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못 합니다. '학'적인 책으로 그런데로 선택하는 것은 가끔 '여성학'이라던가, '심리학' 종류인데, 그런 것도 나름대로 쉽다,던지 재밌다,던지로 유명한 책들만을 겨우 읽을 수 있습니다. 생태학 책으로는 '생태학을 잡아라'라는 책을 읽은 적 있고, '에코 페미니즘'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지요.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작년 11월 말까지 이런 책들 독후감 공모가 있어서 응모할까, 하고 샀습니다. 그런데, 마감일까지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읽었으면서, 누군가 물어보면 '절대로' 재미있는 책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읽는 내내 아주 흥미진진하였습니다. 속도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책 속의 내가 질문하고 답하면서 나아가는 그 지적인 행로에 내가 동참하는 방식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매번 다른 국면에 마주치면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나아가면서 또 그만큼 생각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공연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기를 택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조금은 서둘러 끝내버린 것처럼 나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남긴 화두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는가' 또는 '고릴라가 사라지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에 나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걸 알게 되고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을 때 하나하나 선택의 국면에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 편협한 애정을 가진 나는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위해 성금을 보내어, 제 1세계에서 사라진 어떤 생명체의 빈자리에서 자라난 농산품을 또 많은 생명체를 위협하는 운송수단들을 통해 이동하게 할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대한 치료를 원하는 누군가에게 '신은 모두를 위해 지구를 만드셨고, 삶과 죽음은 신의 일'이라고 그래서 동물을 이용한 신약개발을 더이상 할 수 없다고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내내 이스마엘이 내게 가르친 것이 결국은 이런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 이건 다른 식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공연되는 삶은 전 생태계의 측면에서는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만 이기적인 지금의 문화가 약한 '인간'을 보살피라고 하는 것에 저는 여전히 끌리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그렇지만, 저와는 다른 배경을 가졌기 때문인지 이 훌륭한 선생님의 말씀은 잔인한 상상들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언제나처럼 서양의 이야기들은 분명히 좀 더 피와 살이 튀는 것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오독한 누군가가 지금의 경쟁적인 과학발전을 인간 종간의 진화를 위한 경쟁으로 받아들인다면, 더더욱 속도를 늦추지 않겠구나, 무기들을 포기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제가 언제나 무서워했던 것은 아주 작은 그룹이었음에도 모두를 살육하던 역할맡은 자들,이란 존재였기 때문에, 지금 제 배경에서는 그게 '서양인'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이 훌륭한 선생님이 가르쳐 준 삶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혹은 그 삶을 크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건 '동양인'인 저에게는 피해자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합니다. 가해자인 '서양인'이 이 삶을 택할 수 있다면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지도 않고, 그건 내 책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육식의 종말'처럼 말입니다. 기독교를 배경으로 카인의 역사를 이어온,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을 계속해온, 세상을 쪼개어 과학이라 이름붙인 사람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다른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논리적이지만 무서운 책이었습니다. 논리적이어서 설득되었지만, 그 길로 나를 당기기에는 무언가 끌림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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