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이 기사(https://v.daum.net/v/20250118115805741) 를 보았다.
나는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선명하기보다 흐릿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아빠랑 정치이야기를 하던 대학생일 때, 나는 아빠의 어떤 말이 수긍이 되었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디테일은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 그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에 뛰쳐나갈 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네가 지지하는 그 대통령이 그 정당이 (아빠가 농사짓던) 마늘을 수입하고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의 주제는 우루과이라운드였을까? 자신의 이해관계에 목소리 높이지 않는 아빠는 국가운영에 그게 필요할 수 있는데, 왜 수용하지 않는지 데모하는 농민에 이입하지 않았다. 아빠는 수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높이는 목소리, 투쟁에 굳이 동참하지 않았던 거다.
아빠의 태도에서 나는 명분에 대해 생각한다. 투쟁의 명분이 나의 이익이기만 한 것은 부족하다고, 정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의 명분에 동조할 수 있을 때라야 나의 어떤 주의나 주장은 힘을 얻는다.
나는 16년부터 19년까지 본부의 여직원회장이었다.
16년에 처음 본부 여직원회장 임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목표는 여성의 날,을 모두 알게 하자,는 거였어서 여성의 날에 플래카드를 달고 기념품을 만들어 회원들이랑 나눠가졌다. 월에 5천원 회비를 떼는 모임이지만,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을 들어야 했다. 내부적으로 그런 요구를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적개심을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그 해 연말에 회사에서 나눠주는 수첩에 '여성의 날'을 표시해달라고 했을 때였다. 진지하다면 진지하겠지만,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담당자는 정말 그걸 해 주기 싫어했다. 왜 그러지? 유엔에서 지정한 날인데,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의문에 내년에는 넣어야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미 그 해에 알라딘에서 댓글을 달면서 (https://blog.aladin.co.kr/775792147/8734437) 또 그런 적개심을 느꼈던 터라, 좀 더 진지하게 논의들을 읽어 나갔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동조자를 구하기 보다, 자신의 주장에 명분을 싣기 보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너는 나쁜 거라고 선을 긋고, 설득하고 설명하기 보다 '공부나 하고 와'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와중에 20살 무렵부터 내 자신을 정의하던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하지, 뭐,라는 심정이 되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는 알라딘에서 어그로를 끌어서 조회수를 좀 높였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412572 ) (https://blog.aladin.co.kr/hahayo/13424042 )
1. 윤석열은, 역대대선 최다득표로 대통령이 된 걸 아는가?
2. 문재인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면 정권이 이렇게까지 넘어갔을까?
3. 지금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국민의 힘, 만큼 촛불시민의 어떤 말들을 다시 중간지대를 없애고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프레시안의 그 기사가 싫었다. 여자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바라는 게 같지도 않다. 광장에 여자들이 많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그 모두를 당겨오는 게 희망적인가 질문한다.
사람들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편을 선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 윤석열대통령이 탄핵되고 체포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지는 심정은 노무현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졌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 대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좀 더 조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은 그렇게 진지하지는 않은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뉴스를 보면서 '둘 다 똑같네' 소리 밖에 안 나오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