모르지? 이러다 입학전에 한글을 깨칠 수 있을까? 나로선 걱정이 되고 의문도 들지만 어쨌든, 둘째는 요즘 한글공부에 여념이 없다. 모국어든 외국어든 언어를 습득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두 아들을 통해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요한 하위징아>를 보니 이렇게 어렵고 고차원(?)적인 언어를, 십 수 개에 걸쳐 능통한 이가 있다. 2개 국어, 혹은 3개 국어에 능하다는 사람은 곧잘 보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현대의 인물도 아니라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름아닌 요한 하우징아. 사실 하위징아와는 이번이 지난해에 첫 만남을 가졌다. 그의 책 <중세의 가을>을 보면서 중세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동서양의 작품을 넘나들며 거론하는 문학적 비교에 혀를 내둘렀는데 거기에는 언어와 어학에 대한 하위징아의 남다른 재능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네덜란드 학자인 저자 빌렘 오터스페어는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글 읽는 방법을 배운 것은 하위징아로부터였다고. 하위징아와 저자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0여년 전 저자가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 했던 강의가 바로 ‘요한 하위징아’에 대한 것이었다고 하니 이 책 <요한 하위징아>의 출간은 저자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듯하다.
책은 하위징아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네덜란드의 엘리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하위징아는 목사인 할아버지와 생리학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할아버지를 통해 치열하고 엄격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절제하고 관리하는 삶을, 아버지에게서 생명의 기원과 같은 과학적인 진실을 배웠는데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이념과 사상은 하위징아로 하여금 종교 대 과학, 감성 대 이성, 공동체 대 개인, 영원과 변화라는 중요한 화두에 몰두하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언어와 역사라는 대조적인 학문에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사상가이면서 역사가이고 문화사를 창시한 요한 하위징아의 밑바탕이었다.
<하위징아 읽기(Reading Huizinga)>. 이 책의 원제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요한 하위징아의 ‘작품’이다. 고전작가가 드문 네덜란드에서 요한 하위징아의 작품ㅡ<중세의 가을>, <호모 루덴스>, <에라스뮈스>ㅡ이 지금도 많은 이에게 읽히고 명성이 자자한 이유, 배경은 무엇인지 그가 남긴 훌륭한 작품을 통해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그것도 저자의 시각이 아닌 하위징아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철학을 통해서 말이다. 해서 본문 곳곳에는 하위징아의 작품이 자주 언급되는데 특히 <중세의 가을>와 <호모 루덴스>가 눈에 띄었다. 읽기를 중시했던 하위징아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동화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두 개의 정반대 개념을 한데 묶어서 ‘모순어법’이라는 서술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했는데 대조와 대립, 대비를 통한 글쓰기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중세의 가을>이라는 것이다. 대조와 대립이 하위징아의 이념과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한다면 역사와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균형과 안정, 조화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을 놀이와 문화와의 관계를 다루었던 <호모 루덴스>를 통해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책을 ‘읽다’는 것은 글을 보고 소리내어, 혹은 눈으로 ‘읽는다’는 것과 함께 글에 담긴 뜻을 ‘헤아려 알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즉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했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난해 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과연 읽은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의견, 주장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해 동의하거나 비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겉으로는 읽었지만 이해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조만간 다시 읽어야겠다. 하위징아가 어떤 삶을 살았고 그것이 그의 글쓰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글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좀 쉽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열정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따라서 역사 기록도 없다. 하위징아가 보기에 읽어줄 수 없는 역사는 전혀 역사가 아니다. 가독성이란 곧 드라마이고, 드라마는 곧 열정이다. - 170쪽.
하위징아는 예술을 인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만약 그 둘이 서로 떨어져 있거나, 예술이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 전망은 왜곡될 것이다. -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