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Scene #1  누드는 왜 불편한가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네이키드는 ‘벗은’ 몸이고 누드는 몸 자체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원로들」은 네이키드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여자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전통적인 윤리가 몸의 드러냄을 억압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대심리를 합리화시킬 포장술이 필요하다. 바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누드집이나 벌거벗은 여체를 그린 예술작품을 성의 상품화와 결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누드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될 수 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누드가 관음증의 일종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알몸을 좋아하는 엉큼한 본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드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남자라면 벌거벗은 여자의 알몸을 그냥 안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도 회자되는 호기심 가득한 영국의 양복점 직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창문으로 엿보는 행동 하나로 양복점 직원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존 콜리어  「고다이버 부인」  1898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농민 수탈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본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영주는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몸으로 말에 올라 성 안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고다이버는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곧 농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영주 부인의 알몸을 볼 수 없다며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부인의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으니 톰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다. 하늘도 노했는지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데 여기서 남몰래 엿보는 사람, 즉 관음증이 있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Scene #2  욕망, 그림의 또 다른 이름    

 

사실 고금을 막론하고 명화는 온통 여체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유달리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유명한 화가는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욕망이야말로 그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누드화를 봤을 미술사학자 파스칼 보나푸는 자신을 그동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누드를 몰래 본 관음증 환자라고 커밍아웃(Coming out)했다.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림은 언제나 욕망과 맞물려 있었다." (8쪽)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의 벗은 몸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를 차용해 교훈을 남기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림 속 누드는 인간이 아니라 성서나 신화속의 주인공, 즉 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체의 모델은 비너스, 아담, 이브, 제우스신, 아폴론 등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도 성서나 신화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해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한스 멤링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주문한 사람이나 관람자는 한번쯤은 다윗처럼 음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스 멤링  「목욕하는 밧세바」  1485년경

 

 

이렇듯 화가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자 관람객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 역시 보는 이가 혹할 정도의 자태를 뽐내고 싶어 해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몸단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랜 시간 그림의 주제가 됐다.

 

누드화에서 여성은 피관찰자이며 관찰자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림 속의 여성을 통해 피 관찰자로서 판단되는 관습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한 채 거울 앞에 앉아 몸단장을 한다. 한편 남자는 예술가로 관찰자로, 그리고 주체로 존재한다.

 

 

 

 

 

 

르누아르  「여인의 나신」  1876년

 

 

르누아르는 여성의 몸이 뿜어내는 매혹을 찬미하고 칭송하는 것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젊은 여인의 장밋빛 피부와 원활한 혈액순환을 짐작케 하는 피부’였다. 여성 누드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기본이자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미를 그리면서도 여성의 누드를 위한 피부색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몰두는 대단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어야 할 손이 점점 굳어가고, 진통이 오는 고생을 겪었지만 핏줄처럼 펄떡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여인을 그린 경우에는 그 가슴이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누드를 사랑했다.

 

 

 

 Scene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샘

 

누드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남성성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적 특성인 ‘관음증’이라는 명분으로 길가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훑어보며 즐거워했고, 에로틱한 시선으로 감상해왔다. 근대 서양회화의 누드화에서도 여성은 오브제로서 보이는 광경이 되고 화가인 남성은 감상자가 된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이렇듯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선정적인, 관음증 환자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 최고의 질료이자 탐미의 대상이 인간의 육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체의 그림을 보면서 야릇한 꿈을 꾼다. ‘관음증 환자’로 자처한 파스칼 보나푸는 이미 서문에서 우리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독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묵인하고 있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  1515년

 

특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는 남성, 보여주는 여성’의 구도 속에 숨겨진,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싶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읽어낸다. 시대에 따른 소품의 등장과 달라진 화장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더불어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마주한다. 여인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여인의 욕망 말이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과감한 포즈나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여인의 마음을 읽는 일도 즐겁다.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성이 보완되듯 남성성에 의해 여성이 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 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속에 숨겨진 미적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보듬어 안는다.

 

‘외설’과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쉬울 정도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누드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욕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여인의 곡선이 아름다워서 누드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가면을 없앤 후 가장 본래적인 육체를 통한 감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의 샘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드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감정표현을 위한 정지동작을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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