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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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보배믿보작’.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때 우선 스토리를 보고 출연진을 살펴본다. 자연스러운 감정연기로 믿고 보는 배우가 있는 것처럼 책을 고를 때도 믿보작’, 믿고 보는 작가가 있다. 매력적인 주인공과 탄탄한 스토리,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 그리고 진한 감동과 여운. 이 모든 걸 갖춘 작품을 쓴 작가는 0순위에 올려두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게 그런 작가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세계였다.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조차 없는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야기했다. 때론 개미의 시선으로 인간을 이야기했고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통해 사후세계를, 첨단 과학의 상상력으로 미래 세계를 다루기도 했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에서 100%만족과 감동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최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세이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더구나 제목이 <나는 그대의 책이다>. 어떤 내용일지 상상조차 안되지만 그를 애정하는 독자로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일 아닌가.

 


저를 소개합니다. 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9

 


책이 자신을 소개한다? 거기다 책으로 향하는 나의 여행길에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고? 독특하다. 이런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보이지 않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펼쳐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며 순간순간 일렁이는 감정과 의문, 정답이 없는 고민을 되씹곤 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책이 자꾸 내게 말을 건넨다.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 숨은 가쁘고 다리가 묵직해서 조금씩 뒤처지고 있으면 앞서서 가는 이가 어때. 괜찮아? 계속 갈 수 있겠어?”하는 것처럼.


 

나를 그대라 부르는 책이 이끄는 대로 공기의 세계’ ‘흙의 세계’ ‘불의 세계’ ‘물의 세계를 여행했다. ‘공기의 세계에서는 정신의 힘으로나마새가 된 것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바람결과 공기를 느끼며 날 수 있었고 흙의 세계에서는 내가 진정한 자신을 찾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집으로 향해 나의 일상과 내면을 돌아볼 수 있었다. 대지에서 다시 날아올라 불의 세계에 접어드니 세상은 온통 붉은 핏빛. 기원전 트로이 전쟁을 비롯해 인류가 벌인 수많은 전쟁을 훑는데 포탄이 비 오듯 퍼붓는 아비규환 속에서 책은 힘주어 말한다. ‘그대 안의 온갖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자기 자신과 싸우라. 혼돈의 불꽃을 지나 만난 고요한 물의 세계’.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될줄이야! 흥분으로 심장이 펄떡일 때 하나두울세엣...’ 하며 길게 호흡을 내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맞게 되는 탄생의 순간..

.

 

공기와 흙과 불과 물의 세계를 여행한 내게 책은 말한다. ‘그대의 책에 그대만을 위해 쓰여진 문장을 기억하라. ‘경이로운 것은 이 여행을 수행한 그대 자신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지구와 인류와 인간의 역사를 둘러보았다. 이런 식의 전개는 베르나르이기에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찬사는 여기까지. 아쉬움은 몇 배 더 크다. 책 편집을 왜 이렇게 했을까. 책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표지는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본문은 왜? 공기, , , 물의 세계에 따라 종이 컬러와 서체를 각각 다르게 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그것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까? 특히 공기와 불의 서체는 완전 최악. 도무지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고전은 책의 장정이, 편집이 화려하거나 독특해서가 아니다.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와 세계가 시간을 뛰어넘어서까지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개정판이 출간된다면 이 부분은 재고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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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의 메뉴판 - 한 장의 메뉴에 담긴 시대의 취향, 계층, 문화 이야기
나탈리 쿡 지음, 정영은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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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채식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비건이었다가 중년 이후부터 허용범위가 제법 넓어졌어요. 유제품은 체질적으로 먹지 못하고 소량이지만 익힌 흰살생선이나 계란, 익힌 해물은 섭취하고 있는데요. 베지테리언 중에서 페스코 베지테리언에 가깝다고 할까요. 이런 식성 때문에 외식이나 모임이 있을 때면 은근 신경이 쓰이곤 합니다. 나와 일행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메뉴를 찾아야 하니까 어딜 가더라도 그곳의 음식점 몇 군데를 골라 미리 메뉴 공부를 하는데요. 완성된 요리 사진이나 사용되는 식재료가 표기된 메뉴판은 한마디로 최고의 도구란 생각이 듭니다. 삼계탕이나 갈비탕, 국밥 같은 단일메뉴로 된 곳을 제외하면 말이죠.


 

<미식가의 메뉴판>은 메뉴가 단순한 음식 목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한 장의 메뉴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을 통해 당시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음식과 문학, 식문화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연구한 저자 나탈리 쿡. 메뉴에 대한 저자의 새로운 시선과 접근,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우리는 메뉴판 속에 깃든 한 끼 식사의 의미, 특정한 장소의 분위기, 특별한 손님의 참여, 메뉴의 삽화를 그린 예술가의 상징적 세계까지 읽어낼 수 있다. (...) 식사 전통에는 우리가 식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느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모여 배고픔과 공동체적 욕구를 채웠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메뉴판은 어떤 음식을 선택해 왔는지를 통해 우리가 누구였는지, 또 어떤 존재가 되고자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한다. -30


 

저자는 음식 너머에 담긴 사회와 문화의 역사를 여섯 개의 챕터로 나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눈이 즐거운 만찬]은 메뉴판이라기보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작품 같은 메뉴판을 만날 수 있어요. 인상주의 화가이자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통하는 툴루즈 로트렉이 메뉴판의 삽화를 그렸다는 사실, <미식가의 메뉴판>을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삽화로 유명한 화가이자 만화가 윌 오언의 메뉴판은 실로 매혹적이었구요. 프랑스 화가 알베르 로비다는 미래공상과학소설처럼 하늘 높은 곳에 있는 레스토랑의 모습을 메뉴판에 담았더군요. 놀랍죠?

 


4[우리 안의 어린시절을 위한 메뉴]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메뉴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9세기 철도나 선박을 통한 여행이 활발해지면서 아이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만큼 식사하는 동안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다양하게 메뉴판을 제작했는데요. 동화에 등장하는 토끼나 코끼리 모양의 메뉴판에 색깔이 화려한 삽화를 곁들여 아이들이 선택하기 쉽게 했구요. 메뉴판에 점 잇기 놀이 장치를 해놓은 것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건강한 음식의 기준과 사람들의 취향이 어떻게 달라졌고 그에 따라 식당들은 어떤 마케팅으로 대응했는지 전하는데요. 본문 곳곳에 수록된 화려한 메뉴판 덕분에 책 읽는 내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메뉴판은 식사가 실제로 이루어지던 순간과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그동안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내용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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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곧 당신의 수준이다 세계철학전집 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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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문학 강좌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만났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만 아는 철학자였지만 냉큼 도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강독하면서 참가자들이 서로 생각과 해석을 풀어낸다는 점, 여기에 전공교수님이 도우미로 이끌어준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을 20세기 현대철학의 방향을 바꾼 철학자라고 하는 만큼 그의 철학에 접근하는 건 녹록지 않았다. 단 몇 줄의 문장, 한 페이지에 불과한 글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한두 시간 투자하기를 수차례, 그럼에도 그의 철학에 가닿을순 없었다.

 


두세 달 비트겐슈타인을 만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의 언어에 대한 철학이었다. 일상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도 그는 매우 엄격했다. 사소한 말이라도 세상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 논리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논쟁 자체가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증명할 수 없으면 그냥 입을 다물라는 의미인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근 출간된 <당신의 말이 곧 당시의 수준이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다룬 책이다. 여덟 개의 챕터로 나누어 그의 언어철학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라고 해서 난해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풀어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고 핵심적인 대목을 꼽자면 본문의 첫 대목 언어의 한계가 곧 당신의 한계다였다. 평소에 내가 알고 있거나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의 양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라는 의미이다. 때로 낯선 단어를 접하면 그 개념을 배우고 익혀 일상에 적용해나가야 사고의 폭이 나 표현능력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는 단순한 언어 부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틀, 인식의 폭, 상상력의 한계를 함께 포함한다. 내가 가진 언어가 빈약하면 사고도 좁아지고, 쓰는 말이 거칠어지면 마음도 그에 맞춰 거칠어진다. -17~18

 


하나 더 꼽자면 세 번째 챕터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이다. 얼핏 보면 너무나 당연해서 누가 그걸 모르겠냐 싶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논리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생각할 수 있는 건 식탁 위에 사과가 있다처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거나 개념도 알지 못하면 머릿속으로 상상(그림을 그리)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빨강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을 말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빨강은 보일 수 있을 뿐,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의 한계다. -62.

 


카페나 음식점에서, 혹은 길을 가거나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에 자꾸 귀가 솔깃해진다. 예전엔 그냥 백색소음처럼 무심히 넘기려고 했다면 이젠 그들이 하는 단어와 어투, 표현에 신경이 쓰인다. 주변 사람이 듣거나 말거나 목청 높여 개인사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피로감이 몰려온다. 언젠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사람들 대화에서 ” “대박빼면 대화가 안된다. 심각한 문제다’ ‘특정 몇 개의 단어를 금지시키면 대화조차 불가능하다. 순간 나는 어떤가 돌아보게 됐다. 이제라도 내 언어의 한계를 직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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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괴담
온다 리쿠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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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정말 오랜만이다. 오래전 <밤의 피크닉>을 시작으로 한동안 그녀의 작품과 일본소설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섬세한 장면 묘사에 매료되었다. 때론 일본소설 특유의 기이함이 낯설기도 했지만 재미를 반감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기대감을 주는 작가였다.


 

그녀가 최근 <커피괴담>을 내놓았다. 핏빛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톤에 다소 섬뜩한 그림까지. 표지만으로도 괴이함 200% 장착한 격이다. 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한껏 높아진 궁금증에 묘한 긴장감마저 들었다.


 

잔혹한 호러는 아닐까 잔뜩 긴장했지만 <커피괴담>의 이야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레코드 회사의 프로듀서 다몬을 비롯한 작곡가 겸 스튜디오 뮤지션 오노에, 펑크 로커 같은 의사 미즈시마, 검사 구로다 네 명의 친구들이 비정기적으로 모여 카페를 순례하면서 각자 괴담 하나씩 들려주는데 한 곳에서는 하나의 괴담만, 다음 괴담은 장소를 이동해서 들려주는 형식이다.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에서 시작한 커피괴담은 요코하마, 도쿄, 고베, 오사카로 거쳐 다시 교토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고받는 괴담은 어떤가. 소름이 끼칠 만큼 괴이하거나 무섭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다. 중년의 나이까지 살면서 일상에서 겪었던 기이한 현상이나 경험, 독특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하다는 느낌을 준다. 오래된 찻집을 순례하면서 괴담을 이어가는 그들을 따라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인물을 마주치거나 우연히 던진 말 한마디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고 먼 도시에서 잃어버린 우산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에이 설마, 싶지만 듣다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들. 겨우 이런 얘길하자고 여러 도시의 카페와 찻집을 전전하다고? 그것도 중년의 한 덩치 하는 남자들 네 명이? 어이 상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그게 또 <커피괴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휴일 오전, 사람의 이동이 뜸한 집 근처 카페에서 이 책을 읽었다. 뒤로 뒤로 술술 책장을 넘기면서도 머리에선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다가 예상과 다른 마무리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괴담이란 제목에만 너무 얽메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저자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괴담 그 자체가 아니라 괴담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랜만에 만난 온다 리쿠에게서 호되게 한 방 얻어맞고 정신을 차려보니 건너편 테이블에 중년남성 다섯 명이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때론 웃고 때론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들. 그들도 어쩌면 일종의 커피괴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괴담은 왜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 21세기가 되면 과학의 진보와 함께 없어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중략)

나는 괴담을 이야기하고 있으면, 좀 과장일지 모르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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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삶은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진다 - 리추얼이 만드는 일상의 회복력
펄 카츠 지음, 정영은 옮김 / 북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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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었다. 벽에 새 달력을 달았다. 다이어리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생물학적인 나이는 차치하고 사회적인 나이를 분명 한 살 더 먹었으니 분명 과거에 비해 달라진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읽은 책 <단단한 삶은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진다>는 가장 먼저 제목에 끌렸다. 특별한 성과나 이벤트가 없는 보통의 날들이 모여 단단한 삶을 이룬다니 대체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저자인 펄 카츠는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정신의학 및 행동과학과 교수다. ‘문화와 민족성이 정신질환과 치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연구한다는데 언뜻 와닿지 않았다. 나처럼 낯설어하는 독자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서두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스타벅스 음료의 조합은 무려 87천개에 달하지만 음료를 주문하고 수령하는 몇 가지 방식만 익숙해지면 얼마든지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처음 스타벅스를 찾았을 땐 낯설어 당황했지만 이내 적응하고 편안해졌던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겪는 규칙이나 루틴, 의례 같은 틀이 심리적인 자유를 준다고 한다. 이걸 저자는 리추얼(Ritual)’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루틴의 일부로 평범한 리추얼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고, (...) 리추얼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리추얼이 지닌 예측 가능성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마음껏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할 자유를 준다.-16~17.

 


리추얼이 우리에게 자유와 견디는 힘을 준다는 걸 전하기 위해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해서 수행하는 리추얼이 무엇이고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가장 먼저 장소나 종교, 역할에 있어서 규칙이나 관습, 의례 같은 것들이 처음엔 갑갑하게 옥죄는 듯하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심리적인 자유와 함께 갈등을 예방하고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걸 ‘1부 틀이 있어야 더 자유롭다에서 풀어놓았다. ‘2부 생로병사를 감당하는 힘에서 죽음을 말하면서 애도의 자유를 언급한 대목이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9년 전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애도하고 마음으로 작별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던가를 생각해보면 애도의 날들은 곧 내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과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기존의 관계를 되찾으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사별 후의 삶이 예전의 삶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로써 자신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실을 견뎌낸 것이다. - 170.

 


삶을 지탱해 주는 작고 반복적인 습관, 하루를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질서,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나의 삶이 공허해지지 않고 불안과 혼란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되찾게 하는 것. 작고 소소하지만 그것들이 쌓였을 때 단단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리추얼’. 내겐 어떤 리추얼이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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