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어리석음이 있던가. 


2월 16일 흥국생명과 IBK기업은행의 배구시합을 라이브로 봤다. 저격과 폭로로 이어지는 이슈들을 따라가고 있던 중이라, 안타까움 가운데 보고 있었다. 

1) 이다영선수가 자신의 SNS에서 주어와 대상이 모호한 공개저격으로 팀 내 불화를 드러냈다. 

2) 이다영선수의 피해자연하는 공개저격에 학창시절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으로 배구를 그만 두었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폭로했다. 

3) 이다영 선수는 학교폭력에 대한 자필 사과문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4) 이다영, 이재영 쌍둥이 배구선수는 과거의 학교폭력 때문에 무기한 출장정지가 되었다. 


16일의 경기는 두 명의 주력 선수가 뛸 수 없는 두 번째 경기였다. 팀의 불화로 이미 두 번의 패배와 주력선수 둘이 빠져나간 세 번째 패배가 있었고, 나는 이 경기에서 네 번째 패배를 보았다. 일본에서도 터키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린 김연경이 잔뜩 굳은 얼굴로 3대0으로 패하는 경기를 보고 있자니, 이야기들이 저절로 살을 붙여 굴러간다. 


남편에게 흥국생명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고, 이다영이 과거의 일을 사과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내 의견을 말했다. 다른 걸 사과해야 하지 않은가. 남편은 뭔 이상한 말이냐면서, 학생 때 가해자였다가, 지금 피해자일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사과하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현재의 일을 사과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과거의 일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눈에 띄는 일들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파만파 번지는 학교폭력 폭로를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가해자의 사정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직 어린 애들의 한 때의 잘못에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https://blog.aladin.co.kr/hahayo/8308710) 사람이라서, 결국은 댓가를 치르는 게 아니겠냐고만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십수년이 지나서 폭로하는 사람의 병든 마음이 너무 걱정스러운 거다. 그저 너는 트라우마에 갇힌 피해자라고 어서 폭로하라고 폭로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잊고 싶은 건 잊으라고,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잊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를 때린 애가 매일 티비에 나와서 웃는데 어떻게 잊어요?라고 말하면, 늙은 직장인의 심사로, 아 쟤도 돈 버느라 고생이 많네, 그러라고. 이다영의 학폭을 폭로한 사람의 심정은 나도 이해가 되고, 그 사람이 일상을 살아내지 못할 만큼 트라우마에 갇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당사자도 아닌 목격자들이 하는 폭로들은 뭐지 싶다. 이다영이 지금 피해자라고 생각했어도 여론의 심판을 청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피해자가 등장하여 자신이 심판대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현재의 무언가를 참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다영은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있나, 싶은 거다. 마구 터져나오는 폭로들,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폭력의 댓가가 어때야 할까. 직업을 잃는 것, 기회를 잃는 것이 그 댓가여야 할까. 나라면 그 애가 내가 알던 그 상태로 변하지 않았다면 결국 오래가지는 못 할 테니까,달콤한 성공을 주고, 길고 처참한 하강이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댓가를 치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큰 죄들에도 공소시효가 있는데, 이런 식의 처벌은 과연 옳은가. 기다렸다는 듯 터뜨리는 '트라우마'를 말하는 신문기사는  의미가 있는가. 지금 누군가 피해를 당하는 학생에게 의미가 있을까. 십대에 사십대를 상상하지 못하고, 미래의 일을 들어 지금의 나쁜 일을 교정하지도 못하는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없애야 하는 걸까. 


김연경의 팀은 과거의 일만 반성한 두 명의 선수 없이도 다음 경기에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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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서평도 썼지만(https://blog.aladin.co.kr/hahayo/10488723) 하지 못한 말들이 꽤 많은 책이다. 

이 책은 부모보다 또래집단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가족의 규모가 작은 현대의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같은 또래집단이라고 해도 여성과 남성에게도 다른 문화적 결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천년을 이어온 남자들의 문화와 여자들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성적 동의,에 대한 반유행열반인,님의 글을 보면서 사무실에서 했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좀 오래 되었다. 아직 코로나 전에 결혼한 삼십대 남자, 여자, 미혼의 여자, 사십대 여자, 나 이렇게 넷이 앉아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먼저 가,라고 하면 먼저 가서 좋아요, 라고 말했다. 구내식당에서 나와 같은 파트에 근무하는 직원이랑 남편까지 같이 합석했었는데, 남편이 빨리 먹었길래 먼저 가라고 했더니 먼저 갔다. 그런데, 동석한 직원(남)이 눈이 동그래져서 나한테 싸웠냐고 물었거든.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먼저 가라고 하니까, 그래, 그러고는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남편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삼십대 여자, 미혼의 여자,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했다. 동석했던 직원처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내가 가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했다. 왜????? 그거야 남편이니까요??? 내가 가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가면 안 되죠. 기다려야죠. 그래야 하는 걸 어떻게 알죠? (삼십대 남)그러니까요, 제가 소개팅을 시켜준 적 있는데, 남자는 분위기 좋았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런데 여자는 싫었다고 하던데, 참 그렇더라구요. 연애하는 중이라면, 여자가 거절의사를 밝혔을 때, 한 번 더 권해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 자리의 2,30대 여성이 모두, 남편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어렸을 때 유머일번지,인가에서 박미선이 나와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말하는 유머가 있었다. 남자와 단 둘이 간 여행지에서 여길 넘으면 짐승,이라고 경고하고 자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다. 킬킬거리면서 웃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A를 말하고 B를 원하는-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더 이상 그런 말은 농담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의 남편의 행동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두 명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대화들에 많이 남자들에 이입하고 있다. 왜 그런 걸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표면과 실질이 다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저렇게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의중을 읽고 약빠르게 행동하는 건 눈치가 있는 일이라고도 하고, 그게 미덕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기 보다, 에둘러 말하고, 가급적이면 거절에라도 두 번은 권하라고도 하지 않는가. 어떻게 성적인 부분에서만 명확할 수 있나. 데리러 갈까?라는 질문에 하는 대답에도 정말 데리러 오지 말라는 건지, 그래도 데리러 가면 좋아할지 알 수가 없는데, 게다가 아니 괜찮아,라고 대답했으면서도 정말 데리러 오면 더 좋은 것도 내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성적 동의,가 나는 법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그걸 법의 처벌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간통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인 채로, 성적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과 강간 아닌 걸 구분할 수가 없다. 그걸 도대체 제 3자가 어떻게 알겠다는 거야? 나의 사생활에 얼마나 개입할 셈인 거야? 법으로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의 존재를 가정한 건 어쩌면 그만큼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 도대체 법률기관에 무슨 짓까지 할 수 있게 할 셈인가. 지금도 '키스, 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남자에게 '그걸 왜 물어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라고 타박하는 여자들이 나오는 연애상담 프로들이 있는데, 이제, 우리 여기 동의서,에 서명부터 할까요?로 시작하라는 건가. 심지어 하면서 중간중간? 그걸 정말 여자들이 원하는 게 맞나?


내가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껍데기에 겁 먹지 마라', '분명하게 말하라'이다. 여자들의 말하는 방식도 동양인의 말하는 방식도, 눈치빠른 한국인의 말하는 방식도 아니겠지만, 좀 더 분명하게 거절하고,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라고 말한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끔은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보수적이고 촌스럽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하기 싫은 걸 하고 싶은 척 할 필요 없다, 이다. 네가 그런 사람이 되고, 상대도 그런 사람인 것처럼 대접하라고.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대접하라고, 네가 원하지 않는 걸 상대가 원한다고 줄 필요 없다고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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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2-05 23: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별족님, syo라고 합니다.
이른바 “알라딘의 죽림칠현들”중의 한 사람이구요.

다른 이웃 서재에 들어갔다가 먼댓글을 통해 타고 왔습니다. 먼저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별족님이 쓰신 다른 글도 읽을 기회가 되었네요. 저와 별족님은 여성주의에 대한 견해가 많이 다르지만 그건 그야말로 견해고 각자의 견해는 각자의 것이라 저는 제 견해를 바탕으로 별족님의 견해에 어떤 영향도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견해라는 것에에 대한 별족님의 견해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요.

다만, 이 페이퍼에는 견해의 문제가 아닌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저는 지금부터 어떤 ‘당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실제를 말하려 합니다. 그런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 표현력의 부족이겠지요.

저도 법에 대해서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별족님께서 법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계시다고 느낍니다.

법은(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법은 주로 사법부를 말합니다. 입법의 영역이라고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적 동의의 판단은 주로 재판에서 이루어지니까요) 판단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많이 있지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고 학술적으로 불확실한 물음들로 폴커 키츠의 <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라는 책에서 드는 예를 그대로 옮겨오면, 대마초는 얼마나 해로운가? 동물도 자극을 느끼는가? 아이들은 두 어머니 혹은 두 아버지보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더 좋을까? 모든 남성 혹은 여성이 하나의 성별만 가질까?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법 이외의 영역에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없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답을 내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가 원고-피고, 피고인의 행위의 옷을 입고 실체적 논점으로서 법정에 들어서면, 법은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게 사법체계의 당연한 성질이고 법치국가의 의무입니다. 별족님과 저야 “그/그녀의 행동은 성적 동의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애매한 행동이다/아니다”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겠지요. 우리는 법정 밖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선명한 판단이 내려져야만 합니다. 법은 결코 ˝그 행동이 범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구요.

그 판단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법관도 사람이고, 증거의 충분 정도에 따라 실체적 진실과는 다른 판단이 내려지는 일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 동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행동을 통해 성적 동의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 사건이 법정에 들어온 이상 반드시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별족님이 당한 피해의 구제를 국가에 요청했을 때, 그 피해를 판단하기 위한 요건사실이나 간접사실이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이유로 피해에 대한 판단을 거부할 수 있는 사법부가 있는 나라에서 사신다면, 별족님은 그 나라가 제대로 기능하는 법치국가라고 믿고 살아갈 수 있으실까요?

성적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과 강간 아닌 것을 구분할 수가 없고, 그걸 도대체 제3자가 어떻게 알겠냐고, 사생활에 얼마나 개입할 생각이냐고 말씀하셨는데, 법이 판단을 한다는 것은 민사건 형사건 소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소송은 피해자(측)에서 제기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즉, 그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행위가 법률적 요건사실들을 충족시키는지에 대한 제3자의 개입을 스스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별족님이 마치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법이 사생활에 개입한다는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별족님께서 그 사건의 양 당사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위치에 스스로를 놓고 이 사안을 보고 계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성적 동의가 법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말씀은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법은 판단하지만 그것을 통해 곧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법은 성적 동의가 이런 것이라고 정의하고 사전에 등재하지 않습니다. 이러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행동에는 성적 동의가 있었다/없었다고 판단한다며 근거를 제시할 뿐이지요. 물론 판례는 축적되고 축적된 판례는 법원이 유사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므로 법적 판단에는 정의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규제력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시민들에게는 법원의 판단이 성적 동의의 사전적 정의보다 더 실효적인 정의로 기능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부수적 효과를 거부하려면 판단 자체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니, 결국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가겠고, 다시 법은 판단한다는 말씀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물론 이 페이퍼에서 별족님이 말씀하신 주된 논지는 이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모호한 태도나 선명하지 않은 동의에 대한 별족님의 견해에는 추상적인 정도의 큰 틀에서 동의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교환할 뜻이 없어서요.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syo였습니다.

별족 2021-02-06 07:53   좋아요 1 | URL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죽림칠현‘이 실체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법에 대해서 가장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686347) 우리나라가 판례가 지금 그렇게 기우뚱한가, 의문이 듭니다.
모든 법은 정의부터 시작합니다.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정의하지 않고도 지금 여론에 떠밀려, ‘성인지감수성‘이 판례에 들어오고 있고, 이는 비판지점이 됩니다.
정의될 수 없으면 심판할 수 없고, 심판하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범죄에 친고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지금 장혜영의원의 희망과 다르게 개입하게 된 것 처럼요. 법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정의하고 심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법은 개입하게 됩니다. 민사가 아니고 형사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syo 2021-02-06 12:20   좋아요 4 | URL
안녕하세요, syo입니다.

먼저 ‘죽림칠현’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실체가 없을 겁니다. 최소한 저는 죽림칠현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별족님의 다른 글과 그 글에 달린 댓글 속에서 별족님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마치 계몽의 대상이라도 되는 듯 ‘죽림칠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 자체는 별족님이 쓰시지 않았지만, 그 댓글에 대답하시는 별족님의 말씀에서 별족님 역시 ‘죽림칠현’이라고 비유적으로 불릴 만한 어떤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인식하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분의 댓글은 어떤 비꼼과 그 비꼼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의 대화로 보였습니다. 아래에 달린 댓글을 보니 저 말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꼈나보구요. 그래서 저도 맞비꼬겠다는 뜻으로 굳이 작은따옴표로 묶어 ‘죽림칠현들’ 중 한 사람이라고 썼을 뿐입니다.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이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별족님의 생각이니까요. 실제로 사법부나 대법원 같은 기관을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 말은 ‘일단 인권을 지키기 위해 네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래도 안 되면 법에 맡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법조차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하면 더 이상 피해자에게 방법이 없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법원의 자세와 그 긍지를 뜻하는 말이겠지요.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먼저 시도해볼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법이 정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법은 판단하고, 그것을 통해 곧 정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은, 법은 판단의 전제가 될 만큼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의라기보다는 측량에 가깝습니다.

개념의 정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특정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그 분야에서 정의가 되겠지요. 물리에서의 일work라는 개념은 물리학에서 필요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물리에서는 힘이 작용하는 방향과 수직으로 물체가 이동한다면 아무리 무거운 물체를 아무리 멀리 옮기더라도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아니게 되지요. 우리는 물리에서의 일과 일상생활에서의 일이 다르지만, 큰 충돌없이 두 개의 정의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에 물리가 일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일상의 우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서의 정의가 그 영역 밖의 실제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 우리는 정의를 놓고 논의와 합의를 통해 다양한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정의를 만들어나가겠지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그런 논의의 대상이겠네요. 별족님은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하셨는데, 어떤 것도 단숨에 정의된 이후에 판단의 대상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법은 입법부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조문을 만들고 그 조문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사법부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식으로만 동작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회적 요구나 시대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대법원에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판결을 반복하고, 그를 통해 입법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조상 입법이 사회공동체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반영할 수는 없으니까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은 아직 입법되지 않았습니다. 하여 재판의 결과가 판사에 따라 달라지고 그것은 성인지 감수성을 더 엄격하게 봐야한다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정의의 과정입니다. ‘여론에 떠밀려’라는 말씀을 쓰셨는데, 어떠한 사회적 개념이 형성이 여론으로부터 추동되고 여론과 여론이 공론장에서 맞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형식적으로 건강하지요. 별족님의 견해 역시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둘러싼 하나의 활동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정의가 형성된 이후 그게 법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면 안정적으로 보이겠지요. 특히 별족님처럼 ‘공동체’를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분께는 더 그렇겠네요. 그렇지만 성인지감수성이 판례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 정의는 훨씬 지지부진했을 것이고, 그 지지부진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논의의 완성과 구제를 기다리며 있어야 했을까요.

법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정의하고 심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법이 공동체의 안전과 목표가 개인의 안전과 목표보다 근본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봉건시대 이전의 법이 아니라 사회계약론 이후 등장하여 현대 법의 근간이 되는 법체계들은 국가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헌법만 읽어보셔도, 법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근본 규범인 헌법에조차 얼마나 상세하게 기본권을 정의하고 있는지를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동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대법의 성립 과정을 보았을 때 국가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국민이라는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고 그 개인들의 안전과 권리를 지킴으로서 그 개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를 지킨다는 뜻으로 보는 쪽이 더 타당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추상적인 의미의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법의 1차적 목표라는 별족님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친고죄 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피해자만 고소를 할 수 있다면 가해자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혹은 물리적 권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협박하고 회유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런저런 지배 하에 있을 때, 피해자가 추후에 있을 다른 피해가 두려워 기왕의 피해로부터 보호받기를 포기하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지요. 피해자가 용서했건 말건 가해자를 무조건 잡아 쳐넣어서 피해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포함된 공동체 일반을 지키자-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장혜영 의원의 의사와 다르게 고소가 이루어진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가치판단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장혜영 의원 개인(혹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무관하게 현행법상 그 고소 건은 진행이 될 것이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팩트지요. 그러나 그 고소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별족님의 말씀은, 개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니 개인을 지키는 것이 역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의 하나가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논리가 전제되지 않는 선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사안에서는 더 그렇지요. 어쨌든 그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있는 개별 사건이고, 그 사건의 심판을 통해 공동체의 안전 역시 지켜진다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효과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부수적 이득일 뿐이지, 어떤 목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제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가 지시하는 대상 속에 선명한 개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공동체라는 이름이 그 존재만으로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에 대해 생각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법은 그것들을 생각하고 그 보호막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룩되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견해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다했는데, 주제넘었네요.

별족 2021-02-06 16:37   좋아요 2 | URL
저는 이야기하는 거 좋아합니다.
저는 댓글에 반응한 거고, 받아들인 분이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니 어쩔 수는 없죠. 무언가 알라딘의 중론이 페미니즘에 기운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빼놓고 이야기하고 싶어하신다고도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비꼰다는 느낌을 받으신 것처럼 저는 조금은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습니다.

법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다르네요. 저는 확실히, 자기 자신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 법에 맡겨라, 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신과 나는 동등하다,는 입장이라서, 심판에게 달려가기 전에 그 무엇이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절대적인 열세, 약자,라는 건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 공동체에 대한 말을 할 때 생각한 것은 아래 낙태법 관련해서, 여성주의자들이 아예 모자보건법에서 ‘아이‘를 지우자고 한 부분에 대한 거였습니다.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라,는 말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거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반유행열반인 2021-02-0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먼댓글 달아주신 걸 이제 보고 댓글을 남깁니다.
제가 ‘성적 동의’를 읽은 뒤에 그림책 ‘동의’를 읽고 독후감을 추가로 남겼는데, 아이가 있으시다면 (연령 성별 상관 없이) 권해주시면 별족님께서 마지막 문단에 언급하신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이라, 함께 보시면 동의의 상황과 의미에 대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권해봅니다.
개인이 약자일 수 없다는 건 별족님이 쓰신대로 별족님의 생각일 뿐 모든 관계와 조직 안에는 법이 규정하든, 규정하지 않든 위계와 권력이 형성되고 상대적 약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인간이 인권이 있고, 평등하고, 그런 건 선언이고 지향이지 엄마 자식 간에도, 연인 간에도, 직장 동료 사이에도, 고객과 판매원 사이에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도 지위와 주체 특성에 따라 고정된 건 아니지만 상황마다 자기 뜻을 관철하고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더 가진 쪽이 분명하게 생깁니다. 모두가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소위 사회법이라 분류하는 노동법이, 소비자보호법이 존재하고, 남녀고용평등에관한법률이나 직장내괴롭힘 금지법이 생겨나 약자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예방되거나 침해가 구제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양한 침해 상황의 개개인과 약자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 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미 침해 상황이 발생하고-성폭력 피해가 일어나고, 아동학대 사망 사고가 난 다음- 그 다음에 법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법이 공동체를 안전, 목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도 법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전에 장혜영 의원 관해서 쓰신 글 보면 계속 공동체, 조직을 위하는 선택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개인의 피해와 침해, 고통을 논해야 할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해에 대해 호소와 지지를 바라는 사람에게 딴 소리하는 정도가 심할 때 피해자에게 추가로 상처를 주고, 그것을 2차 가해라고 부릅니다.

별족 2021-02-07 13:11   좋아요 2 | URL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조직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2차 가해‘라는 말의 모호함 때문이 큽니다. 제 이전 글(https://blog.aladin.co.kr/hahayo/12343250)에서 언급한 내용도 그거였구요. 제가 회사의 고충상담원이었으니까요. 남편은 그런 일들이 조직 내 규범을 재정립하는 기회가 될 거라고 했는데, 고충상담원을 하면서 매뉴얼을 보면 그 일을 아예 말도 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규범이 재정립될 수가 있겠어요?

저도 님이 걱정하시는 부분-그러니까, 저의 태도가 피해자 입을 막는 상황- 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역시 가장 최선은 그런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약함을 과장해서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서평도 썼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258284) 생존,이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공쟝쟝 2021-02-07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라지고 바뀌는 사람들에 의해 시대는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확실히 별족님은 남성들에게 더 이입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저역시 그랬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고요..

요즘 그루밍성폭력에 대한 논의가 많잖아요? 아이를 키우시는 분이니 그것에 빗대어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a를 말하고 b를 원하는 사람, 저역시 싫지만 우리는 모두 a와 b를 전혀 구분 못하던 시절을 지나왔지 않나요. 그 시기에 조금은 덜 나쁜 사람들을 만나 부딪히고 깎여나가고 세우고 하며 조금씩 구분의 선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지만, 만약 제게 자원이 더 부족하고 좀 더 취약한 상황이었다면 더 많이 상처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구분을 못하는 취약함을 약점삼아 심리적:성적으로 조종하는 관계가 너무 싫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꼈어요. 꼭 성적 침범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 대한 언어가 생기고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덜 아픈 세상이 되겠죠. 그 상처는 삶의 필연이다 라고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그것은 ‘폭력’이었다라고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저는 좀 더 자유로워졌답니다. 다만 피해자다움 - 가해자다움 논의와 관련해서 저를 피해자다움에 우겨넣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죠. 그래서 그 논의를 해준 장의원이 고마웠고요.

원하지 않았는 데 왜 말하지 않았어?라는 질책을 넘어서는, 왜 특정성별/혹은 특정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구분도 못하게 사회화되는가에 대한 질문과 논쟁들이 페미니즘 안에 많이 들어있어요. 저는 지금 여자들의 무질서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근대의 정치, 법 체계가 어떻게 여성들의 민주주의/동의를 배제해 왔는지 - 그 시작 출발점을 재사유 하려하는 듯 합니다. 기나긴 댓글과 별족님의 심란함(?)에 환기를 주지 않을까 싶어요. 주말 잘 보내세요~

별족 2021-02-07 13:42   좋아요 1 | URL
원하지 않았는데 왜 말하지 않았어?라고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예요.

저는 페미니즘은 이제 싫어요.
봤던 책들도 정리했고(https://blog.aladin.co.kr/hahayo/11542016) 서양의 논리를 그대로 여기 적용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총기소유도 금지되어 있고, 포르노도 금지되어 있고, 서양인에게 여성취급받는 동양인이면서, 그 어디보다 도덕적으로 결벽적인 대한민국에서 서양인들의 논리 가운데 기능했던 페미니즘을 (https://blog.aladin.co.kr/hahayo/12131800) 앵무새처럼 읊으면서 서로를 괴롭히는 게 싫어요.

공쟝쟝 2021-02-07 15:1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굳이 트랙백 달지 않으셔도 돼요 ㅎ 그렇단 이야깁니다! ㅎㅎ

별족 2021-02-08 05:31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의견이 다르다면? 페미니즘을 공부할 생각이 없다면?

트랙백을 다는 것은 제 마음인데요^^
 

오늘은 입춘입니다. 그래도 봄은 오고 꽃이 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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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도 않았으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스트를 나쁘다, 아니다 평가하지 마라. 나도 그 심정 안다. 알지만, 위험하다. 

내용보다는 제목이 슬로건이 더 많은 걸 말해주는 때가 있다. 

내게 페미니즘은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이론으로 넘어가는 단계나, 문화에 대한 상대주의 같은 것이었다. 절대적인 옳음은 없어,라는 태도. 권위에 저항하는 태도, 어쩌면 지금도 다르지는 않은 것도 같다. 나의 답을 내가 찾겠어. 너무 내게 강요하지 마. 

그런데, 지금의 나는 공동체를 위한 좋은 것과 나쁜 것,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페미니스트의 어떤 태도가 지향이 없어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원해서? 라는 질문이 생긴다. 

유명한 페미니즘 슬로건 중에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가 있다. 나도 좋아했던 거 같은데, 한겨레21에서 웬디 덩,에 대한 기사(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874.html)를 읽었다. "깨지 못할 가정은 없다, 단지 노력하지 않는 '샤오싼'만 있을 뿐이다"라는 유머로 맺는 그 기사를 읽고는, 아, 저 슬로건의 현현인가 싶었다. 슬로건의 현현을 눈 앞에서 보고, 슬로건 자체를 회의한다. 법이 정의하지 않는 도덕심, 법으로는 심판할 수 없어도 사람들이 하는 심판,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일부일처제, 가족의 허상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래도 되는가,에 대해 회의하는 거다. 저런 삶을 누구에게 권할 수 있지. 나조차도 싫고, 내가 아는 누구라도 싫었다. 아무런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웬디 덩은 누구보다 나쁘고,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고, 페미니스트인 나를 나쁘네, 나쁘지 않네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타인을 평가하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언가 타인에게 권하고자 하는 주의나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의나 주장에 대한 평가를 수용해야 하지 않나. 나를 평가하는 건 안 되지만, 나는 너를 평가하겠다,고 하면 비난받는 건 당연하다. 너의 이 말은 너의 이 행동과 일치하지 않아,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저 '여자'이기만 하면 변호하겠다는 태도가 '페미니즘'인가. 그저 '페미니즘'이라고만 하면 평판에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게 좋은 태도인가. '나쁘다'는 말이 가지는 추상성 때문에, 오히려, 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되어 버리고, 그러지 말라는 말은 모두 배척당한다. 결국 나는 '페미니즘'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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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01-30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생각보다 이 책 저는 괜찮었어요. 꽤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 책 괜찮다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책입니다. 한번 읽어 보심이...

별족 2021-01-30 09:34   좋아요 2 | URL
^^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겠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슬로건‘에 대한 거였어서. 그래도 역시 이 책을 넣을 거 같아요.
 
보다 두려운 것은 저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80205.html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회사의 성희롱고충상담원,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고 나조차도 만족할 수 없었다. 교육을 받았지만, 질문이 생겼고 질문에 들은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생긴 질문은 이 행위가 정말 조직에 이로운가, 였고 매뉴얼 교육을 받으면서 강사에게 한 질문은 '어떻게, 문제제기가 들어오자마자 분리했는데 주변에서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죠?'였다. 그 때 강사는 조직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직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나는 고충상담원이고 어떤 식으로 개입하게 될 텐데, 사건은 처리하는 과정에도 처리한 후에도 충분히 전파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조직에 막 진입한 사람이 원하는 처벌수위는 지나치게 높아서 원하는 수위보다 낮다고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욕을 먹고, 느리고 긴 처리과정에서 '은폐'라고 욕을 먹는다. 교육받은 사례 중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작은 조직에서 벌어진 걸 처리했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작은 조직이라 피해자거나 가해자, 목격자나 증인, 위원회의 위원, 어디든 걸쳐 있었다면서 외부위원으로 참여한 분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들으면서, 그 모든 행위들이 조직에 도움이 되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춘추전국 이야기를 읽다가 '절영지회'라는 고사를 읽었다. 장왕의 연회에서 갑자기 불이 꺼지고 어떤 신하가 왕을 모시던 미인에게 수작을 건다. 미인은 그 자의 갓끈을 끊고 왕에게 고해서는 그 자를 잡아내라고 청한다. 왕은 불을 켜기 전에 모두의 갓끈을 끊으라고 명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신하는 3년 후에 용맹히 싸워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 성과 관련된 범죄들도 법이라면 경중을 따질 수 밖에 없다. 각각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무게에 맞게 벌을 정해야 한다. 가벼운 죄에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이, 무거운 죄를 막는데 도움이 될까? 갓끈을 끊어놓고 왕께 고하는 미인처럼, 벌을 청한다고 벌을 줘야 할까. 지금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가볍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고, 드러냈기 때문에 더 무거운 벌을 받는 상황이 된다. 무거운 죄라면 피해자가 드러내길 꺼리기 때문에 , 형사법의 처리과정에서 확정되기 전까지 보호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벼운 죄라면, 법으로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개되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균형은 깨어지고 적개심은 커진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는가?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관계의 불균형 가운데, 모호한 정의들로 가득 찬 그 말을 정의는 할 수 있을까?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성폭력,으로 뭉뚱그리고, 그 모든 피해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에 이로운가. 강간과 살인을 같은 무게의 범죄로 보는 것은 순결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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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1-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제발 알라딘의 죽림칠현들이 이런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텐데요.

별족 2021-01-28 09:55   좋아요 1 | URL
댓글은 달아주지 않으시겠죠. ^^

추풍오장원 2021-01-31 09:04   좋아요 0 | URL
느끼는 바도 없는 것 같군요^^

공쟝쟝 2021-01-31 09:20   좋아요 5 | URL
제가 죽림칠현 중에 하나였군요 ㅋㅋㅋㅋ 아 ㅋㅋㅋ 님아 ㅋㅋㅋ 별칭 재밌네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31 20:18   좋아요 3 | URL
어느 지점에서 공감하고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느끼길(그리고 바뀌길) 바라는 건지도 궁금하네요 ㅎㅎㅎ

공쟝쟝 2021-01-31 00: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에 트랙백을 다셨길래 조금더 구체적인 생각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셨을거라 추측해보고, 저의 의견이 더 자세했으면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댓글을 답니다.

1. 제목이 조직에 이로운가 인 부분
저는 정의당의 조직안위에 전혀 관심도 없고, 어떤 연관도 없는 일개 시민입니다. 다만 오랜기간 대의와 조직보위논리로 많은 진보진영의 여성 활동가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꺼내어 말하기 어려워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장혜영 의원의 입장문이 와닿았습니다. 공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진보정당이 척박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의 무려 정의당이니까요. 그의 입장문에 조직에 이로운가를 생각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무겁게 숙고했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당이 아닌 성평등을 외쳐온 정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정치에도, 진보정당의 정치에도 옳은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다니요. 제가 되려 묻고 싶군요. 정의당은 무얼 위해 싸워야 합니까. 공개하지 않는 방법이 정의당 조직에 정말로 이롭습니까?
물론 장혜영을 지지하는 제 초점은 한 동료 시민이자 여성으로서가 더 큽니다. 말하지 않았다면 용기낼 필요 없었고, 용기내지 않았다면 조용했을 거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장혜영이라는 개인과 또 성평등을 외쳐온 국회의원은 그의 표현대로 ‘사건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갇히지 않기로 결단한 그 용기가 어떤 긍정적 징후로 읽혀 뿌듯했습니다. 미투를 비롯해 많은 동료시민 여성들이 용기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정의당이 이 상황을 풀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되려 아주 조금도 없던 정의당에 대한 기대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제겐 장혜영님의 입장문이 조직에 이롭게 느껴집니다.)

2. 인용하신 갓끈에 대해
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구분해야한다 하셨죠. 경중을 따져야한다 하셨죠.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해 더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읽힙니다. (저는 왜 거기서 살아남은 신하가 나라를 구할 거 같지 않고 안희정이 될 것 같죠? .....)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더 큰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인의 직업윤리(?)아닌가요. 희롱, 추행, 강간 다르지요. 그러나 그 모두는 ‘성폭력’ 맞습니다.

덧붙여, 장혜영의 입장문에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진술이 없었던 점은 제가 좋은 글이라고 느끼는 지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뭘했다는 건데, 그건 추행이네/아니네, 여타의 사건에 따라올 자극적 보도들과 언설들... 사법적으로 다투어 결론난사건 마저도 사건 정황에서 피해자의 행동을 탓하며 꽃뱀이니 몰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수대중의 2차 가해를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무엇이 폭력인지 또 무엇이 존엄인지에 대해 미투 이후의 우리 사회가 근본부터 다시 묻고 다시 성찰하고 정립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족 2021-01-31 06:31   좋아요 3 | URL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 조직(정의당)의 안위 따위 관심없다, 2. 작은 죄를 크게 벌하면 큰 죄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거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1. 제가 말하고 싶은 조직은 정의당이 아닙니다. 국가공동체입니다. 저는, 조직이 건강한 상태는 ‘야, 이 미친 놈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추행이 벌어졌을 때 당한 사람이 바로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말 할 수 있고, 그 상황에서 해소될 수 있으면 그건 그대로 건강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못 해, 어떻게 말해?‘라고 하고는 절영지회의 미녀처럼 더 높은 권위로 달려갑니다. 절영지회가 고사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 시대가 왕의 미녀를 추행하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 안에 남성과 여성이 있고, 국가가 여성만을 보호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2. 경중을 따져야 하는 이유는, 장혜영의원이 법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국민들 간 분쟁이 벌어졌을 때, 심판하는 근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큰 질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타가 오히려 정치적 혐오를 키운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지만 정치인은 그러면 안 되지,라는 모순된 말이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일까요? 결국 정치인들이 벌이는 언설을 자기 자신에게도 비춰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그런 자신의 믿음을 법으로 만들어 나를 통제할 사람들인데요.

저는 미투의 처음을 좋아합니다. ‘무언가 성적인 문제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젊은 여성 곁에서 나이든 여성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단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요. 여기서는 그 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라는 위로입니다. 긴 인생에서 짧은 순간, 성적인 문제를 과장해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성적으로 해석하고 바짝 긴장해있는 특정한 시기에 부풀리는 위험들이라고 다독이는 말입니다. 지금의 미투처럼 나의 불안으로 상대를 처벌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공쟝쟝 2021-01-31 08:08   좋아요 6 | URL
미투의 변질에 대한 염려와 불만 잘 알겠습니다. 해일 오는데 조개 줍는 소리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