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 한 자락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움츠리곤 한다. 내가 나를 끌어안듯이 양팔로 감싸 안는다. 헛헛한 속을 데워줄 온기를 가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의 한 가운데에 들어왔다는 증거다. 곧 냉기를 머금은 겨울이 다가오겠지.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란 생각이 든다. 예전엔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는 계절이 가을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을, 지난 시간을, 그리고 곧 어제가 되어버릴 오늘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가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가을엔 혼자 있으려 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고 싶은 것일지도...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의 저자 림태주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글이 좋아서 밑줄을 긋고 포스트 잇을 붙이고 필사를 하지만, ‘말이 좋아서 밑줄을?’ 어떤 의미인지 알 듯 모를듯했다. 혹시나 표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표지엔 어떤 그림도, 사진도, 일러스트도 없다. 그저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빛으로 비치는 모습이 전면에 드리워져 있을 뿐. 저자에게 말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내는 말 중에서 저자가 밑줄을 긋듯이 가슴에 담아낸 말을 어떤 것일까.


 

시집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의 책, 손이 작은 내가 한 손으로 잡고 읽어도 거뜬한 크기인데다 짧은 글로 이루어진 책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할 때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기 좋았다.


 

진심의 핵심, 진정성의 요채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양적으로 사용하면 진정성이 된다. ()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 않는 사람과 바쁘더라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는 사람의 차이가 관계의 진정성을 가른다. 시간이야말로 확실한 진심의 지표다. () 나는 미워하는 시간보다 사랑하는 시간을, 잊으려 하는 시간보다 그리워하는 시간을 더 늘리려고 한다. 나를 위한 유익과 즐거움을 구매하는 데 내 목숨을 지불하려고 한다. - [진심을 알아보는 법] 중에서

 


양치기나 파수꾼이나 등대지기는 별이 발명한 직업군이다.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고 그토록 사람의 말이 그리울 수가 없다. 나는 어쩌다 시인이 되어 고독에 세 들어 살고 있다.(6)’ 책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가슴이 설렐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는 때로 상대의 말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기도 하고 어떤 사정 때문에 차마 전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말들을 저자는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 녹여내어 자신만의 프리즘을 통해 전하고 있다. 때론 아련하게 때론 따스하게 때론 냉철하게.



나는 그가 제대하는 날까지 말의 거리를 풀지 않았다. 언어를 주고받았을 뿐 그와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무겁게 깨닫기를 바랐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상대가 예의 바르고 존중하는 말을 건네더라도 그건 철저하게 외면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상대의 마음에 1밀리미터 다가서는 건 달나라 가는 궤도를 구하는 공식 만큼 어렵다. 마음 한 줌을 얻지 못하면 백 마디 아름다운 말이 내 것이 아니다. [말의 표정] 중에서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하천으로 돌아오는 은어(銀魚)는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의 물빛과 닮은 색을 띠어 회갈색 등에 은백색의 배를 지니게 됐는데 저자는 그런 은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든 인식할 때 분류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물고기 은어가 떼를 지어 살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도 끼리끼리의 언어인 은어(隱語)가 있다며 어떤 무리든 거기에 속하려면 그 언어를 먼저 익혀야 하는데 실상 우리는 그렇지 못함을 꼬집는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사랑이 실패한 이유는 상대방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내가 쓰는 언어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해 모든 것을 내 관점에서 말하고 내 언어 체계로 이해하려 들었다. 상대의 말을 그만의 은어라고 여기지 않았다. 탐구하여 배우려 하지 않았고 시간과 인내가 소요되는 일임을 고려하지 않았다. 자꾸 다른 데서 관계의 하자를 찾으려 했으므로 실패를 반복했다. 그저 말이 잘 통하는 성격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맸다. [은어의 세계] 중에서

 


하안거나 동안거 기간에 사찰을 찾으면 방문객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있다. 자신만의 화두를 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 중인 스님들을 위해 다른 이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달랐다. 고요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찰에서 묵언 수행 중이란 푯말을 만나면 좋았다면서 스님들이 고요를 닮는 연습을 하는 거란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렵다. 문을 걸어 잠그고 정진을 거듭해야 할 정도니까. 내가 고요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말할 때 잠잠함을 유지하는 법이다. 말을 전하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 고요의 가르침이다. [고요의 원리] 중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사고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평소 자신이 여러 과정을 통해 습득했던 지식이라고 한다. 때문에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인해 확증편향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하는데 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당신이 타인에게 보여준 언어가 되돌아와 당신이 된다는 글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아니 가까운 가족에게 어떤 언어를 구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사는 동안 사람은 한 권의 사전이 된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일생 동안 자신이 사용했던 어휘와 정의 내린 개념들이 빼곡히 세포에 기록된다. 기록한 페이지들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고, 그 단어들을 간추려 자신만의 문장으로 엮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인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 엮인 문장들의 줄거리와 고갱이를 이르는 것이 아닐까. [국어사전 사용법]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수영 지음, 박수연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의 특징을 얘기해봐” “시의 3요소가 뭐지?”

작년 여름 제가 중학생 아들의 국어 공부를 봐줬는데요. 아이가 제일 힘들어한 것이 바로 였습니다. 아들만 그런건지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건지 알 수 없지만 깊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모습에 그야말로 제 머리의 뚜껑이 열릴 정도였지요. 맘 같아선 그래, 시는 읽어서 느끼면 되는 거지 그냥 되는대로’ ‘니가 느끼는대로’ ‘니 맘대로 해봐!’ 외치고 싶지만 막상 시험, 점수로 연결되니 생각처럼 되질 않더군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국어 시간에 주제, 제제, 소재, 시의 운율이 어쩌구, 이 시에 드러난 심상이 무엇인가...등등 시를 완전히 분해한 다음 씹어먹듯이 외우고 시험까지 쳤는데요. 성인이 되고 보니 무엇 하나 남는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답니다. 하지만 이제 그걸 다시 아들에게 강요해야 하다니...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작가의 생각? 작가의 의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출제자가 이 문제를 왜 냈는지 생각해봐야 해, 학습목표를 니 머리에 빡! 넣어두고 유추를 해봐. 그래야 문제가 풀려”...이러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김수영은 제목에 왜 폐허에를 두 번 넣었을까였습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김수영의 시를 모두(아니 솔직히 거의 모른다는 게 맞을 겁니다. 예전에 김수영 시집을 구입했지만 읽다가 도중에 덮어버렸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알지 못하는지라 짐작만 했지요. 강조하는건가? 하고요.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시그림집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를 손에 들고 이번엔 예전과 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무심하고 둔해도 세월을 그냥 날로 먹지는 않았을테니 이전처럼 김수영 시 한 편 읽으면서 머리 싸매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웬걸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거예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덮어버려? 하지만 이번엔 정말 그냥 덮고 싶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김수영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입력한 다음 시를 읽으니 그나마 조금 낫더군요.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

저무는 해와 같이

나의 앞에는 회색이 뭉치고

응결되고

또 주먹을 쥐어도 모자라는

이날 또 어느 날에

나는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 [음악 /1950.2]

 


서울에서 지주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집안은 결국 몰락했고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일본에서 김수영은 학문보다 시와 연극에 몰두하는데요. 일본에서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광복을 계기로 귀국합니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국에 징집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하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마는데요. 당시 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공산주의 포로들이 매일 패싸움을 벌이고 수시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고초를 겪던 김수영은 3년 후 민간인 억류자로 석방되는데요. 이후로도 그의 삶은 여전히 고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 놓여 있는 이 방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 [달나라의 장난 / 1953]

 


식민지-전쟁-독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은 김수영에게 무척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 무자비한 권력의 압박을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그는 당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데요. 어렵사리 4.19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이승만 독재 정권처럼 인간의 자유를 무시한 채 반공법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자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써서 신문사에 보냅니다. 북한과 남한 따로 정부가 꾸려졌으니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외친다면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면 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걸 비판하는 시인데 당시 문단이 시의 문맥이 아니라 시의 김일성이란 단어에 치중한 탓인지 그의 사후에야 발표되었습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

나는 잠이 깰 수밖에 - [“김일성 만세”/ 1960.10,6]

 


4.19 혁명이 어떤 것도 변혁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회를,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자 안타까운 마음을 시에 풀어내기에 이릅니다. 마치 혁명의 실패를 예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운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 [그 방을 생각하며/ 1960.10.30.]

 


권력으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현실에 좌절한 그에게 마지막 해방구는 술이었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그는 종종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라도 잊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가 꿈꾸었던 건 어떤 세상일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그가 남긴 마지막 시에서 그가 염원했던 것, 그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제아무리 권력이 억압을 가해도 결코 그들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하고 힘없는 풀일지언정 언제나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고 말겠노라고.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 1968.5.29.]

 


우리 역사의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를 걸으면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시인 김수영. 날카롭고 거칠고 힘찬 그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직 소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언제든 펼쳐볼 수 있도록 가까이에 두고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목에 왜 폐허에를 두 번 넣었을까하는 의문은 책의 마지막에 풀렸습니다.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11-0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작 축하드려요

초딩 2021-11-0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문명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턴가 고양이에게 자꾸 시선이 머문다.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지속해오던 독서모임이 위기를 맞았다. 온라인 영상토론이 낯설어서 어쩔 수 없이 잠정중단 된 모임이 있고,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온라인으로 이어가는 모임도 있다. 온라인으로 모임을 하다 보면 참가한 이의 주변 상황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데 느낌이 색다르다. 한참 토론이 진행될 때 날 좀 보라며 애교부리듯 칭얼대는 반려동물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때론 자신도 우리의 토론에 할 얘기가 있다는 듯 서슴없이 카메라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곤 한다. 또 온라인 필사 모임에선 단톡으로 진행상황을 각자 사진으로 인증하는데 이때 종종 고양이가 등장한다. 어이, 집사! 오늘은 여기까지! 하듯 앞발로 책을 덮어버리기도 하고 필사하지 말고 나랑 놀라달라는 듯 아예 책과 노트 위에 앉거나 엎드리는 고양이를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쟤들, 혹시 글자 읽을 줄 아는 거 아냐?


 

뫼비우스의 띠를 옮겨놓은 듯 계단과 건물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해주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도도하고 당당하게 앉아있는 고양이다. <문명>은 표지에서부터 끝났다고 해야 할까? 표지를 넘기면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를 만나게 될지 무수한 의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거기에 저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니. 읽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바랄 게 없을 거야. 종이에 촘촘히 박혀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는 해바라기 씨만 한 글자들의 뜻을 알 수 있다면. 줄줄이 이어지는 글자들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 살맛이 나겠지. - 13.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해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문자를 익히지 못한 이의 넋두리인가 했는데 천만의 말씀. 바로 세상에 눈뜬 특별한 고양이다.


 

이야기되지 않는 모든 것은 잊힌다. - 14


 

시종일관 당당하게 라고 일컫는 건 바로 흰털과 검은 털이 섞인 암고양이 바스테트다. ‘지나친 완벽주의자여서 단점마저 매력으로 바꿔버리는 이 고양이는 자신이 스스로 고양이라는 종의 한계, 암컷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밝힌다. 자신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당돌함 그 자체인 고양이 눈에 비친 인간은 형편없는 외모를 한 나약한 존재였다. “이러니 어떻게 내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어?(24)” 인간에게 집사로서의 임무가 주어진 게 바로 이때부터였나보다.


 

답답한 인간들 속에서 평이한 일상을 보내던 바스테트는 어느 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한다. 수염 달린 인간이 수염 없는 인간을 죽이고 서로 맞붙어 싸우는 모습. 그리고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인간 세계에 퍼지면서 도시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지만 반대로 세력을 넓혀가는 동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쥐였다.


 

난 쥐가 싫어. 그렇지만 그들의 공격성과 무서운 적응력, 그리고 번식력이 경쟁 관계의 다른 종들을 압도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 29

 


바스테트는 건너편 집으로 이사 온 샴고양이 피타고라스를 위험에서 구해준 것을 계기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피타고라스에겐 특이한 게 있었는데 바로 이마 위에 구멍이 하나 있다는 것. <3의 눈>이라 일컫는 그것은 뇌와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USB 단자였는데 피타고라스를 통해 바스테트는 인간세계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런 어느날 인간들의 습격으로 아들이 실종되자 피타고라스와 함께 아들을 찾아나선다.


 

볼로뉴숲의 고양이들을 만난 바스테트는 쥐들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그들과 시뉴섬에 진지를 구축하는데 쥐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바스테트의 기발한 전술로 쥐를 물리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또다시 쥐들이 무리 지어 습격했는데 이전보다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공격이 더 포악하고 거세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낀 피타고라스는 시뉴섬을 떠나 시테섬으로 이동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쪽배 몇 척에 나누어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이제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피타고라스의 말대로 우리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다시 일구어야 한다. -51.

 


시테섬에서 다시 공동체를 이끌며 얼마간은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또다시 쥐 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거대한 고양이과 동물인 사자 한니발의 활약으로 쥐들을 해치우고 포로를 잡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포로를 통해 쥐들의 새로운 우두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덩치는 크지 않고 하얀 털에 빨간 눈의 흰 쥐인데 이마 꼭대기에 특이한 구멍이 있어서 거기로 방대한 지식을 갖게 됐다고.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는 알게 된다. 적진의 우두머리 역시 제3의 눈을 가졌으며 그의 이름은 바로 티무르라는 것을...

 


인간의 실험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갖게 된 동물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영화나 문학작품으로 여러번 소개가 됐다. 그 속에서 인간은 눈부신 문명을 일구었지만 언제나 자신들의 욕망을 폭력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실험의 도구였던 동물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기서 <문명>은 그동안의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작품과 차별성을 드러낸다. 인간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는 측과 인간과 지식을 공유하고 협동해야 한다는 측이 존재한다. 이런 가운데 바스테트는 과연 자신의 목표인 세상의 모든 종이 소통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여태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결정에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건 익숙한 길을 가는 것보다 당연히 위험하지. - 171.

 


베르베르 소설의 특징이자 장점은 문장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문명> 역시 무리 없이 책장이 넘어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작가가 예상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전염병과의 사투를 벌이는 중이어선지 <문명>을 읽으면서 자꾸만 우리 인간의 행태를 돌아보게 했다. 3의 눈까지는 아니어도 언젠가 인간처럼 말을 하는 동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게 됐다. 알고보니 <문명>은 베르베르의 <고양이>에 이어지는 작품이었다. <고양이>를 읽지 않아도 소설을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지만 그래도 <고양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문명>을 거친 3부작으로 이어진다니 늦게라도 <고양이>를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 -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는 인생
김혜원 지음 / 유영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로 잠정중단 상태이지만 10년 넘게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모임 초창기 때부터 함께 해온 멤버가 대부분이고 간간이 새 멤버가 참석하면 그때마다 우린 자기소개를 하곤 한다. 새 멤버가 낯선 모임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거치는 과정이지만 의문이 들곤 한다. 짧으면 수초, 길면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하고 자신을 소개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때론 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말하는 나실제 나는 같은 인물일까?


 

복불복 사탕 뽑기가 그려진 책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의 첫인상, 제목이 이렇게 발칙해도 돼?였다. ‘이게 바로 나야!’라고 당돌하게 외치는 전형적인 20대 청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접점이 없을 거라고 스킵하려던 차에 눈길에 꽂힌 부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지는 인생’. 입에 넣었을 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건 누구나 당연히 하는 반응인데 그걸 남 눈치 보지 않고 가능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나? 궁금했다. 저자가 이렇게 마음먹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결심한 이후로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일단 결심부터 했다. ‘아무거나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한 번 사는 인생 아무거나 말고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며 살아봐야지 11

 


한동안 내가 읽었던 책이 주로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 많아서 책을 읽다보면 자연히 미간에 인상을 잔뜩 쓰곤 했는데 이 책은 일상의 이야기가 평이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었다. 300쪽이 안되는 책을 두 시간 가량 읽으면서 어느새 자꾸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자의 일상처럼 나 역시 아무거나를 자주 입에 올렸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고기만 아니면 뭐든, 쇼핑도 유행보다 무난한 스타일, 음악 역시 최신음악보다 듣기 편한 것... 주변 분위기를 보고, 그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도드라지지 않는 걸 선택하는 일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저자는 낯선 곳을 여행하던 중에 문득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깨달았다면 난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자식을 보면서 ~~구 소용없다를 읊조렸다.


 

며칠 전 류시화 시인이 올린 글이 떠오른다. 세상은 싫어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 둘로 나뉜다고. 우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니 기왕이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자는 이야기였다. -119쪽


 

나도 당연히 좋아하는 게 있는데. 하지만 내게 전업주부라는 위치가 엄마라는 명찰이, 나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도록 매뉴얼 되어 있었다. 저자는 일로 만난 사이가 어려웠다고 하는데 난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만난 학부모들이 불편했다. 그들의 자식과 내 자식이 엄연히 다른데 그들의 자식자랑에 마냥 박수쳐주기도 솔직히 속이 상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는 내가 못나보였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만을 맺어 오다가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을 처음 사귀게 되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들과 잘 지내고는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124

 


여러분은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돈을 어느 정도까지 쓸 수 있어요? 자신의 소득과 상관없이사람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사실 그건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지출. 미용실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옷차림을 유행하는 스타일로 바꾸고 누구나 한두 개쯤 있다는 명품백을 장만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살았고 그게 내 스타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초라한 나를 숨기려는 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돈을 아끼게 될 때 내가 가난해졌음을 실감한다.- 130.

 


이전과 달라진 나를 시도하는 건 솔직히 나조차 두렵다. 내 생각,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쟤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그러겠지. 분명. 모험을 하기엔 늦은 나이 같지만 어쩌면 모험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가 아닐까 싶다. 입대를 앞두고 7번 국도를 걸었다는 청년처럼 거창하지 않지만 새로운 시도...해봐야겠다. 더 늦기 전에.

 


세상에는 내비게이션을 끄고 달려야만 닿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 - 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