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보고 싶대서 보러 갔다.
나는 양이 늑대랑 우정을 나누는 것도 싫어하고(https://blog.aladin.co.kr/hahayo/5025827), 주토피아도 싫어하는데(https://blog.aladin.co.kr/hahayo/8604003), 여기서는 물이 불이랑 사귄다. 좋을 리가 없다.
사랑은 생존 다음에나 누리는 건데, 이야기를 만드는 한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너무 당연시하는 문제가 있다. 물이 불이랑 만나면 물이 증발하든, 불이 꺼지든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판에 사랑이라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답없는 존재들이다.
코코에서도 드러나는 문화창작자의 우월감(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7267949)가족을 떠나는 존재들의 묘사,는 역시 서구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하여, 이민자 정체성,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아들의 절을 받지 않는 엠버의 할아버지같은 사람인 거다.
파친코를 볼 때도, 엘리멘탈을 볼 때도, 서구인의 비대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 한국계임을 드러내어 스스로를 파는 이민 2-3세대에 대한 거리감이 생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2-3세대야, 뭐 미국사람이지 한국계라는 게 의미가 있어?라고 말하더라. 뭐, 나는 2-3세대가 가지는 묘한 심사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외로움이나 고립을 부풀려서 생각하기 마련인 십대시절을 지나고, 성인이 되어 부모가 떠나온 자신의 뿌리가 지금 자신에 속한 산업(문화지)에서 각광받고 있는 걸 보는 건 어떤 마음일까, 싶은 거다. 여기가 얼마나 고 레벨의 경쟁사회인지는 모르면서, 부모가 떠나온 세상의 어떤 걸 들어 자신을 팔려고 한다. 미국인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한국계,라고 부르겠지, 싶다. 선택하지 않은 이주라서 피해의식이 드러나 보인다.
아이들이 재밌다고 했으니, 뭐, 나는 이제 너무 어른인가, 생각하고.
구름이 내리고 홀쭉해졌던 비행선이 다시 구름을 태우고 빵빵해지는 게 좋았다고 해서, 뭐 그럼 됐다, 싶다.
나는, 디즈니와 결합한 픽사가 유머감각을 잃었다고, 지나친 은유가운데, 대책없는 이야기 가운데, 겨울왕국에서 멋지게 비튼 어떤 클리쉐들이 다시 등장한다. 사랑이 전부인 양 키스로 마치고,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난다. 뒤에 꼬맹이들은 울었다는데, 다시 살아나다니.
음, 조만간 디즈니는 양치기 소년처럼 아무도 울리지 못하는 이야기나 만들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