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인간 이해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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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평평해졌다고들 말한다. 국경이 의미가 없고, 모두 하나로 통한다고도 말한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고, 미국 팝문화에 열광하던 세계와 지금 한류에 열광하는 세계는 이미 하나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기이한 의문들 가운데서 이런 책들을 읽는다. 활자화된 책의 바닥에 흐르는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소설은 못 읽겠어, 라고 사회과학 책을 읽던 선배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과학,이라고 이름붙인 어떤 것과 소설 사이의 간극,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간극은 스위칭이 필요하다. 생각의 지도(https://blog.aladin.co.kr/hahayo/2508428)라는 책을 읽을 때, 연구자는 실험 전에 피험자의 동양적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를 하고 질문을 한다. 사람에게는 동양적 사고도 서양적 사고도 논리적 사고도 감성적 사고도 존재한다. 그 안에서 스위칭하고 입장과 태도를 선택하는 중인 것도 같다. 동양과 서양은 어떤 사고적 특성이 좀 더 고양되는 방식으로 특정한 태도가 비대해진 두 세계 같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커다란 틈, 그 틈에 대한 이야기다. 의식의 바닥에 깔려있는 대전제, 지금 마구 섞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희랍, 기독교, 불교, 유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시작하고 한참은 과학책인 것도 같다고 생각했고, 덮으면서 역시 과학이 현대의 종교라고도 생각한다. 


나중에 정리할 때 적어야지, 하고 붙인 포스트잇이 너무 많다. 그래도 정리하기로 했으니 정리한다. 


제1장 인간 존재의 근원


이렇게 해서 플라톤에 있어 우주 영원설은 부정된다. 우주는 영원히 있어온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을 가지는 것, 즉 없다가 있게 된 것이다. ~ 이는 희랍인들이 존재와 무를 서로 뒤바꿀 수 없는 절대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이고 무는 무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에, 있는 것이 없게 될 수 없고, 없는 것이 있게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기본 명제이다. 그것이 존재의 원리이며, 신도 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 p41~42,(희랍)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인간과 신의 질적 차이의 강조, 따라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접근해 갈 수 없다는 인간 유한성과 무의 강조가 기독교적 인간 본질 규정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굳이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 정통 기독교에 따르면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며 따라서 그 둘 간의 직접적 교통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둘 간의 교통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3의 매개자가 요구되며, 그가 곧 예수이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에 있어 예수의 역할은 절대적이 된다. ~이처럼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와 달리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질적 차이 그리고 피조된 것들 간의 질적 계층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둘을 매개하는 구세주 예수의 역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성을 실현시킨 완전한 인간의 한 전형일 뿐이며, 인간은 누구나 다 본질적으로 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급진적 사상으로 인해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에 의해 이단시된 것이다. 

정통 기독교가 존재 전체를 계층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을 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한편으로는 희랍적 사유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희랍적 사유의 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55-57(기독교)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사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시간상으로 과거를 물어나가다가 무한소급을 끊음으로써 최초를 상정한다. 그러므로 신만이 존재했고 그 신이 우주를 만드는 '태초'가 논의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그것이다. 공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을 확대하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우주의 끝을 인정하고, 최소로 분석해 가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최초의 입자적 존재를 인정하는 실체론적 사유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무한소급을 인정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최초와 최후의 경계는 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모든 것은 무한한 순환관계 속에 있다. 무시 이래로 무명이 있고, 무시 이래로 유정이 있다. 이처럼 무한소급을 허용하므로 최초나 최후의 경계가 그어지지 않고, 경계가 그어지지 않으므로 일체의 존재는 경계지어지지 않은 것, 그 자신의 존재를 무로부터 구분지을 수 없는 것, 따라서 무라고도 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 한마디로 공이 된다.-p70-71(불교)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희랍이나 기독교와는 달리 사유될 수 없고 감각될 수 없으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서양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비되는 동양의 유심론적 태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의 전제 위에 주장되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신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간 유정의 차원에서도 부정되는 것이다. 일체는 정신력 또는 의지적 활동성인 업력의 결과로서 생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업력이 지탱되는 유정의 식 또는 심 바깥에 그 자체 실재하는 객관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유심론적 통찰이 초기 원시근본 불교에서부터 후기 여래장 사상에까지 이어지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된다. 결국 이러한 유심론적 관점에서 불교는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세계의 이원론을 넘어서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 세간의 물질적 존재인 지수화풍을 일으키는 근본 힘을 유정의 정신적 업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중에 중생의 업력이 작용함으로써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p78-79(불교)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유정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또는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83(불교)


인간은 누구나 바르고 통하는 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 이치를 자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앎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알며 그 기의 근원이 되는 리 또는 태극을 앎을 의미한다. 즉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런 앎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서는 선악의 도덕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보여야 할 도덕성은 곧 인과 의이다. 전체 존재 중에 나 아닌 것이 없다고 알고 느끼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그에 따른 공정함을 의라고 한다. -p100(유교)


제2장 인간의 본질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의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좆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중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겅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26, (희랍)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이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한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그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다. - p128~129(희랍)


내가 흙으로 빚어 인형을 만들었다면, 그 인형이 어찌 그 스스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신이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 역시 신에 대해서는 인형이 인간에 대해 그러하듯 한없이 미련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미련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은 더욱더 미련한 짓일 뿐이다. 창조자로서 신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므로, 인간은 지혜로써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질적 차이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적 척도와 기준, 인간적 이성과 사변 등을 모두 내버리고 전폭적으로 무릎 꿇을 때, 신이 손을 내밂으로써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p133, (기독교)


불교의 출발점은 우리의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이 괴로우며, 구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이러한 인생의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불교는 인생의 고통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되며, 모든 집착의 근저에는 곧 자아에 대한 집착, 즉 아집이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집은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즉 무명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설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해탈이다. 고통과 번뇌의 근거인 아집으로부터의 벗어남이 그것이다. 심정적 정서적으로 번뇌를 벗어나는 해탈을 심해탈이라고 하고, 지성적 이지적으로 무명을 벗어나는 해탈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결국 해탈에 이르는 길은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p141, (불교)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아의 정체성이 팔이나 다리 또는 몸통에 놓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남의 것으로 대치해도 나는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나의 머리, 즉 두뇌만은 나의 본질이기에 남의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머리를 뒤바꿨는데도 동일한 자기 의식이 유지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두 귀신을 옛 나를 먹어치우고 새로운 나를 가져다주는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두 귀신 사이에서 당황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게 된다. 10년 전의 나가  더 이상 없듯이 1년 전의 나, 어제의 나, 1시간 전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런 만큼 현재의 는 어제도, 한시간 전에도 없었던 나이다. -p147-148,(불교)


마음이 현상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깨치어 아는 자, 따라서 현상에 따라 이끌리지 않고 언제나 그 마음 자리를 지키어 떠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차별적인 현상 세간에 매여 거기 머물지 않는 마음이 바로 해탈한 마음인 것이다. -p156, (불교)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태어난 만물은 각각 천지의 생물지심을 부여받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따라서 사람은 모두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희朱熹, 《맹자집주孟子集註》) 

이렇게 해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일부로 이해된다. 맹자의 심이 인간을 자연적 동식물이나 자연 사물로부터 구분짓는 인간의 자연초월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주희는 그 초월적 마음을 다시 자연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주 자연 안에 그 자리를 갖지 못하는 그러한 초월적 본성은 보존하기 힘들다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그 도덕적 마음을 우주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우주 안에 그 자리를 확립하여 우주론적으로 도덕성을 근거짓는 것이다.- p170 (유교)


제3장 인간 삶의 끝


생도 미처 모르는데, 어찌 사를 말하겠는가? 《논어》<선진>

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괴상하고 기이한 것, 귀신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건전한 삶의 자세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p179


과학은 삶의 궁극 주체인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다. 과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영혼이 남긴 흔적,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간의 관계일 뿐이다. 즉 과학은 우리 의식 활동이 우리의 신체, 특히 우리의 두뇌 중 어느 부분의 어느 신경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영혼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인식 가능하고 관찰 가능한 대상들만을 다루지만,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인식되고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인식하고 관찰하는 주체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으로 철학의 문제를 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하나인가 아닌가의 물음은 오히려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p190~191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라면, 죽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되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활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 전체의 죽음이다. 희랍적 사유와 달리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육과 영이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육은 죽고 영은 육을 벗어나 계속 존속한다는 영혼불멸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곧 육과 영이 하나로 되어 있는 인간 그 자체의 죽음이다. 죽음이 단지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고 영혼은 그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렇게 큰 사건으로 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나방이 고치를 벗듯이, 우리 영혼이 육신을 벗는 일종의 탈바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을 확신했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대해 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 죽음이란 하나의 큰 사건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라고 선포될 만큼 큰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신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의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이고, 생명의 부정이며 생명의 끝이다.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영혼이 없기에, 빛도 생명도 없는 철저한 부정이며 어두움이고 절망인 것이다. -p209


한마디로 말해 불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 실체의 엄밀한 자기 동일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가 아니라, 업에 따라 형성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오온의 연속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인 것이다. 오온이 불변하는 항상된 것이 아니기에 엄밀한 의미의 자기 동일성은 없지만, 인과 과 또는 업과 보의 관계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기에 오온이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온의 윤회는 등불의 이어짐으로 비유된다. -p215


오온으로서의 자아 안에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생과 내생의 연결에서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연결에 있어서도 오온에 있어 자기 동일적 실체는 없다. 두 촛불의 동일성 여부가 문제되기에 앞서 하나의 촛불에 있어서도 한 순간의 불꽃과 그 다음 순간의 불꽃은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오온을 형성하는 일체는 매 순간 찰라생명하는 것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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