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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 아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네, 나오자 마자 사서 읽은 거면 결혼하고 이듬해에 읽었겠네. 

두 권짜리고 기억에 나는 큰 사건도 없어서 엄청 어렵게 읽었다. 그 때는 책을 시작하면 끝내야 한다는 주의였어서, 끝까지 겨우겨우 읽었다. 읽고 나서 써놓고 보면 단순한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내 기억 속에서 책 속의 부부는 오해 가운데 말로 할 걸 쌓아뒀다가 이혼한다. 왜 부인이 발가벗고 창가에 서 있었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그걸 보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라고 남편은 혼자 생각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 보면서 바보 멍텅구리들이네, 말을 좀 하지,라면서 읽었다. 

그런데도 살면서 화가 쌓일 때 한 번씩 책 속의 부부가 떠올라 한 번 더 말해 볼 마음을 먹는다. 고마운 책이라서 다시 읽어볼까 해도, 음,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2.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https://blog.aladin.co.kr/hahayo/10409909


이것도 읽기는 2004년쯤 읽고 책에 대해서는 2018년에 썼다. 조금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 고마운 맘이 되서 썼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 입고 자고 씻고 살면서 하는 그 많은 일들 가운데, 같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는 수고를 누가 할 지 하나 하나가 다툼이 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기 전에는 분명하던 희생과 기생이 정말 그러한가, 질문하게도 되었다.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수고도 돈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가정 경제에 누가 더 돈을 쓰는지 싸운 적도 있고, 명절을 앞두고 날카로워졌던 날들도 있다. 지금은 조금은 그런 긴장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까지 있어서, 난이도는 올라갔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오히려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하면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명절 다음 날카로워졌던 그 어느 날 가운데, 너만 힘들었냐? 나도 힘들었어! 라는 남편의 말 다음에, 부모의 다툼에 눈치를 살살 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전을 부쳤다면, 남편은 운전을 했고, 아이들도 그 먼 길을 부모가 부모의 부모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지치고 힘들어도 참은 거니까. 누가 더 힘들었는지는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저 아이가 아이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엄마가 엄마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것, 아빠가 아빠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서로 알아주기로 했다. 명절을 쇠고 집에 도착하면 모두 모두를 안는다. 바리바리 짐을 아빠가 들여놓으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짐을 정리하지는 않았어도 우선 모두 안는다. 서로서로 고생했다며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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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이라는 말이 좀 웃기다.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어떤 종용을 들으면 콧방귀를 흥, 뀌고는 '나는 면민인데, 메롱'한다. 

촌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내 자신이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민이 아니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도시 아닌 곳에서 키우는 것에 걱정을 많이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도시 아닌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분업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는 온전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도시 밖에서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와서 도시 안의 쓰레기를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존재들이 거대한 허영과 우쭐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도시에서 사는 마음은 어리석음이 고양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은 도시국가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자국민의 불만을 식민지로 해소하는 마음은, 작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신이 해 주십사 하는 마음도 어리기 짝이 없지.  



1.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나는 관중이 '촌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관중에 대한 고적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중이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野人' 곧 촌놈이라는 사실이다.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이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오히려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뛰어난 야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순자의 의도와는 물론 다르지만, 점차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이 듣기에 '야인'이라는 말은 꽤 매력적인 말이 아닌가? -p166


 공자가 보는 관중은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다. 예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관중은 예에서 엄격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착하다'(仁). 공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공자 스스로 관중이 인하다고 했는데, 공자가 보는 인은 예에 비해 어떤 것일까? 

 사람이 되어 인하지(착하지) 않으면 예는 알아 무엇 하며 음악은 알아 무엇하리요[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 - 『논어』「팔일 八佾」-p171


도시인의 세련된 친절함이 도시라는 문명 밖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삐딱한 마음으로 본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는 불편이 자신에게는 올 리 없다는 음흉한 마음을 감춘 어린애같은 존재들이라고도 생각한다. 


2. 유교와 여성

https://blog.aladin.co.kr/hahayo/15272244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이런 대목을 만난다. 계속 다르다고, 심정적으로 부인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 저렇게 싸운대? 싶은 서양의 날 선 태도들을 구경하면서, 억압이라면 억압일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걸 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같은 믿음들을 구경한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복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은 억압적인 거라는데, 억압은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3. 논어 

和以不同(화이부동)을 크게 인상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라도 들어본 듯한 논어의 말들,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자왈, 군자긍이부쟁, 군이부당, 군자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투지 않고, 모이지만 무리를 짓지는 않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있으면, 어떤 말들은 그저 파벌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의 그럴 듯한 포장지인가 싶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슨 태도가 필요한가. 

국가를 경영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무리를 가족수준으로 쪼갰기 때문에, 국가가 가능했다. 

춘추전국의 피뿌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정치철학이 유학이다. 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상국가가 조선이다. 

모든 인간은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명분의 대결인 정치의 장이 세 대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파벌을 이루지 않은 군자인 개인들은, 명분의 대결 가운데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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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우리나라랑 조선이랑 무슨 상관이야? 라고 했다. 


나는 중국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족이 오성홍기를 드는 데 거부감은 없지만, 개천절 대신 건국절을 쓰자고 하면 화가 난다. 

이런 내가 나도 신기해서 열심히 생각을 한다. 

중국의 웹사이트에서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표시했다는 기사(https://v.daum.net/v/20231128091302937)를 보면서도 그럼 윤동주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생각한다. 윤동주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부모가 만주에서 낳았는데, 한국인이라고 써야 맞나? 조선인이라고 써야 맞나? 분명히 우리나라 사람이기는 한데, 중국인이라고 써 있으면 기분 나쁜 건 맞는데,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쓰는 게 맞나? 조선족이라고 쓰는 건 틀린가? 

대한민국건국절을 제정하는 것이 오천년 역사를 무화시키는 처사라고 흥분하는 나는, 그럼 국가란 민족국가를 생각하는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여기 살고 있지도 않는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은 우리나라지만 애석하게 나뉘어진 것 뿐이라고도 생각한다.


1. 김성동 천자문

이 책을 따라 쓴 적이 있다.


따라 쓰다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의 정반대 되는 어떤 말을 만났다. 


愛(사랑 애) 育(기를 육) 黎(검을 려) 首(머리 수)

백성을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면, 臣(신하 신) 伏(엎드릴 복) 戎(오랑캐 융) 羌(종족이름 강)모든 오랑캐들도 신하가 되어 엎드리고, -p40


오랑캐,라는 말이 민족,이라면, 여기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없다. 신하가 되어 엎드릴 수 있는 존재, 하나의 국가는 아니더라도 같은 의지로 묶여서 복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 전제조건은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는' 거고. 

검은머리,라는 표현을 백성으로 풀어 쓴 저자는 귀족을 제외하고 노동하느라 검게 탄 사람들을 의미했다고 그래서 백성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이 아니라 백성이다. 백가지 성씨.


2. 춘추전국 이야기

무시무시한 전쟁의 이야기들이다. 무섭게 읽는다.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논쟁한다. 나라가 부강하다는 것은 백성이 많다는 거고, 그 백성들은 전란의 와중에 흩어져서 떠돈다. 더 나은 나라, 덜 착취하고 더 평화로운 나라에 정착한다. 이미 형제를 제후로 봉한 각각의 나라들이 종주국과 제후국이라는 춘추의 질서가 존재했으므로, 각각의 나라는 적대하는 순간에도 그 나라의 국민이 가지는 국가 정체성은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나라,와 나라에 속한 백성은 국가와 국민이 가지는 감각과 같지 않고, 민족국가와 민족이 가지는 감각과도 다르다. 백성,이라는 말은 민족,이라는 말을 지우는 것도 같다. 

이런 말을 옮겼었다. 


위 무후가 중산에 있을 때 이회에게 물었다.
"오나라는 왜 망했습니까?"
"자주 싸우고 자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주 싸워 자주 이기는 것은 나라의 복일진대, 유독 오나라만 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주 싸우면 백성이 피폐해지며, 자주 이기면 군주가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군주로 하여금 피폐해진 백성들을 부리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천하에 드뭅니다. 교만하면 마음대로 하고, 마음대로 하면 극단적으로 사물을 추구합니다. 피폐하면 원망하고, 원망하면 극단적으로 꾀를 부립니다. 아래 위가 모두 극단으로 치닫고도 오나라는 그래도 오랫동안 버틴 것입니다. 이것이 부차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 p162-163, 춘추전국이야기 7 '전국시대의 시작' , 공원국 지음 



3. 한자의 역설

https://blog.aladin.co.kr/hahayo/12511341 )


다른 말을 쓰지만, 글로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본다.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면, 오랑캐라도 신하가 되어 엎드린다'는 태도로 정치한다. 하나의 문자로 모순을 품고,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 

통일로 흐르는 문자를 가지고, 세상을 표현한다. 







4. 종이동물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3547749

언어는, 삶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한 기호다. 

국가는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변화하면서 사람들을 통제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경선도 사람도 변한다.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다. 

누구라도 왕이 될 수도 있을 백가지 성씨의 씨줄이 있고, 그럼에도 하나가 되어 적에 대항해야만 한다. 어쩌면 작은 땅의 제후국에 불과하였더라도, 이 땅에서 우리는 자치권을 잃지 않았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왕이나 신하를 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내 목이 명분이라면 지금 가져가라는 신하도,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내 자손은 사지 없이 태어날 거'라며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는 사신도 부끄럽지 않다. 

부모, 자식의 은유 가운데, 군주와 백성이 존재하는 동아시아 문화 안에서 백성을 보호하려는 지배층의 노력은 눈물겹다. 

어쩌면 전쟁의 순간, 위기의 순간, 우리는 우리,라는 감각을 느낀다. 


여전히 'Korea'인 우리 나라라는 나의 감각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KBS는 이걸 극으로 만들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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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채로, 

2023년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애달픈 사랑이야기인 '연인'에서 길채는 포로가 되어 노예시장에 서 있다. 

가상의 국가 아스달의 두번째 시즌인 '아라문의 검'에서 아스달의 타곤,은 은섬,이 태우는 숲 가운데, 섰다. 


1.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172449

6.25 전쟁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이 책을 읽고, 전쟁,에 대해 썼었다. 


밥 하기 싫어서 뭐라도 생기면 겨우 먹는 배 곯는 원주민을 부러워하는 나는, 전투기의 비행소음이 멋지다고 방방거리는 평화 중에 자란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책 속의 이상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인 젊은 남자는 전쟁을 겪으면서 이상을 놓치는 거였던가. 


나는 전쟁이라는 문명의 허약한 울타리가 부서진 진공의 상태를 책 속에서 보고는 무서웠다. 


2. 나목, 도둑맞은 가난

https://blog.aladin.co.kr/hahayo/14868275


엄마가 내게, '얼마나 배고플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이나 한심함,을 읽는 내내 느꼈다. 


전쟁을 겪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경외심을 갖는다. 내게 배고픔을 일깨워 나를 부끄럽게 만든 엄마는 군인 구경조차 못 한 전쟁을 겪었다지만, 그 삶을 어찌 내가 알겠나 싶은 순간 순간들을 내게 전한다.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를 바 없는 젊은 여자가 참혹한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강인한 거라서, 길을 잃고 헤매고, 비행기에서 우는 그 여자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음을 본다. 




3. 전쟁같은 맛

https://blog.aladin.co.kr/hahayo/14841842


나목,이랑 같이 이 책을 읽고 있어서, 가소롭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나 보다. 

죽이지 않는데도 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리적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른 걸 폭력이라고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괴롭지, 괴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가소롭다고. 

자기 엄마에게 '배 지나갔다고 티 나냐'면서 양공주라도 해서 돈을 가져오라는 압박에 쫓기듯 결혼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위의 책 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읽다가, 동양인은 하나뿐이라고 소수자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면 참. 싶었다. 전쟁의 맛을 모르는 딸이, 엄마가 도망친 세상이 어떤지 모르는 딸이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친절하기를 바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병이, 어머니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해석하는 딸의 어떤 말이 나는 가소롭다. 그렇게 쪼개기만 해서야 사는 게 가능한가 싶은 소수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말들을 참기 어렵다.


전쟁으로 펼쳐지는 무법의 공간에 대해 듣는다. 

시사인인가 한겨레인가, 과거사위원회가 전쟁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전쟁 중에 군인 신분이었던 사람이 오랜 사적인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그 죽음은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전쟁범죄로 최종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길을 걷다가, 명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에 들어가 일가족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기사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참을 수 없었다고 했던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앙심을 품는 데는 이유를 알 수 조차 없다. 

평화 시에 문제삼는 어떤 말들,의 억압은 결국 사라질 수 없다. 그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또 나타날까.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감수하는 불편이 결국 사라질 수 있을까. 


아라문의 검,에서 예언의 아이들,이 꿈꾼다는 세상이 너무 추상적이라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니. 약하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뇌안탈은 어떻게 약한 존재들에게 밀려났는가. 약하면서도 연합으로 강해졌다면, 이제 그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약하고 강하다는 건 불변이 아니고, 거대한 나라에 대해 강한 나라라고 해도 모두 다 강한 건 또 아니고 말이다. 약하다고 해도 뭉치면 강하고, 강하다고 해도 하나 뿐이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다음이,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꿈을 증명하는 공간이 될 테지만,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보복의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연인,에서 길채는 '일하는 언니가 사람들 입길에 올라서 부끄럽다'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사람은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거'라고 말한다. 


살고 죽는, 단순함이 가득 찬 서사 가운데, 수없이 쪼개는 말들이 하찮아서 어떤 괴로움의 토로가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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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

법가에 대한 묘사에서, 대부 이상의 자결을 금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벌을 면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 

권력을 가진 대부는, 벌을 받기보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지지부진한 심판을 피했다. 

'자결하라'라는 명은, 사약을 내리거나, 목을 베어버리거나, 사지를 묶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같은, 벌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혜택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이상의 권력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였다. 죄를 저질러 죽어야 할 때조차,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내어주지 않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현대 법체계 하에서도 자결은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의 가장 큰 처벌은 이뤄지지 않은 지 여러 해인 '사형'이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공소권,없음으로 더 이상의 분별은 이뤄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죽이는, 건 '절대'가 붙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읽고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지만, 책 속에서 이것도 자살인가? 싶은 묘사를 만난다. 

늙어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때,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자살인가? 

나는 자살이라고 생각하는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했다. 

그래 그것도 자살,이라고는 할 수 있겠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라고도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선가, 전신이 마비된 채로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던 남자가 자신을 좀 죽여달라고 청원하는 이야기를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가족들은 반대하고, 그 남자는 청원하는 와중에 나는, 그 남자의 가족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산다는 건 뭘까. 죽는다는 건 뭘까. 

전신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의식이 있는 채로 1~2년?을 보내다가 깨어나는 사람이 쓴 책도 있으니, 나는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나는 연명치료거부 의향서를 미리 써둬야겠다고 생각한다.



3. 나를 찾고 너를 만나

이 책을 읽는데, 자결하는 선비의 묘사가 있다.(아름다운 가풍을 이어가려면, 이라는 쪽글이다)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죽어 여귀가 되어 원수를 갚겠노라 자결하는 형 뒤를 따라 아우가 뒤따라 자결한 묘사 다음에 '그 의리 정신도 장하지만,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를 넘어 서로 한 마음을 이루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는 작가의 말에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에서 죽음을 택하는 선비들을 '장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죽지만, 나를 보아, 너는 움직여 달라,는 걸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어떤 선택으로의 죽음이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공개된 나의 죄를 내 스스로 벌하는 죽음도 있고, 더 이상 내 손으로 내 몸을 건사하지 못할 때 곡기를 끊음으로써 더 빨리 죽음을 당기는 방식도 있다.

더하여, 살아서는 갚지 못하는 갚을 수 없는 나의 깊은 원한을 죽음 후에 갚겠다는 선택인 죽음도 있다.


사는 게 괴롭고 힘든 순간에 다른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죽겠다는 게 뭐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야,라고도 가끔은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게 다 순간이니, 뭐 그러지 말라고 너를 아는 나를 위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나를 아는 너를 위해서라도 어차피 닥칠 죽음을 당길 필요야,라고도 생각한다. 

각각의 다른 이유 가운데, 나는, 우리 사회가 움직이는 어떤 방향이 세번째 죽음을 응원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심난하다. 

괴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괴롭힐 방식을 궁리하다가, 나를 죽이기로 하는 어떤 선택이 싫다. 

그런데, 그런 선택 다음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 죽음을 들어, 죽은 자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태도로 응징하려 든다. 그런 이유인지 아닌지 말할 수 없는 이미 죽은 자를 앞세우고, 무언가 자신의 분노를 덧 씌워서 응징을 하려 든다. 

살아있는 누군가는 그걸 보고, 복수하는 원혼,에 대한 이야기를 또 듣고, 지금 약하고 대책없고 괴로운 자신을 죽이는 건 아닐까.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 


복수던 뭐던 네가 하라고. 가장 좋은 복수는 '잘 사는' 거고, 잊는 거라고, 원망을 가득 담은 유서 같은 거 남기고 죽어서 뭐하냐고. 죽지 말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고. 아무리 나를 괴롭게 했더라도, 나를 죽이지 않았으면 죽이지 않은 거라고. 살라고, 살아서 복수던 뭐던 직접 하라고. 난 너 대신 복수 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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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는 좋은글입니다.

별족 2023-10-19 0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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