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6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고통은 어째서 원하지 않는 곳에서 찾아오며 지나칠 생각도 없이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일까? 그래서였던가. 정현종 시인의 「그림자에 불타다」를 읽으면서 살면서 잊고 있었던 내 마음속 ‘그림자’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마음속 근원에 존재하는 원형으로 ‘그림자’를 제시한다. 그림자는 ‘나’의 어두운 면을 의미한다. 이 그림자가 때때로 통제가 안 되고 드러날 때가 있다. 그림자는 우리가 더 칭찬받는 사람이 될수록 그에 맞춰 더 커진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인간은 그림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바깥으로, 즉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도 파괴한다. 「그림자에 불타다」에서 시인의 삶 그리고 그가 사는 세계는 그림자에 까맣게 그을려 있다. 그림자 크기가 비대해질수록 나태, 분노, 우울로 인한 고통의 그늘이 우리 삶을 집어삼킨다.

 

 


1

버스 타고
근동 지방을 구불구불 가다가
드넓은 밀밭을 검게 태운
구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 그림자에 타서! 대지는
여기저기 검게 그을려 있었다.

 

2

욕망 - 구름 그림자
마음- 구름 그림자
몸 - 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너 - 구름 그림자
나 - 구름 그림자
그 - 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3
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
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
그리고
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

 

 

(「그림자에 불타다」, 72쪽)

 


 

비로소 시인은 ‘그림자’의 실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일은 불편하고 낯선 작업이다. 하지만 그림자의 일탈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우리 삶은 위험해진다. 괴물로 망가지느냐, 새로운 탄생을 맞느냐, 중요한 기로가 된다. 그림자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감싸 안은 후에야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 물론, 그 음습한 욕망이 내 것으로 인정하긴 쉽진 않겠지만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 다양한 지식이 있어도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영역.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 바깥쪽에는 그렇게 매달리면서 어째서 우리의 안쪽을 살피는 일에는 그리도 인색한지. 세월이 고단해서, 삶이 지나치게 바빠서, 또 다른 절박한 사정으로, 내 그림자를 때때로 내버려둔 채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지난 하루를 되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사고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니.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지난 발자국」, 12쪽)

 


인간이 하나의 생을 살면서 남기고 가는 흔적은 여러 가지다. 「지난 발자국」은 그렇게 흔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남기는 삶의 발자국이 번뇌와 욕심으로 각인된다면 결코 뒷사람이 따르거나 배울 것이 못 된다. 결국 ‘되돌아보는 일’은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현실적 수행이다. 시인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기 성찰을 유도한다. 하찮게 보이는 발자국을 통해 독자는 삶의 유한한 정체를 깨닫게 된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마악 피어나려는
꽃송이,
그 위에 앉아 있는 지금,
공기 중에 열이 가득합니다.,
마악 피어나려는 시간의
열,
꽃송이 한가운데,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76쪽)

 

 

 

꽃이 예쁜 까닭은 그것이 유한한 데에 있다. 때가 되면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사시장철 한사코 피어 있는 꽃을 상상해 보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꽃이라면 더 이상 귀하거나 애틋하지 않을 것이다. 개화를 보는 일은 무척 까다롭다. 날씨가 변화무쌍해 개화 시기를 정확히 예측하기 쉽지 않다. 희열의 순간을 앞둔 꽃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의 기운을 찬찬히 느끼게 한다. 꽃을 대하면서 우울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자신도 미소를 짓게 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장 찬란한 순간의 심미적인 삶을 공감케 하려는 시인 작업의 핵심이 농축되어 있다.

 

 

여행을 가면
가는 곳마다 거기서
나는 사라졌느니,
얼마나 많은 나는
여행지에서 사라졌느냐.
거기
풍경의 마약
집들과 골목의 마약
다른 하늘의 마약,
그 낯선 시간과 공간
그 모든 처음의 마약에 취해
나는 사라졌느냐.
얼마나 많은 나는
그 첫사랑 속으로
사라졌느냐.

 

 

(「여행의 마약」, 30쪽)

 

 


시간은 항상
그늘이 깊다.
그 움직임이 늘
저녁 어스름처럼
비밀스러워
그늘은
더욱 깊어간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리하여
그늘의 협곡
그늘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化石)이 붐빈다.
시간의 그늘이
심원한 협곡,
살고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화석 그림자.

 

 

(「시간의 그늘」, 32쪽)

 

 


시인은 시간의 경과에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시집에서 ‘그늘’과 ‘그림자’를 자주 쓰는 빈도를 통해서 시인의 정서가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간 시간 쪽에 쏠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아련한 슬픔의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여행의 추억은 첫사랑처럼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남는다. (「여행의 마약」, 30쪽) 시간의 경과 뒤에 남은 것은 ‘살고 죽는 움직임’의 흔적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그림자들뿐. (「시간의 그늘」, 32쪽)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그 사이에」 중에서, 42쪽)

 

 

 

행복의 빛이 마음속에서 밝아지면 시간의 흐름 속에 비굴해지는 그림자가 그만큼 더 짙게 드리운다. 그러나 시인은 지나가 버린 시절의 광휘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기력하지 않다. 삶의 변화를 피해갈 비법은 따로 없다. ‘그늘’을 거꾸로 하면 ‘늘그’가 된다. 늘그막. 시인은 거대한 장막 같은 인생의 그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늘그막은 누구에게나 따라오게 되는 인생 자체의 그림자다. 무거워서 한숨과도 같고, 한편으로는 너무 가벼워서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