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의

이 책을 읽을 때 법가와 유가에 대한 말이 기억에 남아 남겼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686347

이미 썼지만 다시 쓰자면, 당시 대부 이상을 통제하는 방식은 관계이고, 이하를 통제하는 방식은 법이고, 법가는 대부 이하를 통제하는 방식을 전체에 확대하여 대부 이상에게도 법에 따른 통제를 요구하고, 유가는 대부 이상을 통제하는 방식을 전체에 확대하여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삼는 거라고 했다. 

더하여, 법가는 대부이상의 자결을 금지시켰다고도 했다. 스스로 벌하는 방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낮은 계급이 벌을 받듯 법에 따른 처벌을 받으라고 했다고. 

나는, 척지다,라는 말이 법과 관련된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https://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6749) 그렇지, 법이란 그런 것이지. 법대로 하자,는 말이 너와 나의 인간 관계는 끝이라는 의미로 들리지,라고 생각했다. 공동체는 법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예와 의리로 유지된다. 예와 의를 기리는 이야기들로, 법은 그저 하한선이다. 얼기설기 엮은 하한선, 인간이라면, 인간의 관계라면 해서 안 되는 일에 대해, 결국 마지막에 의탁하는 하한선이고, 할 수 있다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어떤 것이다. 

그런데, 복잡한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뻔뻔함이 공동체를 물들이고,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법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이길 때까지 멈출 수 없는,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다니!!!


2.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https://blog.aladin.co.kr/hahayo/10685062

시민운동이 동료시민을 설득하는 수고로움 대신, 법관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택함으로써 초기 운동의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평판을 갉아먹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설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아니라 꼭 한 사람, 권위있는 한 사람을 설득해서 자신의 주장을 더 많은 사람에게 관철시키려고 한다. 민주적인 체하지만, 실상은 자신은 복종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복종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가능한가? 


낙태죄 완전폐지를 위한 청원에도 반대하는 마음(https://blog.aladin.co.kr/hahayo/12210402 )이었고, 비동의 강간죄 제정에도 반대하는 마음(https://blog.aladin.co.kr/hahayo/12367911 ) 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말하지만, 이걸 법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https://blog.aladin.co.kr/hahayo/12544871)

https://blog.aladin.co.kr/hahayo/13581886

법의 심판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시작한 순간 질 수 없다.

현대의 법정은 로마시대의 격투장처럼 이기고 지는 일만 남는다.

형사와 민사가 있고, 형사는 공동체가 규정한 죄를 심판하는 자리라서 그 기준은 공동체의 기준이 되고, 판결은 새로운 정의가 된다. 

정의당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 장혜영의원의 입장문에 대해 의견을 쓸 때(https://blog.aladin.co.kr/hahayo/12343250 ), 연예인 남친의 낙태종용을 폭로한 여자에 대해 쓸 때(https://blog.aladin.co.kr/hahayo/13052482 )형사와 민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싶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두 사람이 괜찮대도 처벌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게 형사다. 형사사건 중에도 그 영향이 작을 때 일부 반의사불벌죄(https://namu.wiki/w/%EB%B0%98%EC%9D%98%EC%82%AC%EB%B6%88%EB%B2%8C%EC%A3%84)나 친고죄(https://namu.wiki/w/%ec%b9%9c%ea%b3%a0%ec%a3%84 )를 적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예외들이고 성폭력범죄, 아동범죄는 그간의 노력으로 예외가 아니다. 아동학대나 성폭력을 누군가가 신고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심판의 절차는 진행된다. 이제 심판대에 피해자의 자리는 없고, 공동체를 위해 죄를 심판하려는 검사와 자신을 변호하려는 가해자가 있다. 

장혜영의원은 정의당 내의 징계로 사건을 끝내려고 해당 사건을 고발하지 않았고,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https://namu.wiki/w/%EC%9E%A5%ED%98%9C%EC%98%81/%EB%85%BC%EB%9E%80 ) 


고소와 고발이 들어오면 이제 검사는 그 죄를 다뤄야 한다. 이건 무지한 내가 그저 형사와 민사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형사에도 특별히 성범죄나 아동범죄의 경우 피해자 변호인을 국가에서 지정해 의견을 청취하고 재판상황을 모니터링하고 피해자에게 알리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벌어지는 아동학대 재판은 그 판결이 세상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 판례가 될 수 있다. 이미 신고한 아동의 학부모는 재판 당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의견을 낼 수 있고,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재판에 여론의 관심이 쏠리고, 이제 세상의 새로운 기준이 생기면 세상은 또 그만큼 변화한다. 그 변화는 좋을까, 나쁠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나와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는 상대가 나와 벌어진 갈등에 대해 나와 대화하기보다 법에 호소하겠다고 가장 먼저 결심한다면 그 공동체는 공동체로서 건강하기 어렵다.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 개인들과, 갈등상황에서 언제나 심판자에게 달려가는 개인들, 그리고 개인들 위에서 심판하는 심판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어떻게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심판이란 것도, 호소한 개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개인이 이길 때까지하염없이 늘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그런 귀찮고 지루하고 길고도 긴 그런 송사에 휘말리기 싫어서 더 뒤로 물러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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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이동물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3547749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사고,라기에는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이다. 

그래도, 이 책 속의 '모노노아와레'때문에 아래 책-변종-이 떠올랐다. 

지구를 버리고 우주로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일본인을 묘사한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버리다니 이해하지 못하겠다, 에 존경스럽다,까지. 

한국인인 나는, 중국계인 저자가 가지는 일본인에 대한 태도에 그래, 일본사람들의 문제는 그거지,라고 좀 다른 품평을 하지만, 다시 다른 관점에서 저자가 살고 있는 서양인의 세계에서 일본인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은 동양인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갑자기 변종, 생각이 났다. 




2. 변종

https://blog.aladin.co.kr/hahayo/5205694 

심해 괴물?과의 대결을 블록버스터처럼 묘사하는 소설인데, 모노노아와레 때문에 떠올랐다. 

심해 괴물은 하나하나는 단세포동물처럼 보잘 것 없고, 쉽게 없앨 수도 있지만, 이게 군집으로 움직일 때는 종 자체의 보존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대적하기 어려운 존재로 묘사된다. 

개별적인 자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과연 단 하나의 목표, 종 자체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진행되는 이야기가 갑자기 모노노아와레를 읽다가 떠올랐다. 

동양인인 나는, 종의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는 이르,와 굳이 대적해야 할까 공존을 모색하는 게 낫지 않나하고 생각하면서, 왜 어떻게든 이 비장한 전투를 승리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투쟁의지를 불사를까?라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모노노아와레에서 일본인을 묘사하는 경외의 감정이, 이르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겹쳤다. 나는 죽어도 나의 종족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함께 움직이는 작고 미약한 존재에 대한 묘사와 겹쳤다. 


3. 도롱뇽과의 전쟁

https://blog.aladin.co.kr/hahayo/10213714

이건 원 서양인이 동양인을 도롱뇽처럼 생각하네,라면서 읽었어서 다시 또 붙이기가 그렇지만.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와닿았어서 빼놓을 수가 없다. 











서양저자의 책들,에서 묘하게 걸리는 태도의 문제들 때문에, 궁금해서 동서양의 인간이해, 도 구해 읽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원처럼 둥근 세상을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것과 만나고, 무와 유가 다르지 않는 세상을 사는 동양인을, 어느 순간 무한소급을 끊기 위해 절대자 신을 만들어낸 서양인들. 

서양인들에게 동양인들은 미지의 존재가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동양인은 도롱뇽이기도 하고, 이르이기도 한 걸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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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전기와 통신과 물, 가스가 연결되어 내게로 온다. 

그래서, 어떤 말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전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다. 

내가 취업했을 때는 전기를 만들고, 팔기도 하는 회사였다. 그래서 신입들에게 '세금'이 아니고 '요금'이라고 정정시킨다.  

만들기도 팔기도 하는 회사인데 공기업이라서, 같이 취업한 친구는 자기 물건 쓰라고 영업했지만-그 친구는 통신사였던가, 카드회사였던가-, 나는 아껴쓰라고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익을 내려고 격렬하게 노력하지는 않는 회사라서 좋았다. 


보기 흉한 송전탑이 산을 가로지르는 이유나, 주렁주렁 통신선이 전봇대에 매달리는 이유나, 땅 속에 뒤죽박죽 파이프가 지나가는 이유는 편리 때문이다. 와이파이가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해저를 가르는 몸통보다 두꺼운 케이블을 지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머스크의 로망대로 촘촘히 띄운 인공위성이 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거나. 


도시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전기 말고는 어렸을 때부터 쉽게 집으로 들어온 것들이 아니다. 

어렸을 때, 물은 마당의 펌프에서 길어서 부엌에 통에 채웠다. 펌프가 수도꼭지가 되고, 그게 또 부엌으로 들어갈 때도, 그 물은 사람을 불러 뚫어 만든 지하수였다. 

여전히, 가스는 망에서 오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아직도 엄마가 사는 시골집에는 떨어지면 트럭이 새 가스통을 싣고 와서는 다 쓴 가스통을 싣고 간다. 

전화는 언니가 고등학교를 갔을 때도 집에 없었고, 한참이나 없었고, 아빠는 동창회 전화를 돌리는 나에게, '전화요금은 괴산 중놈이 내느냐'고 화를 냈다. 


에코페미니즘,을 읽을 때였던가, 도시의 상수도망을 만들기 위해 시골의 지하수원이 고갈된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쉽게 물을 쓰지 못하던 어린시절과 겹치면서, 언제나 물들이 귀하다. 


전기회사에 들어와서 '세금'이 아니라 '요금'이라고, 내가 쓴 만큼 내는 돈이라고 들으면서, 전기도 어린시절의 물처럼 느껴진다. 


인터넷망,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들어가는지 듣고 나서는, 산다는 게 두렵다. 


그런데도, 망을 통해 공급되는 이 많은 것들은 망을 통해 공급되기 때문에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요금이 충분히 비싸지 않으면, 물을 물 쓰듯, 전기를 또 물 쓰듯 쓸 수 있게 된다. 자각이 없다. 내가 쓰는 물이 무엇의 댓가인지, 내가 쓰는 전기가 무엇을 치르고 내게 오는 건지, 아예 느끼지 못한다. 공기가 아닌데도 공기라고, 공공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통신이나 인터넷까지도 그렇게 된 것도 같다. 필수재, 공공재, 그래서 비용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정말 그래? 

게다가 망을 통해 공급되는 물건은 무언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망 자체에 들어가는 돈에 대해 자꾸 잊는다. 관심은 최초생산방식에 집중되서, 망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그리드,를 읽을 때 미국에서 집에 태양전지를 올리고,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어 팔고, 부족할 때 망을 통해 전기를 공급받는 부자들 때문에, 망의 부하는 커지는데, 비용을 청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듣는다. 이익이 나야, 망을 개선할 수 있는데, 이익을 낼 방법은 아예 없는 구조를 꽤나 진지하게 친환경이라 좋은 거라고 말한다. (최근 읽은 기사에서 한전에서 연간 망을 유지보수하는 비용이 6~7조라고( https://www.energy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2713 )하더라.) 


물과 전기가 공공재라서 요금을 올리면 안 된다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되서 누리는 편리인지 댓가를 치르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내가 아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https://www.youtube.com/watch?v=EyAhO7_981g&t=20s



https://www.youtube.com/watch?v=T65PZXxD7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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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기억에 있을 리 없다. 

모두 다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아빠의 이야기, 역사의 이야기.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죽고 태어나고, 이 땅에 사람들은 변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도 있고, 그 가운데, 이야기는 남아 나는 내가 피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국민인 걸 잊지 않는다. 그래서, RM의 인터뷰 (http://tayom.tistory.com/339 ) 가 회자될 때 새삼스러웠다. 

자랑스러운 감정에 더하여, 괴롭고 모순된 감정들이 내게 있다. 


1. 도롱뇽과의 전쟁

https://blog.aladin.co.kr/hahayo/10213714


도롱뇽과 전쟁을 하는 인류가 아니라, 도롱뇽에 이입하는 바람에 재미나게 읽을 수 없었다. 

인간도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동양인인 나는, ( https://blog.aladin.co.kr/hahayo/12615586 ) 

책을 읽는 내내, 도롱뇽이 서양인이 보는 일본인,같다고 느꼈다. 도롱뇽이었는데, 문명을 따라잡아서 공격하는 존재. 

유럽의 역사에 '세계사'라고 이름붙이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되서 싫었다. 





2. 두번째 봄

(https://blog.aladin.co.kr/hahayo/7636123 )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국이었다고 해도, 저런 삶을 내가 산다는 보장이 없는 계급이면서도, 저렇게 부유한 삶을 선망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식민지였다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독재정치의 폭압 가운데 이르른 지금의 이 나라의 현실에서 책 속에 묘사된 삷을 선망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보지 않으면, 모른 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경각심이 들었다. 




3.고릴라 이스마엘

(https://blog.aladin.co.kr/hahayo/603247 )

좀 더 도전적이고 무시무시한 표지의 책으로 읽었지만, 읽으면서 뒷걸음질치는 순간들이 있어서 남겼다. 

피식민지의 기억이 있다. 선선히 생태적 삶으로, 경쟁적이지 않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4. 소년,아란타로 가다

( https://blog.aladin.co.kr/hahayo/11354393 )


이 책보다, 이 책을 읽고 녹두꽃 드라마 속 묘사를 남겼다. 전봉준이 문명이나 진보,가 야만이라고 말하는 장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마음이 없는 문명이나 진보는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가. 









지금 어떤 나라들이 지금 우리나라의 풍요를 선망하고 있고, 우리의 지금 부가 그런 선망 가운데 이루어지는 수출 위에서 가능했다는 걸 또 알고 있어서 부끄러운 마음이 된다. 


피식민지의 기억이 공동체에 남아 있다. 

축구를 할 때마다, 야구를 할 때마다, 기억하지 못하는 울분에 흥분하면서 열광한다. 

제국의 사람들이 평화를 말할 때, 그럴 듯한 말들로 환경과 생태를 말할 때, 그들처럼 쉽게, 크게 말하기 어렵다. 

식민지의 자연을, 식민지인의 시체들을 아래에 깔고, 자국 내 불만을 잠재웠던 그들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일군 부를 토대로 올라가고 올라갔던 그들 국가의 안전망을 선선히 볼 수가 없다. 그럴 수 있었던 저들의 토대를, 그럴 수 없었던 우리의 토대를 알기 때문에, 노동자면서 사장처럼, 힘없는 국민이면서 정치가라도 된 양 갈팡질팡 하고 있다. 


다시 식민지가 될 수는 없어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알고 있다.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가능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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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차(https://blog.aladin.co.kr/hahayo/14143752)

단편선에 딱 하나 실린 여성작가의 소설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서 놀랐다. 나를 죽인 자와 함께 탄 죽음 뒤의 마차에서 죽인 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 본다. 


나에게도 이런 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태어난 게 원죄라는 기독교도, 완전한 소멸이 목표라는 불교도 싫지 않냐고 했었지만 지금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래서 그렇게 싫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계들, 때문에 나의 죽음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당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가진다. 나를 아는 누구에게라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 올 테니, 나를 위해서라도 기다려 주십사, 생각한다. 


2.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https://blog.aladin.co.kr/hahayo/8192500)

피다한 부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명의 말들에 대해 생각하고 남겼었다.

살기 싫은 감정,이 그럴 수 있다는 나의 태도 때문에, 그 태도가 얼마나 기이한 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거라고 썼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의 파충류 뇌가 예민하게 노력하고 있다. 나의 파충류 뇌가 작동하는 동안에 살기 싫은, 어쩌면 한가한 감정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데, 이미 죽음은 어디에도 안 보이게 잘 치워둔 세상이기 때문에 삶은 무료해지는 게 아닌가도 싶다. 





3.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일기를 쓰는 십대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소년의 관대함을 본다. 


소년은 죽었고, 일기의 그 첫 문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비수가 되지만, 일기를 다 읽은 소녀는 그 말이 다른 의미임을 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본다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귀찮게 구는 동생도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애도, 지금 삶을 꺾을 것처럼 거대하고 괴로워 보이는 일들도 참 별게 아니라고, 소년은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삶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된다. 

나도 아직 가끔 모르겠는 걸 참 일찍 깨달은 소년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수동적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고 살아남는 건, 수동적이어야 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누가 낳아달랬어?'라고 부모에게 항의한다는 자식들 이야기를 들으면 변명을 궁리한다. 그게 과연 나만의 욕망이었을까. 그건 너였어. 네가 나를 세상에 나오는 통로로 쓴 거지. 어떻게 내가 내 의지만으로 너를 낳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복에 살지요'라는 동화가 어린 날 나의 자신만만함의 근거였다면, 부모가 된 지금의 나에게 부모된 자의 변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하여, 수동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염세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죽음만큼 삶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내가 관대해 보인다면, -그런 놈은 죽여야 되,라는 말에 언제나 물러서는 것 같은- 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닥치는 죽음은 벌이 아닌데, 죽음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도 뛰어드는 죽음이라는 것이 벌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가혹함,에 거리가 생기는 건 나의 이 애매한 태도,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태도 때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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