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 시대를 위로한 길거리 고수들 이야기
안대회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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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희노애락을 느꼈을까?  

요즘은 텔레비전을 켜면 TV 프로그램들을 부족함 없이 볼 수 있다. 케이블 방송과 같은 경우에는 24시간 TV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다.   자다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먼저 찾는게 리모컨이고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키게 된다. 모든 이들이 잠든 새벽에도 텔레비전을 켜면 케이블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들이 재방영된다. 텔레비전은 컴퓨터와 더불어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전제품이 되었다.  시청자의 눈과 감각을 충족시켜주는 텔레비전은 '바보 상자' 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무조건 좋은 효과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어린이 시청자들의 교육에 유해할 수 있는 잘못된 언어 남발과 단순히 방송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설정된 요즘 방송 프로그램의 등장은 TV의 대표적인 단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TV가 시청자를 '바보' 로 만드고 정서에 좋지 않은 고철 덩어리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TV를 통한 유용한 교양 및 지식 전달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TV를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TV를 통해서 여러가지 감정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우승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면서 시청자인 우리도 운동선수들처럼 승리의 열광을 맛보게 되고, 인기 드라마 속 착한 주인공을 끝까지 괴롭히는 악역 캐릭터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드라마에 감정에 몰입되어 화가 나게 된다.  부모 없이 동생과 단칸방에 사는 불우이웃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펼쳐지는 희극인들의 개그는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이렇듯, TV는 우리 생활에 땔래야 땔 수 없는 필수품인 것이다.  TV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하다. 

TV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았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들의 삶에도 우리들의 삶처럼 웃음과 눈물이 공존했을법한데 희노애락의 감정을 전달해준 그들이 누구였을까?   

 

 

   18세기 조선시대의 ' 스타킹 '

 일요일 오후에 모 방송국에서 하는 시청자 오디션을 표방하고 있는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스타킹' 이 있다.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나 독학으로 악기 연주를 배움으로써 전문가 수준 실력을 갖추게 된 40대 주부 등 우리 삶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숨겨왔던 재능을 우리는 시청자로서 보고 있다. 

우리는 TV로 전파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재능과 끼를 보면서 웃음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조선 시대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구경하면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의 등장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유교 계급의 영향이 붕괴되고 신흥 상인들의 등장으로 도시와 시장이 형성된 18세기 때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 계층의 몰락과 동시에 기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존의 양반 중심의 문화는 18세기에 이르러 평민들도 참여하는 문화로 변화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양반 중심의 유교사회에서 '책' 은 양반 식자층들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은 책이란 것을 읽어볼 수도 없었으며 평생 조선 시대의 사람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으로 살아가야만 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남녀노소 모든 이들도 책을 읽을 수 읽게 되었다. 특히, 지금 ' 고전소설 ' 이라고 불리우는 <홍길동전><춘향전><심청전> 등의 등장은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읽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진 조선의 문맹률 때문에 소설을 읽을 수 있는 평민은 극소수였다.  

<홍길동전><춘향전> 등은 조선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평민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평민들이 대중적인 소설을 접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자들의 등장이다. 평민들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 말 ' 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 당시만해도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번화가 곳곳에서는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자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 대다수 문맹자인 평민들에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으며 이들에게도 교양과 지식을 제공하는 ' 지식 교류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평민들은 이들 덕분에 '독서' 라는 행위를 할 수 있었으며 조선 후기 특유의 대중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老 = 怒

  내 이름은 삼월이, 조선의 당찬 老처녀    

주위 시선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노처녀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 내 이름은 김삼순 ' 이 '김삼순 신드롬' 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노처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못한) 채 ' 노처녀, 노총각 '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달고 살아야 하는 30대를 넘어선 남녀들은 주위 시선에 부담스러워 했듯이, 혼인할 시기를 넘어선 조선남녀들도 사회로부터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었다.  

요즘 대한민국 남녀들에게는 결혼은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부담스러워 한다. 결혼을 함으로써 짊어져야 할 가정을 먹여살려야 하는 경제적 부담을 결혼 기피 1순위로 꼽고 있는 것은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은 현실이 만들어낸 대한민국 남녀의 결혼관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결혼 기피도 역시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었다.  

특히 평민들에게는 결혼이라는 삶의 관문은 우러러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았다. 혼인을 하는데 필요한 혼수를 마련할 경제적 여건이 없으면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노처녀, 노총각 평민들이 많아지게 되자, 조정 관리들도 근심할 정도로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는 결혼 못하는 백성들의 증가는 사회적 안정을 훼손할 수 있는 문제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가난한 노처녀, 노총각들을 장가갈 수 있도록 경제적 여건을 마련해주는 사회적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적인 제도 도입만으로 이들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런 결혼 제도는 조선남녀들로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결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제도까지 마련했음에도 결혼을 하지 못한 조선남녀들은 평생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결혼 못하는 남녀는 곧 ' 돈 없는 가난한 사람 ' 이라는 이미지가 성립되었다. 특히 노처녀들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관점은 그 때 당시 천시받았던 과부와 맞먹을 정도로 심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이 ' 노처녀 ' 라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는, 요즘 말로 말하는 '용자' 가 있었으니, , ,   일부 문헌 속에 등장하고 있는  ' 삼월이 ' 라는 여자이다.  

조선 시대에서 존재했던 독특하고 기이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수삼의 <추재기이>에서는 삼월이를 50살의 노처녀로 기록하고 있다.  조수삼의 기록에 의하면 삼월이는 언제나 처녀 복장을 한 채 시장 한가운데서 떡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입으로 화장품을 구입하여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사용하였다.  50살의 할머니나 다름 없는 삼월이가 처녀처럼 화장을 하고 다닌 것은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남편으로 여기는 그녀만의 독특한 가치관에서 반영된 것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눈길을 안 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그녀와 관련된 민요도 나오게 되었다.   돈이 부족할 정도로 경제적 여건이 부족했던 조선의 노처녀, 노총각과 다르게 삼월이는 직접 스스로 돈을 벌어 연애보다는 자신의 외모 가꾸는데만 인생을 살았는데, 어떻게 보면 조선 시대의 'OL족' 였던 것이다.  OL족이란 소득수준은 중간계층이면서도 소비수준은 최상류층에 맞먹게 행동하는 직장여성을 가리키며 이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처녀인데 남편이 많다는 / 동구 밖 삼월이. 

   -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안대회, 한겨레출판, p 149 -  

 

삼월이에 대한 조수삼의 기록은 단 몇 줄 밖에 안 되어서 그녀의 자세한 일대기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삼월이에게도 '노처녀 = 가난한 여자' 라는 콤플렉스를 시달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경제적 자립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땅에 제대로 박혀버린 노처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그녀 혼자서 상대하기가 버거웠을 터이다. 그녀에 대한 <추재기이>의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술에 취한 삼월이가 교수형에 처해져서 목만 덩그러이 매달려 있는 죄수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삼월이의 일화를 통해서 조수삼은 삼월이 특유의 다부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노처녀' 라는 이유만으로 홀대받아야 하는 조선 사회에 향한 일종의 분노 표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외모만 가꾸는데만 좋아하는 삼월이의 마음 속에도 한 여자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은 50살 할머니가 되어서 진정 자신을 사랑해준 이성을 찾지 못해서 일어난 히스테리일 수 있겠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장애인 노래꾼, 통영동이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에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찾아 배따라기를 부르면서 전국을 떠도는 나그네가 등장한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서 배따라기를 구슬프게 부르면서 전국을 방황하는 소설 속 나그네처럼 조선 역사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물이 실제로 살았었다. 

자신의 성과 이름 대신에  스스로 '통영동이' 라고 불렀던 무명씨는 자신이 열 살 때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전국을 떠돌게 되었는데, 무명씨는 생활하는데 온전치 못한 장애인이었다.  전해내려오는 기록에 의하면 통영동이는 두 눈은 실명하였으며 한 쪽 다리를 절고 있는 불구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가 실명된 이유에는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밤낮동안 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영동이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수많은 노래들을 부르고 구걸 행위를 하였다.

'통영동이' 라는 별칭에는 통영 출신이라는 뜻만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은 너무 간략할 정도로 자세하지 않다. 그리고 그가 전국을 떠돌아 구걸을 하면서 불렀다는 노래는 온갖 새를 묘사한 <백조요>라는 곡만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가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동생을 찾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통영동이는 김동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 배따라기 ' 나그네처럼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자신만의 구슬픈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가 불렀다던 노래들이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쉽지만, 통영동이의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에게도 자신의 불우한 인생사를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을 것이다.  

  

 

 

  무뚝뚝한 조선을 웃게 만든 유쾌한 예능인들, 길거리 재주꾼  

<추재이재>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길거리 재주꾼들에 대한 묘사가 많다.  앞에서도 언급한 소설 읽어주는 낭독자처럼 도시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의 장기를 보여줌으로써 돈을 벌면서 살아갔다.   

입 하나만으로 온갖 새 종류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구기(口技)의 달인,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말하는 재담꾼, 훌륭한 기교를 갖춘 길거리 악기 연주자 등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특기를 직업 삼아 살아갔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을 정도로 조선의 '인기 스타' 였다. 

요즘과 같으면 그들은 '연예인' 과 유사하다. 입으로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조선의 구기 연기인들은 1970년대 성대 모사의 달인이었던 원로 개그맨 남보원이나 연예계에서 가장 다양한 소리를 구사할 줄 안다는 개그맨 정종철를 보는거 같다. 그리고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자신들의 말을 귀 기울이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입담을 가진 재담꾼은 대한민국 최고의 MC 유재석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유명한 김제동 급인 것이다.

  

 

   ' 조선의 폴 포츠' 달문, 추남 거지에서 조선 최고의 광대가 되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되다가,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는 연예인의 굴곡된 인생 경로 역시 조선 시대의 재주꾼들에게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전국 양반들과 기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던 광대 달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못생긴 외모를 가진 추남 거지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얼마나 못 생겼으면 연암 박지원도 자신의 글에서 자신이 직접 본 달문은 못 생겼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못생긴 외모와 거지라는 천한 신분은 달문의 출세에 커다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겉모습은 추했지만 속은 무척 따뜻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문은 주위 거지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 당시 유행하던 각종 연희들을 습득하였다.  그래서, 그의 재능에 대한 소문은 길거리를 통해서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달문은 조선 사람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광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착한 성품과 전국으로 떠도는 소문통에 의해서 달문은 조선 최고의 스타 광대가 된 이유도 특이하지만, 결혼도 못할 법한 못생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최고의 광대가 된 과정 역시 예전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폴 포츠와 수잔 보일을 연상하게 한다. 이 두 사람에게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가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회의 선입견을 깨뜨리고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실력 하나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는 연예인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광대 달문은 조선의 ' 폴 포츠 ' 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대중들의 시선과 인기가 너무 과하게 되면 자칫, 자신의 연예인 활동 혹은 인생 전부를 한 순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독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전국 연희 공연을 통해 나름 짭짤한 수입을 거둔 달문은 주위의 권유로 인해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달문은 돈의 달콤한 맛에 맛들어버렸다. 그리고 기방에 자주 드나들어 기생의 치마폭에 둘러싸이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큰 인기에 비해서 그는 그렇게 부유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공연에서 얻은 어마어마한 수익만으로도 달문도 양반층으로 급부상할 수 있는, 완전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문에 대한 기록에서는 그가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대부분, 그의 공연과 기방에서 노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로 인해서 인기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가십거리 역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고 심지어 왜곡되어 전해지기 마련이다.  

달문은 생뚱맞게도 역모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었다.  역모를 꾀한 이들이 당시 달문의 스타일을 흉내낸 것도 있었지만, 그들 중의 주모자가 자신이 달문의 동생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관련 없는 달문은 설상가상으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오랜 심문 끝에 달문은 역모 사건에 관련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역모를 일으키게 할 정도로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달문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가벼운 형벌이었기에 그의 귀양살이는 짧았으며 풀려난 뒤에도 다시 광대 활동을 했지만,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달문이 종적을 감추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간간히 전해져 내려오는 달문의 인생은 연예인으로서의 인생사를 보는 거 같기도 하다.  한 순간의 경험 때문에 대중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마는 불행한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조선 후기를 장식한 조선 문화의 아웃사이더

이 책에서 소개된 조선의 길거리 재주꾼들과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조수삼의 <추재기이>에서 인용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조수삼의 <추재기이>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으로 통해 전해내려오는 소문들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아서 아쉬운 단점이기도 하다. 평민들을 주체로 한 살아 숨쉬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여전히 조선의 사대부 의식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이렇다보니 길거리 재주꾼들은 대중들의 많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비례하는 대접은 부족하였으며 역사적 기록에서도 의도적으로 많이 배제되어야만 했다.  

세계적인 명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인생은 가까이서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보면 희극이다." 라고 말하였다.  조금 떨어져 있는 거리를 통해서 이들의 재주를 지켜본 조선 시대 사람들은 무척 즐거운 희극으로 보았지만, 반대로 타인에 의해 기록되어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내밀한 일상을 조금 더 가까이 보게 되면 조선 문화의 ' 아웃사이더 ' 로 살아간다는 인생의 서러움과 자조감이 묻어나 있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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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좋은 리뷰!

조선 시대 하면, 머랄까 국사 책에서 배운대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허구의 대상처럼 느껴지잖아요. 이야기 속 인물같고, 우리같이 자잘한 고민을 했을까 싶구. 그런데 <엽기 조선왕조실록>을 엄청나게 웃으면서도 한층 가까와진 느낌을 받았었답니다.
지금 읽으신 책에 대한 리뷰도 그런 느낌이네요. ^^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서 덜 하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모두 책=지식=(돈 또는 혁명) 등의 공식이 가능했잖아요. 그래서 금했나봐요. 책이란 곧 힘인거잖아요. 아마, 인류가 홀랑 망하고, 몇 안 되는 사람만이 남으면 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희안한 상상 중~)

cyrus 2010-12-17 17:22   좋아요 0 | URL
사실 이런 역사책 리뷰는 지루하기 마련인데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고님의 상상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보는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멸망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책을 소유하고,
또 그 책은 특권층만의 소유물이 될 수 있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2-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거리가 왕조사나 제도사에 치중한 역사보다 더 재밌지요.어차피 생활사를 모르면 역사는 맹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장터 같은 데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성대보호를 위해 무슨 약을 먹었을까요...

일제시대만 해도 20대 초반이 넘으면 노처녀 소리를 들었고 80년대만 해도 20대 후반에 접어들면 노처녀였죠.요즘은 애기 낳을 수 있는 마지막 연령까지도 노처녀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아무래도 평균수면이 길어질수록 노처녀 연령도 더 느슨해진 것 같아요.환갑도 못넘기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옛날엔 노처녀의 기준이 훨씬 더 엄격했겠지요.

cyrus 2010-12-19 19:37   좋아요 0 | URL
저도 한국사 같은 경우에는 풍속사, 생활사가 더 끌리더군요. 선조들의
삶을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그러고보니 저 역시 노자님의
궁금중에 대해 무척 궁금하기도 합니다. 책의 저자인 안대회 교수가 옮긴
<추재기이> 역시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