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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다,는 말은 감정적인 인상이 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찌르는 것,과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 무엇이 더 잔인한가?라는 이야기를 하릴없을 때 하릴없이 한 적이 있다. 

잔인하다,라는 한자어는 역시 칼,이지만(殘忍 죽을사변에 남을잔(창(戈:창과)이 두 개나 겹쳐있다),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 말이 가지는 감정적인 느낌은 저런 질문을 만든다. 

잔인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풀이에 보이는 인정머리 없다,라는 건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어떤 마음이 뭘까,라는 무얼 더 보기 힘들어 하는가,란 질문도 만든다. 

어떤 걸 더 보기 힘들어하나, 인간이라면 응당, 무엇을 더 못 참는가. 

책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같지만 다른 잔인함에 대해 생각한다. 


1.상나라 정벌

이 책을 읽을 때, 인간은 잔인하다,라고 생각했다. 

모든 초기 문명에서 나타난다는 인신공양, 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초보적인 문명의 단계, 인간이 상상하는 어떤 것, 지금은 '잔인하다'나,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도 생각한다. 잔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했다. 

내버려 두면, 잔인해지기 때문에 악착같이 가리고 숨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이야기라서, 너는 그렇지만, 나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인정머리 없다,와 잔인하다,는 말에서 인정머리,라는 것이 얼마나 문화적인 것인가,도 생각한다. 

신께 드릴 게 없어서, 귀한 사람의 절박한 비명이 하늘에 닿게 하는 종교적 묘사들 가운데, 인간의 잔인함을 보는 거다. 제사는 그런 것이었지만, 그런 게 아닌 척, 이제 인간은 그걸 감추고 숨겨서 그럴 듯하게 인정머리를 연기하고 있다. 

 

2. 원청 

제국이 사라진 광대한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본다.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칼 뿐 아니라 총을 들고도 사람들은 서로를 도륙한다. 


묘사가 일상적이라, 충격을 받는다. 

밥을 먹는 일처럼, 귀를 자르는 비적의 묘사가 있다. 도시의 사람을 납치해서, 돈을 요구한다. 귀를 잘라 협박하는 비적의 무리는 다시 자리잡는 문명이나 제도 아래서, 사람들 사이로 흩어져 섞인다. 

내 옆에 선량한 누구라도, 복수와 원한 가운데, 칼을 들고 일어서서 그 대상만큼 혹은 그 대상을 넘어서는 잔인함을 또 보여줄 수 있다. 피로 갚는 피, 가운데, 인간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위태롭고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다. 



3. 인어사냥

잔인함을 묘사하고 있지만, 좀 결벽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봤자 인간은 아니다, 라고. 

잔인무도한 나는, 이입하는 대신 물러선다. 

그런 약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인 나는 아마도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지만, 그런 종류의 잔인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선량함에는 의구심을 가진다. 

인간은 잔인하지만, 어떤 종류의 인간은 그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죽여 먹을 수 없을 만큼 예민하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었다. 





4. 영화들 : 귀멸의 칼날:무한성편1, 체인소맨레제, 주술회전:회옥,옥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된 잔인함은 너무 과해서 보기 어렵다. 

머리가 터지고, 사지가 잘리고,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인간이 아니라고, 다른 존재라고, 악마거나 귀신이거나, 악귀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잔인함이 눈 앞에 전시된다. 


나는, 그걸 구분할 수 없다고, 인간은 잔인하고, 알 수 없는 게 아니냐고 질문한다. 

잔인하고, 잔인한 동아시아에서, 잔인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들을 본다. 

신께 바치는 고귀한 자의 비명을 위해 잔인할 수도 있고, 팽배한 자본주의 하에서 돈을 위해서도 잔인해질 수 있고,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이나 안위를 위해서도 잔인해질 수 있다. 

혹은 그 잔인함을 상대에 대한 재정의로도 행할 수도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잔인함이란 어디까지 그 범주를 늘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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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1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나라 청동제기는 매우 정교한 문양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현대의 기술로도 복원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근데 이 세공작업이 노예들을 비인간적 환경에서 노동시킨 결과라고 합니다.게다기 갑골문에서도 전쟁포로들을 인신공양한 기록이 많다고 합니다.주가 상에 역성혁명을 일으킨 주된요인을 상의 이런 잔혹한 통치행위를 문제삼은 것이였지요.
 

큰 딸이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너무 재밌다고 도파민 폭발,이라고 했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 새삼 놀라면서, 지금 뒤늦게 호응하는 독서가들도 궁금하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겨우 겨우 읽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도 핫했는데, 그 때도 읽어보려고 했었다는 걸 읽기 시작하고 생각났다. 모르는 이야기가 아닌데, 싶더라. 그 때는 음, 스물일곱에 자가용을 몰면서 월세를 받아 사는 젊은 여자의 도입을 참아내질 못한 거 같다. 게다가 그때의 나는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있었으니 그 여자가 제도권 페미니스트,들을 조롱하는 것도 기분나빴을 거다. 여러 종류의 감정으로 젊은 나는 이 책을 보다 말았지만, 지금의 나는, 딸이 좋아한 건 뭘까, 궁금하고, 지금 다시 이 책이 핫하다는 것도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다. 그러고도 결국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어쩌면 궁극의 미러링?인가, 싶은 내용이지만, 어디서 도파민이 터지는 거지. 

그러고는, 미친 사람이 쓴 건 못 읽겠어, 게다가 삶의 수고로움이 없는 주인공은 재수없어, 라고 딸에게 감상을 말했다. 

미친 사람이 화자인 이야기, 나는 못 읽겠어,라는 나의 말에 딸은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알려줬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란 책 뒤에 직소,라는 단편이 붙어 있다고. 가롯 유다, 관점에서 쓴 이야기라고, 재밌었다고 했다. 

그래서, 읽었다. 단편이라니, 좋아,라면서 읽었다. 


다 읽고는 말했다. 

멀쩡하던데??

직소의 화자는 강민주,처럼 단호한 확신이 없다. 강민주가 가지는 자기확신, 을 나는 혐오한다. 상대를 돈으로 호감으로 조종하면서,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그 말들이 싫었다. 생각해보면, 강민주가 그대로 화자가 아니라, 약간은 강민주를 비추는 작가시점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강민주가 주인공인데, 화자는 아니야. 그런데, 강민주는 자기확신에 도취된 스스로 교주같은 인물이니까 내가 못 봐주겠는 거다. 이입할 수도, 응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직소는 화자이면서 주인공이니까, 그 모든 스스로의 혼란이 드러나고, 나는 그 혼란에 이입할 수 있는 거지. 갈팡질팡, 우왕좌왕.


어찌보면, 직소는 강민주의 숭배자가, 강민주를 쏘고 나서 하는 긴 고백같다고도 볼 수 있는데, 나는 스스로를 신격화한 존재에 이입하기 보다, 내 옆의 범부에게 더 이입하기 쉬운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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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늙어서 보수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요.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요.

별족 2025-09-24 06:40   좋아요 0 | URL
젊어서는 안 읽었어요. 역시^^
그 말은 참 싫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진보와 보수,는 책임을 지고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어서 가능하다던 이상은 책임지는 위치에서 가능하지 않으니까, 조용해집니다. 저는 부모고, 집 안에 실권자?인데 집 안 조차 평등하고 자유롭고 차별 없게 못 하니까요. 다섯명 뿐인데도요. 그런데, 젊은이였을 때는 수천, 수만, 수백만, 수천만인 나라가 평등하고, 자유롭고, 차별없기를 큰 소리로 말했으니 뭐-_-;;;
 

1. 남편과 아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네, 나오자 마자 사서 읽은 거면 결혼하고 이듬해에 읽었겠네. 

두 권짜리고 기억에 나는 큰 사건도 없어서 엄청 어렵게 읽었다. 그 때는 책을 시작하면 끝내야 한다는 주의였어서, 끝까지 겨우겨우 읽었다. 읽고 나서 써놓고 보면 단순한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내 기억 속에서 책 속의 부부는 오해 가운데 말로 할 걸 쌓아뒀다가 이혼한다. 왜 부인이 발가벗고 창가에 서 있었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그걸 보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라고 남편은 혼자 생각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 보면서 바보 멍텅구리들이네, 말을 좀 하지,라면서 읽었다. 

그런데도 살면서 화가 쌓일 때 한 번씩 책 속의 부부가 떠올라 한 번 더 말해 볼 마음을 먹는다. 고마운 책이라서 다시 읽어볼까 해도, 음,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2.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https://blog.aladin.co.kr/hahayo/10409909


이것도 읽기는 2004년쯤 읽고 책에 대해서는 2018년에 썼다. 조금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 고마운 맘이 되서 썼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 입고 자고 씻고 살면서 하는 그 많은 일들 가운데, 같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는 수고를 누가 할 지 하나 하나가 다툼이 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기 전에는 분명하던 희생과 기생이 정말 그러한가, 질문하게도 되었다.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수고도 돈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가정 경제에 누가 더 돈을 쓰는지 싸운 적도 있고, 명절을 앞두고 날카로워졌던 날들도 있다. 지금은 조금은 그런 긴장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까지 있어서, 난이도는 올라갔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오히려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하면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명절 다음 날카로워졌던 그 어느 날 가운데, 너만 힘들었냐? 나도 힘들었어! 라는 남편의 말 다음에, 부모의 다툼에 눈치를 살살 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전을 부쳤다면, 남편은 운전을 했고, 아이들도 그 먼 길을 부모가 부모의 부모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지치고 힘들어도 참은 거니까. 누가 더 힘들었는지는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저 아이가 아이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엄마가 엄마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것, 아빠가 아빠 몫의 힘듬을 견뎠다는 걸 서로 알아주기로 했다. 명절을 쇠고 집에 도착하면 모두 모두를 안는다. 바리바리 짐을 아빠가 들여놓으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짐을 정리하지는 않았어도 우선 모두 안는다. 서로서로 고생했다며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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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이라는 말이 좀 웃기다.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어떤 종용을 들으면 콧방귀를 흥, 뀌고는 '나는 면민인데, 메롱'한다. 

촌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내 자신이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민이 아니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도시 아닌 곳에서 키우는 것에 걱정을 많이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도시 아닌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분업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는 온전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도시 밖에서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와서 도시 안의 쓰레기를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존재들이 거대한 허영과 우쭐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도시에서 사는 마음은 어리석음이 고양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은 도시국가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자국민의 불만을 식민지로 해소하는 마음은, 작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신이 해 주십사 하는 마음도 어리기 짝이 없지.  



1.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나는 관중이 '촌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관중에 대한 고적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중이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野人' 곧 촌놈이라는 사실이다.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이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오히려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뛰어난 야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순자의 의도와는 물론 다르지만, 점차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이 듣기에 '야인'이라는 말은 꽤 매력적인 말이 아닌가? -p166


 공자가 보는 관중은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다. 예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관중은 예에서 엄격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착하다'(仁). 공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공자 스스로 관중이 인하다고 했는데, 공자가 보는 인은 예에 비해 어떤 것일까? 

 사람이 되어 인하지(착하지) 않으면 예는 알아 무엇 하며 음악은 알아 무엇하리요[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 - 『논어』「팔일 八佾」-p171


도시인의 세련된 친절함이 도시라는 문명 밖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삐딱한 마음으로 본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는 불편이 자신에게는 올 리 없다는 음흉한 마음을 감춘 어린애같은 존재들이라고도 생각한다. 


2. 유교와 여성

https://blog.aladin.co.kr/hahayo/15272244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이런 대목을 만난다. 계속 다르다고, 심정적으로 부인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 저렇게 싸운대? 싶은 서양의 날 선 태도들을 구경하면서, 억압이라면 억압일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걸 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같은 믿음들을 구경한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복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은 억압적인 거라는데, 억압은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3. 논어 

和以不同(화이부동)을 크게 인상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라도 들어본 듯한 논어의 말들,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자왈, 군자긍이부쟁, 군이부당, 군자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투지 않고, 모이지만 무리를 짓지는 않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있으면, 어떤 말들은 그저 파벌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의 그럴 듯한 포장지인가 싶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슨 태도가 필요한가. 

국가를 경영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무리를 가족수준으로 쪼갰기 때문에, 국가가 가능했다. 

춘추전국의 피뿌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정치철학이 유학이다. 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상국가가 조선이다. 

모든 인간은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명분의 대결인 정치의 장이 세 대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파벌을 이루지 않은 군자인 개인들은, 명분의 대결 가운데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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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우리나라랑 조선이랑 무슨 상관이야? 라고 했다. 


나는 중국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족이 오성홍기를 드는 데 거부감은 없지만, 개천절 대신 건국절을 쓰자고 하면 화가 난다. 

이런 내가 나도 신기해서 열심히 생각을 한다. 

중국의 웹사이트에서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표시했다는 기사(https://v.daum.net/v/20231128091302937)를 보면서도 그럼 윤동주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생각한다. 윤동주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부모가 만주에서 낳았는데, 한국인이라고 써야 맞나? 조선인이라고 써야 맞나? 분명히 우리나라 사람이기는 한데, 중국인이라고 써 있으면 기분 나쁜 건 맞는데,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쓰는 게 맞나? 조선족이라고 쓰는 건 틀린가? 

대한민국건국절을 제정하는 것이 오천년 역사를 무화시키는 처사라고 흥분하는 나는, 그럼 국가란 민족국가를 생각하는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여기 살고 있지도 않는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은 우리나라지만 애석하게 나뉘어진 것 뿐이라고도 생각한다.


1. 김성동 천자문

이 책을 따라 쓴 적이 있다.


따라 쓰다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의 정반대 되는 어떤 말을 만났다. 


愛(사랑 애) 育(기를 육) 黎(검을 려) 首(머리 수)

백성을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면, 臣(신하 신) 伏(엎드릴 복) 戎(오랑캐 융) 羌(종족이름 강)모든 오랑캐들도 신하가 되어 엎드리고, -p40


오랑캐,라는 말이 민족,이라면, 여기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없다. 신하가 되어 엎드릴 수 있는 존재, 하나의 국가는 아니더라도 같은 의지로 묶여서 복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 전제조건은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는' 거고. 

검은머리,라는 표현을 백성으로 풀어 쓴 저자는 귀족을 제외하고 노동하느라 검게 탄 사람들을 의미했다고 그래서 백성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이 아니라 백성이다. 백가지 성씨.


2. 춘추전국 이야기

무시무시한 전쟁의 이야기들이다. 무섭게 읽는다.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논쟁한다. 나라가 부강하다는 것은 백성이 많다는 거고, 그 백성들은 전란의 와중에 흩어져서 떠돈다. 더 나은 나라, 덜 착취하고 더 평화로운 나라에 정착한다. 이미 형제를 제후로 봉한 각각의 나라들이 종주국과 제후국이라는 춘추의 질서가 존재했으므로, 각각의 나라는 적대하는 순간에도 그 나라의 국민이 가지는 국가 정체성은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나라,와 나라에 속한 백성은 국가와 국민이 가지는 감각과 같지 않고, 민족국가와 민족이 가지는 감각과도 다르다. 백성,이라는 말은 민족,이라는 말을 지우는 것도 같다. 

이런 말을 옮겼었다. 


위 무후가 중산에 있을 때 이회에게 물었다.
"오나라는 왜 망했습니까?"
"자주 싸우고 자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주 싸워 자주 이기는 것은 나라의 복일진대, 유독 오나라만 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주 싸우면 백성이 피폐해지며, 자주 이기면 군주가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군주로 하여금 피폐해진 백성들을 부리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천하에 드뭅니다. 교만하면 마음대로 하고, 마음대로 하면 극단적으로 사물을 추구합니다. 피폐하면 원망하고, 원망하면 극단적으로 꾀를 부립니다. 아래 위가 모두 극단으로 치닫고도 오나라는 그래도 오랫동안 버틴 것입니다. 이것이 부차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 p162-163, 춘추전국이야기 7 '전국시대의 시작' , 공원국 지음 



3. 한자의 역설

https://blog.aladin.co.kr/hahayo/12511341 )


다른 말을 쓰지만, 글로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본다. 

'친자식처럼 아껴 기르면, 오랑캐라도 신하가 되어 엎드린다'는 태도로 정치한다. 하나의 문자로 모순을 품고,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 

통일로 흐르는 문자를 가지고, 세상을 표현한다. 







4. 종이동물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3547749

언어는, 삶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한 기호다. 

국가는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변화하면서 사람들을 통제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경선도 사람도 변한다.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다. 

누구라도 왕이 될 수도 있을 백가지 성씨의 씨줄이 있고, 그럼에도 하나가 되어 적에 대항해야만 한다. 어쩌면 작은 땅의 제후국에 불과하였더라도, 이 땅에서 우리는 자치권을 잃지 않았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왕이나 신하를 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내 목이 명분이라면 지금 가져가라는 신하도,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내 자손은 사지 없이 태어날 거'라며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는 사신도 부끄럽지 않다. 

부모, 자식의 은유 가운데, 군주와 백성이 존재하는 동아시아 문화 안에서 백성을 보호하려는 지배층의 노력은 눈물겹다. 

어쩌면 전쟁의 순간, 위기의 순간, 우리는 우리,라는 감각을 느낀다. 


여전히 'Korea'인 우리 나라라는 나의 감각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KBS는 이걸 극으로 만들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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