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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님 글에 쓰는 먼댓글인데, 먼댓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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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서점의 붐업에 옌롄커,를 읽어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보다는 옌롄커를 생각한 거였고요. 

그리고 수상발표가 뉴스 아래쪽에 깔렸을 때 놀라서 남편에게 말하면서 '음, 나는 한강 싫어하는데, 약해빠져서'라고 덧붙였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시적 문장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서, 한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말하는 누구라도 나는 그걸 들어줄만큼 인내심이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책장에는 200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이 있네요. 


그러다가, 논란이 된다는 다른 소설가의 품평도 읽고 - 역사왜곡이다, 옌렌커를 줬어야 한다,는 식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202457 -,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싫어할까, 나는 왜 옌렌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826912 )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식민지 인도의 어떤 소설이 제국 영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우리나라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달까요. 



 

노벨상은 권위가 있는 상이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가 시상하는 상이고, 자신의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이야기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상이라고 해도 시상자의 의도라는 건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이 서구의 문화를 대할 때와 다른 문화권을 대할 때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옌롄커의 책으로 골라 받은 건 '딩씨마을의 꿈'-국가가 매혈을 장려하는 가운데, 마을 하나에서 에이즈가 창궐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었으니, 한강이나 옌롄커 둘 중 누가 받았더라도 자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서구문명의 아나키즘적 지향-정치는 뒤로 종교는 앞으로-은 문학상에서 선호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역시, 한글 처럼 사용자가 작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아이들은 결핍이 없을 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 시상자의 의도 어쩌구 하는 제 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으로 보이겠지만, 이제 제 다음 세대는 그 뜻 그대로 들리겠지요. 


강인한 한국 여자인 저는 한강의 여주인공들보다 토지의 서희가 더 좋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스웨덴 한림원이 상상하는 한국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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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0-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먼댓글이 안되어 있어용^^

별족 2024-10-14 06:17   좋아요 0 | URL
왜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_-;;;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셨으니 되었습니다. ㅋ
 

한겨레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시대는 달라졌는데 끝나지 않은 길채와 장현의 싸움'(https://v.daum.net/v/20231129163006011)을 봤다. 

애초에, 나는, 장철의 태도가 젊은 여자애들을 앉혀놓고 분노를 부채질하는 어떤 이론가나, 젊은 남자애들을 모아 너의 가난이 사회와 제도 탓이라고 또 분노를 부추기는 어떤 이론가와 같은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칼럼은 장철을 보수주의자로, 지금의 넥슨 이슈를 거짓 이슈라고 생각한다. 


이미 GS 손가락 포스터 논란도 있었고,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칼럼의 태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아이템의 인벤토리 '기어코 또 터져버린 '그 손 모양'' https://www.youtube.com/watch?v=U1SGOLMIzPQ 도 보았다. 


그러고도, 한겨레와 경향의 뒤늦은 이슈화와 이어지는 민우회의 집회, 계속되는 반박에 나는 다시 질문한다. 계속 말하면 그게 바뀔 수도 있나?


나는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한 걸까. 


혐오표현은 검열이나 억압으로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이미 쓴 다음( https://blog.aladin.co.kr/hahayo/15033625), 게임에서 집게손가락 이슈가 터졌다. 혐오표현을 금지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상황에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말을 못 했다. 


나는 넥슨의 발빠른 대응이 맞다고 생각한다. 넥슨도 뿌리도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댓서라는 일러스트 팀장도 사과해야 한다고, 달노도도 사과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열심히 말하니까, 진짜로 이게 넥슨의 갑질인 것처럼 사람들이 믿네, 싶어서 당황하고 있다. 나는 뭘 보고, 넥슨의 발빠른 사과가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던가. 내가 이 사건에서 싫어한 건 뭐였나. 


여자들은 조직에 관심없어서 조직 내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다, 라는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결국 그건 못 찾고 그 사람의 다른 유튜브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yhoSyyCUU )

조직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 나도 내가 조직에 관심 없는 내 자신을 자각한다. 

댓서는 조직에 속해서 일러스트를 그리는 심지어 팀장이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문제가 될 만한 말을 썼다.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조직에 관심이 없고, 자신은 그림만 잘 그리면 다른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까. 

유리천장에 대해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여성 고위직을 찾아 온 젊은 여직원들 앞에서 그 여자 임원은 '여자들은 일만 잘 하면 다른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그게 문제라고 말했던 것도 같다. 일을 잘 한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보지 못한다. 연구자의 일에는 연구비를 따는 것도 있고, 개발자의 일에는 하지 못하는 걸 설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조직의 목표에 동의하지도 않으면서, 조직의 일을 하고, 그 일을 잘 했다고 스스로 능력있는 거라고는 할 수 있을까. 


나는 공무원에게 정치의 자유가 없고, 공무원에 준해서 공공기관 임직원에게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데 불만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좁고 나는 모르는 전장이 펼쳐진다. 

집게손가락,을 남성혐오표현으로 쓰면서 한남,이라고 소추,라고 조롱하는 여자들이 뭉쳐서 낄낄거린다. 그걸 여기 저기 '은근슬쩍 스리슬쩍'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은 모든 손가락을 의심할 수 있다. 

절집의 만(卍)자가 외국인 관광객을 놀라게 할 수 있어서 표식을 바꾸는 중이라면, 우리는 조심할 수 있다. 

의도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고, 남자가 그렸다고 변명하는 대신, 죄송하다,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왜 여성노동권의 침해고, 페미니즘 백래시인가. 

그저 이 싸움을 찻잔 속의 싸움으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렇지만, 일베를 축출했던 기억이 있어서, 적어도 집게손가락에 그저 없던 일처럼 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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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2-19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별족님은 우리가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마주칠수 밖에 없는 모호함에 대한 태도, 그리고 좋든 싫든 결국 이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시는것 같아 감사합니다.
요즘 알라딘에 올라오는 글들은 마치 한 사람이 다른 닉네임으로 같은말만 반복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참 읽기 힘든데(이상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별족님의 글은 참 반갑습니다.

별족 2023-12-20 06:37   좋아요 1 | URL
제가 아빠한테 양비론자다!라고 했던 것처럼 이런 모호한 태도는 인기가 없죠. ㅋ
 

내 인스타(insta>@hahayoii)에 좋아요, 가 달려서 누군지 구경하러 갔다. 자기소개에 파트너 구함,이라고 써 놓은 인스타였다. 그런 좋아요,가 세 개나 달렸는데, 좋아요,는 내가 없앨 수도 없는 거 같다.

그렇지, 좋다는데 어쩌겠어, 라고 생각하고 만다. 


반짝이는 워터멜론,에서 아버지,로 하는 하이찬과 청아 아버지의 대화 말고 좋았던 대화가 참 많은데, 그 중에 하이찬과 청아의 내 마음이니까,도 있다. 


최세경에게 반해서 그녀를 위한 밴드를 만들어보인다는 하이찬을 좋아하는 청아는, 그 마음을 들켜버린다. 하이찬이 나는,이라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 청아는 나도 네가 세경이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고, 내 마음은 내 꺼,라고 대답한다. 

네가 최세경을 좋아하는 건 네 마음,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 


다른 사람 마음을 내가 어쩌겠어.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너를 불편하게 했다면 그건 말해줘.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버려둬야지, 별 수 있나. 


내가 내 인스타에 좋아요,를 건 어쩌면 성매매종사자일 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자신의 인스타에 드러낸 그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좋아요,를 지울 수 있을까. 지우는 기능이 있다면 지워야 할까. 그건 그저 작은 하트인데, 내 마음의 검열에 걸렸다고 그 사람의 마음은 없애야 할까.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었다. 내 인스타가 그런 사이트 홍보의 연결점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과연 누가 그런 좋아요,까지 누군지 확인할까, 싶기도 하고. 이런 SNS의 좋아요,나 하트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내가 무겁게 생각한다고 다른 누구도 진지할 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만 내 마음, 다른 사람 마음은 다른 사람 마음. 어쩌지 못하는 것은 어쩌지 못하는 채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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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23-11-3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는 계정을 차단하고 신고했더니 지워졌습니다. 세 개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 였는데 일곱개까지 자기 소개가 똑같으니까-사이트광고가-_-;;;- 신고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이 보이지 않는, 스팸 계정으로 신고했습니다.
좋아요, 까지 없어져서, 뭔가 여기 쓴 말이 거짓말이 된 거 같아 댓글을 답니다.
 

https://blog.aladin.co.kr/stavrogin/15030330 , 이 백자평을 봤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렸을 때, 티비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데, 초청무용수로 공옥진여사가 나왔다. (https://namu.wiki/w/%EA%B3%B5%EC%98%A5%EC%A7%84)

어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지금 저기 티비에서 흉내내는 춤을 추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들 보고 있다. 그 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모습을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면서, 웃었을까, 따라 춤을 췄을까. 내가 받은 충격은 춤 때문이었을까?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내 기억이 정확한지도 자신하지 못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손가락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을 못하는 사람, 살면서 쉽게 만나지지는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볼 지 어떻게 대할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지나치게 무심한 것도. 


그런데도, 이런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장애人' 대신 '장애友',

'귀머거리' 대신 '농인',

'벙어리' 장갑 대신 '손모아'장갑,

'장님' 대신 '시각장애인',


약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내 전부가 약하지는 않고, 친구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처럼 직관적인 우리말 표현 대신 알아차리기 힘든 한자 표현을 쓰는 것은, 무언가 거리를 만드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혐오표현,에서 '혐오'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도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사진을 보고 설명해 주세요'에 말을 찾느라 옴싹달싹 못 하는 사람 이야기를 만난다. 


'긴 의자가 양쪽으로 있는 곳에, 흑인인 엄마와 아이가 울고 있어요'라고 설명할 수 있을 사진 한 장인데, '흑인'이 혐오표현이라고 수정하려고 '아프로아메리칸'을 선택하려 든다.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사진을 보고, '흑인'이란 표현대신 '아프로아메리칸'을 택할 수 없다. 

'아메리칸'이란 표현은 부정확해진다. 관찰하는 행위, 표현하는 행위, 에 판단하고 검열하는 개입이 일어나고, 관찰은 부정확하게 표현되면서 부적절한 의사소통을 일으킨다. 




무언가를 혐오표현이라고 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공옥진 여사의 춤이 혐오스럽다고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곱사,의 움직임을 살면서 평생 못 보았을 수도 있다. 

벙어리장갑이라는 비유 가운데, 나는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간접 체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은 의미를 바꾸는 것 뿐이라고, 자부심의 표현으로 '딴따라'를 쓰는 박진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검열이나 억압으로 혐오표현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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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4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그물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들이지요. 도착증에 가깝습니다.
 

장면들이 필요한가. 

공지영의 인터뷰에서, 내 아이가 맞았으면 달려나가 싸우겠다,를 듣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다.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자신의 아이가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돈이 있으니 자신은 가해자들에게 지옥 맛을 보게 해주겠다고 했지.

 

나도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상상을 하기는 하는데,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겁 먹지 마라. 상대도 사람이다. 겁 먹었어도 겁 먹은 거 들키면 안 된다."

"얕잡아 보이지 마라."

이런 대비에 대해 말한 다음, 다시 저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한다.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할 지. 재판을 하고 싶지도 않고, 뭐가 지옥 맛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 줄 마음이 없다. 

아이들의 싸움에서 내 아이는 절대 잘못할 리 없다,는 확신도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 줄 수 있다. 딱 여기까지가 부모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계획은 그럴 듯 했다. 육아서를 보고, 만 세살이 되기 전에 티비는 보여주지 않겠다고도 했었지. 그런데,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몇 주 보내는 동안, 나조차도 티비없이 못 지내겠더라. 모로 누워 젖을 물리면서 소설책을 읽는 나를 보고, 잠든 아기를 방에 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보는 나를 보고, 에이 못 해먹겠다 그랬다. 나도 물론 안 보여주겠지만, 아이를 맡길 때도 부탁해야지 했었지만, 나도 못 하는 걸 어떻게 부탁하나, 그랬다. 

석달의 출산휴가 다음에 출근하면서 아이를 맡기면서는 바란 것은, 저녁에 살아서 만나자, 정도였달까. 좋은 분이었지만, 내 기준에 맞춰달라고 안 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씻기는 나의 기준은, 아주머니께 지나치게 낮았다. 그저 아이가 만나는 어른 가운데, 엄마 같은 어른도, 아줌마 같은 어른도, 아빠같은 어른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유, 예쁘다,라는 말이 아이에게 좋은 말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내 아이에게 '아유, 예뻐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첫째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어른이고 엄마인 내 눈에 보이는 아이는 너무 위태롭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나의 불안을 아이에게 들키면 아이는 나의 불안을 보고 자신의 불안을 키워서 놀지 못할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놀이터 구석에서 아이를 흘끔거리면서 풀을 매거나, 책을 읽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과 싸운다. 남편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 눈에 부당해서, 남편이 아이를 혼내는 건 너무 꼴 보기 싫다. 남편조차 그렇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남편과도 싸우게 된다. 내 생각에 혼내지 말아야 할 일에 아이를 혼내서, 내 생각에 어이없는 이유라서. 


그러면서, 부모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구나, 생각한다. 

특히 엄마인 나는, 내 자신을 과신하면서, 아이를 안다고 선을 넘는다. 내가 그런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멀찍이서 보면서도 보지 않는 척 연기한다. 

우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아이가, 자기 마음속에 자기 감정을 정리하게 둔다. 

아이가 들었을 말들, 내가 들었다면 분개했을 어떤 말들을 부러 들으려 애쓰지 않는다.

내가 대신 듣지도, 대신 화내지도, 대신 말해 주지도 않는다. 

아이가 듣고, 화내고, 내게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두 세 살 먹은 아이 손을 잡아 미끄럼틀 위까지 올려주고, 또 내려주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기 손으로 잡고 올라갈 수 있을 때 올라가는 아이가 되게 하려고 애쓴다. 


"그래? 엄마가 뭘 말해줄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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