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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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의 별명은 미친 소크라테스였다. 이 별명을 붙여준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 플라톤(Plato)이다. 진중권의 설명을 빌리자면, 소크라테스는 입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면 디오게네스는 몸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1] 실제로 디오게네스는 자기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파철학자였다. 세계 정복을 나선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평생을 거리에 버려진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다. 그는 햇볕을 쬐기 위해 통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만나러 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철학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왕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세요.” 디오게네스는 이 말 한마디로 콧대 높은 젊은 왕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왕의 부하들이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꾸짖으려고 하자, 왕은 부하들을 말리면서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두가 부러워하고 숭앙하는 권력자였다. 디오게네스는 돈도 권력도 없는 거지였지만 당당했다. 한 사람은 세계 정복을 열망했고 다른 한사람은 햇빛이면 만족했다. 디오게네스는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식의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그의 냉소적인 철학을 견유주의(Cynicism)라고 부른다. 디오게네스가 권력을 냉소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디오게네스의 발언 태도는 모든 것을 말하기’, ‘솔직하게 말하기’, ‘진실을 말하기 등에 가깝다. 이 말하기 행위는 고대 그리스어로 파레시아(parrhesia)’라고 한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지향했던 삶의 원칙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생 말기에 파레시아를 주목했다.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1982년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던 파레시아1983년 미국에서 총 여섯 번으로 진행되었던 담론과 진실 강연 내용을 채록하여 정리한 것이다.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텍스트에서도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파레시아는 신과 교인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 교리에 진실성 있게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파레시아는 고대 철학자들과 푸코가 이해하는 파레시아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푸코의 파레시아는 신이 아닌 사회 전체에 적용되며 비판적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강연에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비극(悲劇) 작품,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문헌들을 인용 소개하여 파레시아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파레시아는 권력자 앞에서 담대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며 민주정 체제가 허용하는 시민(아테네 시민권에 여성과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여성은 정치 참여에서 제외되었다. 파레시아의 시대적 한계이다)의 기본 권리이다. 파레시아를 행하는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중의 분노와 역반응을 감수하면서 발언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견유주의의 파레시아를 비교, 분석한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파레시아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명제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함축되어 있다. 즉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자기 돌봄이다. 자신의 무지를 정확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 개념과 중첩하게 된다. 견유주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급진적 파레시아다. 견유주의 철학자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기성 질서를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성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현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견유주의 철학자는 주류를 거부한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기술로 이해한다. 따라서 파레시아스트가 되려면 먼저 자아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며 대중 앞에서 떳떳하게 진실을 알리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파레시아스트도 상대방의 정당한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상대방의 의견에 경청해야 한다. 파레시아스트의 말 속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 자발적으로 비판하는 파레시아스트가 많이 나올 수 있을까? ‘숙의(熟議)’, 말 그대로 깊이 생각하고 충분한 의논을 통해 문제를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논의를 위해 판을 잘 깔아야 한다. 숙의민주주의 발전이 더딘 사회에 파레시아스트의 등장을 바라는 것은 근시안적인 기대감이다. 썩은 내 나는 입으로 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파레시아스트인 것처럼 행세하는 형편없는 자가 나올 수 한다. 우리는 '진실'의 가면을 쓴 사기꾼을 경계해야 한다.

 

 

 

 

[1]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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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21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에서 퍼질러 앉아 있는 디오게네스가 생각납니다.^^. 사리사욕을 버려야 ‘파레시아‘가 가능하겠지요...

cyrus 2017-11-22 14:04   좋아요 1 | URL
주류에서 파레시아스트가 나오기 힘들어요. 주류를 비판하면 주류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려요. 사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주류로부터 배척당해요.

2017-11-2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2 14:10   좋아요 1 | URL
대구 경북은 보수의 텃밭이 아니라 순실그네가 활개치던 놀이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