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차(https://blog.aladin.co.kr/hahayo/14143752)

단편선에 딱 하나 실린 여성작가의 소설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서 놀랐다. 나를 죽인 자와 함께 탄 죽음 뒤의 마차에서 죽인 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 본다. 


나에게도 이런 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태어난 게 원죄라는 기독교도, 완전한 소멸이 목표라는 불교도 싫지 않냐고 했었지만 지금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래서 그렇게 싫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계들, 때문에 나의 죽음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당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가진다. 나를 아는 누구에게라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 올 테니, 나를 위해서라도 기다려 주십사, 생각한다. 


2.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https://blog.aladin.co.kr/hahayo/8192500)

피다한 부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명의 말들에 대해 생각하고 남겼었다.

살기 싫은 감정,이 그럴 수 있다는 나의 태도 때문에, 그 태도가 얼마나 기이한 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거라고 썼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의 파충류 뇌가 예민하게 노력하고 있다. 나의 파충류 뇌가 작동하는 동안에 살기 싫은, 어쩌면 한가한 감정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데, 이미 죽음은 어디에도 안 보이게 잘 치워둔 세상이기 때문에 삶은 무료해지는 게 아닌가도 싶다. 





3.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일기를 쓰는 십대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소년의 관대함을 본다. 


소년은 죽었고, 일기의 그 첫 문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비수가 되지만, 일기를 다 읽은 소녀는 그 말이 다른 의미임을 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본다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귀찮게 구는 동생도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애도, 지금 삶을 꺾을 것처럼 거대하고 괴로워 보이는 일들도 참 별게 아니라고, 소년은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삶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된다. 

나도 아직 가끔 모르겠는 걸 참 일찍 깨달은 소년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수동적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고 살아남는 건, 수동적이어야 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누가 낳아달랬어?'라고 부모에게 항의한다는 자식들 이야기를 들으면 변명을 궁리한다. 그게 과연 나만의 욕망이었을까. 그건 너였어. 네가 나를 세상에 나오는 통로로 쓴 거지. 어떻게 내가 내 의지만으로 너를 낳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복에 살지요'라는 동화가 어린 날 나의 자신만만함의 근거였다면, 부모가 된 지금의 나에게 부모된 자의 변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하여, 수동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염세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죽음만큼 삶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내가 관대해 보인다면, -그런 놈은 죽여야 되,라는 말에 언제나 물러서는 것 같은- 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닥치는 죽음은 벌이 아닌데, 죽음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도 뛰어드는 죽음이라는 것이 벌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가혹함,에 거리가 생기는 건 나의 이 애매한 태도,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태도 때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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