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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평점 :
얼마전 유명작가의 저자 강연회에 다녀왔다. 자신이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언제 하게 됐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우선 집안이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6.25때 피난을 가서도 엄마가 장에 갔다가 새로 나온 책이라며 <걸리버 여행기>란 책을 내미셨다는 거다. 그러면서 전쟁이 터져서 피난을 가면서도 인쇄기를 싸 짊어지고 가는 사람도 희한하고 그 책을 사다 주는 사람이나 사다 준다고 또 읽는 사람이나 모두 희한했다며 웃으셨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너무너무 부러웠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의 저자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읽기 <독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전의 저자 강연회를 떠올랐다. 지금이야 ‘김.열.규.’란 이름 석자는 국문학과 민속학, 한국학의 석학으로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열규 교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바로 그 삶의 여정이 담겨있다. 김열규 교수가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쌓아온 세계, 책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펼쳐진다.
이 책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1부는 ‘서書_ 책, 내게로 오다’는 한마디로 저자의 책읽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옛날, 옛날, 그 옛날에...”로 시작되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그에게 듣기의 시작이자 읽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매일밤 할머니를 스승으로 한 수업, 옛날이야기 몇 개를 번갈아가며 반복하는 일상이었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또 ‘언문제문’을 낮게 읊조리는 어머니의 음성에서 그는 어린 아이임에도 한의 정서를 느끼고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한국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자는 털어놓고 있다. 낭독을 즐기던 어린 시절을 비롯해 해방과 광복이란 시대적인 큰 변화속에서도 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그 이후의 한국 현대사 흐름에 그의 책읽기가 어떤 단계를 거쳐갔는지....그의 책과 함께 한 삶이 펼쳐져있다.
2부‘독讀_ 읽기의 소요유(逍遙遊)’에서는 책읽기의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꼼꼼읽기', '클로즈 리딩'이라든가...하는 책읽기의 요령과 ‘속독’으로 책을 읽는 현대인이 무엇을 놓칠 수 있는지, ‘삼단뛰기’와 ‘장애물경주’처럼 읽기에도 비결이 있다고 말하며 읽기의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읽으면서 재미를 찾으라고 조언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시나 소설, 논설문을 어떻게 읽고 그 구조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얘기해놓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 바로 김열규 교수가 자신의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고전을 소개하면서 책을 읽는 누구나 자신에게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책,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책을 찾아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거기에 소개된 책의 목록이 정말 굉장했다. 올해로 희수(喜寿), 77세인 김열규 교수가 평생토록 책을 읽고도 미처 못 읽은 책들이 아쉽고 사무치게 그립다는 대목이 가슴에 찡하게 와닿았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 앞에 서있는 느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체호프의 <내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릴케의 <말테의 수기>,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전기>.
예전에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책, 차마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책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 이 책들을 언제라도 꼭 읽어내자, 그래서 내 것이 되게 만들자고. 둘, 나만의 고전, 내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책을 찾아내자고. 그리고 마지막 셋,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읽어주자고. 내 유년시절엔 비록 “옛날 옛날 옛날에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에...”하고 이야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이들에겐 내가 듣기의 시작이자 읽기의 시작이 되어주자고...아이들이 금방 사서 펴든 새 책에서 갓 핀 장미의 향을 맡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삶의 책 읽기는 농부의 연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삽과 괭이로 농부가 논밭을 갈 듯, 나는 책을 통해 지식의 논을 가꾸고 마음의 밭을 일궜다. - 서문 중에서. ··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목소리, 언문제문을 읊조리시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둘은 나의 첫 고전이자, 영원한 고전이다. 내 귀에 들려오던 그분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내게 글이며, 책이며, 문학은 없었을 것이다. - 17쪽.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 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 - 85쪽.
꽃은 새로울수록 좋고 정은 묵을수록 좋은 것! 책은 양수겸장(兩手兼將)이다. 금방 사서 펴든 새 책에서는, 갓 핀 장미의 향이 난다. 오래오래 읽고 묵힌 책에서는 폴폴 정의 냄새가 끼친다. - 198쪽.
책 읽기와 함께한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 오랜 자국들이 새삼스럽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 같아보인다. 이제 눈꽃이라도 필까?...그래도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미처 못 읽은 책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