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책'(숨책)을 드나든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인문 사회과학 도서들이 다른 책방에 비해 비교적 풍부하기 때문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이제 일주일에 한 번 들르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든다.  2주만에 들린 숨책에서 발견한 보물들이다.

'팡세'를 한 번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구입은 하지 않고 있다가 어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뭐 이런 책이 출간된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렇게 우연히라도 발견하면 왕건이 큼지막한 것으로 건진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죽음에서 진화까지 인문학적 사유에서 과학적 지식까지 잡다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구입 후 전철에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주제에 따른 글이 가볍지 않다.  

보통 이러한 책들에서 다기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 피상적이거나 산만한 경우가 보통인데, 일단 피상성과 산만함은 일정정도 극복했다고 보인다. 물론 전문서에 비해서야 피상적일 수 밖에 없지만 교양서로서는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뒤러의 '멜랑콜리아'를 좋아하는데...표지가 바로 그 그림이라 구입했다. 언제부터인지 미술에 대한 인문학적 글들이 재미있어 보이기 시작했는데....장점은 다양한 지식을 겸비할 수 있다는 것. 단점을 직접 봐야 할 그림까지 책으로 몽땅 소화하고 있다는 것.... 

남의 글이 해석한 그림을 보는 것 말고...미술관에서 조용하게 그림을 보고 싶은데....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휴일에 간 미술관의 시장같은 분위기는 더 싫고....게으름까지 겹치니 미술감상은 당분간 책으로 계속 해야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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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의 유래

1)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 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했다. 그리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한때 '근로자의 날'이라 불렸던 세계 노동자의 날....일하는 사람들은 달력의 
숫자와 관계없이 쉬면서 놀러가거나 집회에 참석했다. 놀러가더라도 알고 놀러 
가란 얘기다...그 자유로움이 핏구덩이 속에서 얻는 것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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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구판절판


늘 맹세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의지가 약해서, 때로는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어떤 우월한 힘 때문에.-296쪽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367쪽

램프든, 개든, 사람이든, 누구도 또 어떤 것도 처음에는 왜 이 세상에 나왔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385쪽

우리는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을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387쪽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우리에요-388쪽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395쪽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해 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405쪽

우리는 어떤 것들은 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기억한다. -407쪽

작가는 삶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인내나 얻는 사람이오-409쪽

스스로를 조직해야지, 자신을 조직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눈을 갖기 시작하는 거야-416쪽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418쪽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419쪽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423쪽

우리가 대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물의 질서가 뒤집혀 있어요.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 버렸어요-428쪽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예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 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예요-449쪽

불행이 모두에게 닥쳐도, 늘 남들보다 더 심하게 그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451쪽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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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9. 05. 04) 잘 알지만 잘 알지 못하는 내 자화상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그의 필모그래피(작품 목록)에서 가장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영화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독설과 조롱은 전작들에 비해 한결 줄었으며,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나이가 들어 편안해진” 것처럼 보인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짝 미쳐 있는 여자들, 센 척 하지만 항상 쩔쩔매는 남자들,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충분히 있을 법한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데, 기이하게도 홍상수는 그 익숙함을 낯설게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다. 관객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일상의 조각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다.

일상을 살짝 비튼 웃음


홍상수의 주인공은 언제나처럼 길 위에 서 있다. 예술영화 감독 구경남(김태우)은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제천에 갔다가, 얼마 뒤 학생들에게 특강하러 제주도에 간다. 영화는 구경남이 제천과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의 장면들을 비틀어 웃음을 이끌어내는 홍상수식 유머는 거의 정점에 이른 듯하다. 이를테면 구경남과 제천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엄지원)가 처음 만나는 장면. 구경남은 전날 한숨도 못 잤는데,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한두 시간 잤더니 다섯 시간 잔 것처럼 개운하다는 등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공현희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허리를 자르며 명함을 건넨다. 저녁에 열린 파티에서는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흥행 감독이 됐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후배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싸잡아 얘기하면 너나없이 다 속물들인데, 그런 속물들이 사는 곳이 바로 세상 아닌가, 홍상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vs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의 주인공은 여전히 연애에 관심이 많지만, 예전처럼 본능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영혼의 ‘짝’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짝을 만났다고 자부하는 두 커플을 만난다. 그러나 구경남이 확인한바, 부상용(공형진)·유신(정유미) 부부는 자기 안에 갇힌 과대망상의 ‘송충이’이며, 양천수(문창길)·고순(고현정) 부부는 바람을 피운다. 구경남 자신은 이번에도 짝을 찾는 데 실패한다.

제천과 제주라는, 앞 글자가 같은 두 공간의 대구는 ‘지키지도 못하면서’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대구이기도 하다. 제천에서 만난 공현희는 구경남에게 지키지도 못하면서 왜 약속을 남발하느냐고 타박하고, 제주에서 만난 고순(고현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고 구박한다. 영화는 결국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고, 스캔들을 비난하는 세상을 향해 “위선 떨지 마, 지가 하고 싶은 거였으면서”(구경남)라고 야유를 보낸다.

영화에 대한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극장전>(2005)보다도 훨씬 직접적으로 감독 자신의 작품(혹은 작품 활동)에 대해 대놓고 말하는 ‘영화에 대한 영화’(메타 영화)다. <씨네21>이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텍스트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흔들고 풍자한다. “왜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구경남은 뭐라고 답변하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허공을 떠돌고 결국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구경남은 “다음 영화는 200만”이라며,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래서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지금까지 나온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다.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진 맙시다”(<생활의 발견>), “생각을 해야겠다.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극장전>)와 같은 영화 유행어를 남긴 홍상수는 고현정의 입을 빌려 달관한 사람처럼 일침을 놓는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홈비디오로 찍어놓은 자기 모습을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쑥스럽고 민망하다. 그러나 그런 보잘것없는 자화상과 대면한 뒤 극장 문을 나서면 관객은 다시 그 쑥스럽고 민망한 세상 속에서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홍상수의 유머는 힘이 세다.(이재성기자)  

09.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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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5-0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라이너스 2009-05-1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2009-05-12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이님 서재에서 퍼옵니다...

- 이재원씨 블로그에서 퍼옵니다. 지젝에 관한 좋은 소개글.   
 


이 글은 민예총 산하 인터넷잡지 <컬쳐뉴스>(2007년 4월 24일자 문화일반 코너)에 실렸다. 기록차원에서 블로그에 올려놓는다. 

. 따라서 그의 이력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을 읽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끝)




[출처]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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