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하는 밴드에 한 친구가 '낙태죄 완전폐지를 위한 국민청원'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AE67727ABE9934EDE054A0369F40E84E
1.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법의 관점을 여성의 성, 재생산권으로 전환하라.
- 모자보건법 제14조와 임신중단 여성 및 의료인에 대한 처벌을 전면 폐지하라.
- 모자보건법을 여성아동건강법으로 법률의 관점을 전환하라.
- 모자보건법 제1조 ‘모성’을 ‘여성’으로 변경하라.
- 법률과 공식 문건에서 부정적 인식을 조장하는 ‘낙태’ 대신 ‘임신중단’ 혹은 ‘임신중지’로 용어를 변경하라.
2. 인공임신중단 의료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보장하라.
- 가짜 피임약 판매자 처벌 강화를 위해 경찰의 함정수사를 허용하고 가짜 약 판매 적발 시 생명 위협과 동일한 수준의 처벌을 받는 법안을 제정하라.
- 임신중단 유도약(미프진) 수입허가를 위한 식약처 안전성 검사를 시행하여 국내에 미프진을 도입하고 국내 피임약 가격 수준으로 보급하라.
- 국민건강보험 보장 범위에 인공 임신중단 수술을 10% 자부담 항목으로 포함하라.
- 소파법 이외의 안전하고 비용 부담이 적은 임신중단 수술 방법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라.
- 인공 임신중단 의료 시 안전성 관련 상세 내용에 대한 고지 의무를 법제화하라.)
나는 그 청원에 동의하는 부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가운뎃줄로 지운 부분이다)이 있고, '임신중단 가능' 주수를 법에 명시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어서 서명하지 못하겠다고 댓을 달았다. 법의 관점은 '여성'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이어야 하고, 용어를 '임신중단'으로 바꾸려면, '임신중단'의 정의에 그 '가능 주수'가 명시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10주에 하는 행위나 32주에 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낙태'라고 부르는 건 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 청원의 주장처럼 모자보건법에서 아이를 모두 지우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게 과연 여성에게 좋은 것인가도 의문이다. 청원이 가지는 단순성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보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은 청원이다. 서명하지도 않았고 또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공연히 일없는 책을 하나 걸고는 이렇게.
법은 모순 위에 올라간 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태아와 여성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태아가 중요하니 여성이 권리를 포기하라고 물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술은 나아지고 있고, 사회는 더 엄격해지고 있고,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다. 자가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여성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인 주수와 아닌 주수를 알 수 있다면, 그걸 기준으로 '임신중지'가능 주수를 말하는 게 뭐가 문제지?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술이 미진하고, 사회가 좀 더 난폭할 때, 엄마 몸 안에 있을 때는 독자성이 없어서 권리도 없는 존재라는 정의를 그대로 적용해서 10주나 32주나 동일하게 낙태라고 부를 필요는 없는 거니까. 불가피한 상황은 법이 있을 때에도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고, 지금 명문화시키려고 할 때는 지금의 법 수준에서 인공임신중지가 가능한 주수를 당연히 말해야 하지 않나.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법적으로 생명권이 없는 존재라는 태아,라는 말은 일면 맞고 또 틀린데, 그럼 막 태어난 아이를 엎어놓는 건 뭔가요? 모순들이 삶에 얼마나 많은데, 아직 엄마 뱃속에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주수가 있다니까. 산부인과 의사들의 의견(https://www.youtube.com/watch?v=tuFRGarPT0w)도 찾아서 본다.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말하고, 낙태죄가 불합치 판정을 받기 전에 나는 불합치 판정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도 나는 동일한 사안을 죄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도나 중국의 여성운동에 대해 듣고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합리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생각했다.
물론 나도 법이 죄책감을 덜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법이 어느 정도의 가이드이고, 그게 바로 공동체가 가지는 합의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법에서 죄가 아니라고 해도, 죄라고 생각할 수 있고, 죄라고 해도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문화되었던 법이 명문화되려 하면서 지금 기술 수준에서 재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생각하면서 만약 지금이라면 나는 태어날 수 없는 아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마흔아홉에 가지고는 아이를 지우려고 안 한 일이 없다고 하셨었거든.
그리고 나는 딸 셋에 막내가 아들인 집에 둘째 딸이니까.
정말 여성인 나에게 저렇게까지 법을 고치는 게 좋은가, 생각하는 거지.
인공임신중지가 피임보다 좋은 선택지가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남자에게 아이를 가졌으니, 나를 책임져,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
여성이 누리는 많은 특혜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기르기 때문에 주어지는 건데 왜?
살아가는 모순 가운데 법이라는 공동체의 규율이 어디까지 얼마나 나를 통제하는 걸 수용할 것인가? 통제가 있기 때문에 누리는 혜택은 또 어디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