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뜻을 알아?

아들에게서 놀라운 해석을 들었다. 

'목소리가 달달하다??'

포도청,을 매실청,같은 걸로 생각한 거다. 


목구멍이 포도청,은 배가 고프면 뭐든 할 수 있게 된다,라는 말,이라고 설명해준다. 


포도청,은 경찰서, 같은 조선시대의 관청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은 배가 고파서 목구멍에 들어가는 게 없으면, 감옥에 갈 줄 알면서도 나쁜 짓도 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준다. 

목구멍과 포도청은 나에게 같은 존재라는 말이라고. 목구멍이 밥 내놔라,라고 명하면, 나라는 존재는 얄짤없이 그 무엇이라도 하게 마련이라는 말이라고. 

포도청,을 설명하기 위해 포도대장,이라는 말을 해도, 아들에게는 달콤한 연상들이 따라온다. 나의 이 익숙함은 사극으로 단련된 어휘인가, 싶다. 


목구멍이 포도청, 

시장이 반찬, - 이 말도 뜻을 잘 모르더라. 시장하다,라는 말이 배고프다,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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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게 하는 건 뭘까. 

나는 짐이라고 생각한다, 호수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죽고 나면 짐일 수 밖에 없는 물건들을 모으고, 식물을 키우고, 동물을 키우고, 돌멩이에도 이름을 붙이고 곁을 내어주는 인간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지, 나의 이 몸조차 짐이야. 궁극의 짐, 최초의 짐은 바로 내 자신의 몸이지. 뭐 묘사가 그렇다는 거지. 네가 무언가를 짐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렇다고.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도 했다더라.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이 제약없이 풀려나는 게 바로 죽음이라고 했대. 

뭐, 영혼이 있던지 말던지. 그게 정말 자유인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살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몸뚱이조차 짐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산다는 거라고 생각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몸,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 내 뜻 대로 되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살아간다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는 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너의 슬픔을 알 것 같으면서도, 나는, 네가 엄마인 염분홍 여사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마음이 되었어. 

엄마의 집에 있는 짐들을 하나씩 챙겨서 너의 집으로 옮기는 마음은 그래 네가 좀 더 허랑방탕한 아들이었다면 기특하고, 고마운 처사일 수도 있는데, 너는 그런 아들이었던 적이 없잖아. 엄마에게 그 간절함을 내 보인 적 없었던 아들이라서, 엄마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드는 거야.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엄마를 살게 하는데, 너는 그 사랑을 짐이라고 부르고,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엄마를 밀어내지. 미지 앞에서 울던 그 마음을 엄마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으니, 엄마는 늘 네가 어렵고, 늘 너를 그리워하잖아. 

살아간다는 건, 짐을 지고 걷는 일이야. 내 자신을 겨우 짊어질 수 있을 때, 그 다음 짐들이 필요하지. 아니, 내 자신을 짊어지기 위해서도 다른 짐들이 필요해. 나만으로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서 있을 수가 없거든. 오히려 다른 어쩌면 짐이면서도 사랑인 것들이 나를 세우고 살게 하는 거거든. 

호수야, 사람은 누구나 다 약하고 어리석단다.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버티고 살아가기 위해서 네가 짐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이 필요해. 너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짐인 누군가도 너를 떠받치고 있는 거야. 

네가 무얼 짐,이라고 부르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그 짐,이란 게 어떤 건지도 생각해 봐. 그게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계속 살아간다니. 아무 짐도 없는 삶이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짐이 무거울 수록 더 삶에 용맹해지기도 해. 살다보면 깨닫게 되기도 하고 말이지. 엄마에게 짐을 빼앗지 말아, 호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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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색깔표시 다르게 할 수 없나. 퍼센테이지만큼 색깔을 섞어서 보여주던지. 한 표만 많아도 이기는 이 싸움에서,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의 가치가 동일한 선거라는 공간에서 저런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색칠하는 방법뿐인가? 

결국 보라색으로 살게 될 텐데, 더 파란 보라색과 더 붉은 보라색들로 칠하면 미울까. 

요즘 AI는 그런 것도 그려주겠지만, 이렇게 말로만. ㅋ 

그러고, 도대체 출구조사가 이렇게까지 다르다는 건, 뭘까. 

참으로 사람 속은 모를 일이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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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출장을 가서, 초6 딸래미랑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다. 

그 날 아침에 '경험의 멸종'책 광고를 본 이야기를 해 줬다. 

"엄마가 아침에 책 광고를 봤는데, 요즘 십대는 선호하는 기술이랑 후각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기술을 선택한대."

"?"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지. 스마트폰을 안 쓸래? 냄새를 못 맡을래?라고 물어보면 냄새를 못 맡고 말지'라고 대답한다는 거야."

그런데 애한테 설명해주다 보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이 후각을 잃는다는 게 뭔지 알까? 싶은 거지. 저런 질문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는 질문이 아닌가. 십대라면 죽음의 무게도 모를 텐데, 저런 질문이 유효할까. 만약 정말 냄새를 못 맡는 채로 하루만 지내봐도 그런 선택을 할까, 의문이 들었다. 

"냄새를 못 맡아도 불편한 게 없지 않아?"

"에? 냄새를 못 맡으면 맛을 못 느낀대."

"그래?"

아무 것도 모르는데, 냄새를 못 맡는 불편을 모르는데, 그런 선택을 어떻게 질문하고, 그 대답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지, 싶었다.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듣던, 균형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상대의 말이 어떤 배경 가운데 나온 지 안다면 연구는 가능할까. 책이 묘사한 근심은 정말 유효할까. 

경험의 멸종,이라는 실제의 모험 대신 가상공간의 모험을 모험이라고 상상하는 세태에 대한 어쩌면 경각심은 나나 아이에게는 아직 없는가, 싶다. 책을 읽어봐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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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02 0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식대가 이연복 쉐프가 후각을 잃어 맛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그분이 하는 요리는 수십년간의 경험이 쌓여서 맛을 안보고도 가능하지만 일반인이 그렇다면 엄청 불편할 겁니다.
하지만 10대들에게 스마트폰을 뺏는 것은 그 어떤 처벌 보다도 가혹하게 느껴질 거에요.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9140.html


카스피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caspi/16358277 )을 통해 칼럼을 보았다. 매체의 지면을 가진 기자가 칼럼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기자는 '여자가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임신출산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걸 아무도 공공연히 말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남자들이 속으로는 젊고 어린 여성을 원하더라도,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건가? 

나는 임신이나 출산,이 어리고 젊은 여성이 가지는 권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기자의 태도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광수의 질문이나 그 질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낸 매체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람을 나이로 차별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끝없이 동안,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스스로 그걸 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묻는 여자 출연자들이 떼로 나오는데, 그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권력은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종류의 힘이고, 짝짓기가 이뤄지는 공간에서 힘의 우열은 확실히 젊고 어린 여성에게 있다. 다루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위태롭고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기는 해도, 그게 힘이 아닐 수는 없다. 

그래서, 여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언니'라는 호칭은 가끔 모멸이나 무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 언니,와 남자들도 있는 데서 부르는 언니,는 다르다는 걸 여자들은 안다. 

불편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은, 어쩌면 문명의 도구이고, 우리는 말을 해야만 한다. 말이 실질과 다르더라도, 그 말과 실질을 맞춰 보면서 상대를 탐색하고 그 말 가운데 서로를 옭아매면서 내가 아닌 남을 이해하고 더 깊은 관계들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뭐, 신문사 데스크의 기자님과 내가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내밀한 영역까지 공개하고 있는 그런 연애프로그램 가운데, 둘의 대화를 어디까지 공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까. 공공의 영역에서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늘어나서, 이제 방송이 점점 내밀한 영역으로 파고 들어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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