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으면서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언니와 여동생과 남편과 명절에 모여서 회사에 싫은 사람 흉을 볼 때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안 된다던 아빠, 데모하고 뉴스에 목청을 높이는 나에게 정치란 네모난 그릇에 둥근 국자로 물을 푸는 것 같은 거라던 아빠 생각이 났다. 언니랑 싸우고, '요즘 사람들은 돈만 주면 뭐든 시키려고 한다'며 화를 내던 아빠, 여동생이 배가 불러 결혼식을 한다고 동네 창피하다던 아빠 생각이 났다. 태어난 동네에서 초등학교 동창인 엄마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아빠 생각이 났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대차이가 나고, 가끔 어떻게 설명하지, 싶은 순간들에 아빠와 싸우던 내가 겹친다. 이제 나도 아빠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어른이 된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만하게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래, 나도 안다,고 건성으로 흘려들을 말이나 하고 있다. 

  

이야기 속의 화자는 열 두 살에 이미 죽은 아이인데, 아이가 묘사하는 할아버지가 아빠 같았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외부적으로 부여하지 않았어도 권위를 가진, 작은 촌 동네의 글을 아는 사람이다. 거대한 국가의 권위가 작은 마을까지 미치지 못할 때에 사람 사이의 문제에 대해 청하여 듣는 사람, 선생들이 자리를 비운 학교에서 글자를 가르치는 사람. 그러고도 자신의 아들들 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는 그런 할아버지가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닫는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걸 과연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무섭다. 


자오더취안에게는 자오씨우친 같은 담력과 기개가 없었다. 원래 사내들은 여자들 같은 담력과 기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누리끼리했고, 위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모양새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인 같았다. -28%(p372~373)


"딩 선생님, 선생님께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무가 다 베어져버리면 마을이 마을 같지 않을 거예요. 저는 관을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실 저는 죽기 전에 집사람에게 붉은 비단 저고리를 주고 싶었어요. 이 일은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에게 약속한 일이거든요. 사람이 죽고 나면 관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을 나무가 전부 베어져버리는데 말입니다." - 56%(p 738-739)


그녀는 눈빛으로 삼촌을 압박했다. 삼촌이 목을 들이밀기만 하면 자신도 곧장 밧줄 안으로 목을 들이밀 작정이었다. 상황은 이미 죽음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죽음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 삼촌은 얼굴에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아주 못된 웃음, 장난기 섞인 웃음이었다. 삼촌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정 가고 싶으면 링링이 먼저 가. 나는 더 살아야겠어." -70%(p924-925)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쓸 만큼만 있으면 되지 돈이 이렇게 많아서 어디에 다 쓸꼬?"

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열병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89%(p118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4-12-07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신약에 대한 기대감으로 공연을 준비한 마샹린과 아내에게 선물할 붉은 비단 저고리를 훔친 자오더취안이 아련하더군요.
이렇게 좋은 책이 왜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풍자와 은유로 읽힐 부분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 정도도 허용 못하는 사회라니...

별족 2024-12-08 09:5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공산주의,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eBook] 평등은 없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지 처음이 '(아마도) 이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조안에게'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도덕철학자가 쓴 글이 굉장히 사적으로 읽혔다. 서문과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경제적 평등,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짧은 책이다. 두 장 중에 첫번째 장이 사적으로 읽혔다.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도가 다른 커플에서 벌어질 법한 어떤 논쟁의 끝에 쓰여진 장 같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를 경영하자는 제안에 '당신이 나에게 오는 해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대답하는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다. 소득이 다른 것, 부유하고 부유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부유한 사람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고, 덜 소유했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편견이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당신도 극빈이 해소되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은 도덕적 이상일 수도 없다, 고 말한다. 분노하지 않는, 불평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어떤 말들에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평등에 대한 주장이 도덕적으로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1장과 달리 2장은 경제적 평등을 앞세운 사람들의 주장이 때때로 다른 감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처럼 보인다. '내가 누구네 집 딸이었어도 대접이 이랬겠어?'라는 불만의 표현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게 아니냐고 말한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어떤 과격한 발언들이 과연 도움이 되는 말인가 싶었던 짧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갑질에 대한 분노가 존중을 고양하기 보다, 분노를 고양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에 대한 말들이다. 열개를 다섯사람에게 두 개씩 나눠주는 것이 좋은가,라는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서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하여, 과연 경제적 평등과 존중의 평등을 엮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질문하게 한다.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절한 화폐량을 판단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문제를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와 비교할 때 자신의 경제적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중요한 도덕적 관심사라도 되는 양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렇듯 평등의 원칙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피상성에 기여하고 있다. -24p


경제적 평등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그리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얼마나 큰 효용을 얻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가졌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런 오류는 소득이 적은 사람이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부유한 사람에 비해 많다는 그릇된 가정에 일부 기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지는 도덕적 중요성에서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 p5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작은 만족을 제공하는 자원에 만족하는 것이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현재 가진 자원에 만족하겠다는 그의 결정 - 다시 말해, 자신이 현재 이만큼의 자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결정 - 은 자기 삶의 현재 상태와 질에 대한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평가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 p66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을 수긍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불평등을 제거 혹은 개선하려는 노력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많은 노력들을 지지한다. 내가 그러한 노력들을 지지하는 것은 평등이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목표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실용성에 기초한 경험적 믿음으로 볼 때 대개의 경우 더 많은 평등이 서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 p71


공정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등주의적 분배를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할 특별한 이유를 제공하는 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경우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의 선험적인 혹은 선제적인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라, 존중과 공정성의 도덕적 중요성이다. 

벌린이 제시한 것과 같은 사례들에서 평등의 요구와 존중의 요구가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 경우에 요구되는 평등은 결코 평등주의 자체가 가진 도덕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는 파생된 것이다. 평등주의는 존중과 공정성이라는 더 기본적인 요구들에 기초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도록 명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인간성에 대응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이지 그 자체로 강력한 목적이 되는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다. -p86~ 88


합리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성이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거나 어떤 행동방침을 따르는 것이 합리성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도덕적 명령에 어긋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중에서 벗어난 대우를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사실 외에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늘 실패하지만 늘 시도하는 책장정리 가운데, 포스트잇이 붙은 이 책을 꺼냈다. 포스트 잇을 떼어내고 싶다. 우선 그 내용을 적자 싶어서 언제 읽었는지 찾았다. 2020년 8월에 마쳤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탐구하는 것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써놓았더라.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책 한 권을 펼쳐놓았다. 그때도, 제목보다는 부제 때문에 꺼려지는 마음이 있어서 아무 것도 못 남긴 거 같다. 


거친 것을 알려고 오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거친 말, 즉 거짓말로 공손하게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도가 아니면 그를 피한다"는 뜻이다. 

순자가 위에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조급하다"고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소용이 없다거나 화가 나는 일, 금지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잠재적 교류 대상이다. 또한 그들 역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진지한 물음을 표할 때 진지한 태도로 응하면 된다. "피한다"는 표힌이 단어 그대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도"에 대해서, 즉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지금 당장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183


일본의 인문학자 오구마 에지는 일본의 전후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기여한 윤리주의를 "나는 지식인이다, 학생이다, 특권계급이다, 그러므로 특권과 사생활을 버리고 노동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윤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흑과 백, 전부와 전무로 나뉘며, 강경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과 힘을 얻는다. 윤리주의는 운동의 전망을 가망 없게 만들고 참여에 높은 장벽을 쌓는다. 따라서 참가자는 적어진다. 참가자가 적어지므로 비난과 죄책감으로 참가자를 끌어내려는 시도가 강해진다.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너는 데모하러 오지 않았잖아?", "바리케이드에서 빠져나가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그런 데에 정나미가 떨어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윤리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스스로도 괴롭고 확신을 지닐 수 없으므로" 타협에 혐오감을 보이고 "타인을 세차게 몰아붙이기 쉽다." 그 결과 "내부 대립과 배신자 취급이 마구 벌어"진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며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활동이 "윤리를 내세워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인내심 경연대회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윤리주의는 새로운 속물들을 창출한다. 이 속물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나 조직에서 윤리의 위계를 세우고, 그 위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간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 p246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는 한 명의 독지가를 설득하고 승낙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의 성격은 세네카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배의 이음매들이 사방으로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져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올 때(...) 퍼내도 퍼내도 물이 줄지 않고 자꾸만 더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지지 않고 자꾸 생겨나는 악에 맞서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p255


"가령 말이야.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는 쇠로 된 방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세. 다들 곧 질식해 죽겠지.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곧바로 죽음의 상태로 이어질 테니까 절대로 죽기 전의 슬픔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맑은 사람 몇몇을 깨운다면 말이야. 이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만회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서도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하지만 몇 사람만이라도 깨어난다면, 쇠로 된 방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루쉰은 "희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과거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p2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 - 누구나, 언제나, 저마다의 속도로
이수인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이 내가 딱 하나만 읽는다면 읽겠다던 '인재시교'를 떠올리게 해서 골랐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라, 교육이 뭘까, 라는 질문을 자꾸 자꾸 하게 되서 이런 책을 읽는다. 큰 아이가 고3이라 지금 입시나 교육이 왜 이런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대학은 필수적인 경로나 교육이 아니다. 30프로만 갈 수 있을 때에도 그랬고, 거의 100프로의 수험생이 갈 수 있는 지금도 그렇다. 상승욕구가 있고,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부모가 방법을 모르는 채로 떠민다. 또래집단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압력이 작용한다. 사교육시장은 비대해지고, 사교육시장도, 대학도 살아남기 위해 케케묵은 담론들을 이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한다. 많은 교육관련 책들은 그래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인가?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인가?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인가? 어떤 삶을 살면 좋은 삶인가? 어떤 것이 성공인가? 질문은 많고 답은 모른다. 

그래서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저자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게임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해서 첫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느리게 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이가 적어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수를 이해할 만큼 적어도 2학년짜리만큼은 되길 바라면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에듀테크,라고 불리는 분야의 기업가가 되어 쓴 책이다. 엄마의 마음, 기업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엄마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기업가기 때문에 더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엄마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그래도 최선을 다 해서 말한다.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이기를 기대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배움의 목표는 무엇일까,에 답은 없어도, 여전히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사람을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움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라고 유학의 '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목표여야 끝까지 배울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부모는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 깜깜한 미래를 기쁘게 기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돌보는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키워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 그런 걸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저자의 말들에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기대도 조금은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병원의 유전학자인 닥터 골라비가 병실에 찾아와서 무슨 질문이든지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아이와 같은 유전 정보의 아이를 찾아서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곤조곤 말을 쏟아냈다. "너는 유전적으로 정상인 아이를 하나 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착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될지 악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삶을 마무리할지 알 수 있겠니? 장애가 있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마찬가지야.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나는 머릿속에서 막연히 '장애가 있는 아이'와 '장애가 있지 않은 아이'를 나누고, 그 부모의 인생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불행한 삶'과 '그렇지 않은 행복한 삶'의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골라비는 아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모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말해주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의 유전질환은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조합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축복이지 않니? 아무도 모른다고!" -p17~18


그러다가 아이가 다른 반 교실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 그런 아이들을 마주치면 매우 반가워하면서 말을 걸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방학 중 추가 학습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고 말을 걸면서 아이는 매우 행복해했다. 이런 광경을 몇 번 지켜보자, 차라리 특수학급에서 비슷한 수준의 또래들과 함께 있게 했다면 아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p200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교육의 목표가 잘목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림 그리는 것의 목표가 직업을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기능을 훈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의 수준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또래와 비교해서 미술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잘 그리는 것, 상업적으로 팔릴 것을 목표로 그리면 안 된다. 교육의 목표가 '어떤 수준을 달성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이제열 지음 / 모과나무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기독교가 편애하는 신의 차별적인 사랑을 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베이스인 서양의 문명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골랐지만, 또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나는 종교를 조금은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종교적 방식으로 하는 설명에 삐딱한 태도도 있다. 나는 동서양의 인간이해,가 두 종교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

내가 싫어하는 친구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비슷한 애가 그 친구를 막 욕하는 걸 듣는 기분이 된다. 사실, 책에서 하는 말은 욕도 아니고, 기독교와 불교는 그리 가깝지 않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종교의 입장을 불교의 입장에서 듣는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중이라, 천국이나 지옥, 전생이나 내세, 환생이나 이적에 대해 말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평화로워야 하고 구하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완전한 자는 세상에 대한 희로애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욕망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p25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형벌이 있든 없든 생로병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애초부터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다. '생으로 말미암아 사가 있는 것'이다. -p49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그 본성에 있어 실제가 아니다. 마치 꿈의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 불교의 지옥은 미혹한 중생이 업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이다. 꿈을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의 일들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듯 지옥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업의 힘에 의해 꾸는 꿈이다. 지옥의 모든 형틀 기구와 참상과 전경 그리고 사자들의 모습은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의 마음이 만든 허상들이다. - p94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法, Dharma)이고, 바로 그 법 속에서 중생들이 업을 지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에 전하는 다음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돌아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의 속박 속에 굴러간다." -p127 -128


혹 불교 경전에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들이 지은 죄를 씻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일러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방식을 불교는 애당초 부정하고 있다. - p161- 1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