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를 본 어머니의 감상은 '여기는 남자가 안 나오는구나'였다. 

정년이를 본 내 감상은 '주인공이 밉상이네'고, 딸래미의 감상은 '영서가 제일 착해'다. 


마지막회차,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주란이의 선택에 대한 시선이다. 주란이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 국극단을 나가고 결혼을 하기로 한 건 주란이가 한 선택이다. 주란이가 정년이를 보면 정말 너무 떨리고 설레서 연기조차 못 할 지경이었던 묘사나, 그런 주란이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제 목을 망가뜨리는 정년이의 묘사나 역시 좀 과했지만, 그게 결국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남자-주란이의 약혼자, 주란이의 아픈 언니의 치료비를 감당하고, 앞으로 주란이를 부양할 예정인 바로 그 남자-와 결혼에 대한 적대로 드러날 때는 작금의 여대 사태가 같이 떠오르는 지경이었다. 여자로만 구성되었던 국극은 결국 사라졌다. 길게 붙인 에필로그에도 불구하고, 정년이가 나중에 무엇을 했던지 간에 국극 자체는 소멸했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라니 척화비에도 안 쓸 문구로 - 원래는 척화비에나 쓸 말에 혹해서는 이라고 했지만, 사실 구한말 척화비의 태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개방하지 않겠다'였다- 학교를 망가뜨리면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여자들이 겹쳐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그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나라가 이성애를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는 아이가 생기니까,가 아닐까. 권장하고 독려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권장이나 독려에도 불구하고 이성애를 택하지 않는 사람은 불이익에 대해서 수용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한다. 권장이나 독려하지 않았다고 해서 강요라고 받아들이고, 울분을 토하는가? '말안하기 게임'을 읽었을 때의 감상( https://blog.aladin.co.kr/hahayo/14297055 ) 그대로, 어쩌면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성을 혐오하는 것은, 인종차별과도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데 이유를 백가지 붙이는 것처럼 지금 그러고들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목숨을 내놓을 만큼 남자가 싫은 거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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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이르게 퇴근했다. 

있으려니 초5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편의 퇴근시간도 늦지는 않고, 아들의 하교시간하고 얼추 맞을 거 같아서, 혼잣말도 아닌 혼잣말로 "아빠가 오빠 태워서 독감예방접종 맞춰 오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초5 딸래미가 

"그걸 바라기만 하면 돼? 말을 해야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얼른 전화해서 통화했다. 전활 막 끊었는데 문을 열고 아들이 들어왔다. 

웃겼다. 아들은 집에서 아빠를 기다렸다가, 주사맞고 아빠랑 같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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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1-08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독감주사를 맞을 시기가 다시 왔네요.작년에 맞은것이 엊그제 갖은데 벌써 11월 이군요.그나저나 요즘 독감주사도 한 5만원 정도 해서 가격이 참 만만치 않을것 같습니다.

별족 2024-11-08 06:58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무료예요. 저도 더 늙으면 무료겠죠. ㅋ

카스피 2024-11-08 17:34   좋아요 0 | URL
어 보건소에서 맞히셨나요.동네 소아과(내과도 함께 운영)에서 4가 백신인가 4~5만원 하는것 같던데요.

별족 2024-11-0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건소는 아니고 지정의료기관?에서 맞췄습니다.
 

말이 너무 많다. 

월요일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오를 죽였을까봐 미쳤나봐,라고 했는데, 현오는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종화 내내 '차라리, 죽이지' 할 만큼 꼴 보기 싫었다. 

이제 나는 조직에 너무 오래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서, 현오나 은호가 상사들의 요청이지만 명령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이가 없다. 

여기는 방송국이고, 누군가 죽어나가도 방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 웃겼다. 방송국 아닌 어떤 조직도, 그런 이유로 조직을 만들어서 키우고 운영하는 거다. 내가 아니어도 굴러가게. 완벽은 아니어도 이러구러 굴러가게. 

현오가 은호때문에 아홉시 뉴스를 거부한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고, 은호가 오후뉴스는 싫다고 뻗댈 때도 어이가 없었다. 조직 내에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명령인 것들, 내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것들, 그래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다음 카드가 언제나 있는 것들을 나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게 싫었다. 

뭐 싫은 걸로 치자면, 자기는 결혼 안 한다고 애저녁에 뻥 찬 여친 주위를 뱅뱅 돌았던 현오와 그렇게 자신을 뻥 찬 남자 때문에 해리성인격장애를 앓으면서도 또 그 주위를 뱅뱅 도는 은호인 거겠지. 현오가 주연이 질투하는 거 보면, 은호가 현오랑 헤어지자 마자 다른 남자랑 결혼이라도 할 거처럼 굴었다면 냉큼 달려와서 결혼하자고 했겠구먼, 그눔의 새끼, 이러면서 봤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난 아직 부족해,라면서 돈 벌 궁리하는 남자들. 

결혼은 이 남자랑 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라면서 커리어를 쌓으려는 여자들. 

결혼이란 게 혼자만의 마음으로 혼자만의 시간표에 딱 맞춰 가능한 게 아닌데 말이지. 

온 우주에서 함께 늙고 싶은 혹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기적에 더하여, 그 사람과 마침맞게 사귀고 마침맞게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것도 기적인데. 

현오가 좀 더 싫었던 건 8년이나 사귀면서 자신의 어떤 처지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결국 선택은 은호가 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은호에게 통보했다는 거지. 그래, 그걸 내가 못 받아들이니까, 이 메인커플 대신 환상 속의 커플, 혜리씨와 주연씨가 더 좋은 거지. 

현오와 은호는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 말은 저렇게 너무 많이 하는 커플이었다!!! 

난 너무 T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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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2024-11-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를 먹은탓인지 모르겠지만 F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ㅋㅋ
 

카스피님 글에 쓰는 먼댓글인데, 먼댓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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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서점의 붐업에 옌롄커,를 읽어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보다는 옌롄커를 생각한 거였고요. 

그리고 수상발표가 뉴스 아래쪽에 깔렸을 때 놀라서 남편에게 말하면서 '음, 나는 한강 싫어하는데, 약해빠져서'라고 덧붙였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시적 문장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서, 한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말하는 누구라도 나는 그걸 들어줄만큼 인내심이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책장에는 200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이 있네요. 


그러다가, 논란이 된다는 다른 소설가의 품평도 읽고 - 역사왜곡이다, 옌렌커를 줬어야 한다,는 식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202457 -,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싫어할까, 나는 왜 옌렌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826912 )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식민지 인도의 어떤 소설이 제국 영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우리나라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달까요. 



 

노벨상은 권위가 있는 상이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가 시상하는 상이고, 자신의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이야기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상이라고 해도 시상자의 의도라는 건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이 서구의 문화를 대할 때와 다른 문화권을 대할 때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옌롄커의 책으로 골라 받은 건 '딩씨마을의 꿈'-국가가 매혈을 장려하는 가운데, 마을 하나에서 에이즈가 창궐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었으니, 한강이나 옌롄커 둘 중 누가 받았더라도 자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서구문명의 아나키즘적 지향-정치는 뒤로 종교는 앞으로-은 문학상에서 선호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역시, 한글 처럼 사용자가 작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아이들은 결핍이 없을 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 시상자의 의도 어쩌구 하는 제 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으로 보이겠지만, 이제 제 다음 세대는 그 뜻 그대로 들리겠지요. 


강인한 한국 여자인 저는 한강의 여주인공들보다 토지의 서희가 더 좋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스웨덴 한림원이 상상하는 한국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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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0-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먼댓글이 안되어 있어용^^

별족 2024-10-14 06:17   좋아요 0 | URL
왜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_-;;;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셨으니 되었습니다. ㅋ
 

나의 엄마에 대해 쓰면서 우리 문화의 여자들, 특히 어머니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강한 존재'라고 썼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575630 )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지 나의 클릭질에서 다 드러나니까, 유튜브는 쇼츠로 저 한국엄마 콘텐츠를 보여주는 거다. 

유튜브 쇼츠로 '한국엄마'라는 게 떳다. 한국인 엄마와 흑인 물리학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스탠딩 코미디언 마이클 요의 콘텐츠다. 


흑인,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게 인종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아한 나의 태도가 저 엄마에게 모두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XyL3hqefI



https://www.youtube.com/watch?v=1CiUaP8r7Xw


"그래? 거짓말 하랴?"-"뭐? 내가 없는 말 했어?"라고 번역되어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게 나는 무례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라는 도구가 갈등을 다루기 위해 개발되어 있는데, 그 말을 왜 자꾸 이런 저런 이유로 하지 말라고 하는지 의심한다. 그래도 개중 가장 평화로운 도구, 말로 갈등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의 느낌 그대로, 듣는 나는 그 사람의 말의 의도를 넘겨짚지 말고, 들은 데서 출발해서 다시 또 말해야 한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면 나쁜 대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고 하던 말이, 글이 되고, 더 넓게 확장되면서 둘 사이 문제 없던 대화가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문제가 되는 말들 가운데, 우리는 대화하기 보다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으레 상대를 어떤 틀에 넣어 넘겨짚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서 오해를 마음 속에 쌓아두는 건 아닌가.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데, 그래서 조율하기 위해 말이 있는 건데, 숨기고 감추고 조심하느라, 아예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다니 너무 답답한 세상이다. 

그래, 세상 모두가 이런 나를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해도 나는 저 한국엄마처럼 굴어야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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