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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서평도 썼지만(https://blog.aladin.co.kr/hahayo/10488723) 하지 못한 말들이 꽤 많은 책이다. 

이 책은 부모보다 또래집단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가족의 규모가 작은 현대의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같은 또래집단이라고 해도 여성과 남성에게도 다른 문화적 결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천년을 이어온 남자들의 문화와 여자들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성적 동의,에 대한 반유행열반인,님의 글을 보면서 사무실에서 했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좀 오래 되었다. 아직 코로나 전에 결혼한 삼십대 남자, 여자, 미혼의 여자, 사십대 여자, 나 이렇게 넷이 앉아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먼저 가,라고 하면 먼저 가서 좋아요, 라고 말했다. 구내식당에서 나와 같은 파트에 근무하는 직원이랑 남편까지 같이 합석했었는데, 남편이 빨리 먹었길래 먼저 가라고 했더니 먼저 갔다. 그런데, 동석한 직원(남)이 눈이 동그래져서 나한테 싸웠냐고 물었거든.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먼저 가라고 하니까, 그래, 그러고는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남편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삼십대 여자, 미혼의 여자,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했다. 동석했던 직원처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내가 가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했다. 왜????? 그거야 남편이니까요??? 내가 가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가면 안 되죠. 기다려야죠. 그래야 하는 걸 어떻게 알죠? (삼십대 남)그러니까요, 제가 소개팅을 시켜준 적 있는데, 남자는 분위기 좋았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런데 여자는 싫었다고 하던데, 참 그렇더라구요. 연애하는 중이라면, 여자가 거절의사를 밝혔을 때, 한 번 더 권해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 자리의 2,30대 여성이 모두, 남편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어렸을 때 유머일번지,인가에서 박미선이 나와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말하는 유머가 있었다. 남자와 단 둘이 간 여행지에서 여길 넘으면 짐승,이라고 경고하고 자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다. 킬킬거리면서 웃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A를 말하고 B를 원하는-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더 이상 그런 말은 농담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의 남편의 행동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두 명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대화들에 많이 남자들에 이입하고 있다. 왜 그런 걸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표면과 실질이 다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저렇게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의중을 읽고 약빠르게 행동하는 건 눈치가 있는 일이라고도 하고, 그게 미덕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기 보다, 에둘러 말하고, 가급적이면 거절에라도 두 번은 권하라고도 하지 않는가. 어떻게 성적인 부분에서만 명확할 수 있나. 데리러 갈까?라는 질문에 하는 대답에도 정말 데리러 오지 말라는 건지, 그래도 데리러 가면 좋아할지 알 수가 없는데, 게다가 아니 괜찮아,라고 대답했으면서도 정말 데리러 오면 더 좋은 것도 내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성적 동의,가 나는 법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그걸 법의 처벌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간통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인 채로, 성적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과 강간 아닌 걸 구분할 수가 없다. 그걸 도대체 제 3자가 어떻게 알겠다는 거야? 나의 사생활에 얼마나 개입할 셈인 거야? 법으로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의 존재를 가정한 건 어쩌면 그만큼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 도대체 법률기관에 무슨 짓까지 할 수 있게 할 셈인가. 지금도 '키스, 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남자에게 '그걸 왜 물어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라고 타박하는 여자들이 나오는 연애상담 프로들이 있는데, 이제, 우리 여기 동의서,에 서명부터 할까요?로 시작하라는 건가. 심지어 하면서 중간중간? 그걸 정말 여자들이 원하는 게 맞나?


내가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껍데기에 겁 먹지 마라', '분명하게 말하라'이다. 여자들의 말하는 방식도 동양인의 말하는 방식도, 눈치빠른 한국인의 말하는 방식도 아니겠지만, 좀 더 분명하게 거절하고,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라고 말한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끔은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보수적이고 촌스럽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하기 싫은 걸 하고 싶은 척 할 필요 없다, 이다. 네가 그런 사람이 되고, 상대도 그런 사람인 것처럼 대접하라고.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대접하라고, 네가 원하지 않는 걸 상대가 원한다고 줄 필요 없다고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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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2-05 23: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별족님, syo라고 합니다.
이른바 “알라딘의 죽림칠현들”중의 한 사람이구요.

다른 이웃 서재에 들어갔다가 먼댓글을 통해 타고 왔습니다. 먼저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별족님이 쓰신 다른 글도 읽을 기회가 되었네요. 저와 별족님은 여성주의에 대한 견해가 많이 다르지만 그건 그야말로 견해고 각자의 견해는 각자의 것이라 저는 제 견해를 바탕으로 별족님의 견해에 어떤 영향도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견해라는 것에에 대한 별족님의 견해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요.

다만, 이 페이퍼에는 견해의 문제가 아닌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저는 지금부터 어떤 ‘당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실제를 말하려 합니다. 그런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 표현력의 부족이겠지요.

저도 법에 대해서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별족님께서 법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계시다고 느낍니다.

법은(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법은 주로 사법부를 말합니다. 입법의 영역이라고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적 동의의 판단은 주로 재판에서 이루어지니까요) 판단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많이 있지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고 학술적으로 불확실한 물음들로 폴커 키츠의 <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라는 책에서 드는 예를 그대로 옮겨오면, 대마초는 얼마나 해로운가? 동물도 자극을 느끼는가? 아이들은 두 어머니 혹은 두 아버지보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더 좋을까? 모든 남성 혹은 여성이 하나의 성별만 가질까?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법 이외의 영역에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없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답을 내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가 원고-피고, 피고인의 행위의 옷을 입고 실체적 논점으로서 법정에 들어서면, 법은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게 사법체계의 당연한 성질이고 법치국가의 의무입니다. 별족님과 저야 “그/그녀의 행동은 성적 동의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애매한 행동이다/아니다”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겠지요. 우리는 법정 밖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선명한 판단이 내려져야만 합니다. 법은 결코 ˝그 행동이 범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구요.

그 판단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법관도 사람이고, 증거의 충분 정도에 따라 실체적 진실과는 다른 판단이 내려지는 일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 동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행동을 통해 성적 동의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 사건이 법정에 들어온 이상 반드시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별족님이 당한 피해의 구제를 국가에 요청했을 때, 그 피해를 판단하기 위한 요건사실이나 간접사실이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이유로 피해에 대한 판단을 거부할 수 있는 사법부가 있는 나라에서 사신다면, 별족님은 그 나라가 제대로 기능하는 법치국가라고 믿고 살아갈 수 있으실까요?

성적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과 강간 아닌 것을 구분할 수가 없고, 그걸 도대체 제3자가 어떻게 알겠냐고, 사생활에 얼마나 개입할 생각이냐고 말씀하셨는데, 법이 판단을 한다는 것은 민사건 형사건 소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소송은 피해자(측)에서 제기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즉, 그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행위가 법률적 요건사실들을 충족시키는지에 대한 제3자의 개입을 스스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별족님이 마치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법이 사생활에 개입한다는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별족님께서 그 사건의 양 당사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위치에 스스로를 놓고 이 사안을 보고 계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성적 동의가 법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말씀은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법은 판단하지만 그것을 통해 곧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법은 성적 동의가 이런 것이라고 정의하고 사전에 등재하지 않습니다. 이러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행동에는 성적 동의가 있었다/없었다고 판단한다며 근거를 제시할 뿐이지요. 물론 판례는 축적되고 축적된 판례는 법원이 유사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므로 법적 판단에는 정의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규제력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시민들에게는 법원의 판단이 성적 동의의 사전적 정의보다 더 실효적인 정의로 기능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부수적 효과를 거부하려면 판단 자체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니, 결국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가겠고, 다시 법은 판단한다는 말씀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물론 이 페이퍼에서 별족님이 말씀하신 주된 논지는 이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모호한 태도나 선명하지 않은 동의에 대한 별족님의 견해에는 추상적인 정도의 큰 틀에서 동의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교환할 뜻이 없어서요.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syo였습니다.

별족 2021-02-06 07:53   좋아요 1 | URL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죽림칠현‘이 실체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법에 대해서 가장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9686347) 우리나라가 판례가 지금 그렇게 기우뚱한가, 의문이 듭니다.
모든 법은 정의부터 시작합니다.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정의하지 않고도 지금 여론에 떠밀려, ‘성인지감수성‘이 판례에 들어오고 있고, 이는 비판지점이 됩니다.
정의될 수 없으면 심판할 수 없고, 심판하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범죄에 친고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지금 장혜영의원의 희망과 다르게 개입하게 된 것 처럼요. 법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정의하고 심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법은 개입하게 됩니다. 민사가 아니고 형사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syo 2021-02-06 12:20   좋아요 4 | URL
안녕하세요, syo입니다.

먼저 ‘죽림칠현’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실체가 없을 겁니다. 최소한 저는 죽림칠현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별족님의 다른 글과 그 글에 달린 댓글 속에서 별족님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마치 계몽의 대상이라도 되는 듯 ‘죽림칠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 자체는 별족님이 쓰시지 않았지만, 그 댓글에 대답하시는 별족님의 말씀에서 별족님 역시 ‘죽림칠현’이라고 비유적으로 불릴 만한 어떤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인식하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분의 댓글은 어떤 비꼼과 그 비꼼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의 대화로 보였습니다. 아래에 달린 댓글을 보니 저 말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꼈나보구요. 그래서 저도 맞비꼬겠다는 뜻으로 굳이 작은따옴표로 묶어 ‘죽림칠현들’ 중 한 사람이라고 썼을 뿐입니다.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이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별족님의 생각이니까요. 실제로 사법부나 대법원 같은 기관을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 말은 ‘일단 인권을 지키기 위해 네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래도 안 되면 법에 맡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법조차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하면 더 이상 피해자에게 방법이 없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법원의 자세와 그 긍지를 뜻하는 말이겠지요.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먼저 시도해볼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법이 정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법은 판단하고, 그것을 통해 곧 정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은, 법은 판단의 전제가 될 만큼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의라기보다는 측량에 가깝습니다.

개념의 정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특정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그 분야에서 정의가 되겠지요. 물리에서의 일work라는 개념은 물리학에서 필요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물리에서는 힘이 작용하는 방향과 수직으로 물체가 이동한다면 아무리 무거운 물체를 아무리 멀리 옮기더라도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아니게 되지요. 우리는 물리에서의 일과 일상생활에서의 일이 다르지만, 큰 충돌없이 두 개의 정의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에 물리가 일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일상의 우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서의 정의가 그 영역 밖의 실제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 우리는 정의를 놓고 논의와 합의를 통해 다양한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정의를 만들어나가겠지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그런 논의의 대상이겠네요. 별족님은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하셨는데, 어떤 것도 단숨에 정의된 이후에 판단의 대상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법은 입법부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조문을 만들고 그 조문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사법부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식으로만 동작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회적 요구나 시대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대법원에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판결을 반복하고, 그를 통해 입법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조상 입법이 사회공동체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반영할 수는 없으니까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은 아직 입법되지 않았습니다. 하여 재판의 결과가 판사에 따라 달라지고 그것은 성인지 감수성을 더 엄격하게 봐야한다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정의의 과정입니다. ‘여론에 떠밀려’라는 말씀을 쓰셨는데, 어떠한 사회적 개념이 형성이 여론으로부터 추동되고 여론과 여론이 공론장에서 맞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형식적으로 건강하지요. 별족님의 견해 역시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둘러싼 하나의 활동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정의가 형성된 이후 그게 법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면 안정적으로 보이겠지요. 특히 별족님처럼 ‘공동체’를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분께는 더 그렇겠네요. 그렇지만 성인지감수성이 판례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 정의는 훨씬 지지부진했을 것이고, 그 지지부진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논의의 완성과 구제를 기다리며 있어야 했을까요.

법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정의하고 심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법이 공동체의 안전과 목표가 개인의 안전과 목표보다 근본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봉건시대 이전의 법이 아니라 사회계약론 이후 등장하여 현대 법의 근간이 되는 법체계들은 국가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헌법만 읽어보셔도, 법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근본 규범인 헌법에조차 얼마나 상세하게 기본권을 정의하고 있는지를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동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대법의 성립 과정을 보았을 때 국가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국민이라는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고 그 개인들의 안전과 권리를 지킴으로서 그 개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를 지킨다는 뜻으로 보는 쪽이 더 타당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추상적인 의미의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법의 1차적 목표라는 별족님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친고죄 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피해자만 고소를 할 수 있다면 가해자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혹은 물리적 권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협박하고 회유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런저런 지배 하에 있을 때, 피해자가 추후에 있을 다른 피해가 두려워 기왕의 피해로부터 보호받기를 포기하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지요. 피해자가 용서했건 말건 가해자를 무조건 잡아 쳐넣어서 피해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포함된 공동체 일반을 지키자-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장혜영 의원의 의사와 다르게 고소가 이루어진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가치판단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장혜영 의원 개인(혹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무관하게 현행법상 그 고소 건은 진행이 될 것이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팩트지요. 그러나 그 고소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별족님의 말씀은, 개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니 개인을 지키는 것이 역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의 하나가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논리가 전제되지 않는 선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사안에서는 더 그렇지요. 어쨌든 그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있는 개별 사건이고, 그 사건의 심판을 통해 공동체의 안전 역시 지켜진다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효과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부수적 이득일 뿐이지, 어떤 목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제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별족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가 지시하는 대상 속에 선명한 개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공동체라는 이름이 그 존재만으로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에 대해 생각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법은 그것들을 생각하고 그 보호막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룩되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견해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다했는데, 주제넘었네요.

별족 2021-02-06 16:37   좋아요 2 | URL
저는 이야기하는 거 좋아합니다.
저는 댓글에 반응한 거고, 받아들인 분이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니 어쩔 수는 없죠. 무언가 알라딘의 중론이 페미니즘에 기운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빼놓고 이야기하고 싶어하신다고도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비꼰다는 느낌을 받으신 것처럼 저는 조금은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습니다.

법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다르네요. 저는 확실히, 자기 자신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 법에 맡겨라, 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신과 나는 동등하다,는 입장이라서, 심판에게 달려가기 전에 그 무엇이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절대적인 열세, 약자,라는 건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 공동체에 대한 말을 할 때 생각한 것은 아래 낙태법 관련해서, 여성주의자들이 아예 모자보건법에서 ‘아이‘를 지우자고 한 부분에 대한 거였습니다.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라,는 말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거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반유행열반인 2021-02-0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먼댓글 달아주신 걸 이제 보고 댓글을 남깁니다.
제가 ‘성적 동의’를 읽은 뒤에 그림책 ‘동의’를 읽고 독후감을 추가로 남겼는데, 아이가 있으시다면 (연령 성별 상관 없이) 권해주시면 별족님께서 마지막 문단에 언급하신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이라, 함께 보시면 동의의 상황과 의미에 대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권해봅니다.
개인이 약자일 수 없다는 건 별족님이 쓰신대로 별족님의 생각일 뿐 모든 관계와 조직 안에는 법이 규정하든, 규정하지 않든 위계와 권력이 형성되고 상대적 약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인간이 인권이 있고, 평등하고, 그런 건 선언이고 지향이지 엄마 자식 간에도, 연인 간에도, 직장 동료 사이에도, 고객과 판매원 사이에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도 지위와 주체 특성에 따라 고정된 건 아니지만 상황마다 자기 뜻을 관철하고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더 가진 쪽이 분명하게 생깁니다. 모두가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소위 사회법이라 분류하는 노동법이, 소비자보호법이 존재하고, 남녀고용평등에관한법률이나 직장내괴롭힘 금지법이 생겨나 약자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예방되거나 침해가 구제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양한 침해 상황의 개개인과 약자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 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미 침해 상황이 발생하고-성폭력 피해가 일어나고, 아동학대 사망 사고가 난 다음- 그 다음에 법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법이 공동체를 안전, 목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도 법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전에 장혜영 의원 관해서 쓰신 글 보면 계속 공동체, 조직을 위하는 선택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개인의 피해와 침해, 고통을 논해야 할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해에 대해 호소와 지지를 바라는 사람에게 딴 소리하는 정도가 심할 때 피해자에게 추가로 상처를 주고, 그것을 2차 가해라고 부릅니다.

별족 2021-02-07 13:11   좋아요 2 | URL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조직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2차 가해‘라는 말의 모호함 때문이 큽니다. 제 이전 글(https://blog.aladin.co.kr/hahayo/12343250)에서 언급한 내용도 그거였구요. 제가 회사의 고충상담원이었으니까요. 남편은 그런 일들이 조직 내 규범을 재정립하는 기회가 될 거라고 했는데, 고충상담원을 하면서 매뉴얼을 보면 그 일을 아예 말도 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규범이 재정립될 수가 있겠어요?

저도 님이 걱정하시는 부분-그러니까, 저의 태도가 피해자 입을 막는 상황- 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역시 가장 최선은 그런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약함을 과장해서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서평도 썼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258284) 생존,이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공쟝쟝 2021-02-07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라지고 바뀌는 사람들에 의해 시대는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확실히 별족님은 남성들에게 더 이입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저역시 그랬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고요..

요즘 그루밍성폭력에 대한 논의가 많잖아요? 아이를 키우시는 분이니 그것에 빗대어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a를 말하고 b를 원하는 사람, 저역시 싫지만 우리는 모두 a와 b를 전혀 구분 못하던 시절을 지나왔지 않나요. 그 시기에 조금은 덜 나쁜 사람들을 만나 부딪히고 깎여나가고 세우고 하며 조금씩 구분의 선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지만, 만약 제게 자원이 더 부족하고 좀 더 취약한 상황이었다면 더 많이 상처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구분을 못하는 취약함을 약점삼아 심리적:성적으로 조종하는 관계가 너무 싫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꼈어요. 꼭 성적 침범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 대한 언어가 생기고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덜 아픈 세상이 되겠죠. 그 상처는 삶의 필연이다 라고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그것은 ‘폭력’이었다라고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저는 좀 더 자유로워졌답니다. 다만 피해자다움 - 가해자다움 논의와 관련해서 저를 피해자다움에 우겨넣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죠. 그래서 그 논의를 해준 장의원이 고마웠고요.

원하지 않았는 데 왜 말하지 않았어?라는 질책을 넘어서는, 왜 특정성별/혹은 특정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구분도 못하게 사회화되는가에 대한 질문과 논쟁들이 페미니즘 안에 많이 들어있어요. 저는 지금 여자들의 무질서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근대의 정치, 법 체계가 어떻게 여성들의 민주주의/동의를 배제해 왔는지 - 그 시작 출발점을 재사유 하려하는 듯 합니다. 기나긴 댓글과 별족님의 심란함(?)에 환기를 주지 않을까 싶어요. 주말 잘 보내세요~

별족 2021-02-07 13:42   좋아요 1 | URL
원하지 않았는데 왜 말하지 않았어?라고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예요.

저는 페미니즘은 이제 싫어요.
봤던 책들도 정리했고(https://blog.aladin.co.kr/hahayo/11542016) 서양의 논리를 그대로 여기 적용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총기소유도 금지되어 있고, 포르노도 금지되어 있고, 서양인에게 여성취급받는 동양인이면서, 그 어디보다 도덕적으로 결벽적인 대한민국에서 서양인들의 논리 가운데 기능했던 페미니즘을 (https://blog.aladin.co.kr/hahayo/12131800) 앵무새처럼 읊으면서 서로를 괴롭히는 게 싫어요.

공쟝쟝 2021-02-07 15:1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굳이 트랙백 달지 않으셔도 돼요 ㅎ 그렇단 이야깁니다! ㅎㅎ

별족 2021-02-08 05:31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의견이 다르다면? 페미니즘을 공부할 생각이 없다면?

트랙백을 다는 것은 제 마음인데요^^
 

불편한 이유가 불편해서 아무 말도 못 남겼던 책이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불편하네, 내가 뭐라고 나쁜 말만 남기나, 이러면서 남기지 않았었는데, 이제 내게 책이 없으니 뭐라도 남기기로.  


1.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


나는 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좋은 서평을 보고, 저자의 이 책을 사서 읽었을까. 이게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나. 

책을 읽고 무언가 앙상한 느낌이라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이게 오리엔탈리즘, 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문학적인 느낌이 남았다기 보다, 서양이 동양을 보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뭔가 서양인이 부유해진 것은 달랐단 말이야, 싶은 반발심이 들었다. 

어디라고 달라? 싶은 반발심이다. 




2. 작은 것들의 신


슬픈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배경이 껄끄러워서 집중하지 못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쓰여진 아픈 이야기가, 영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이 이야기의 어떤 면이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이야기의 가장 큰 갈등은 전통적인 카스트제도에서 비롯된다. 카스트제도에 묶여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가장 나중에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카스트,라는 절대 악이 존재했었던 과거의 세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한 지금의 인도가 묘사되기 때문에, 영국인이 좋아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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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가지가 기억에 남아서, 게다가 너무 개인적인 거 같아서 그러나 저러나 짧은데도 서평에는 못 쓰고


1. 랑랑별 때때롱

외계인-다른 별의 다른 존재니 외계인이 맞는 말일 텐데, 동화적인 세계속이라 그저 사람이다. 먼 별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동화인데, 나는 매 끼니 같은 걸 먹는 이 사람들의 식탁 묘사에, 아 작가는 매 끼니 고민하는 수고를 아는 사람이구나,라고 고마워했다. 

정말 밥하는 게 너무 힘든 날들이 있었다. 

먹을 게 없다며 밥상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도 남편도 미운 날들에, 가난하여 단촐한 매 끼니 같은 식사에 대한 조금은 장황한 책 속의 묘사가 고마웠다. 





2, 쿠쿠스 콜링

여기서 기억에 남는 건 택시를 탈 수 없어서 걸어가는 묘사. 주머니에 남은 돈과 남은 거리를 한참을 계산하는 가난한 탐정의 묘사, 였다. 

사람은 참 신기하지, 주머니에 돈이 있고, 걸어갈 때는 그런 마음이 안 되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걸어갈 때는 다 나를 보는 것처럼 비참한 심정이 되는 게 왜 그런 걸까. 가난한 탐정이 주머니에 돈을 셈하면서 걸어가는 가난의 묘사가 꽤나 길었어서, 그 묘사가 꽤나 생생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을까?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다. 


3. 삼체

면벽자인 중국인에게 고용된 중국의 군인이 서양인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서양인은 이유를 다 알아야 하나? 나는 군인이고 시키는 일을 하는 거지. 왜 시키는지 알 필요는 없어. 뭐 이런 대사였는데, 내가 그 서양인처럼 이유를 알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서 기억에 남았다. 

복종에 대해 생각했던가. 가끔 이유를 알지 못하고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알고 한다는 게 인간에게는 오만한 일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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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잔을 찾아서

대학 때, 뭔가 여성주의적인 영화라고 봤다. 상황은 잘 기억이. 

계급이 분명히 다른 두 여자가 뭔가 사람을 찾는 이야기였는데, 잘 기억은 안 난다. 기억나는 건, 시작. 미용실에서 온 얼굴의 털을 미는 장면이다. 왜? 왜? 왜?

티비에서 다리털을 밀고 실크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왔을 때도 역시 그런 느낌. 왜? 왜? 왜?

고등학교 때 친구는 '있잖아, 나는 아깝다. 잘 먹고 잘 자서 이렇게 내 몸에 있는 것들인데 아깝잖아'라고 여자애치고는 잘 보이는 팔뚝 털을 조금은 어루만지면서 말했었다. 그 친구가 그 말을 하면서 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했다. 폭식이나 나쁜 습관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고 있는 동안 내 몸을 받쳐주는 내 몸에 생겨난 나의 살들도 그렇게 아깝다고. 그 진지한 표정을 기억하고 있어서, 얼굴털을 다리털을 싹 다 밀어버리는 여자들이 이상했다. 내 몸인걸, 나는 좋아한다구. 이건 어쩌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같지만 묘하게 다른. 

털을 미는 문화가 개화되기 전에 있었을까, 많은 불편부당하다고 분노하는 것들이 서구화와 근대화 가운데 우리에게 들어온 건 아닌가 싶다. 서양여자들은 저렇게 털을 싹 다 밀어???이러면서 놀라면서 봤던 기억이. 

  


2.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남장여자인 김윤희가 대물이 되는 이유는, 남자들 안에 있는 위계와 문화를 아예 모르기 때문이다. 왕만이 지나갈 수 있는 문으로 성큼 걸어들어가려는 여자는 궁정의 문화나, 여러 불가능한 일들-저질렀을 경우 큰 벌을 받게 되는 일들-에 대해 무지하다. 아예 알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남자들의 눈에는 대범하게 보인다. 

여자들에게는 여자들의 문화가 있다. 남자들이 '사회'라는 구조를 만들면서 쌓아올린 어떤 규칙들처럼, 여자들은 여자들의 방식 가운데 판단한다. 위계 대신 친소로 새로운 관계 가운데서 판단을 한다. 김윤희같이 글을 배운 여자라면, 여자들 가운데서도 남자들 가운데서도 쉽지는 않겠다. 





3. 사막의 꽃

소말리아 출신의 수퍼모델, 아프리카 여성할례를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 직접 쓴 수기의 제목은 자신의 이름 와리스에서 왔다. 사막의 꽃은 소말리아 어로, '와리스'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오래 전에 읽었는데, 모든 수기들이 그러하듯이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글로는 주제가 하나, 집중된 게 읽기 좋겠지만, 삶은 그런 게 아니니까, 삶을 쓴 글이다. 

나는, 사막에서의 삶을 묘사할 때, 부유함,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의 부유함이 무엇을 치른 댓가인가, 이런 생각. 묘사된 사막의 삶에서 부유한 적 없던 와리스의 가족은 고기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줄 수 있을 때 베풀어야 하는 문화는 어쩌면 저장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가난이 아닌 공동체를 본 나는 부러웠다. 나눠먹을 사람들이라, 나는 만들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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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천도룡기 

이국의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다. 몸으로 칼로도 싸우지만 입으로도 싸우면서 "아프지 말고 살다가 죽어라"라고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건 덕담처럼 들리지만 악담이라면서, '비명횡사'를 바라는 말이라고 해서 놀란다. 아, 오래 산다는 건 늙고 아픈 걸 피할 수 없는 거라는 걸, 그 옛날 사람들도 알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정말 안 아프고 오래 살다가 죽기를 바라는 구나, 맥락없이 터무니없게,라는 자각을 했다.





 

 

 

2. 5학년 3반 청개구리들 

절판이고 그림도 없지만 무언가 넣고 싶었다. 언제 읽었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남아서 아직도 답을 모르겠는 질문이 있다.  

책 속에서 아이는 부모에게 집안의 어려움을 나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청한다. 아이인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부모의 그런 말은 나에게 부담이 되므로 부모가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뭐 이런 말이었던 거 같다. 그 때 나는 그게 이상했다. 그리고 여전히 모르겠다. 아이도 가족인데, 집안의 어려움을 몰라야 할까? 알아야 할까? 아이가 받아들이는 무게감이 부모와는 다를 수 있으니, 부모가 보호자로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아이였던 나는 부모가 부모의 어려움을 내게 한마디도 안 한다면 좋을까? 

책 속의 아이와 다르게, 나는 알기를 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도 알기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수 있기를. 나의 부모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기 힘들 거 같다. 

그래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입장이 되었을때, 상대의 모든 말이 그저 변명같을 때,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싶은 순간들이 있어서, 여전히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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