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2726.html


친구들과 하는 밴드에 친구가 퍼놓아서 다 늦게 보게 되었다. 


나는 남녀공용화장실도 싫고, 트랜스젠더의 여성스포츠 참여도 싫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0641897

파리올림픽에 외팔이 탁구선수를 본 기억이 있어서 기사를 검색했다. 누군가는 모멸적인 언어라고 하겠지만, 딱 이렇게 검색했다. '파리올림픽 외팔이 탁구선수'. 

내가 생경한 이유는 그 선수가 비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기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 나는 그 선수가 '왜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까?'라고 의구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비장애인을 다 이겼나보네, 라고 답하고 치워버렸다. 


스포츠는 차별적이지 않다. 그저 신체의 탁월함을 겨루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 운동선수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탁월하다면, 저 외팔이 탁구선수처럼 경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 운동선수는 없었기 때문에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여성스포츠라는 장르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고, 핸디캡이 있지만 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장르다. 1군이 아닌 2군 야구처럼,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에,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핸디캡이 없는 사람의 참여를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이 차이, 자체를 인정하는 나는, '여성'이 핸디캡인 장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즐기기 위해 함께 뛰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나? 그렇지만 여성,이라는 장르에 트랜스젠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거다. 소수자,여서 그 불편을 이해하려 해도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더라도, 여자 목욕탕에 성기를 덜렁거리면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25-02-0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살림집에는 ‘엄마아빠 누나오빠 동생‘ 누구나 ‘똑같은‘ 화장실을 쓰지만,
한집안이니까 ‘그냥 화장실‘입니다.

온갖 사람이 뒤섞인 바깥(사회)에서는
한집안과 다르기에 화장실을 나누고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곳도
그저 알맞게 나눕니다.

‘나누기‘가 모두 차별이지 않고,
‘살림집에서 한집안이 함께 쓰는 화장실‘처럼 사회 모든 곳이 똑같이 가야
평등이지 않다는 대목을,
이러한 길을 눈여겨보고 읽을 때에
비로소 ‘공정(정의)‘을 이룰 텐데 싶습니다.

정의로운 외침이 너무 많은 오늘날입니다...
 

명절 연휴, 여기 저기로 달리는 차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JdUI51NZg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내가 남편에게 말한다. 

"글쎄, 애들이 반딧불이가 개똥벌레랑 같은 건 줄 몰랐대!"

"에? 그래? 둘이 다른 게 아냐?"

"어, 아빠도 모르네."


딸아이는 뒷자리에서 나무위키를 검색한다. 

반딧불이,는 개똥벌레와 같다,는 설명을 찾고, 다시 반디,가 그 벌레의 옛이름이라고도 찾는다. 옛이름 반디,에서 반딧불,이 되고 벌레의 이름이 반딧불이,가 되다니. 

"에? 초였다가 촛불이었다가 촛불이,가 되었네."

개똥벌레,는 옛날에 그 벌레가 너무 흔해서,이기도 하고 개똥이나 소똥에서 생겨난 줄 알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호박잎으로 반딧불이를 감싸서 호롱불처럼 가지고 놀았다시는데, 냄새가 났었다고 그래서 아마도 개똥벌레일까,라고 하셨다. 


반디,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도 개똥벌레도 되고, 반딧불이도 되네. 

참,이름이란 것도 부질 없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시안의 이 기사(https://v.daum.net/v/20250118115805741) 를 보았다. 

나는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선명하기보다 흐릿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아빠랑 정치이야기를 하던 대학생일 때, 나는 아빠의 어떤 말이 수긍이 되었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디테일은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 그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에 뛰쳐나갈 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네가 지지하는 그 대통령이 그 정당이 (아빠가 농사짓던) 마늘을 수입하고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의 주제는 우루과이라운드였을까? 자신의 이해관계에 목소리 높이지 않는 아빠는 국가운영에 그게 필요할 수 있는데, 왜 수용하지 않는지 데모하는 농민에 이입하지 않았다. 아빠는 수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높이는 목소리, 투쟁에 굳이 동참하지 않았던 거다. 

아빠의 태도에서 나는 명분에 대해 생각한다. 투쟁의 명분이 나의 이익이기만 한 것은 부족하다고, 정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의 명분에 동조할 수 있을 때라야 나의 어떤 주의나 주장은 힘을 얻는다. 


나는 16년부터 19년까지 본부의 여직원회장이었다. 

16년에 처음 본부 여직원회장 임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목표는 여성의 날,을 모두 알게 하자,는 거였어서 여성의 날에 플래카드를 달고 기념품을 만들어 회원들이랑 나눠가졌다. 월에 5천원 회비를 떼는 모임이지만,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을 들어야 했다. 내부적으로 그런 요구를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적개심을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그 해 연말에 회사에서 나눠주는 수첩에 '여성의 날'을 표시해달라고 했을 때였다. 진지하다면 진지하겠지만,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담당자는 정말 그걸 해 주기 싫어했다. 왜 그러지? 유엔에서 지정한 날인데,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의문에 내년에는 넣어야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미 그 해에 알라딘에서 댓글을 달면서 (https://blog.aladin.co.kr/775792147/8734437) 또 그런 적개심을 느꼈던 터라, 좀 더 진지하게 논의들을 읽어 나갔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동조자를 구하기 보다, 자신의 주장에 명분을 싣기 보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너는 나쁜 거라고 선을 긋고, 설득하고 설명하기 보다 '공부나 하고 와'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와중에 20살 무렵부터 내 자신을 정의하던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하지, 뭐,라는 심정이 되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는 알라딘에서 어그로를 끌어서 조회수를 좀 높였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412572 ) (https://blog.aladin.co.kr/hahayo/13424042 )


1. 윤석열은, 역대대선 최다득표로 대통령이 된 걸 아는가?

2. 문재인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면 정권이 이렇게까지 넘어갔을까?


3. 지금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국민의 힘, 만큼 촛불시민의 어떤 말들을 다시 중간지대를 없애고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프레시안의 그 기사가 싫었다. 여자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바라는 게 같지도 않다. 광장에 여자들이 많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그 모두를 당겨오는 게 희망적인가 질문한다. 

사람들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편을 선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 윤석열대통령이 탄핵되고 체포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지는 심정은 노무현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졌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 대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좀 더 조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은 그렇게 진지하지는 않은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뉴스를 보면서 '둘 다 똑같네' 소리 밖에 안 나오는 날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s://tenasia.hankyung.com/article/2024123063294?cm=news_headline


드라마를 안 보고 기사를 쓰나. 드라마를 봐도 이입은 하지 않은 걸까. 

도둑,이라, 도둑이라. 


나는 재미나게 보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돈을 깔고, 쓸 수도 없는 돈을 깔고, 그저 아무도 믿지 못할 선심으로 치매 의심이나 받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모두 다 알아버렸는데, 그래도 비밀을 지키려고 서로 말도 못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나는 구경한다. 다림이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 돈을 굳이 가져왔을까. 알고도 말 못하는 심정을 왜 이해하지 못할까. 

드라마의 무엇이 절도, 은폐 방법을 알려준다는 걸까. 

100억이 파묻힌 걸 알아도 쓸 수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데 말이지. 

억,이라는 단위가 흔해졌지만, 실상 그 출처를 알지 못하는 돈은 쓰지를 못 한다고 드라마는 내내 알려준다. 그 돈을 헐어 눈을 뜬 다림이도 울고, 경찰인 우림이도 울고, 그 돈을 어떻게든 갚아보려고 애쓰는 강주도 있는데, 왜 이들이 도덕심이 없다는 걸까.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걸까. 사람은 얼마나 다른 걸까. 

내가 8억이면 눈을 뜰 수 있는 아픈 손녀가 있는 할머니인데, 돈가방 파묻는 걸 봤으면 안 파올 거야? 이미 그 돈이 깨끗한 돈이 아니라, 도둑맞은 돈 주인도 경찰에게 신고하지 못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잘못이라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년이를 본 어머니의 감상은 '여기는 남자가 안 나오는구나'였다. 

정년이를 본 내 감상은 '주인공이 밉상이네'고, 딸래미의 감상은 '영서가 제일 착해'다. 


마지막회차,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주란이의 선택에 대한 시선이다. 주란이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 국극단을 나가고 결혼을 하기로 한 건 주란이가 한 선택이다. 주란이가 정년이를 보면 정말 너무 떨리고 설레서 연기조차 못 할 지경이었던 묘사나, 그런 주란이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제 목을 망가뜨리는 정년이의 묘사나 역시 좀 과했지만, 그게 결국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남자-주란이의 약혼자, 주란이의 아픈 언니의 치료비를 감당하고, 앞으로 주란이를 부양할 예정인 바로 그 남자-와 결혼에 대한 적대로 드러날 때는 작금의 여대 사태가 같이 떠오르는 지경이었다. 여자로만 구성되었던 국극은 결국 사라졌다. 길게 붙인 에필로그에도 불구하고, 정년이가 나중에 무엇을 했던지 간에 국극 자체는 소멸했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라니 척화비에도 안 쓸 문구로 - 원래는 척화비에나 쓸 말에 혹해서는 이라고 했지만, 사실 구한말 척화비의 태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개방하지 않겠다'였다- 학교를 망가뜨리면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여자들이 겹쳐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그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나라가 이성애를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는 아이가 생기니까,가 아닐까. 권장하고 독려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권장이나 독려에도 불구하고 이성애를 택하지 않는 사람은 불이익에 대해서 수용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한다. 권장이나 독려하지 않았다고 해서 강요라고 받아들이고, 울분을 토하는가? '말안하기 게임'을 읽었을 때의 감상( https://blog.aladin.co.kr/hahayo/14297055 ) 그대로, 어쩌면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성을 혐오하는 것은, 인종차별과도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데 이유를 백가지 붙이는 것처럼 지금 그러고들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목숨을 내놓을 만큼 남자가 싫은 거야? 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