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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몇 년 전 박경리의 <토지>를 읽다가 덮었습니다. 지인들과 대하소설 읽기 프로젝트를 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 첫 작품으로 박경리의 <토지>를 선정하고 호기롭게 시작은 했습니다만 전 안타깝게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철학이나 경제학처럼 난해한 인문학 서적은 읽다가 어려워서 도중에 덮기도 했지만 소설을 도중에 덮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를 제외한 지인들은 대부분 수월하게 책을 읽었거든요. 지인들은 제게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었는데요. 저의 대답을 듣고 마구 웃더군요. 제가 했던 대답이 ‘사투리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ㅠㅠ’였거든요.
경남 하동을 중심으로 대지주인 최 참판댁과 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토지>는 토속적인 향토 묘사와 정황이 빼어난 작품이라고 하죠. 그만큼 짙은 서부경남 사투리가 곳곳에 포진해 있는데요. 일부 사투리는 각주로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것조차 없거나 검색해도 안 나오는 사투리가 수두룩했습니다. 경상도에서 반백 년 가까이 살아온 저였지만 그럼에도 생전 처음 마주하는 사투리는 소설의 몰입을 떨어뜨렸고 결국 도중 포기라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겁니다. 소설의 등장인물을 모아놓은 책은 있지만 저처럼 사투리로 고생하는 독자를 위한 안내책자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손에 들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댔습니다. 짙은 블루 바탕에 펼쳐놓은 세계지도와 피라미드, 나비, 고래, 개미, 고양이 등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표지는 보자마자 “근사해”란 말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지식의 백과사전’이란 단어에 어떤 내용이 수록되었을지, 소설가가 쓴 백과사전이라니 호기심이 일었는데요. 프롤로그에 이렇게 밝히고 있더군요. 책에 소개된 이야기는 자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듣거나 보거나 읽었던 것들인데 열세 살 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덧 수백 개가 되었다고. 그런데 자신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진과 만화 같은 그림을 더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매우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저 역시 여러 경로로 알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나 상식, 지식을 접하지만 그것을 모아두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거든요. 역시 베르베르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천채, 베르베르였습니다.
책은 모두 12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진행방식이 독특합니다. 사전이니까 앞뒤 내용이 논리적으로 연관성을 갖고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책을 바탕으로 했더군요. 가장 최근에 출간한 책을 제일 먼저, 출간된지 오래된 책일수록 뒤에 소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테면 ‘1장 죽음’은 저자의 <죽음>에서 추려낸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거죠. 독특한 전개방식은 흥미로웠지만 반면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직 안 읽었거든요. 어쩌나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본문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신기하고 독특한 이야기가 그야말로 가득했거든요.
그리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56년에 황당한 사고로 사망했다. 맹금류 새 한 마리가 그의 머리를 매끈하고 둥근 돌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등딱지를 깨서 먹으려고 살아 있는 거북이를 머리에 내리친 것이다. - 17쪽. ‘엉뚱해서 유명한 죽음들’ 중에서.
그러면 안되지만 정말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너무 황당한 상황이어서. 예전에 지인들과 <아이스킬로스 비극전집>을 읽고 토론하면서 저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그의 죽음에 이런 사연이 있다니... 다음에 다시 <비극전집>을 읽을 때 얘기를 나눌 화젯거리가 생겼는데요. 책에는 이렇게 기이하고 때론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셜록 홈즈>에 매료된 전력이 있기에 아서 코넌 도일이 심령술에 빠졌다는 대목이나 발명왕 에디슨이 말년에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데 매진했다거나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위해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탄압했던 동서양의 여러 왕이 있는가하면 그와 반대로 많은 이들을 돕는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었구요. 코로나 시국이어선지 유행성 감기와 독감에 대한 대목은 더욱 눈길을 끌었고 지인들과 조만간 <걸리버 여행기>를 읽을 예정인데 ‘조너선 스위프트’에 대한 얘기가 있어서 주의깊게 읽었습니다. 20세기에 벌어진 전쟁 중에서 대규모 살상으로 희생된 사망자 숫자를 무미건조하게 적어둔 대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자가 무려 6천5백만 명이라는 기록에 더 이상 어떤 전쟁도 있어선 안되겠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느긋하게 텔레비전 앞에 있으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신기한 사건이나 믿기 힘든 일화를 엮어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는데요. 각 장의 주제에 따라 세부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꼭 그런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처 읽지 못했던 베르나르의 책에서 추려놓은 이야기에서 일부라도 내가 아는 내용이나 읽었던 책이 언급되면 어찌나 반갑던지요. 마구잡이식 독서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고 할까요. 베르나르가 모아놓은 이야기, 그의 독특한 상상력의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지식과 일화들은 꼭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 오히려 여유가 될 때 내용을 익혀두었다가 이담에 만남이 자유로워졌을 때 하나씩 대화 소재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 곁에 두고 틈날 때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쏠쏠한 재미에 단박에 빠져드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