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평등은 없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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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처음이 '(아마도) 이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조안에게'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도덕철학자가 쓴 글이 굉장히 사적으로 읽혔다. 서문과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경제적 평등,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짧은 책이다. 두 장 중에 첫번째 장이 사적으로 읽혔다.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도가 다른 커플에서 벌어질 법한 어떤 논쟁의 끝에 쓰여진 장 같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를 경영하자는 제안에 '당신이 나에게 오는 해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대답하는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다. 소득이 다른 것, 부유하고 부유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부유한 사람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고, 덜 소유했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편견이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당신도 극빈이 해소되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은 도덕적 이상일 수도 없다, 고 말한다. 분노하지 않는, 불평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어떤 말들에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평등에 대한 주장이 도덕적으로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1장과 달리 2장은 경제적 평등을 앞세운 사람들의 주장이 때때로 다른 감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처럼 보인다. '내가 누구네 집 딸이었어도 대접이 이랬겠어?'라는 불만의 표현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게 아니냐고 말한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어떤 과격한 발언들이 과연 도움이 되는 말인가 싶었던 짧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갑질에 대한 분노가 존중을 고양하기 보다, 분노를 고양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에 대한 말들이다. 열개를 다섯사람에게 두 개씩 나눠주는 것이 좋은가,라는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서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하여, 과연 경제적 평등과 존중의 평등을 엮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질문하게 한다.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절한 화폐량을 판단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문제를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와 비교할 때 자신의 경제적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중요한 도덕적 관심사라도 되는 양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렇듯 평등의 원칙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피상성에 기여하고 있다. -24p


경제적 평등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그리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얼마나 큰 효용을 얻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가졌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런 오류는 소득이 적은 사람이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부유한 사람에 비해 많다는 그릇된 가정에 일부 기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지는 도덕적 중요성에서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 p5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작은 만족을 제공하는 자원에 만족하는 것이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현재 가진 자원에 만족하겠다는 그의 결정 - 다시 말해, 자신이 현재 이만큼의 자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결정 - 은 자기 삶의 현재 상태와 질에 대한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평가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 p66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을 수긍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불평등을 제거 혹은 개선하려는 노력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많은 노력들을 지지한다. 내가 그러한 노력들을 지지하는 것은 평등이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목표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실용성에 기초한 경험적 믿음으로 볼 때 대개의 경우 더 많은 평등이 서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 p71


공정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등주의적 분배를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할 특별한 이유를 제공하는 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경우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의 선험적인 혹은 선제적인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라, 존중과 공정성의 도덕적 중요성이다. 

벌린이 제시한 것과 같은 사례들에서 평등의 요구와 존중의 요구가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 경우에 요구되는 평등은 결코 평등주의 자체가 가진 도덕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는 파생된 것이다. 평등주의는 존중과 공정성이라는 더 기본적인 요구들에 기초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도록 명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인간성에 대응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이지 그 자체로 강력한 목적이 되는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다. -p86~ 88


합리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성이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거나 어떤 행동방침을 따르는 것이 합리성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도덕적 명령에 어긋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중에서 벗어난 대우를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사실 외에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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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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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실패하지만 늘 시도하는 책장정리 가운데, 포스트잇이 붙은 이 책을 꺼냈다. 포스트 잇을 떼어내고 싶다. 우선 그 내용을 적자 싶어서 언제 읽었는지 찾았다. 2020년 8월에 마쳤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탐구하는 것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써놓았더라.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책 한 권을 펼쳐놓았다. 그때도, 제목보다는 부제 때문에 꺼려지는 마음이 있어서 아무 것도 못 남긴 거 같다. 


거친 것을 알려고 오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거친 말, 즉 거짓말로 공손하게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도가 아니면 그를 피한다"는 뜻이다. 

순자가 위에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조급하다"고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소용이 없다거나 화가 나는 일, 금지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잠재적 교류 대상이다. 또한 그들 역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진지한 물음을 표할 때 진지한 태도로 응하면 된다. "피한다"는 표힌이 단어 그대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도"에 대해서, 즉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지금 당장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183


일본의 인문학자 오구마 에지는 일본의 전후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기여한 윤리주의를 "나는 지식인이다, 학생이다, 특권계급이다, 그러므로 특권과 사생활을 버리고 노동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윤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흑과 백, 전부와 전무로 나뉘며, 강경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과 힘을 얻는다. 윤리주의는 운동의 전망을 가망 없게 만들고 참여에 높은 장벽을 쌓는다. 따라서 참가자는 적어진다. 참가자가 적어지므로 비난과 죄책감으로 참가자를 끌어내려는 시도가 강해진다.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너는 데모하러 오지 않았잖아?", "바리케이드에서 빠져나가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그런 데에 정나미가 떨어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윤리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스스로도 괴롭고 확신을 지닐 수 없으므로" 타협에 혐오감을 보이고 "타인을 세차게 몰아붙이기 쉽다." 그 결과 "내부 대립과 배신자 취급이 마구 벌어"진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며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활동이 "윤리를 내세워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인내심 경연대회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윤리주의는 새로운 속물들을 창출한다. 이 속물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나 조직에서 윤리의 위계를 세우고, 그 위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간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 p246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는 한 명의 독지가를 설득하고 승낙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의 성격은 세네카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배의 이음매들이 사방으로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져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올 때(...) 퍼내도 퍼내도 물이 줄지 않고 자꾸만 더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지지 않고 자꾸 생겨나는 악에 맞서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p255


"가령 말이야.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는 쇠로 된 방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세. 다들 곧 질식해 죽겠지.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곧바로 죽음의 상태로 이어질 테니까 절대로 죽기 전의 슬픔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맑은 사람 몇몇을 깨운다면 말이야. 이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만회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서도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하지만 몇 사람만이라도 깨어난다면, 쇠로 된 방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루쉰은 "희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과거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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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 - 누구나, 언제나, 저마다의 속도로
이수인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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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내가 딱 하나만 읽는다면 읽겠다던 '인재시교'를 떠올리게 해서 골랐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라, 교육이 뭘까, 라는 질문을 자꾸 자꾸 하게 되서 이런 책을 읽는다. 큰 아이가 고3이라 지금 입시나 교육이 왜 이런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대학은 필수적인 경로나 교육이 아니다. 30프로만 갈 수 있을 때에도 그랬고, 거의 100프로의 수험생이 갈 수 있는 지금도 그렇다. 상승욕구가 있고,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부모가 방법을 모르는 채로 떠민다. 또래집단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압력이 작용한다. 사교육시장은 비대해지고, 사교육시장도, 대학도 살아남기 위해 케케묵은 담론들을 이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많은 교육관련 책들은 그래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인가?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인가?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인가? 어떤 삶을 살면 좋은 삶인가? 어떤 것이 성공인가? 질문은 많고 답은 모른다. 

그래서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저자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게임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해서 첫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느리게 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이가 적어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수를 이해할 만큼 적어도 2학년짜리만큼은 되길 바라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에듀테크,라고 불리는 분야의 기업가가 되어 쓴 책이다. 엄마의 마음, 기업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엄마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기업가기 때문에 더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엄마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그래도 최선을 다 해서 말한다.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이기를 기대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배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에 답은 없어도, 여전히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사람을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움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라고 유학의 '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목표여야 끝까지 배울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부모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 깜깜한 미래를 기쁘게 기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돌보는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키워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 그런 걸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저자의 말들에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기대도 조금은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병원의 유전학자인 닥터 골라비가 병실에 찾아와서 무슨 질문이든지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아이와 같은 유전 정보의 아이를 찾아서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곤조곤 말을 쏟아냈다. "너는 유전적으로 정상인 아이를 하나 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착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될지 악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삶을 마무리할지 알 수 있겠니? 장애가 있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마찬가지야.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나는 머릿속에서 막연히 '장애가 있는 아이'와 '장애가 있지 않은 아이'를 나누고, 그 부모의 인생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불행한 삶'과 '그렇지 않은 행복한 삶'의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골라비는 아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모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말해주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의 유전질환은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조합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축복이지 않니? 아무도 모른다고!" -p17~18


그러다가 아이가 다른 반 교실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 그런 아이들을 마주치면 매우 반가워하면서 말을 걸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방학 중 추가 학습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고 말을 걸면서 아이는 매우 행복해했다. 이런 광경을 몇 번 지켜보자, 차라리 특수학급에서 비슷한 수준의 또래들과 함께 있게 했다면 아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p200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교육의 목표가 잘목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림 그리는 것의 목표가 직업을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기능을 훈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의 수준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또래와 비교해서 미술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잘 그리는 것, 상업적으로 팔릴 것을 목표로 그리면 안 된다. 교육의 목표가 '어떤 수준을 달성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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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이제열 지음 / 모과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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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가 편애하는 신의 차별적인 사랑을 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베이스인 서양의 문명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골랐지만, 또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나는 종교를 조금은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종교적 방식으로 하는 설명에 삐딱한 태도도 있다. 나는 동서양의 인간이해,가 두 종교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

내가 싫어하는 친구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비슷한 애가 그 친구를 막 욕하는 걸 듣는 기분이 된다. 사실, 책에서 하는 말은 욕도 아니고, 기독교와 불교는 그리 가깝지 않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종교의 입장을 불교의 입장에서 듣는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중이라, 천국이나 지옥, 전생이나 내세, 환생이나 이적에 대해 말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평화로워야 하고 구하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완전한 자는 세상에 대한 희로애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욕망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p25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형벌이 있든 없든 생로병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애초부터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다. '생으로 말미암아 사가 있는 것'이다. -p49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그 본성에 있어 실제가 아니다. 마치 꿈의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 불교의 지옥은 미혹한 중생이 업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이다. 꿈을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의 일들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듯 지옥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업의 힘에 의해 꾸는 꿈이다. 지옥의 모든 형틀 기구와 참상과 전경 그리고 사자들의 모습은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의 마음이 만든 허상들이다. - p94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法, Dharma)이고, 바로 그 법 속에서 중생들이 업을 지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에 전하는 다음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돌아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의 속박 속에 굴러간다." -p127 -128


혹 불교 경전에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들이 지은 죄를 씻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일러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방식을 불교는 애당초 부정하고 있다. - p161-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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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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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히지 않는 날들이다. 겨우 마친 책은 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선택하는 서구 저자의 책이다. 

바댕테르의 책을 읽었던 때의 느낌( https://blog.aladin.co.kr/hahayo/15744499 ) 처럼, 그래도 저자는 좌파,를 버리지 못하는구나, 라면서 읽는다. 나는 그게 뭐 중요한가,라는 태도가 되어, 그래 워크 니들이 좌파 가져라, 나는 나의 믿음으로 움직이겠다,라는 입장이라서 이제는 모르겠다. 제목에서 나는 좌파고 좌파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워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나는 없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서 분노할 건가, 싶은 날들이다. 

계몽주의가 기독교에 저항하기 위해 겨우 세웠던 공통의 어떤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저자의 책에서, 나는 다시 그 담론이 발 딛고 선 종교의 언어들을 느낀다. 


이렇듯 문화는 특수성을 가진 영역이지만, 정치는 그 핵심에 보편주의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차이는 그것을 물화시키는 법 없이도 소중하게 다루는 게 가능하다.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아마 여러 해골을 모아 놓은 회의장만큼이나 무겁고 딱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문화적 범주를 중심 무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 - p114


일부 권력 형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푸코가 논의하는 바는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분석이 단순히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권력 비판과 마찬가지로 해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분석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런 희망은 완전히 무너진다. 

모든 지식은 불의에 기반한다는 점(즉 인식활동에 있어서조차 진리 혹은 진리의 기초에 대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을 원하는 본능은 악의적이라는 점(즉 인류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살인적인 것이라는 점).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 푸코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허무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도 당연하다.-127p


만약 권력이 그토록 모든 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것이라면, 그 개념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스러워진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권력이라면, 이 권력이라는 개념은 만사만물을 다 포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의 권력 개념이란 너무나 폭넓은 것이라서 악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 사그라들게 된다. 

나는 우리 사유의 준거점을 언어와 기호의 거대한 모델이 아니라 전쟁 및 전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를 낳고 또 지금의 모습으로 결정지은 역사는 언어가 아닌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닌 권력의 관계인 것이다.(...)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이란 언제나 끝이 결정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것이건만, '변증법'이란 헤겔식 논리의 뼈대 위에서 그러한 실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며, '기호학'이란 그러한 현실의 폭력, 유혈, 살상의 성격을 고요한 플라톤식 언어 및 대화로 환원하여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 개념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p129-130 


푸코의 이 인용문에서 보듯, 이들은 모두 평서문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의구심의 형이상학을 펼치려면 의문문을 쓰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글은 몽롱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보통 니체 애호가들이지만, 니체가 자신이 경멸하는 자들을 까뭉개는 표현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다음의 조롱을 들어 마땅하다. "그들은 연못에 흙탕을 쳐서 심연처럼 보이게 만든다."-p130-131


푸코는 자신의 관점이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가리기 위해 거짓 겸손을 떤다. 사르트르와 같은 "일반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는 자신과 같은 "특정 문제의 지식인"이 발견해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여러 정치적 판단에 대해 이유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도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와 논리란 그저 자기합리화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권력이란 그저 맹목적 추동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성의 경멸과 손을 잡고 함께 이루어진다. 이성의 격하와 권력의 격상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들이니까. 푸코, 하이데거, 아도르노와 같이 서로 다른 20세기 사상가들이 공통으로 내거는 주장이 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계몽적 이성"이라는 것은 사기의 자작극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는 자연 그리고(그들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원주민들까지 복속시키는 데 혈안이 된 지배욕, 계산욕, 탐욕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 p133


이성은 분명코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성을 단지 권력의 한 형태로 본다면 폭력과 신념, 그리고 신념과 의식 조작의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내가 너보다 덩치가 더 크니까 라는 말과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이것이 (a)옳기 때문에 (b)공동체에 좋기 때문에 (c)너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d)네 스스로 선택한 정당화 논리 때문에 라는 말의 차이도 무시하게 된다. -p138


그 결과 진화심리학자들 또한 그들을 낳은 사회생물학자들처럼 이른바 이타심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권력과 자기보존의 투쟁을 그럴듯하게 치장한 예를 역사를 뒤져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자기들 생명까지 희생해가며 벌거벗은 자기이익과 반대되는 일을 행한 사람들의 예 또한 무수히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메리 미드글리는 이기심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남들을 배려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했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가르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진화심리학 이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조차 자기들 도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 윌슨은 이 원리를 명쾌하게 말한다. 

이타주의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이타주의자'는 사회가 자기 혹은 가까운 친족에게 보답할 것을 기대한다. 그의 선한 행동은 계산된 것이며, 전적으로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 심리적 도구는 거짓말, 위선, 기만 등이며, 심지어 자기기만도 들어간다. 행위자 본인이 자신의 행위가 진심이라고 믿을 때 가장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일반적 주장을 스티븐 핑커는 훨씬 더 확장한다. - p164-165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은 곧 과학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할 때가 많다. 이들은 자신의 비판자들이 몰래 창조론을 믿는 자들까지는 아니더라도 향수에 젖은 감상주의자라고 암시한다. 이타주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가 그 창조주와 함께 죽어버렸다는 니체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p167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진보'라는 말로 옮겨간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좌파라는 말도 1789년 프랑스 의회에서 의원들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자리를 몰려서 앉다가 우연히 생겨난 이름이니까. 게다가 좌파와 우파의 여러 차이 중에서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상만큼 크고 깊은 차이도 없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다. 그들은 역사를 기껏해야 머물러 있거나 순환적인 것으로 보며, 아주 나쁜 경우에는 신화 속 황금시대로부터 천천히 쇠퇴해가는 슬픈 이야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 p181


이 때문에 진보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을 해체하는 가운데에서도 루소의 논리는 푸코와는 전혀 다른 톤을 지닌다. 푸코는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의문을(수사적 의문?) 던지는 쪽을 더 좋아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을 내미는 것보다는 그저 슬쩍 암시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어떤 하나의 입장을 가진 독자가 되기보다는 어떤 몽롱한 분위기에 빠진 독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 p193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희화화에는 더 심층적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테르는 비록 당대의 세상에 그득했던 온갖 야만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인물이었지만,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사악해지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그는 《철학사전》에서 말한 바 있다. 만약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병에 걸려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들은 아무 병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구역질 나는 자들이다. 볼테르가 이렇게 바라보았던 이들은 바로 성직자였다. 볼테르의 목적은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수호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보는 기독교의 관점을 공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99


우리 손에 있는 모든 데이터는 사실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희망과 공포라는 필터로 한 번 걸러진 것들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루소가 보는 자연 상태에 따르면 참으로 변태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홉스의 비전에 따르면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 된다.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인간 본성은 야수적인 폭력성에 있으며 인류 스스로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p202 


포스트잇을 떼면서 옮겨적으니, 내가 이 책에서 뭘 좋아했었는지 생각났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도무지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왜인지 음험해보이는 책들에 대해 대차게 씹어주고 있어서 좋아했다. 

푸코와 슈미트, 적과 적 아닌 자로 구분하는 단순한 저작,이거나 억압은 더 교묘하게 변했을 뿐 여전히 어디에나 있다는 몽롱한 저작들. 새 시대의 종교인 과학의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어떤 정치적 입장의 저작들. 

그런데도, 역시 저자는 자신의 지적 배경-정치가 분리되고 종교가 통일된 서구의-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느꼈던 어떤 이질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서구 지식인은 기독교의 전횡에 대항하고 싶지만, 강한 국가권력은 역시 또 거부한다. 제도나 도덕의 목적에 대해 종교에 의지하는 태도가 여전히 드러난다. 저들의 모순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정답이 있는 문제지-기후위기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그러하다-를 앞에 두고 다른 답을 쓰는 사람을 좌파와 우파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진보를 여전히 믿는 것도 같다. 나는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하다,는 표현은 끔찍한데도, 이것이 진보인가는 역시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고, 급하고도 빠르게 세상을 바꿔온 나라에 살면서도 역시 무엇이 진보인지 모르겠다. 풍요가 진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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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9-14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읽는다고 나불거리는 사람을...전 결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잖은 허세로 보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