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외식을 간 레스토랑에서 남편이 메이저리그에서 삼진으로 상대를 잡은 투수가 걸어들어가는 상대타자에게 '싯 다운, 보이'라고 외친 이야기를 했다. 백인 투수고, 흑인 타자였고, 흥분한 흑인 타자는 달려나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렇게 외친 백인 투수도 흑인 타자도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 https://www.news1.kr/sports/overseas-baseball/6216619 )

배재고가 광주일고와의 야구경기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를 응원구호로 사용한 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되는지 반면교사처럼 이야기된다고 한다. ( https://www.yna.co.kr/view/AKR20260701190851007

나는, 아이들은 어른 말을 안 듣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벌을 주고, 훈계하는 게 이런 작금의 사태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세대 간에 반발이 존재한다면, 지금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는 아이들의 감정을 봐야 하는 게 아닌가. 교육과 설득과 벌. 그게 작동할까. 그게 작동했으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겠어?라고 했지. 


나는 혐오표현에 대해 법제화를 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성희롱에 대해서도 차라리 따귀를 올려붙여!라고 말하는 입장이다. 


격렬하게 몸이 부딪치는 스포츠 경기장에서 말로 상대를 흔들기 위해 애쓴다는 걸 안다. 

이런 분쟁들이 소수자 공동체, 상처받는 소수자 공동체가 자신의 약점을 이마에 붙이고 전장에 서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얄짤없이 긁힙니다,라고 이마에 붙이고 전장에 서는 전사,같다. 심지어 그 말에 긁히지 않는다면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흥분하면 이길 수 없는데, '들으면 반드시 흥분하고, 흥분해야만 하는' 말이 있고, 그 말을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존재가 어떻게 결국 승리할 수 있단 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예지원이 프랑스 여행을 가서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 예능에서 나왔을 때, 댓글로 '당신은 인종차별당했어요!'라고 알려주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https://cafe.daum.net/ok1221/9Zdf/1519030 )인종차별이 심해서 주문을 받지 않는 카페에 한참 앉아있었다는 유럽 여행객 이야기에 키득거리는 나는, 말들을 줄 세우고 '이건 이 그룹이 화낼 말' 금지, '이건 이 그룹이 화낼 말' 금지,라고 꼬리표를 달고, 화가 안 났어도 화 내야 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차라리 무대응이 나을 때도 있고,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같은 온도의 대응보다 차가운 무시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거든. 모르면 모르는 데로 흔들릴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상관없이 잘 사는데, 왜? 싶다.  

세상에는 적의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싸움은 언제 어떻게 벌어질 지 알 수 없는데, '들으면 반드시 흥분하고, 흥분해야만 하는 말'을 이마에 써붙이고 싸우는 존재,라니 과연 이길 수 있나, 싶은 거다. 

'네가 그 말에 긁히더라도 들키지 마라'라고 아이에게 말할 나는, 혐오표현이 힘을 얻는 것은 언제나 대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자라서 안 되'라는 말이 나를 긁어도, '아씨, 여자고 자시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라고 안 하는 편이 내 신상에 이롭다는 거지. 그런 말을 쓰면 안 되,라고 상대를 설득하기 보다, '아씨 어쩌라고'하고 말겠다는 거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6-07-06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바입니다^^
 

아침에 인스타릴스에서 귀여운 꼬마 동영상을 봤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다가와서 말걸고 개를 쓰다듬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자기 개는 진도개가 아니고 시고르자브종이라고 하는 거다. 시고르자브종,이라는 견종도 있구나,라고 그렇게 보아넘기고는 아침밥 먹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 번뜩 알아차렸다. 

시. 골. 잡. 종. 

눈으로만 볼 때는 몰랐는데, 여즉 넷상에서 여러 번 만났던 그 이상한 견종, 나는 모르는데 꽤나 익숙하게들 알고 있는 그 견종이 시!골!잡!종!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다. 

깜짝 놀라서, 알고 있었어?라고 중1 딸래미한테 물어봤다. 

아니. 

나중에 대딩 딸래미한테 물어봤다. 

응. 

알고 있었구나. 그래.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언어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에, 끼리끼리 또 만들어 내는 중에, 내가 모르는 게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데. 이걸 모른다고, 또 역시 아는 사람들끼리 나를 비웃을 수도 있었겠다, 싶어서 억울했다. 

믹스견, 잡종, 이 뭐 어때서! 내가 아는 말로 안 부르고, 이상하게 부르냐는 억울한 마음이다. 

시간은 흐르고, 언어는 달라지고, 그 달라지는 언어를 모두 다 따라잡기에는 내가 너무 힘든데, 내가 쓰던 말은 옛날 사람의 옛날 말이 되고, 새로운 말들이 자꾸 자꾸 나온다. 결국 같은 걸 가르키는 그저 '말'일 뿐인데도, 달라져서 어리둥절하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꼈느니, 옥가락지를 꼈느니 하고 있는 거 같달까. 

그저 옛날 말인 건 참을 수도 있는데, 무식한 말이거나, 개념없는 말이 되는 건 억울하다. 

재밌어서 바꿨어요, ㅋㅋ 정도면 덜 억울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6-06-20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첨에는 시로르자브종 이라는 말을 들어보고 새로운 견종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참 누가 맨 먼저 말했는지 참 위트가 있더군요^^
 

오랜만에 뉴스 헤드라인이 노동조합소식이다.

남편은 삼성전자 노조가 주장할 만 하지,라고 하는데, 나는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장은 싫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노동조합의 투쟁은 언제나 가치관의 투쟁이라고, 아직도 순정하게, 지금 여기 이 집회에 선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게 돈이 아니라서, 지금 저 자본과 권력은 두려워하는 거야, 라고 (  https://blog.aladin.co.kr/hahayo/9213188 생각해왔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삼성노조의 말들에 동조하지 못한다. 

후배에게 '알지? 진급이 빠르면 퇴직도 빠른 거?'라고 말했던 게으르고 조직 내 성장에 뜻이 없는 나는, 노동조합이 '영업익의 15%'를 주장하는 게 무슨 가치관의 투쟁인지 모르겠다. 기업의 흥망성쇠 안에서도 노동조합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기를 바라는 나는, 흥망성쇠의 파도 그대로 내게 댓가를 달라는 요구에 의문을 품는다. 

삼성전자에 다니던 선배가 '성과급 잭팟이 터지면, 퇴사 메일을 여러 통 받는다'고 말했을 때, 저런 식의 성과급 배분이 조직에 이로운가,라는 생각도 했다. 

노동조합과 회사가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둘은 적어도 같은 하나의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회사 노조가 인사이동에 대한 이런 저런 안건을 내놓을 때, 공동의 목표,는 없나 싶어 의심을 품었을 때처럼, 지금, 삼성노조의 말에 '공동의 목표'는 없어?라는 의문을 가지는 거다. 

성과급,은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가장 확실한 도구고, 어쩌면 삼성전자는 그걸로 여태 회사를 경영해왔다. 그러고는 지금, 그 도구를 스스로 체화하고 다른 많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 아래 서서 회사와 대결하는 노조를 만났다. 


대규모 노동조합들이 스스로의 이익에 집중해왔던 그 많은 세월 가운데

( https://blog.aladin.co.kr/hahayo/10547220 ) 이제 나는, 노동조합이 다른 가치관의 투쟁이 아닐 수 있다고, 그저 그런 이익집단,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둘이 싸우게 내버려 둬,라는 남편의 입장도 아니고, 나는 이제 회사는 망하던지 말던지? 그런 주장을 하는 게 노조라고?라고 어쩌면 국가의 개입을 원하는, 젊은 날 대적하려던 꼰대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9140.html


카스피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caspi/16358277 )을 통해 칼럼을 보았다. 매체의 지면을 가진 기자가 칼럼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기자는 '여자가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임신출산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걸 아무도 공공연히 말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남자들이 속으로는 젊고 어린 여성을 원하더라도,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건가? 

나는 임신이나 출산,이 어리고 젊은 여성이 가지는 권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기자의 태도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광수의 질문이나 그 질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낸 매체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람을 나이로 차별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끝없이 동안,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스스로 그걸 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묻는 여자 출연자들이 떼로 나오는데, 그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권력은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종류의 힘이고, 짝짓기가 이뤄지는 공간에서 힘의 우열은 확실히 젊고 어린 여성에게 있다. 다루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위태롭고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기는 해도, 그게 힘이 아닐 수는 없다. 

그래서, 여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언니'라는 호칭은 가끔 모멸이나 무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 언니,와 남자들도 있는 데서 부르는 언니,는 다르다는 걸 여자들은 안다. 

불편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은, 어쩌면 문명의 도구이고, 우리는 말을 해야만 한다. 말이 실질과 다르더라도, 그 말과 실질을 맞춰 보면서 상대를 탐색하고 그 말 가운데 서로를 옭아매면서 내가 아닌 남을 이해하고 더 깊은 관계들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뭐, 신문사 데스크의 기자님과 내가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내밀한 영역까지 공개하고 있는 그런 연애프로그램 가운데, 둘의 대화를 어디까지 공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까. 공공의 영역에서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늘어나서, 이제 방송이 점점 내밀한 영역으로 파고 들어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귄다,는 무슨 의미일까?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누군가는 극혐,이라고 해서 저 사람이 생각하는 사귐,과 내가 생각하는 사귐,이 다른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기사는 2010년의 기사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HOB3FJA8J

남자가 생각하는 사귐과 여자가 생각하는 사귐은 다르다,고 기사에서 남자는 '독점성-한 눈을 팔지 않는다'이 '스킨쉽'보다 중요하고, 여자는 '스킨쉽' 다음으로 독점성,을 말한다. 2010년 미혼의 성인남녀가 생각하는 이 '사귐'에 대한 의미는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십대가, 이십대가, 삼십대가, 사십대가, 오십대가 생각하는 사귐은 또 얼마나 다를까? 

짧은 릴스에서 여자들이 지금 세대의 남녀는,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성교도 하면서도, '사귀자'라고 말하지 않는 관계는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본다. https://www.news1.kr/entertain/celebrity-topic/5244445


결혼하기 전에는 성교는 없다는 '사랑이 뭐길래'의 지은이(하희라가 연기했는데,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대발이(최민식이 연기함)가 부모에게 '책임질 일을 했다'고 말 한 걸 알고 펄펄 뛰면서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냐'고, '그러면 결혼을 왜 하냐'고 운다. 유튜브 링크를 걸고 싶었는데 못 찾겠다-_-;;;)를 아는 늙은 여자인 나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길래, 성인은 미성년자와 사귀면 안 된다는 거지 의아해 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성년을 사귀는 성인의 태도는 미성년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성교를 기다릴 수 있는 사귐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라고 노래하는 박지윤을 상상하는 거지. 이미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늙은 여자를 우습게 보는 어린 여자애가 자신만만하게 어른 남자와 호감을 쌓아가는 걸 상상하는 거다. 그런 호감을 쌓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가능해진 모든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과외하던 학생과 성인이 되어 만나서 결혼했다는 썰이나, 오래 알던 동네 동생과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걸 상상하는 거다. 


여비서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주장하고 부인은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관계 가운데, 심리적 지배를 통한 그루밍이라고 동조하는 여성단체의 옹호를 남편이 수긍하길래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다. '도대체, 여자는 몇 살이나 처먹으면 자기 의지로 성교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했지. 서른살도 넘은 배울만큼 배운 여자가, 사리분별을 못 해서 그러하였다,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동조해 주는 게 화가 났었다.


남자들이 위계와 권력에 민감하다면, 여자들은 성적인 긴장에 민감해서, 자신의 권력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아버지와 관계를 발전시킨 양귀비를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처럼 '사귄다'를 생각하면, 미성년과의 연애가 문제가 되려면, 성적착취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일 텐데, 그건 정말이지 당사자성이 드러나는 거라서 알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나는 한 사람이 강간당했다고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면, 혹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 편할 데로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로 믿어준다. 

나는 또 내가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하지, '갖고 놀다가 버려진 사람'이나 '그루밍성폭력을 당한 어린애'로 인식되길 원하지 않는다. 


'팡쓰치의 첫사랑낙원'(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에서도, '종이인형'(https://blog.aladin.co.kr/hahayo/9937231) 에서도 소녀들은 위태로운 관계 가운데서 선택에 맞닦뜨린다. 팡쓰치도 팡쓰치에 대해 쓴 린이한도 살아남지 못했다. 종이인형,의 소녀는 '자신만의 젊은 남자'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제 수명은 하릴없이 늘어나서, 어디까지 성인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존재한다. 뭐 뇌과학적으로는 스물다섯까지도 성장은 계속되니, 스물다섯 넘은 사람이 스물다섯 안 넘은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어디 명문화시켜서 처벌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 성장,이라는 것이 실패한 사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 할 건가.  

https://www.youtube.com/watch?v=HuJhMzelz4o


도대체, 이 많은 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5-03-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남들이 보기에 연애하는 사이(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도-잠자리 포함-)처럼 보여도 한쪽이 우린 서로 사귄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건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별족 2025-03-22 18:06   좋아요 0 | URL
그런다데요. 왜 그러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