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노동자들이 고공으로 올라갔다.

지상에서 싸우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에 마지막으로 농성을 행해야 하는 곳으로 ...

지상에서 추방된 자들은 땅 속으로 죽어 들어가거나 살기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한겨레 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668927.html?_fr=mt1

 

스타케이컬이 그렇고 한진이 그랬으며 씨앤앰 노동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쌍용이 또 추가되었다.

 

대한항공 김현아 부사장의 슈퍼갑질에 세상이 시끄럽다. 하기야 그들의 부를 창출하고 유지하고 지탱시켜 주는 노동자들에게 인격이 없는 물건취급을 했으니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게 슈퍼 갑질을 하도록 허용한 것은 누구일까?

 

IMF시절 한보의 정태수는 직원을 머슴으로 칭했다. 이른바 노예로 여긴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사용자와 노동자는 형식적이나마 계약관계 임을 전면 부정하고 아직도 봉건제에 살고 있음을 깨우치는 일갈이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한 말이었다.

그 시절 이후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을까?

 

87년 체제 후 민주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들 한다. 사실 변화된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이 관계는 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더 심화되고 있다. 시대가 변해서 대놓고 노예라고 머슴이라고 칭하지 않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모욕하고 상처주고 굴욕을 주고 있고 이러한 행위는 하늘이 준 천부인권적 권리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노력없이 세습받은 부와 지위로 타인을 모욕하는 그 천박한 행태는 이 사회에서 용인받아 왔기에 행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도 이런 천박한 행위를 용인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비정규직을 용인하는 것, 정리해고를 용인하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조건을 계속해서 허용하고 있는 것, 노동이 상품임을 용인하는 것...

 

이제 다시 고공으로 올라간 노동자들에게 전해줄 이야기는 무엇이어야 할까?

지상에서 추방되어 하늘 가까이에 올라가 이 엄혹한 바람을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 이 사회가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노동의 문제가 삶의 문제라서 그런걸까?

아직 쉬운 해답이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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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하여 지지한다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일까?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니가 뭔데 나를 함부로 재단하냐는 반발이다. 그런데 그런 반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압력이 세다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할 수도 있다. 어쩌면 소수자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침탈에 들어오는 외부에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몰려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수자이다.

 

성소수자들이 서울시청을 점거하고 있다.

서울인권헌장에 들어갈 성소수자 차별금지에 대한 문구때문에 논란( =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의 깽판)이 있었지만 서울인권헌장을 기초한 대표자들의 압도적(?)표걸로 통과시켰다. 문제는 서울 시였다. 서울시와 박원순은 합의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서울인권헌장을 사장시키려 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인권이란 합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혐오와 배제를 부르짖는 그야말고 인권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합의해야 되는 것이다.

 

현재 인권단체들과 성소수자들은 시청 로비 일부를 점거하고 박원순 시장을 압박하고 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시장이 기독교근본주의 목사들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이나 하고 있으니... 인권활동을 정치적 자산을 위한 활동으로 생가가고 있는건 아닌지....

 

주변 참모들이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박시장의 행보를 충고(?)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그렇다면 참모들 부터 물갈이 해야 할 듯하다. 기독교근본주의자들에게 아무리 아부를 해도 그들이 박시장에게 표을 줄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인권적 가치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잃을 뿐이다. 일부 박시장의 지지자들은 아군을 향해 총질하는 성소수자들과 인권활동가들을 비난하던데, 이거 참 웃기는 얘기다. 소수자들에게 새누리당이나 지금의 박시장이나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폭력은 동일하다. 어디서 차이를 느낄 수 있겠는가? 다른 진보적 가치들? 소수자를 배제하고 펼치는 진보적 가치들이란 무엇인가? 그건 진보적 가치라고 부르기 보다는 우수한 행정능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진보의 이름으로 아군에게 총질한다느니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느니 하는 개드립은 좀 삼가했으면 좋겠다.

 

12월 10일은 유엔에서 정한 세계 인권의 날이다. 이날 서울시청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은 시민의 이름으로 '서울인권헌장'을 선포했다. 행정권력인 서울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보적 가치들은 이를 시행할 권력에 대한 감시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한 사람이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다면 이미 진보 정권 10년이 가져다 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꼴이다. 더 얘기해봐야 입만 아프다.

 

서울시와 박원순은 서울인권선언을 정식으로 공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조건에서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선언하나 외치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디 사람사는 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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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2-1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권리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차별하지 말라는건데 그거 법에 다 있는건데 왜 제정을 못할까요. 좀 우스워요 =.=

머큐리 2014-12-11 17:27   좋아요 0 | URL
농성장 분위기는 마치 축제 현장 같았다는... 정치인 박원순과 인권변호사 박원순의 분열이 너무 심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는...

무해한모리군 2014-12-11 18:30   좋아요 0 | URL
제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캠프중에 하나가 25살때 레즈비언 친구들과 놀러갔을때였는데 우와 서로 속옷만 입고 악기 연주하며 놀아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요 ㅋㄷㅋㄷㅋㄷ
 

노동에서 소외된 노동자... 이제는 아예 노동할 자유도 잃어버린 노동자...

영화 카트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를 못 만들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영화 속 현장과 현실이 겹치면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가 답답해서 였다. 


얼마전 대법원에서 쌍용자동차 대량해고가 합법적이라 판결했다. 회사의 거짓말을 모두 인정하여 당시 정리해고가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옳고 그름은 한편으로 밀어 놓고 대량으로 정리해고가 아무런 윤리적인 판단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 

영화 처음에도 나왔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한 그 '실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 '실화'의 시대적 배경 역시 빠지면 안된다. 그 이유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참여정부 시절이기 때문이다. 


보수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 지칭했던 그 시절,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닥친 해고의 칼날은 자칭 좌파정권 하에서도 자행되었던 것이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소모품처럼 사람을 해고해도 괜찮다고 신호를 준 것이 그나마 이 땅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선 시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하나의 상징를 보이고 있다. 

이러니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이 정부의 대법원의 판단을 그저 보수적이라 비판할 수 있을까? 최소한 노동에 관한 한 이 사회는 보수적 시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영화의 극적 구성이나 리얼리티는 잘 살려져 있다. 다큐멘터리처럼 투박하지 않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았다. 몇번씩이나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들도 감동적이었고 ...


그럼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만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평범한 마트 노동자가 대기업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투사가 되는 것조차 자연스럽게 연출된 이 영화에서 무언가 빠진 것이 있어 불편해 진다. 아마도 나의 편협함도 한 몫햇으리라. 


그래서 이쉬움을 토로한다. 당시의 싸움은 홈에버 노동자들의 단독 싸움이 아니었다.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민주노총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함께 했다. 그들의 파업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이 결집해서 이루어진 '연대'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는 이후에도 이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더불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제시해야 할 것은 바로 연대의 정신이었다. 


영화에서 '연대의 정신'이 빠지자 관객의 시선은 연민과 동정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단치 처참하게 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싸움의 종말은 항상 패배였다. '연대'를 했었지만 패배 했었다. 그러나 그 패배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의 영화 속에서 희망을 찾기란 요원하다. 아니 어쩌면 감독은 아직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노동에서 해방된 세상이 아니라 노동에 종속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에 종속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운동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이전에는 노동을 착취하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 노동운동이라면 이제는 최소한 노동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싸우는 것이 노동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지 못해도 인간 답게 대접해 달라고 노동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빨갱이가 되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니 이제 정규직을 유연화하여 비정규직과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새누리당에서 이야기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분열이 자본의 의도였지만 노동을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노동자는 모두 노동자였지만 분열되고 갈라진 노동계급은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이란 딱지를 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결국 노동자들의 단결 밖에 없다. 그리고 단결과 더불어 연대가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연대가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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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 - 셀카 본능에서 잊혀질 권리까지, 삶의 격을 높이는 디지털 문법의 모든 것
구본권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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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대의 문법이 바뀌었다. 세상은 하루하루 눈부시게 변해가고 있고 변화를 따라 잡기에도 허덕이는 시대다. 특히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세상은 조금만 방심하면 뒤쳐지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변화를 일견 긍정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정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손쉽게 접하고 거리를 지우고 언제나 만나고 싶은 사람과 연락할 수 있으며, 이전보다 자신을 대중앞에 드러내기 쉬운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숙고 없이 지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고 거대 권력으로 부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정보의 확산과 공유는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디지털 정신은 개개인에게 이전과는 다른 권력을 주었다. 거대 권력기과에 맞서는 개인의 힘은 과거에 비해 커졌지만, 동시에 국가기관의 힘도 비약적으로 커졌다. 우리들이 1984를 끊임없이 되뇌이는 이유다. 


실제 모든 정보는 충분히 약탈되고 공유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개인적인 지침은 무엇일까? 일단 디지털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법은 없다. 심지어 과거의 행적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과거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웹상에 공개된 정보를 지우기보다는 향후 자신의 행적을 통제하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향후 자신의 행적을 디지털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기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부터 외부와 접속하는 모든 기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통카드기 되는 신용카드마저도....


이러한 것은 결국 세상으로 부터 철저하게 고립되는 것이다. 이건 사실상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다. 이 시대는 자신을 스스로 노출하는 시대이지 자신을 감추는 시대가 아니다. 이미 SNS를 통해서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하는 것을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행하고 있다. 이미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초기 설정부터 스스로를 노출하도록 초기화 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결국 어디론가 흘러가 어떻게 사용될 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근 빅데이터 이론을 보면 이렇게 모집된 정보는 국가나 기업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고 실제 활용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페이스북의 글이나 트위터의 글이 법정의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개인의 생각을 증명하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결국 아무생각 없이 그때 그때의 소회가 자신을 얽매는 동아줄로 변할 수 있다. 그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잊혀질 권리가 대두되는 이유다. 


이 책의 장점은 단순하게 정보 통신에 대한 안내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삶의 풍경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 가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행태가 달라지고 있다. 시간에 대한 감각에서 부터 교육문제까지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이야기는 간단하게 여길 수 없다. 


정보화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개인이 최소한도로 알아야 할 지식은 무엇일까? 이 정보화 시대가 인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

이 책은 장미빛 미래라고 칭송되는 정보화 시대의 어두운 일면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 어두운 일면을 인식하지 않고 정보화시대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족쇄로 채우는 일이다. 


디지털시대의 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갈 것인가 현명하게 항해해 갈 것인가?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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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

 

이 영화 불쾌하고 무겁다. 마치 바다에 가라 앉은 것처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스크린을 타고 넘실거린다. 영화가 끝나고 왜 이런 불쾌감이 드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딱 지금의 우리가 갇혀있는 사회가 영화의 선박인 '전진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부터 이야기 하자 '전진호' ... 한때는 잘 나가던 이 배는 선주가 폐선처리해야 할 정도로 낡고 고장이 잦다.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는 이 배...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된다.

강선장.. 선장은 '전진호'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이 배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무엇인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는 저질러 버린다.

 

선원들... 갑판장과 기관장 그리고 선원들은 강선장의 지휘 아래 있다. 강선장도 이들을 잘 챙기는 편이다. 그러나 그이 리더십도 한계가 있는 법. 전진호의 상황은 선장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홍매...조선족 밀항자인 그녀는 이 영화에서 피해자이자 구원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으로 때로는 모든 이들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매개체로...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피해자이나 구원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스토리로 보면... 생존의 극한에서 벌어지는 우연적인 사고가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를 인간의 밑바닥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자 보라... 여기 인간이 있다.

 

불편했던건 '전진호'가 이 사회와 너무 비슷하다는 점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결국 마지막 밑바닥을 보여야 함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자멸한다는 점에 있었다... 고 난 느낀다.

시대적 배경도 IMF로 난리가 났던 때이다. 자본의 이동은 유래없이 자유로워졌지만, 노동의 이동으 극도로 제한되는 신자유주의 시발점이 된 그 시절에 '전진호'를 살리기 위해 강선장은 모험을 한다. 이른바 밀항을 시도한 것.

 

불행한 사고로 밀항자들은 모두 죽고 홍매라는 조선족 여인 하나만 살아 남는다. 사건을 외부로 알리지 않으려면 홍매를 제거해야 하지만 홍매를 사랑(?)하는 동식은 홍매를 구하기 위해 강선장에게 대항한다....

 

이 영화를 도식적으로 풀자면 신자유주의로 돌입한 이 사회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는 사회가 어떻게되던 상관없이 되어 버린다. '전진호'의 쇠락과 몰락이 상징하는 바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 사회를 구해내야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강선장이다. 그러나 이미 관철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인 질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림도 없다. 위험하더라도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밀항이다. 이 밀항은 자본의 요구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해야 하는 요구와 그 노동력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쓰여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지도력의 파괴가 준비된다. 특히 선원들 중의 막내는 이시대의 청년과 연결된다. 선원 중 막내인 동식은 '전진호'가 무너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전진호'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홍매로 상징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강선장의 리더십을 해치고 결국 '전전호'를 살리는데 방해가 되므로 철처하게 응징된다. 이때 동식은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사회에 복종하지만 결국 버려지는 것에 분노하듯이 그는 강선장을 따르지만 마직막을 함께 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거대한 비유... 그 비유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이 영화가 무겁고 아프지만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직도 우리는 자욱한 해무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그 막막함에도 조금이라도 생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우리를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다 잊고 새롭게 경제를 살리자고 떠들어 대고 있다.

 

이런 영화가 '명량'에 밀려 고전하는 것이 아쉽지만... 결국 시간의 이 영화를 가치를 평가할 거라 믿는다.. 조조로 봤더니 하루가 좀 어둡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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