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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귄다,는 무슨 의미일까?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누군가는 극혐,이라고 해서 저 사람이 생각하는 사귐,과 내가 생각하는 사귐,이 다른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기사는 2010년의 기사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HOB3FJA8J

남자가 생각하는 사귐과 여자가 생각하는 사귐은 다르다,고 기사에서 남자는 '독점성-한 눈을 팔지 않는다'이 '스킨쉽'보다 중요하고, 여자는 '스킨쉽' 다음으로 독점성,을 말한다. 2010년 미혼의 성인남녀가 생각하는 이 '사귐'에 대한 의미는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십대가, 이십대가, 삼십대가, 사십대가, 오십대가 생각하는 사귐은 또 얼마나 다를까? 

짧은 릴스에서 여자들이 지금 세대의 남녀는,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성교도 하면서도, '사귀자'라고 말하지 않는 관계는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본다. https://www.news1.kr/entertain/celebrity-topic/5244445


결혼하기 전에는 성교는 없다는 '사랑이 뭐길래'의 지은이(하희라가 연기했는데,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대발이(최민식이 연기함)가 부모에게 '책임질 일을 했다'고 말 한 걸 알고 펄펄 뛰면서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냐'고, '그러면 결혼을 왜 하냐'고 운다. 유튜브 링크를 걸고 싶었는데 못 찾겠다-_-;;;)를 아는 늙은 여자인 나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길래, 성인은 미성년자와 사귀면 안 된다는 거지 의아해 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성년을 사귀는 성인의 태도는 미성년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성교를 기다릴 수 있는 사귐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라고 노래하는 박지윤을 상상하는 거지. 이미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늙은 여자를 우습게 보는 어린 여자애가 자신만만하게 어른 남자와 호감을 쌓아가는 걸 상상하는 거다. 그런 호감을 쌓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가능해진 모든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과외하던 학생과 성인이 되어 만나서 결혼했다는 썰이나, 오래 알던 동네 동생과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걸 상상하는 거다. 


여비서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주장하고 부인은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관계 가운데, 심리적 지배를 통한 그루밍이라고 동조하는 여성단체의 옹호를 남편이 수긍하길래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다. '도대체, 여자는 몇 살이나 처먹으면 자기 의지로 성교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했지. 서른살도 넘은 배울만큼 배운 여자가, 사리분별을 못 해서 그러하였다,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동조해 주는 게 화가 났었다.


남자들이 위계와 권력에 민감하다면, 여자들은 성적인 긴장에 민감해서, 자신의 권력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아버지와 관계를 발전시킨 양귀비를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처럼 '사귄다'를 생각하면, 미성년과의 연애가 문제가 되려면, 성적착취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일 텐데, 그건 정말이지 당사자성이 드러나는 거라서 알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나는 한 사람이 강간당했다고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면, 혹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 편할 데로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로 믿어준다. 

나는 또 내가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하지, '갖고 놀다가 버려진 사람'이나 '그루밍성폭력을 당한 어린애'로 인식되길 원하지 않는다. 


'팡쓰치의 첫사랑낙원'(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에서도, '종이인형'(https://blog.aladin.co.kr/hahayo/9937231) 에서도 소녀들은 위태로운 관계 가운데서 선택에 맞닦뜨린다. 팡쓰치도 팡쓰치에 대해 쓴 린이한도 살아남지 못했다. 종이인형,의 소녀는 '자신만의 젊은 남자'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제 수명은 하릴없이 늘어나서, 어디까지 성인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존재한다. 뭐 뇌과학적으로는 스물다섯까지도 성장은 계속되니, 스물다섯 넘은 사람이 스물다섯 안 넘은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어디 명문화시켜서 처벌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 성장,이라는 것이 실패한 사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 할 건가.  

https://www.youtube.com/watch?v=HuJhMzelz4o


도대체, 이 많은 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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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남들이 보기에 연애하는 사이(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도-잠자리 포함-)처럼 보여도 한쪽이 우린 서로 사귄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건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별족 2025-03-22 18:06   좋아요 0 | URL
그런다데요. 왜 그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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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2726.html


친구들과 하는 밴드에 친구가 퍼놓아서 다 늦게 보게 되었다. 


나는 남녀공용화장실도 싫고, 트랜스젠더의 여성스포츠 참여도 싫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0641897

파리올림픽에 외팔이 탁구선수를 본 기억이 있어서 기사를 검색했다. 누군가는 모멸적인 언어라고 하겠지만, 딱 이렇게 검색했다. '파리올림픽 외팔이 탁구선수'. 

내가 생경한 이유는 그 선수가 비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기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 나는 그 선수가 '왜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까?'라고 의구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비장애인을 다 이겼나보네, 라고 답하고 치워버렸다. 


스포츠는 차별적이지 않다. 그저 신체의 탁월함을 겨루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 운동선수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탁월하다면, 저 외팔이 탁구선수처럼 경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 운동선수는 없었기 때문에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여성스포츠라는 장르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고, 핸디캡이 있지만 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장르다. 1군이 아닌 2군 야구처럼,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에,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핸디캡이 없는 사람의 참여를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이 차이, 자체를 인정하는 나는, '여성'이 핸디캡인 장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즐기기 위해 함께 뛰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나? 그렇지만 여성,이라는 장르에 트랜스젠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거다. 소수자,여서 그 불편을 이해하려 해도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더라도, 여자 목욕탕에 성기를 덜렁거리면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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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5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냥 살림집에는 ‘엄마아빠 누나오빠 동생‘ 누구나 ‘똑같은‘ 화장실을 쓰지만,
한집안이니까 ‘그냥 화장실‘입니다.

온갖 사람이 뒤섞인 바깥(사회)에서는
한집안과 다르기에 화장실을 나누고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곳도
그저 알맞게 나눕니다.

‘나누기‘가 모두 차별이지 않고,
‘살림집에서 한집안이 함께 쓰는 화장실‘처럼 사회 모든 곳이 똑같이 가야
평등이지 않다는 대목을,
이러한 길을 눈여겨보고 읽을 때에
비로소 ‘공정(정의)‘을 이룰 텐데 싶습니다.

정의로운 외침이 너무 많은 오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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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이 기사(https://v.daum.net/v/20250118115805741) 를 보았다. 

나는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선명하기보다 흐릿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아빠랑 정치이야기를 하던 대학생일 때, 나는 아빠의 어떤 말이 수긍이 되었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디테일은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 그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에 뛰쳐나갈 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네가 지지하는 그 대통령이 그 정당이 (아빠가 농사짓던) 마늘을 수입하고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의 주제는 우루과이라운드였을까? 자신의 이해관계에 목소리 높이지 않는 아빠는 국가운영에 그게 필요할 수 있는데, 왜 수용하지 않는지 데모하는 농민에 이입하지 않았다. 아빠는 수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높이는 목소리, 투쟁에 굳이 동참하지 않았던 거다. 

아빠의 태도에서 나는 명분에 대해 생각한다. 투쟁의 명분이 나의 이익이기만 한 것은 부족하다고, 정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의 명분에 동조할 수 있을 때라야 나의 어떤 주의나 주장은 힘을 얻는다. 


나는 16년부터 19년까지 본부의 여직원회장이었다. 

16년에 처음 본부 여직원회장 임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목표는 여성의 날,을 모두 알게 하자,는 거였어서 여성의 날에 플래카드를 달고 기념품을 만들어 회원들이랑 나눠가졌다. 월에 5천원 회비를 떼는 모임이지만,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을 들어야 했다. 내부적으로 그런 요구를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적개심을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그 해 연말에 회사에서 나눠주는 수첩에 '여성의 날'을 표시해달라고 했을 때였다. 진지하다면 진지하겠지만,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담당자는 정말 그걸 해 주기 싫어했다. 왜 그러지? 유엔에서 지정한 날인데,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의문에 내년에는 넣어야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미 그 해에 알라딘에서 댓글을 달면서 (https://blog.aladin.co.kr/775792147/8734437) 또 그런 적개심을 느꼈던 터라, 좀 더 진지하게 논의들을 읽어 나갔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동조자를 구하기 보다, 자신의 주장에 명분을 싣기 보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너는 나쁜 거라고 선을 긋고, 설득하고 설명하기 보다 '공부나 하고 와'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와중에 20살 무렵부터 내 자신을 정의하던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하지, 뭐,라는 심정이 되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는 알라딘에서 어그로를 끌어서 조회수를 좀 높였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412572 ) (https://blog.aladin.co.kr/hahayo/13424042 )


1. 윤석열은, 역대대선 최다득표로 대통령이 된 걸 아는가?

2. 문재인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면 정권이 이렇게까지 넘어갔을까?


3. 지금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국민의 힘, 만큼 촛불시민의 어떤 말들을 다시 중간지대를 없애고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프레시안의 그 기사가 싫었다. 여자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바라는 게 같지도 않다. 광장에 여자들이 많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그 모두를 당겨오는 게 희망적인가 질문한다. 

사람들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편을 선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 윤석열대통령이 탄핵되고 체포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지는 심정은 노무현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졌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 대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좀 더 조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은 그렇게 진지하지는 않은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뉴스를 보면서 '둘 다 똑같네' 소리 밖에 안 나오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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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님 글에 쓰는 먼댓글인데, 먼댓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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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서점의 붐업에 옌롄커,를 읽어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보다는 옌롄커를 생각한 거였고요. 

그리고 수상발표가 뉴스 아래쪽에 깔렸을 때 놀라서 남편에게 말하면서 '음, 나는 한강 싫어하는데, 약해빠져서'라고 덧붙였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시적 문장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서, 한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말하는 누구라도 나는 그걸 들어줄만큼 인내심이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책장에는 200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이 있네요. 


그러다가, 논란이 된다는 다른 소설가의 품평도 읽고 - 역사왜곡이다, 옌렌커를 줬어야 한다,는 식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202457 -,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싫어할까, 나는 왜 옌렌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826912 )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식민지 인도의 어떤 소설이 제국 영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우리나라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달까요. 



 

노벨상은 권위가 있는 상이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가 시상하는 상이고, 자신의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이야기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상이라고 해도 시상자의 의도라는 건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이 서구의 문화를 대할 때와 다른 문화권을 대할 때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옌롄커의 책으로 골라 받은 건 '딩씨마을의 꿈'-국가가 매혈을 장려하는 가운데, 마을 하나에서 에이즈가 창궐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었으니, 한강이나 옌롄커 둘 중 누가 받았더라도 자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서구문명의 아나키즘적 지향-정치는 뒤로 종교는 앞으로-은 문학상에서 선호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역시, 한글 처럼 사용자가 작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아이들은 결핍이 없을 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 시상자의 의도 어쩌구 하는 제 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으로 보이겠지만, 이제 제 다음 세대는 그 뜻 그대로 들리겠지요. 


강인한 한국 여자인 저는 한강의 여주인공들보다 토지의 서희가 더 좋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스웨덴 한림원이 상상하는 한국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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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0-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먼댓글이 안되어 있어용^^

별족 2024-10-14 06:17   좋아요 0 | URL
왜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_-;;;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셨으니 되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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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시대는 달라졌는데 끝나지 않은 길채와 장현의 싸움'(https://v.daum.net/v/20231129163006011)을 봤다. 

애초에, 나는, 장철의 태도가 젊은 여자애들을 앉혀놓고 분노를 부채질하는 어떤 이론가나, 젊은 남자애들을 모아 너의 가난이 사회와 제도 탓이라고 또 분노를 부추기는 어떤 이론가와 같은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칼럼은 장철을 보수주의자로, 지금의 넥슨 이슈를 거짓 이슈라고 생각한다. 


이미 GS 손가락 포스터 논란도 있었고,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칼럼의 태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아이템의 인벤토리 '기어코 또 터져버린 '그 손 모양'' https://www.youtube.com/watch?v=U1SGOLMIzPQ 도 보았다. 


그러고도, 한겨레와 경향의 뒤늦은 이슈화와 이어지는 민우회의 집회, 계속되는 반박에 나는 다시 질문한다. 계속 말하면 그게 바뀔 수도 있나?


나는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한 걸까. 


혐오표현은 검열이나 억압으로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이미 쓴 다음( https://blog.aladin.co.kr/hahayo/15033625), 게임에서 집게손가락 이슈가 터졌다. 혐오표현을 금지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상황에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말을 못 했다. 


나는 넥슨의 발빠른 대응이 맞다고 생각한다. 넥슨도 뿌리도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댓서라는 일러스트 팀장도 사과해야 한다고, 달노도도 사과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열심히 말하니까, 진짜로 이게 넥슨의 갑질인 것처럼 사람들이 믿네, 싶어서 당황하고 있다. 나는 뭘 보고, 넥슨의 발빠른 사과가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던가. 내가 이 사건에서 싫어한 건 뭐였나. 


여자들은 조직에 관심없어서 조직 내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 라는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결국 그건 못 찾고 그 사람의 다른 유튜브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yhoSyyCUU )

조직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 나도 내가 조직에 관심 없는 내 자신을 자각한다. 

댓서는 조직에 속해서 일러스트를 그리는 심지어 팀장이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문제가 될 만한 말을 썼다.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조직에 관심이 없고, 자신은 그림만 잘 그리면 다른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까. 

유리천장에 대해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여성 고위직을 찾아 온 젊은 여직원들 앞에서 그 여자 임원은 '여자들은 일만 잘 하면 다른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그게 문제라고 말했던 것도 같다. 일을 잘 한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보지 못한다. 연구자의 일에는 연구비를 따는 것도 있고, 개발자의 일에는 하지 못하는 걸 설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조직의 목표에 동의하지도 않으면서, 조직의 일을 하고, 그 일을 잘 했다고 스스로 능력있는 거라고는 할 수 있을까. 


나는 공무원에게 정치의 자유가 없고, 공무원에 준해서 공공기관 임직원에게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데 불만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좁고 나는 모르는 전장이 펼쳐진다. 

집게손가락,을 남성혐오표현으로 쓰면서 한남,이라고 소추,라고 조롱하는 여자들이 뭉쳐서 낄낄거린다. 그걸 여기 저기 '은근슬쩍 스리슬쩍'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은 모든 손가락을 의심할 수 있다. 

절집의 만(卍)자가 외국인 관광객을 놀라게 할 수 있어서 표식을 바꾸는 중이라면, 우리는 조심할 수 있다. 

의도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고, 남자가 그렸다고 변명하는 대신, 죄송하다,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왜 여성노동권의 침해고, 페미니즘 백래시인가. 

그저 이 싸움을 찻잔 속의 싸움으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렇지만, 일베를 축출했던 기억이 있어서, 적어도 집게손가락에 그저 없던 일처럼 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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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3-12-19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별족님은 우리가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마주칠수 밖에 없는 모호함에 대한 태도, 그리고 좋든 싫든 결국 이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시는것 같아 감사합니다.
요즘 알라딘에 올라오는 글들은 마치 한 사람이 다른 닉네임으로 같은말만 반복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참 읽기 힘든데(이상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별족님의 글은 참 반갑습니다.

별족 2023-12-20 06:37   좋아요 1 | URL
제가 아빠한테 양비론자다!라고 했던 것처럼 이런 모호한 태도는 인기가 없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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