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여성 - 오리엔탈리즘적 페미니즘을 넘어서
리-시앙 리사 로즌리 지음, 정환희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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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살 무렵에 페미니즘에 경도되었었다. 제약이 많다고 느낀 스무살 여자애가 불만을 토로하는 서양 페미니스트,들의 말들에 신이 났었다. 나도 남자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가지지 않은 몸으로 상대는 더 나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불만의 말들을 했었다. 그러다가, 취업하고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점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에코 페미니즘'그러니까 인도 여성이 쓴 제3세계 페미니즘에 대한 기억에서, 페미니즘이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만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라는 말들을 들으면서, 페미니즘이 발생한 서구철학의 토대가 문제고 구분하는 태도가 오히려 세상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여성이라서, 삐딱한 마음으로 '웃기고 있네, 우리 엄마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라고 반발하던 마음이 이제는 아예 페미니즘 대신 유교나 불교가 필요하다,라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책은, 중국계 미국인 학자가 유교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도시국가 이상이 되어보지 못하는 서구의 사상가들에게 미개하다고, 성차별적이라고 성억압적이라고 품평당하기 일쑤인 자신의 문화적 토양에 대해, 설명하는 말들이다. 뭐 나라면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분별적인 서구철학의 토양에서 자란 이론을 굳이 다층적이고 품이 넓고, 함께 살기 위한 태도로서의 포용적인 동양철학과 융합한다는 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책 속의 많은 말들은 속이 좀 시원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어떠한 시도에서도 우리는 먼저 타자의 '타자성 Otherness'를 최대한 이해하여야 하며,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문화적 가정을 부과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2%


성평등 문제에 관한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서구 윤리 이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지속되고 있다.-3%


'유'가 갖는 의미의 유동성은 광범위한 해석을 허용하며, 더 중요한 점은 '유'의 정체성이 민족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4%


그러나 음양 은유를 서구의 이원적 여성성/남성성과 개념적으로 동일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중국의 상관적correlative 음양 우주론에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부과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중국사회의 성억압의 원인을 오인하게 된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원적으로 보는 서구의 패러다임과 달리, 대립적이지 않으며 상보적인 이원론인 음양은 중국의 성억압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정당화 기능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 5% 


그녀가 보기에 여자는 문학적 형태로 보존된 고대의 지혜에 대해 교육을 받을 때, 비로소 도덕적일 수 있으며 예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 6%


예를 들어 당唐나라 이후 황실 법령에 의해 보호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과부 관행은 배우자에 대한 정절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손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권위를 강조하며 여성들이 자신들의 통합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도였고, [재혼을 권유하는] 부모의 친권보다도 우선시되는 여성 고유의 재량권을 상징한다.- 7%


여성들은 '내'적 영역에서 문자와 붓 대신에 천싸개와 바늘로, 자신과 '우리들의 문화'를 전승할 딸들의 발을 속박시켰다. 이 장의 목적은 이러한 사회적 관행의 '성차별적' 요소들을 어떻게든 얼버무리려는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언급된 관행의 대부분은 [오늘 날] 더 이상 사회적 이상 social ideal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 7%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대담하게도 한 장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학자들에게 있어 유교는 현대적이며 우수한 것으로 상정되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져 폐기되어야 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졌다. - 9%


유교에 대한 울프의 인식에서 폄하적인 어조는 분명하다. 그녀에게 있어, 유교 - 구 중국의 쓸모없는 이데올로기- 는 가부장제 및 여성 혐오의 동의어이다. 페미니스트의 저작에서 반유가적인 정서는 매우 고조되어 있다. - 10%


예수회의 Confucianism이란 용어 발명은, 서양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유 개념을 단순화하고 세속화하였다. - 10%


서양의 분석적 전통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이 보기에, 이렇게 유의 정의를 동음이의어의 연관성에서 파악하려는 것은 합리적인 문자적 해석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기이해보일 것이다. - 11%


한자를 식별하는 데 있어 주어진 단어의 의미는 개별적인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정의에서 오기보다는 항상 단어 또는 구 句의 군집에서 연관하여 유래한다. - 12%


앵거스 그레이엄 A. C. Graham이 말하듯 '유'의 강점은 고대의 문화를 보존하는 자로서 그들이 중국 문명의 수호자로 여겨졌다는 것이고, 따라서 '유'는 개인이 중국적 문화 정체성을 통합하는데 중요한 핵심 요소가 되었다. - 15%


정치 영역에서 과거시험은 두 가지 효과를 갖는다. 첫 번째, 공정한 방식의 시험에 참여함으로 문화 엘리트의 특권적 지위는 객관적으로 승인된다. 두 번째, 문화 엘리트의 지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통치상의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합법성을 획득한다. - 17%


'유'는 무엇보다도 성인의 문명 질서라는 문화적 이념을 의미했다. '유'가 일종의 문화에 근거한 범주라는 점은, 여진족의 금 왕조가 유학을 문명질서로 채택했음에도 동시에 [한족들은 유학을 통해]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18%


다시 말해서 '유'는 문화 또는 문명적 이상의 수호자라 할 수 있다. - 19%


중국세계에서 학문과 문장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 20%


요컨대, 예수회가 '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중국 문인들에게 '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은 라이어널 젠슨이 말했듯이 '유'는 실제로 '다층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유'는 그 시대에 멈춰버린 단일하고 고정된 교리를 의미하지도, 또 한족의 문인에게 국한된 민족적 관습 역시 아니다. 대신에 최소한의 수준에서 '유'는 경전 학습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상징한다. 첫째, '성현'의 학문이다(따라서 '유'는 중국의 고급문화를 표현한다). 둘째, 학식 있는 '유'의 지위와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을 전제하는, 공자에 대한 국가적 숭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유'는 유가 문인과 국가의 복잡한 관계를 함의한다.) 셋째, 부자, 부부, 형제의 계측적 친족 관계에 근거하여 통치자와 백성들 사이의 상호 돌봄 및 의무를 강조하는 도덕정치의 문명적 이념이다(따라서 '유'는 가족-국가 예법의 은유를 표명한다). 넷째, 신과 인간, 자연계의 상관관계에 대한 공유된 가정으로, 조상이 신과 같이 추앙받으며, 천지인의 조화로운 일체를 구현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으로 여긴다(따라서 '유'는 유기적인 우주론과 내재적인 종교적 감성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자기 수양이라는 평생 과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유덕한 자아는 의례적 공동체의 인간관계망 내부에 위치하며, 그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기에 효는 인간다움에 대한 도덕적 표현이 된다(그러므로 '유'는 덕 윤리를 나타낸다). - 21%


우선, 가장 기본적인 언어학적 수준으로 볼 때 한자의 '人(인)'은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이는 성중립적이다. 즉 '남성'과 일반적인 '인간'은 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동일시되지 않는다. - 23%


서구에서 모든 인간관계보다도 신[하느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고, 모든 인간관계들은 일차적으로 신과 합일되기 위한 초월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덕 수양의 최고의 경지로서 인은 오직 인간관계에서만 성취되고 발전될 수 있다. - 24%


인간은 관계 안에서만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타자 없이는 나란 존재도 없다. - 25%


가족은 공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등의 천하를 질서 정연하게 하는 근간으로 이해된다. - 25%


그리고 유교윤리학에선 사적 자아와 반대되는 절대적 타자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상호 호혜성과 의사소통력은 인간관계 구조의 그 기초가 된다. - 26%


남녀라는 용어가 구별적인 성역할 관계를 함의하여 인간세계에만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모빈과 자웅이란 용어는 생식기로 암컷과 수컷을 구별하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세계에만 사용된다. 순자가 보기에 남녀를 사회적인 역할과 의무에 따라 구별한다는 것은 인류의 지표이다. - 28%


친족적 역할을 넘어 '여성'에 대한 규범적인 설명을 얻으려는 외부 관찰자의 시도는 현지 정보원이 계속 그 주제를 구체적인 가족, 친족의 역할을 묻는 것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좌절되었다. 하지만 중국 사회에서 여성은 오직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여성'일 수 있다. - 29%


동중서는 정확하게 "양 그 자체만으로 낳을 수가 없고, 음 그 자체만으로 낳을 수 없다. 음과 양이 하늘과 땅에 함께 참여하여야 삶이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 40%


양은 전적으로 남성이 아니며 음은 전적으로 여성이 아니다. - 40%


퍼스는 "『황제내경』에서 의학적으로 표준적인 몸은 음과 양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양성적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의학 이론은 퍼스가 고전 유럽 의학의 '단성'모델이라고 부른 것을 거부한다. - 41%


건강한 몸은 음과 양이 균형 잡힌 몸이지,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몸이 아니다. - 41%


열정, 육체, 내재와 같이 여성적인 것들에 비해 이성, 마음, 초월과 같이 남성과 관련된 것들이 갖는 특권적 지위는 페미니스트의 해석에 따르면 서구에서의 성억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음-양 이항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사회적 자원과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없다. 음-양과 위계적 젠더 관계의 상관관계만으로는 왜 중국 여성이 평가 절하되었는지를 대표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 41%


초기의 용례에서 내-외는 특정한 성별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주로 질서정연한 황실과 혼란스러운 외부 세계 사이의 공간적 경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경계는 결국 문명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의 경계가 된다. - 45%


『논어』의 공자가 말하길,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질서를 세우면, 백성들이 형벌만 면하려 하고 부끄러워함이 없을 것이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선에 이를 것이다." - 45%


최소한의 수준에서 예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적절한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 46%


내-외 이항은 두 개의 상충되고 호환되지 않는 영역을 표시하는 절대적인 공간적 경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내림차순의 동심원에서 '중심과 주변부' 혹은 로저 에임스가 말한 '중심과 장' 사이의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경계에 가깝다. - 49%


순자는 계속해서 구별짓기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무리지어 살지 않을 수 없으니, 무리지어 살면서 구분이 없으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어지러워지며 어지러우면 곤궁해진다." 남자와 여자를 외와 내라는 두 개의 다른 젠더적 영역으로 구별하는 그 행위는 질서 있고 번영하며 문명화된 사회의 시작점이다. - 51%


내와 외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며 상호적이므로, 여성이 '내'에서 하는 것은 '외'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와 그 구심이 되는 아내의 미덕이 병치된 것은 『맹자』의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맹자는 나라의 변화가 두 여성의 공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화주와 기량의 처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애절하게 곡하였기에 나라의 풍속을 변하게 하였다. 안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서 가족과 국가, 또는 내와 외는 모순적인 영역이 아니라 관계적인 영역이다. - 53%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중국에서는 서구와 상응하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국가와 상업, 국가와 문인의 분리가 명확하게 정의되고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53%


당파에 대항하는 유교적 정치 이념은 역시 『서경』「홍범」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에선 정치적 결속에 있어 당파의 부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 54%


게다가 중국 세계에서 가족, 친족적 영역 밖의 '여성'범주는 실재하지 않는다. - 54%


중국 젠더학에서 친족 위계와 젠더 격차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측면에 걸쳐 여성이 남성에 획일적으로 예속되어 있다고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다. 대신에 젠더 격차는 친족 관계라는 복잡한 망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친족 관계에서 젠더 격차는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부분일 뿐이다. 성별은 그 자체로 인생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할 수 없다. - 54%


삼종지도는 종종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선천적 열등성이나 예속의 표식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중국사회의 삼종지도는 여성의 친족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예속적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 종종 '삼중의 종속 혹은 예속'으로 번역되곤 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삶의 세 단계 모두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삼종지도를 '삼중의 종속'으로 해석하는 데 지지하는 사람들은 중국 사회의 어머니가 갖는 권위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 역사적 현실에서 어머니는 어떠한 형태나 형식으로든 아들에게 종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어머니는, 특히 과부가 되면 아들이 황제라 할지라도, 아들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 55%


황실에서 태후의 섭정이 제도화됨으로써 모친의 권위가 더욱더 분명해졌다. - 55%


왕조에 따라 부모가 불효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정도는 상이하였지만, 부모가 가정이나 황실에서 불효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와 당사자의 합의 없이도 아들의 배우자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는 어느 왕조에서나 항상 인정되었다. - 56%


아내는 남편과 같이 [동등하게} 존중받는데, 그녀는 남편이 가진 것과 동일한 특권과 지위를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57%


여성의 과거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하여 여성의 역사를 끊임없이 재창조해야 하는 서구와는 달리, 중국의 열녀 전통은 전한의 궁중역사가인 유향으로부터 최후의 왕조인 청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역사적 기억들'을 만들었다. - 58%


여성의 덕행과 악행은 집안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간주되었다. - 58%


그러자 서오는 모임에서 사용할 충분한 초를 가져올 수 없던 것은 자신의 가난함 때문이고, 그러므로 항상 일찍 오거나 늦게까지 남아 그 자리를 청소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먼 구석에 앉았다고 변론하였다. 게다가 서오가 변론하였듯이, 방에 한 사람이 더 있다 하더라도 빛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 59%


"집안이 가난해야 현명한 아내를 구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좋은 신하를 구한다." - 61%


리사 라팔스가 언급한 것처럼 명말청초의 유덕한 여성을 표상하는데 인지나 변통과 같은 지적인 덕목이 생략되고 효행이나 정절로 모티브가 바뀐 것은, 의도적인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순전히 비극적 내용이 담긴 삽화가 주는 감정적 호소력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 있다. - 62%


문文(문화의 방식)은 무武(힘의 방식)와 반대로 남성만의 특권이다. 캠 루이와 루이스 에드워드는 문과 무의 중국적 남성성에 대한 그들의 이론적 작업에서 분명하게 말하길, 서구와 달리 [중국에서] 무(무예)는 '남성성'의 표식이 아니다. 문(문명적이고 세련된 존재방식)과 비교해볼 때, 무는 말하자면 남성성의 열등한 형태이다. - 76%


명말청초에 '내'영역에서 과부 추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외'영역에서 정치적 충성이 강조된 것과 얽혀 있다. - 77%


다시 말하자면, 재혼 그 자체가 반드시 여성에게 있어 어떠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78%


따라서 정이의 과부정절에 대한 진술은 절대적인 교리로 이해되기보다는 엘리트의 덕 윤리 담론, 즉 규제적인 이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과부가 재혼하게 되면 곧 정절을 잃는다는 정이의 비유는 유덕한 아내와 충성스러운 신하 사이의 전통적인 은유를 반영한다. - 79%


그러나 오직 정절을 지킨 과부의 집안만이 노역에서 면제를 받았다. - 80%


과부의 자결과 명나라 충신의 반청 운동이 연관되었기에, 실제로 청나라 초기에 과부의 자결은 청 조정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지되었다. - 80%


과부 관행은 실실적으로 서민의 부인과 그 가족들이 지역 사회에서 사회적 영예를 획득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황실 조정이 공인한 대안적인 경로였다. - 81%


가난 때문에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 줄곧 용인되었던 사회에서 과부의 강제적인 재혼을 금지하는 청나라의 법률은 사실상 연장자의 뜻에 반하는 연소자의 불복종을 승인하였다. - 81%


과부 재혼은 과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선 가족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다. 새로 결혼한 과부는 연장자 서열의 원리가 적용되는 친족 위계 구조에서 새댁이라는 밑바닥 지위를 맡아야 한다. - 82%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에 체현된 신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제3세계 여성은 종종 서구의 백인 자매에게서 이론화되고 구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며 차례로 서구의 백인 여성은 어떤 지역적 전통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 간주된다. - 82%


따라서 손상되고, 쓸모없는, 꽁꽁 감싸진 한 쌍의 발은 가문의 부유함을 상징하였는데, 전족을 한다는 것은 가계 경제에서 여성 구성원의 나태함 정도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형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83%


그것은 또한 지위의 표식이었으며, 사회적 인정의 표식이었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안의 남자들은 문학을 배울 수 없었고, 여성들은 전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84%


요컨대, 유교 세계에서 문학과 예절의 학습은 교양 있고 도덕적인 존재를 향한, 평생 이루어져야 할 자기 수양 과정의 기점이다. - 84%


그러나 서구가 윤리적 이론의 유일한 공급자이며 나머지 세계는 해결되길 기다리는 도덕적 문제라는 관점 아래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이 양립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페미니즘을 가장하여 인종적인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 87%


그러나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또한 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그 주제와 그 주제의 주체들을 지워버린다.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 사이에서 발견되는 주변화 패턴이 초국가적 페미니스트 담론에서도 동일하게 영속되는데, '서구 여성'의 주체성과 근대성은 전통에 묶인 '제3세계 여성'의 희생과 대조되고 있다. - 89%


사회적 관계 속에 자기 자신을 정위시키지 않으면 사람은 실존적 존재가 되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완전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실존적] 출발점은 철저히 유교적인데, 그것은 유교의 성취되는 인격성과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점에 따르면 사람은 오직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역할-가족 관계 역할로부터 시작하는-로 실현될 수 있는 특정한 사회적 덕목을 체화했을 때에만 '사람'일 수 있다. - 90%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데 있어 어떠한 자격조건이 없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거부한다면,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은 반드시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 자아의 바로 그 '본질'로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오직 관계-내-존재일 때만 사람이다.  - 90%


효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인간다움을 향하는 관문이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돌봄은 인간이 되는 출발점이며, 그러한 점이 생략되고선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한 마디로 유교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을 자격이란 없다. - 90%


부모와 자식 사이의 타고난 관계에서 발견되는 효심을 이방인에게까지 확장함으로써 추상적인 사람에 대한 단순한 존중으로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진정한 돌봄이 성취되고 '보편화'될 수 있다. - 91%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맺는 권역이 확대될수록 자아도 확대된다. - 91%


유교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위계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 호혜적이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자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 권위의 정당성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 대해 실천하는 호혜적인 돌봄에 달려 있다. - 92%


나는 페미니스트이자 중국인으로서 그러한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여성이 몰역사적이고 몰문화적으로 있는 이론적 공간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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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2-01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합리화와 변명하는 부류들을 정말 싫어하는데, 알라딘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집단들을 보면 그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려 하는건 좋은데 너무 그러면 같잖아 보일수 있다는 점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별족 2024-02-02 06:5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세상 모든 글이 ‘자기합리화‘와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_-;;;;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뭐 이런 식.
서구식 사고방식은 명쾌하고, 또 대결에서 이겼기 때문에, 젊은이가 혹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가르치려고 하는 거고 ^^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이론은 말도 안 된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젊은이들이랑 싸우는 건, 뉴턴역학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랑 같은 거라서, 안타까우니까요.
내가 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런가, 뭘까, 갸우뚱하고 물러서면 될 일인데.
스스로의 옳음을 명백하게 믿는 사람들은, 이걸 관철시키려고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처럼 점점 더 강경하게 말하는 거 같습니다. 그럼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갇혀 버리는데요.

추풍오장원 2024-02-02 07:55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사람을 어떤 논리와 근거로 여성혐오주의자로 낙인찍는걸까요.
자기가 보기 불편하거나 거슬린다고 발화 자체를 차단하고 싶은가 봅니다.

별족 2024-02-04 07:33   좋아요 1 | URL
사실, 입 닫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다시 한 번 더 말하거나 그러는 거죠. 그런데, 동조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힘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과격해지는 거죠.
그런 면에서 파시즘이나 나치즘이라고 조롱당하게도 되고요. 여성들이 고양시키는 문화,가 논리나 합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휩쓸리게 되는 것도 같아요.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 한자경의 일체유심조 강의
한자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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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포스트잇이 남은 이 책을 찾았다. 심층마음의 연구를 이미 좋게 읽은 다음이라, 같은 저자의 책을 찾아 읽은 것이다.

책에 포스트잇을 붙이면, 그 부분을 여기 옮겨적고 떼어내기 때문에 의아했다. 21년 5월에는 아직 그러지 않았나 보다. 너무 좋은 책은 아직 남기지 않을 때, 책에 붙인 포스트잇을 떼어놓지 않을 때, 였나 보다. 책이 이래 저래 잘 읽히지 않는 날들이라 오래 전 읽은 책에 남겨진 포스트잇을 떼어내며 남긴다. 

모든 책을 적어놓은 수첩에는,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 게 가능한가 싶은 이야기들,이라고 남겼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아는가, 모르는가, 같은 이야기다. 사라졌을 때에야 하는 늦은 자각, 너무 가까워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경계를 알아내려고 멀어지는 태도, 이미 어디에나 있고,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개 여성과 남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여기지만, 사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통해 서로가 있는 상즉의 존재입니다. 나아가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상입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있고,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있는 것이지요. 20세기 서양 분석심리학자 융은 여성 무의식 안의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부르고, 남성 무의식 안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불렀습니다. 음과 양의 상입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p62


반면 신비주의를 제외하면, 서양철학에서 일一은 개체들 내의 성性이 아니라 개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神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현대과학에 와서야 비로소 '일즉다 다즉일'이 주장됩니다. 일즉다 다즉일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프랙탈 무늬'입니다. 프랙탈 무늬를 보면, 전체의 무늬가 각 부분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지요. 그리고 그 부분의 부분도 다시 또 전체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각 부분이 다이면서 그대로 일이 되는 것이지요. '홀로그램 필름'에서도 일즉다 다즉일이 나타납니다. 일반 필름은 그 필름 전체의 일부만을 잘라서 현상하면 그 부분만 나타나지요. 그런데 홀로그램 필름의 경우는 전체의 일부분만을 잘라서 투사해도 그것으로부터 다시 전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부분이 그대로 전체가 되는 것이지요. -p77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행위자 내지 실체를 묻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언어구조 내지 사유구조가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구조는 '주어-술어' 형식인 'S는 P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 형식이 바로 주어-술어의 구조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언어구조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 또한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즉 세계가 '주어-술어' 형식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의 관계로 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빨간색을 보면 그 빨간색을 속성으로 갖는 '빨간 사물'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일으키는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물리적 속성에 대해 물리적 실체를 심리적 속성에 대해 심리적 실체를 설정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유를 실체론적 사유라고 합니다.-p84-85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우주의 본질,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요. 모두가 근원에서 하나이며 불이不二라는 것,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명이기에 '나는 나다'라는 아집我執을 갖고, 그 집착을 따라 업을 지으며, 또 그 업력에 의해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무명 이후의 11개 항이 모두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p90


그런데 유식은 그런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대해, 그래도 식 자체, 우리의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헝겊을 물들일 때 본래 헝겊 자체는 무색이고, 종이에 향수를 스며들게 할 때 본래 종이 자체가 무향인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번뇌에 물들어 있어도, 그 번뇌 있음을 아는 그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본래 마음 본심本心, 진짜 마음 眞心 또는 선한 마음 良心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나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분명 깨끗하고 선한 마음이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p189


아뢰야식이 무한 무외의 마음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마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마음은 우리가 아는 전체이고, 우리는 그 마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에게 전체이기에, 우리는 그 마음을 마음으로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p219-220


본각이면서도 불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요?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그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있지요.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으면, 그 사랑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 사랑이 끝나야지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고 있어야지, 그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고 있되, 다만 자신이 그 사랑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일 뿐이지요. -p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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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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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문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문자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은 순간들에 그렇지 문자란 살아 움직이고 언제나 변화하지,라고 생각했다. 

뼈 위에 새겨지던 문자가, 청동기 위에 남기던 문자가, 대나무 위에, 나무판 위에서 비단 위에 종이 위에 옮겨지고, 지배계층의 제사와 전쟁에 사용되던 문자가 모두에게 사용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들이 문자에 남아있는지 이야기한다. 

종교적인 의미들로 형상을 묘사하던 한자의 초기 모습이 어떻게 간략화되었고 변화되었고, 다시 소리를 의미하는 방식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음을 듣는다. 오래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축소된 형상 가운데 추정하고, 그 때 모두들 알아차린 그 형상이 지금은 그저 한자로만 남아 있다. 간략화되고, 변화하고, 피와 살이 튀던 원형은 은유로 남고, 사람들의 삶 속에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모습은 고대의 제사장 이야기였다가, 춘추전국의 전쟁이야기였다가, 발굴되는 죽간들로 한 번씩 점프하는 연구의 이야기였다가, 서체로 묘사되는 어떤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재미있다. 


문자를 사용했던 500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에서 볼 때 너무나 찰나이기 때문에, 뇌에 문자를 읽기에 적합한 구조가 만들어질 여유가 없었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동안 수렵채집자로서 생존에 적합한 구조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글 읽는 뇌』의 저자 스타니슬라스 드앤은 인간의 뇌와 문자의 관계를 간명한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생존하도록 설계된 뇌를 이용하여 셰익스피어를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 16%


그러나 문자를 배운 도시인들은 이런 자연의 신호 앞에 까막눈이 되어버린다. 한번 문자 상자를 활성화시킨 사람은 문맹자가 쉽게 구별해내는 자연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a와 A가 같은 문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맹자를 무시하지만, 그들은 바로 눈앞에 찍힌 맹수의 발자국도 구별하지 못해 곧 죽을 운명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는 우리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문자를 얻은 인간은 생존에 필요했던 섬세한 시각 분별 능력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17%


새것을 만들 때는 아무런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 없다. 익숙한 무언가를 기점으로 삼아 그곳에서 상상을 시작한다. 창의성이란 아무런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에 축적된 뇌의 영역 간 새로운 연결을 통해 생겨난다. - 32%


『한비자』의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에 얽힌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제나라 왕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제나라 왕이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개와 말이 가장 어렵지요."

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리기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인가?" 

화가가 대답했다. "귀신 따위를 그리기가 가장 쉽지요. 개나 말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면 눈앞에 나타나기에 아무렇게나 추측하여 그릴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귀신은 형태가 없으며 종을 쳐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그리기 쉬운 것입니다." - 『한비자』「외저설좌상(外儲設左上)」- 31%


하지만 음악을 통한 이런 동질화는 유가가 강조하는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예기』에서 『악경』의 나머지 부분을 복원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렇게 차별적인 예를 구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음악의 속성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서로를 같아지게 하는 것이고, 예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 33%


주나라 초기 천의 개념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직 인격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지만, 상제는 더 이상 마음대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상나라의 멸망은 신의 변심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왕이 절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덕적인 기준을 지키지 못해 자초한 것이다. 하늘의 결정 기준은 하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이 세상 인간들의 행위에 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스스로 도덕과 원칙을 지킨다면 하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45%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족이라는 범주는 유전적 계통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비과학적 범주이다. 그렇다면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할 유일한 요소는 한자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온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뿐이다. - 47%


여기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 진행되지 않았고, 철학자에 의해 이성과 감성, 진리와 가상을 구분하는 이중 세계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이오니아학파 철학에서 진리는 도덕이나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문자의보급이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 49%


높다는 개념이 이렇게 추상적인 의미까지 확장된 것은 인간의 거의 모든 언어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높다(高, high)라는 단어는 '높은 계급[고관(高官, high-class)]'에 있는 '고귀한 분(高貴, Highness)'의 '고결하고(高潔, high-souled)' '숭고한(崇高, high-minded)'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추상개념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감각을 빌려 표현된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를 개념 은유라는 틀로 설명한다, - 50%


공자는 주공의 세계관을 이상으로 따르며, 상나라의 주술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부정한다. 주나라 초기 사회야말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질서로서 예를 강조하고, 외형적 겉치레와 화려한 의식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덕을 중요시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62%


그런데 중국의 청동기 시대에 청동제 생산도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역사 발전 단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유물사관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물사관은 기술의 3단계 발전 순서를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인류가 진보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중국 청동기 시대의 독자적인 특수성을 강조했던 뇌해종과 진몽가는 한 때 유물사관에 반하는 반혁명 우파로 몰려 학술 활동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 64%


이 지역 사람들은 황하라는 큰 강을 끼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물이 부족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물이 넘쳐나는 역설적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옛날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홍수 방지용 제방 공사를 추진할 막강한 권력자의 출현을 반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이 등장했던 곳이 바로 산동에 위치한 제나라와 진나라였다.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기후 환경적 요소는 이 지역의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 69%


그렇기 때문에 전통 시기 지식인은 유가 사상가로서 관리가 되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소명이었지만, 자유분방한 노장의 예술적 상상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속된 사람으로 천시받기도 했다. 유(有)의 철학으로서 유가와 무(無)의 철학으로서 노장이라는 두 사상이 지식인의 마음 속에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 72%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가 강국이 된 것은 급진적 법가 사상가 상앙이 기원전 356년 무렵 시행했던 일련의 정책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진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조직을 갖춘 제국으로 발전했다. 대규모 종족 조직을 상호 감시가 가능한 소규모 가족 단위로 재조정하고, 위법한 자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세습적 지위나 특권은 점차 사라졌고 국가에서 인정받은 공로가 있어야만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 75%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오래된 자형인 소전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당시 통용되는 예서체 글자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끼워 맞춘 것이다. 이런 문자 왜곡은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정서에 해악을 끼쳤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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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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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에 책을 구해 읽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외삼촌이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건네는 노트와 같은 구성이다. 소년이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고, 그 사건들 다음에 외삼촌이 소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사랑의 학교'가 생각났다. 

영화를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자국에 대한 변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로 읽으니까,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지만, 부유하고, 그 부유함의 배경은 없다. 193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부유한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 사이에서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에게 어른이 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데다가 식민지 조선인이었을 거라서 걸리는 감정들이 생긴다.

아이에게, 얼마나 정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닥치고, 어른이 가지는 모순된 감정들이 닥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야기 가운데 아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소설의 단순하고 밝은 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가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호한답시고, 아이들에게 다른 미래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이 정도 이야기조차 금서라고 막았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쁘지 않은 세상은 가능한가 생각하는 거다. 잔인함을 적당히 막아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톤 다운시킨 이야기 가운데, 삶의 잔인함을 직시할 수도 없는 아이들을 키웠던가 회의하기도 하는 거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아이들도 느낄 지 궁금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부모인 내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렇게만 해도 돼. 하지만 지금 네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단다. 중요한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야. 네 눈이 무엇에서 사람의 훌륭함을 찾고 있는지, 그것을 네 영혼이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기타미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누가 뭐래도"하는 오기가 필요하단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네 엄마가 바라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단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될 뿐 네 자신에게 떳떳한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한단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은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는 하지.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코페르,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마음이 감동받을 때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렴.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해 -p52~53, 용감한 친구


어머니는 코페르를 보지 않고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엄마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엄마가 겪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많이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인생에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단순히 그 일만 놓고 본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잘못했다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후회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경험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너도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은 분명히 보고 계실 거야."-p215~216, 돌층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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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를 찾고 너를 만나: 유학자와 함께 일상에서 철학하기
금장태 지음 / 바오로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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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학에 호감이 있고, 기독교에는 편견이 있다. 

유학이 꽤나 이성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의심이 들 때는 꼭 물을 것을 생각하고(사자소학의 구사九思 중)-, 이렇게 이성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 를 구해 읽기도 했었다. 나의 호기심에는 먼저 읽은 책보다는 이 책이 더 맞는 거 같다. 

영성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 설명을 듣다가, 그래서 그게 뭔데?라는 질문이 닥치는 순간 조용히 눈을 들여다보면서 해야 하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글을 쓰는 동안 필자의 생각이 어둡고 이해도 얕아 벙어리가 꿈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여 말하는 사람으로서 답답함이 심했으니, 듣는 사람까지 답답하게 할까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4%(머리말)


따라서 내가 '나'에게 어떤 나를 바라고 있는지, '나'를 어떤 품격의 존재로 알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존재로서 숙명적인 한계를 알라는 말도 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처지나 분수를 알라는 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결코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나'에는 이미 굳으져 형체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이 지금 형성되는 도중이고, 언제 어디로 얼마나 큰 힘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활화산같은 존재다. -5%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사랑할 수 있으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조국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도리를 따져 가르쳐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를 저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맹자 7-10:1 고 했다.-7% (자기를 사랑해야)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막힌 다음에 분발하며, 안색에 나타나고 소리로 터져 나온 다음에 깨닫는다. 나라 안에는 법도 있는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라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환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안락 속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맹자 12-15:1 - 19% (편안할 때 근심을 잊지 말아야)


자신의 기질이 지닌 문제점을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말은, 고칠 수 있는 것도 자신이요 고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자전거 같은 사물과 인간존재가 다른 점이다.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동안은 비록 고장이 난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자포자기'는 스스로 고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는 자기 파괴요 자기 부정인 것이다. ~ 하늘이 인간의 가능성을 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늘이 주신 가능성을 끊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자포자기'란 바로 인간이 스스로 하늘을 끊은 '자절自絶'이라 하겠다.-26~27% (자포자기와 자절)


항상하면 긴장을 풀고 안심할 수 있으니, 그 편안함을 누구나 바란다. 변화하면 긴장해야 하고 불안해지니, 그 불편함을 누구나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변화는 숙명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항상함이란 변화가 없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 변화를 조종할 수 있는 원리나 법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이 영원불변의 존재라는 말도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를 다 포함하면서 유지해가는 변함없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항상한 성품과 지조가 있다는 것도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에서 그 중심을 지속적으로 지켜주는 힘이라 하겠다.-27% (항상[常]과 변화[變])


우리의 몸이 활동하는 것은 그 바탕에 고요함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니, 항상 활동[動]과 고요함[靜]은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일하고 쉬는 것도 어느 한 쪽이 결핍되면 다른 쪽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만 하고 쉴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의 바탕이 허약해져서 언제 병들고 주저앉을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쉬기만 하고 일하지 않으면 그 휴식은 쓸모가 없어 저절로 녹슬어버릴 것이다.-30%(휴식에서 얻는 활력)


문제는 어떻게 해야 '덕'을 쌓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상'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서도 전체를 대표하는 덕이 '인 仁'인데, 정약용은 '인 仁'이라는 글자가 '사람[人]'과 '둘[二]'을 뜻하는 두 글자가 결합된 것임을 주목하여, 두 사람 사이에 행해야 할 도리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덕인 '인'은 바로 나와 너 두 사람 사이의 도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결국 사람답게 사는 도리는 내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33% (사람답게 사는 도리)


그래서 대중을 좀 더 쉽게 이끌어 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깊은 산골에서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바위에 막히면 잠시 기다렸다가 가득 차면 바위를 넘어 다시 흘러간다는 점진적 방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없을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넓혀간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그 사랑이 이웃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사랑을 넓혀가고 채워과는 확충擴充의 방법이다.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바깥으로 흘러 넓어질 때 인간다움의 덕도 커지고, 사랑이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 때 인간다움의 가치도 잃게 된다.-34% (사람답게 사는 도리)


예절이 질서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법률은 질서의 방어선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도 법률의 한계선조차 어기는 사람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으니, 이들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이 사회의 아름다운 풍속과 질서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36%(예절과 준법정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방에서 많은 은혜를 입는 것인데 감사하고 보답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원망은 너무 쉽게 분출된다. 조금만 섭섭하거나 불편과 손해를 입으면 격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이 반복되거나 심화되면 원한을 품고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더라도 남에 대한 원한이 맺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은혜를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 41% (은혜와 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대조되는 양상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유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신이야 부모에게서 받지만 생명의 핵심인 영혼은 하느님이 각자에게 부여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이고, 육신은 영혼의 밑받침 역할을 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곧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확산되어, 조상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나의 위치는 더욱 뚜렷해졌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다. 법률은 가족이 연좌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조상의 명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유교문화는 대대로 이어져 온 연속선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개인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사슬 가운데 하나의 고리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고리로서는 완성된 개체이지만 전체의 사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본다. - 47%(조상과 자손)


율곡은 어두움의 병과 어지러움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이치를 궁구하여 선을 밝힐 것 窮理以明善'과 '의지를 독실히 하여 기질을 통솔할 것 篤志以帥氣'을 제시하고, 나아가 '심성을 배양하여 참됨을 보존할 것 涵養以存誠'과 '성찰하여 거짓됨을 제거할 것 省察以去僞'의 네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좀 더 쉽게 설명하여, "게으른 것이 병이 됨을 알면 부지런하고 독실함으로써 치료하며, 욕심이 병이 됨을 알면 이치를 따름으로써 치료하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지 못함이 병이 됨을 알면 엄숙하고 장중함으로써 치료하며,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짐이 병이 됨을 알면 한결같이 집중함으로써 치료하는 것이다. 병이 비록 나에게 있지만 약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 [贈洪㽒(錫胤)說]고 했다. 마음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면 스스로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95%(마음의 병과 치유법)


그러나 동시에 하늘은 인간을 감시하며 인간의 악에 재앙과 질병을 내리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공자는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한다 畏天命"[논어]16-8라 하여, 군자가 천명을 두려워하도록 강조했고,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天喪予"[논어]11-9라 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고 나를 알아주신다고 믿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은 언제 나를 버리고 죄 줄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다. 그만큼 하늘이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대로 나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믿고 의지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더욱 절박한 것은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 99%(하늘을 우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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