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촛불은 나에게 많은 걸 남겼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그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에서 일주일에 한 번 촛불을 들고 있다. 최소한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거대한 촛불이 되길 열망하면서...그럼에도 그간에 성과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기존의 성과까지 잃어버릴까 걱정이다. 1주년을 맞이하여 촛불에 대한 논란도 많고 말도 많다. 문제는 실천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알맞는 실천을 어떻게 일구어내는냐의 문제인데....항상 그것이 제일 어렵다.

[사회]촛불 1년,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새로운 운동방식의 성과와 한계, ‘제2의 촛불’은 타오를 것인가  

‘촛불‘은 2008년 여름 광장을 거치면서 시민주권을 대표하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잡았다. 시민들이 촛불을 저항의 상징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여름이 처음은 아니다. 시민들은 2002년 여중생 사망사건 규탄 집회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이전 촛불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면, 2008년 촛불은 촛불행렬에 참가한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지울 수 없이 강렬한 불도장을 찍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계기로 점화돼 석 달 남짓 광장을 밝혔던 촛불집회가 5월 2일로 1주년을 맞았다. 5월 2일 10대들이 청계광장에 모였을 때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냈던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기에 적합한 시간적 거리다. 올해 2월과 3월에는 <촛불집회와 한국사회>(문화과학사),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가 잇달아 출간됐다. 4월 마지막 주에는 1주년을 눈앞에 두고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진보진영연구소 및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주관한 촛불1주년 기념 토론회가 이틀 간격으로 열렸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흐름은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해 나왔던 촛불담론들이 촛불집회의 빛과 성과에 집중했다면 최근 논의는 촛불의 그늘과 한계를 짚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상상하지 못한 경로로 진화하면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그 다채로운 모습 속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새로움’이었다. 그 새로움은 우선 ‘시민의 재발견’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여러 모로 이전의 집회 참가자들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옷차림부터 달랐다. 10대들의 교복 차림 시위에 뒤늦게 합류한 시민들 가운데는 정장 차림이 많았다.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은 이 시기 자유로운 복장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움직임도 달랐다. 그들은 단일한 대오로 움직이지 않았다. 청계광장에서 시작한 집회는 5월 24일 집회를 계기로 가두행렬로 이어졌고, 거리로 나간 시민들은 정해진 목적지 없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경찰이 앞을 막아서면 저지선을 뚫는 대신 돌아서 다른 길로 갔다. 이런 이들이 모인 촛불집회는 집회라기보다는 축제였다. “공약을 지킬까봐 겁나는 건 네가 처음이다” “조중동이 신문이라면 우리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 같은 창조적인 손팻말 문구는 이처럼 발랄한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전 집회와는 다른 ‘시민의 재발견’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민들 앞에서 당황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광우병대책위 차량은 집회 내내 광장과 거리를 오갔지만 촛불행렬을 앞장서 인도하는 구심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일부 시민은 현장에서 대책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회 참가자 최동식(29)씨는 “당시 대책위에 불만이 많았다. 시민들 사이에는 심지어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집회 참가자들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하루 30만 원짜리 숙소에서 잠을 잤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면서 “당시 시민들 중에는 시민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는 곳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민의 대변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시민사회단체에 이 경험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박영선 참여연대 기획위원장은 “그 이전까지 시민단체는 시민에 대해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만 갖고 있었다. 보수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해 시민운동의 발목을 잡거나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시민 둘 중 하나였다. 지난해에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구체적 시민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만큼 기존 시민운동이 일반 시민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시민과 괴리되어 있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서 촉발했다. 그런데 식품 안전은 기존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작은 이슈였다. 시민과 시민단체가 삶을 바라보는 감수성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운동방식에서도 촛불시민의 창조력은 기존 단체의 운동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기존 시민단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박 위원장의 말이다.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누구보다도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자신이었다. 지난해 5월 말 유모차부대를 끌고 거리로 나와 주목받은 유모차부대 카페 운영자 정혜원(34)씨는 촛불집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신문의 정치면과 사회면을 보지 않는 평범한 주부였다. 정씨는 “촛불집회는 정치가 일상의 모든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계기가 됐다”면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던 이웃 엄마들이 이번 경기교육감 선거에서는 김상곤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참여 시민도 새로운 자신 발견
촛불집회는 시민들에게 기존 미디어의 문제점도 새롭게 조명했다. 지난해 아프리카방송에서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면서 ‘BJ 라쿤’으로 잘 알려진 나동혁(29)씨는 “지난해 5월 2일 첫 집회를 보고 신문을 보니 ‘어디에서 몇 명이 모였다’는 정도로만 처리돼 있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보수 신문에서 촛농을 문제삼은 부분이었다. 이런 게 왜곡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시민은 나씨 혼자뿐 아니었다. 시민들은 촛불집회의 실상을 왜곡한다고 판단한 언론사에 광고를 주는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실상을 전달한다고 판단한 신문에 대해서는 자발적인 배포 운동을 벌였다.

새로운 집회 양상과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의 발견이 광장과 일상의 영역에서 촛불집회가 던진 신선한 충격이었다면, 촛불집회를 계기로 불거진 선출된 정치권력의 정당성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명박 정부는 분명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였음에도, 3개월 남짓 주말마다 타오른 촛불집회에 담긴 민의를 모른 척하거나 힘으로 진압하려 했다. 6월 10일 광화문 한복판을 점령한 ‘명박산성’은 선거로 집권한 권력과 권력을 준 시민들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의민주주의 한계에 근본적 질문
6월 11일 새벽 시민들이 ‘명박산성’ 앞에 스티로폼 탑을 쌓고 컨테이너 장벽을 넘어서느냐 마느냐를 두고 새벽이 밝을 때까지 벌인 논쟁은 선거와 정당 중심의 기존 제도정치와 집회 등 직접 행동을 통한 운동정치 사이의 긴장을 첨예하게 드러냈다.

여기에는 87년이나 2004년과 달리 선출된 권력의 부당한 권력행사를 선거를 통해 심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욱 딜레마로 작용했다. 지난해 6월 중순 최장집 교수는 “운동의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우므로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최 교수의 취지는 이해하나 당시 상황에서는 논리적인 모순이었다. 당시에는 좋은 제도권 정치가 없었기 때문에 거리 정치가 활성화됐던 것”이라면서 “여당은 물론이고 국민을 대변할 만한 야당 세력이 없는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강렬하고도 오래 타올랐던 만큼 분명 그늘도 있었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원은 올해 2월 ‘촛불과 한국사회 중산층의 자화상’이라는 글을 통해 “촛불집회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추켜세우는 것 역시 과도하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으로 오지 않았다…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는 이랜드 노조 부위원장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계층과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고 촛불의 한계를 지적했다.

“시민들 의견 모아내지는 못했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공론을 모은 ‘전자적 대중’과 시민단체나 노조 같은 조직행동의 괴리가 너무나 뚜렷했다”는 점을 촛불집회의 한계로 꼽았다. 앞서 시민단체 내부에서 나온 반성과 통하는 대목이다. 노원구 지역촛불 카페에서 활동하는 ‘쥐니’(필명 여)는 “정말 많은 의견과 주장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내지르기만 했을 뿐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내지는 못했다”면서 “하나가 되는 게 참 어렵다. 그런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해 실망하고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던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한 시민은 “거리투쟁 이후에 촛불이 스스로 도취됐고 비현실적인 주장들이 나왔다. 광화문에서도 그랬지만 아고라에서도 극단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는 걸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한계가 있다면 가능성도 있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은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시민들이 보여준 지지를 주목했다. 김 부원장은 “화물연대 파업은 획기적인 계기였다”면서 “시민들이 화물연대 파업을 ‘생계형 파업’이라고 부르면서 인정해줬다. 파업을 생활의 이슈로 파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촛불집회가 파업과 같은 이슈를 생활 영역의 문제로 끌어들였을 때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은 것은 제2의 촛불이 타오를 것인가라는 문제다.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는 “촛불은 용산 참사 현장과 비정규직 노조 파업을 따라다니면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당장 올해는 힘들겠지만 1~2년 안에 다시 타오를 것”이라면서 “신자유주의를 대중운동으로 극복하는 최초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신중한 입장도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제2촛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정치가 시민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면서 “그러나 촛불을 신화화해서 얻을 건 없다. 1년이 지났으니 촛불집회를 돌아보면서 실천적인 교훈을 얻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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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5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주일에 한번씩 꼭 나가신다니,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화이팅입니다!ㅋ

머큐리 2009-05-15 10:07   좋아요 0 | URL
그냥 작년에 지역에서 촛불시위에 같이 참석하던 사람들끼리 조그만 카페를 하나 만들어서 의견을 공유하다 보니...
 

 지난 10년간 노동법은 계속적인 후퇴를 해왔고 이제 노동유연성이란 명목하에 더욱 더 임시직과 비정규직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법률개정을 시행하려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만큼이라도 진보세력들은 싸워야 하는데..오히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니 아이러니 하다. 적은 선명해 졌는데 분열에 조직쇠퇴에...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노노모’ 노무사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선 이유…
“연륜 느는 만큼 상담 수준도 높아졌으면…” 

“10년 전 노무사를 시작할 때보다 경험과 연륜은 더 늘었어요. 그럼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은 내용의 상담을 해야 할 텐데…(현실은 반대예요). 제가 이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술을 가졌다면, 실제 하고 있는 건 소독과 붕대 매주는 정도인 셈이에요. 법이 갈수록 노동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노무사의 갈림길 ‘누구 손을 들어줄 건가’  

4월29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 따사로운 봄 햇살의 세례 속에 장혜진(39) 노무사가 팻말을 손에 든 채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란 글귀가 크지 않은 그의 체구를 가리고 있다. 세상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인데, 사람 사이의 갈등을 규율하는 법은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되레 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이성적 분노의 표현이다.

그를 하루짜리 단식에 참가시키며 이 자리에 세운 건 세 가지다. 첫째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이 땅의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이고, 둘째는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돼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에 소속된 그를 몇 달 전 한 여성 장애인 노동자가 찾아왔다. 지난해 한 통신회사의 전화상담원으로 입사한 그 여성은 애초 여덟 달 동안은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회사 쪽에서 받았다. 하지만 막상 기간을 채운 그에게 돌아온 건 계약 해지 통고였다. 장 노무사는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다. 사업주가 말로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건이기에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노무사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노동위는 화해를 주선했다. 사용자 쪽이 추후 채용 계획이 생기면 그 여성을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협의가 이뤄졌다. 장 노무사가 보기에 그 여성은 부당하게 해고됐지만 법이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마지막으로 열린 노동위에서 최후 진술을 요구받은 그 여성이 머뭇거리자 한 위원이 그러더군요. ‘회사에 고맙다는 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 거대한 세상이 100만원짜리 노동자의 생존권을 이렇게 짓밟을 수도 있구나 싶었죠.”
 

노무사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0년차를 맞은 그는 그동안 분노와 연민을 삭혀오다 이렇게 1인시위를 하면서 겉으로 표현이라도 하게 돼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장 노무사는 “이렇게라도 실천하니까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환란 직후인 1998년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6개월의 수습 기간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했다. 주중엔 지도노무사의 사무실에 나갔는데, 주로 회사 쪽을 상담했다. 주말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무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돈 있는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도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진로 결정을 앞두고 그는 차마 회사 쪽 노무 상담을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기 1명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의 문을 두드렸다. 노무사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차별 시정 명령에 폐업으로 맞선 하청업체


장 노무사를 국회 앞에 서게 만든 세 번째 요인은 바로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노노모)의 회장 이병훈 노무사다. 이 모임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장 노무사가 이날 단식과 1인시위에 참가하기 전, 이 노무사는 15일 동안 내리 밥을 굶었다. 보다 못한 회원들이 하루씩 릴레이 단식농성을 하겠다며 말린 끝에 이 노무사는 단식을 풀었다. 그 사이 몸무게가 12kg 빠졌다. 2002년 결성된 노노모는 기업 쪽 사건 수임은 하지 않는 노무사 100여 명이 모인 단체다. 그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모순 덩어리다. 이 노무사가 곡기 채우기를 스스로 거부한 데는 거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개업 노무사인 그의 사무실을 노동자 두 명이 지난해 찾아왔다. 금호타이어 전남 곡성공장에서 타이어 포장일을 하던 그들은 회사가 해당 작업을 외주화한다는 소문에 신분 불안을 호소했다. 알아보니, 하청업체인 ㅅ회사 소속 노동자이면서 해당 공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사실상 불법 파견 상태였다. 같은 작업장에서 다른 네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은 노동을 하면서 하청업체의 관리·감독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임금, 상여금, 교통비, 가족수당, 교대지원금 등은 적게 받았다. 연봉으로 치면 1년에 1500여만원가량 차이가 났다.

이에 이병훈 노무사는 전남지방노동위원회와 광주지방노동청에 이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원청업체인 금호타이어 쪽이 이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진정을 제기했다. 두 기관은 지난 2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청업체는 4월 중순 노동자 두 명을 해고하면서 자진 폐업으로 맞섰다. 그 사이 또 다른 하청업체가 하나 만들어져 이들의 일감을 가져갔다. 이 노무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 노무사는 “노동청과 노동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폐업까지 해가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건 지난해 7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뒤 이번 사건이 전국 최초”라며 “첫 사건이 이렇게 해결되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 사건 때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의무 전환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하는 법 개정안이 오는 6월 국회에서 처리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게 노노모 회원들의 생각이다. 이를 막기 위해 노노모 회원들은 국회가 비정규직 보호법을 처리하지 않고 폐기할 때까지 1일 단식과 국회 앞 1인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괴물’


고령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최저임금법의 적용 대상에서 빠지도록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이들이 보기에는 ‘괴물’일 뿐이다. 이 노무사는 “앞으로 더 많은 법률가들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고 모든 사회단체와 함께 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은 돈 안 되는 노동자 사건보다는 기업 쪽 노무 상담과 사건 수임으로 쏠리는 노무사 업계의 현실에도 하고픈 말이 많다. 장혜진 노무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은 노동법 후퇴의 역사였어요. 지금도 법은 기업에 유리하게 돼 있는데, 기업들이 또 법망을 피해나가도록 노무사들이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 아닌가요? 심지어 현장 노동자들은 일부 노무사들을 ‘노조파괴범’이라고까지 부르더라고요.”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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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 내 서재를 방문하는 분들이 오해하지 않았음 한다. 난 늙어서 추해진 이 시대의 문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을 뿐이고.... 이 시대를 그냥 가감없이 남길 생각일 뿐이며....이 문인의 이야기에는 전혀 공감하는 바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래도 기분 나쁘신 분들은 아래 기사들을 읽지 마시라! 사실 읽어봐야 혈압만 올라갈 뿐이니....

 

 "신아시아 외교 구상과 나의 알타이 연합론 일치” <중앙일보>

소설가 황석영(66·사진)씨가 10∼14일 이명박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2개국 국빈방문에 동행한다.

“5일 오전,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어요. ‘내가 경제 대통령으로만 알려졌는데 앞으론 문화적으로도 일을 풀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을 전한 그는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가하고 3일 귀국한 그는 전화통화에서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그런 제안을 받으니 멍했다”고 했다.

‘깜짝 방북’과 수감생활, 3년 여에 걸친 영국·프랑스 체류 등 거침 없는 행보를 보여온 황씨가 어떤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7일 오후 홍대 앞 노천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방송 출연 등으로 얼굴이 알려진 그는 이제 ‘연예인급’이다. 한 여성팬은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특유의 입담으로 ‘알타이 연합’론을 펼쳐 보였다. 다름아닌 ‘21세기 북방담론’이었다.

“이 대통령의 이른바 ‘신아시아 외교 구상’은 표면적으로는 몽골·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지향하지만 실은 해당 국가들의 협력 틀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까지 도모하는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내가 가다듬어 온 알타이 연합 구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황씨는 이런 점을 현 정권 핵심인사들을 통해 직접 확인했다고 했다. 알타이 연합 개념은 자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은 몽골의 문화계 인사들이 몇 해 전부터 황씨에게 제안한 게 단초가 됐다. 황씨에 따르면 한 유력 학자가 한글을 자신들의 문자로 수입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몽골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친(親)한국적이다. 이런 경향은 지난해 400만ha 농지 임대 제안으로 나타났다. 황씨는 “북한 노동력을 활용해 그 광활한 토지에 옥수수·밀·콩 등을 심으면 북한은 단숨에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남한은 이들 작물로부터 무공해 연료인 에탄올을 무한정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발판으로 이번에 방문하는 두 나라 등 중앙아시아 6개국은 물론 중국·일본까지 포함하는 ‘정치적 콘소시움’인 알타이 연합을 만들어야합니다. 유럽연합이나 동아시아국가연합 같은 형태의 공동체를 설립하자는 거지요. 이 연합 틀 속에서 하나의 패키지로 남·북한간 느슨한 국가연합체제도 자연스럽게 도모할 수 있겠지요.”

황씨는 패권을 잡으려는 중국과 일본이 걸림돌인데, 중국의 경우 연합 안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할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몽골 농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북한은 국제 관계가 경색될대로 경색된 현재로서는 지뢰밭인데, 황씨는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황씨는 그런 국제정치적 기획의 사전 정지 단계로 ‘알타이 문화 연합’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문화예술인과 학자가 앞장서 알타이 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서구식 근대 문명의 대안도 찾아보는 국제 학술·문화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자는 것이다. 황씨는 이번 출장에서 ‘알타이 문화 연합’을 추진해 올 가을 제주도에서 첫 행사를 성사시킬 구상을 하고 있다.

황씨는 “정부로부터 이런 역할을 부여받기는 처음”이라며 “지금까지 내 안테나는 시대 변화, 대중의 흐름을 놓친 적이 없어요. 현실 정치와는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내 경험에 비추어 정부를 도울 수 있는 부분들은 돕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황씨는 신바람이 나는 듯했다.

신준봉 기자   

 

 황석영 "이 대통령은 우익 아닌 중도" <중앙일보>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소설가 황석영 씨는 13일 "이명박 정부를 일부에서 보수우익으로 규정하는데 스스로는 중도실용 정권이라고 한다"며 "이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나는 봤다"며 이 대통령을 적극 감쌌다.

황석영 "PSI 유보한 것은 참 지혜로웠다"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한 황석영 씨는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한 후 "취임이후 촛불시위라든가 자기정신을 정립해 나갈 기회가 없었다. 일일이 예를 들지 못하지만 1년 동안 정신이 없었고 꼬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중도적인 것을 통해 선진정치로 갔으면 한다"고 주문한 뒤, "영호남 토착세력을 각각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따지기 힘들다.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약진해 전국정당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진전, 진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문제를 현 정부가 대단히 전향적으로 유보한 것은 참 지혜로웠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는 "내년 상반기까지 (대북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현 정부가 할 역할이 없다"며 "내년 상반기까지가 고비"라며 더욱 유연한 대북정책을 주문했다.

"좌우를 가르는 것 우스워"

그는 이어 자신의 성향에 대해 "나는 2005년부터 중도론을 얘기했다"며, KBS-TV의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핀란드 국적의 `따루'씨의 방송 코멘트를 예로 들어 "핀란드 여자애가 `한국의 좌파는 우리나라의 보수 같아요'라고 얘기했다. 지난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하는데 이라크 파병,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의 정책을 봤을 때 그게 어디 좌파 정권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또 "한국의 진보정당이라는 민노당도 비정규직 문제나 외국인 근로자 문제까지는 못 나가고 그저 노동조합 정도에서 멈춰 있다"면서 "좌파는 리버럴해야 하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독재타도나 민주화운동이 억압당했던 관행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비판적 평가를 했다.

그는 이어 "좌우를 가르는 것이 우습다. 준비가 안된 좌파, 우파 정권이 서로 줄세우기를 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갈 것이냐. 소모가 심하다"며 "전세계적인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은 고전적인 사회이론의 틀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용산참사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면서도 "해외에 나가 4년 살면서 광주사태는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럽도 다 겪었다. 영국에서는 대처 시절 시위군중에 발포해서 3~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큰 틀에서 동참할 것"

그는 특별수행원으로 이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한 것에 대해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며 "젊을 때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다 대응했는데 이제 나잇값을 해야지. 큰 틀에서 동참할 것"이라며 향후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할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는 순방에 동행한 이유에 대해 "제 생각과 대통령의 생각이 같은 부분이 있다"며 남북한과 몽골, 중앙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알타이 문화 연합론'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정부 측에 그런 얘기를 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은 강대국들이 남북분단 체제를 컨트롤하는 것에 적응하느라고 바빴고, 중국의 견제가 두려웠다"며 "지난 정부가 동북아 균형자론을 꺼냈는데 실속도 진전도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 역량을 과대평가했던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눈을 돌려 먼저 동북중앙아(알타이연합)를 형성해 놓고 동북아 문제를 차후에 해결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며 "이것이 느슨한 연방제로 갈 토대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에 의견접근이 이뤄져 작년 가을부터 이 대통령과 뜻도 나누고 했다"고 말해, 이 대통령과 지난해 가을부터 만나왔음을 밝히기도 했다.

李대통령, 황씨 조언 경청

황석영씨는 정부 허락없이 북한에 다녀온 뒤 국보법으로 위반돼 수감생활을 할 때 당시 의원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면회온 것을 인연으로 오랜 기간 이 대통령과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 대통령 집권후 이 대통령과 여러 차례 독대를 했으며, 국립대한민국관 건립위원이라는 직함을 맡아 지난달 이 대통령과 공식간담회를 갖기로 하는 등 이 대통령과 잦은 접촉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대통령 역시 화려한 달변에다가 북한을 비롯해 유럽 등지에 두터운 인맥을 맺고 있는 황석영씨를 높게 평가하며 올 들어서도 여러 차례 황씨를 만나 남북문제 해법 등에서 그의 조언을 경청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향후 황씨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황씨는 지난 대선때는 오랜 지인이던 손학규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에 큰 영향을 미친 전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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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따위에게 관심 끊은지 오래입니다.
 

제가 아는 '황석영'이라는 분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 그러 모아 비장하게 비상시국선언까지 했던 분입니다. 그때는 이명박씨를 '부패연대세력'이라 부르며,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MB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제 기억에 그 움직임은 결국 문국현 후보에게 가하는 사퇴의 압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자 뉴스를 보니, 자신을 황석영이라 부르는 또 한 분이 나서서 이명박 정권이 실용적인 중도정권이라며, 그 정권을 적극 돕겠다고 하는군요. 부패한 세력이 집권 1년 만에 자연치유되어 싱싱해졌다는 얘긴가요? 아니면 이명박이 '부패'한 세력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치즈나 요구르트처럼 '발효'한 세력이었다는 얘긴가요?

더 황당한 것은 아직도 진보세력이 '독재 타도'나 외치고 있다는 그의 비판입니다. 2007년 대선 때 철지난 독재타도 외치던 사람은 바로 황석영씨였습니다. 그때 '비상시국회의'라는 단체의 결성식에서 황석영씨는 "척박한 독재의 동토에서 민주화를 위해 분투한 초심의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사돈 남 말 하고 계시니.... 

사진에 나타난 생물학적 특성은  이 개체가 영장류에 속한다고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기억력이 2초라는 금붕어도 아니고, 세상에 명색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했던 언행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욕도 웬만해야 하는 거지, 이 정도의 극적인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넘어가지요. 

정작 코미디는 따로 있습니다. 황석영의 문학적 영감이란 게 '몽골 + 2 korea'라는 발상이라네요. 이 대목에서 완전히 뿜어버렸습니다. 요즘 그러잖아도 크로스 오버가 유행하던데, 아예 개그계로 진출하시려나 봅니다. 민족문학 한다고 북조선 넘나들더니, 이젠 민족의 단결을 넘어 몽골 인종주의, 알타이 종족주의 문학 하시려나 봅니다. 이 분, 생기신 것보다 많이 웃기세요. 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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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5-1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까지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늙으면 입다물고 죽어야 하는 것이 정답인건지....

[해이] 2009-05-15 00:02   좋아요 0 | URL
예술 혹은 문학의 자율성이라는게 얼마나 공허한 얘긴지 알수 있죠... 예술가들도 공부해야 합니다;;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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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평을 하기 전에 유시민을 참 좋아한다고 해야겠다. '지식소매상'을 자처 하지만, 사실 유시민처럼 일반(?)인들이 교양적 지식에 접근하기 쉽게 글 쓰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지식소매상'으로서의 유시민은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존재이다. 인간성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알 수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이라면 조금 평가가 박해질 수 밖에 없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헌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풀어논 1부와 참여정부 시절의 에피소드를 곁들인 몇몇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성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 1부에서 말하는 헌법에 대한 이야기야 별반 이견이 없으니 나름 공감대를 넓게 형성하면서 읽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참여정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슬슬 심기가 불편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에 적응했었던 장관 유시민을 바라봐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양쪽에서 욕을 많이 얻어먹은 정치인 유시민이라 그런지 리틀노무현 이란 별명까지 얻어가며, 참여정부를 옹호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을 에세이를 통해서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자신의 '성찰'이라 이야기 한다면 또 다시 실망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현실적 개혁과 실용주의 노선이란 명목하에 '사회 자유주의'란 신조어까지 생성시킨 성찰이다 보니 마치 떫은 감 씹은 듯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다.  

진보와 보수를 엄밀하게 '성찰'하지 않고 지 입맛대로 정의내린 다음 진보는 교조 꼴통이고 보수는 진보보다 더 골통이라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형평과 통합을 강조하는 '사회자유주의'자가 되었으니 이해하란 이야기인지....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평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한미관계가 악화됨으로써 장애가 조성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한 '내키지 않는 선태'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요설로 까지 느껴지니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열린우리당은 미국 민주당처럼 보수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의 세력이 제휴한 연합정당이었다" 고 규정하고 중도 정당이 힘이 없어서 협공에 밀려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국민이 다수파를 만들어 주었고 국민의 기대에 못미쳐서 정권까지 꼴통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면, 정말 성찰을 해야지 변명을 해서 될까? 그의 글들은 사회자유주의는 커녕 보수적 자유주의의 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마냥 씁쓸하기만 했다.  

난 국회에서도 싸우는 유시민을 원한것이지 실용적 개혁이란 이름으로 기성정치인과 동화되는 유시민을 보고 싶지 않다. 진보의 가치를 내걸지 않는 개혁이란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한나라당과 사회 자유주의의 그 미미한 차이를 이해 못하는 교조적 진보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 할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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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읽어보고 비판하는게 꺼림칙하긴 하지만 별로 읽어보고싶진 않습니다. 안읽어봤으니 그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라고 한다면, 그냥 비난하는거죠 뭐ㅎㅎㅎ 유시민은 그냥 80년대에 멈췄어야 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