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말레이시아
조경화 글, 마커스 페들 글 사진 / 꿈의열쇠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리뷰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평이 나쁜데, 아마도 '나쁠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봐서인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저자가 똑똑하고(학창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많이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더 열심히 글쓰기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실망스런 부분은 사진 부분이었는데, 한국인 아내가 글을 쓰고 캐나다인 남편이 사진에 취미를 붙여 사진을 찍었다고 했는데, 사진이 안좋더라. 뭐 각자의 취향이니, 자기가 좋은대로 찍고 싶은대로 찍었겠지만, 여행기는 대체적으로 사진이 큰 영향을 미치는 바, 내게는 맞지 않는 취향의 사진들이었다. 나는 역시 베트남 쌀국수 여행 책이 여태 읽은 여행 책 중에 최고로 좋았어.....



어떤 호텔에서는 '두리안'이 반입금지인데, 가격이 비싸고 날카로운 돌기가 나있고, 냄새는 화장실 변냄새와 같은데 맛에 대해서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두리안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개성 있는 사람은 속된 말로 튄다. 눈에 띄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과 결코 다 잘 어울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결코 다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 우리 풍토에선 이런 유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성을 우스갯소리로 '개 같은 성질'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창의적인 인간 즉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다. 두리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입금지'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가장 필요한 것 같다. (p.156)




읭?

여기 뭔가 이상해.. 뭔가, 억지스럽달까... 이 부분 읽으면서 읭???? 했더랬다.




안좋은 리뷰를 보고난 후에 선택해 읽은 책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말레이시아 여행을 결정하는데, 한 방이 더 필요해!! 하고 있다가, 그 한 방이 되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맛있는 먹거리가 많다고 한다................ -0-





영국의 한 대학에서 조사한 바로는 인간이 습관을 만드는 데는 ‘66일‘ 정도가 걸린단다. 이게 습관이 되면 오히려 안 하면 찝찝해진다. 습관은 사람의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난 내가 나를 위해 직접 정해봐야겠다. 하루에 다섯 번, 아니 한 번만이라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으로 뭐가 좋을까?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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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6-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레이시아 가세요? ... 쿠알라룸푸르.. 좋은데 말이죠. ㅎㅎㅎ

다락방 2017-06-13 09:28   좋아요 0 | URL
네, 쿠알라룸푸르에 먹방 ...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마땅히 마음에 드는 말레이시아 여행기가 없네요... (시무룩)

비연 2017-06-13 12:25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때 갈 때 마땅한 여행기가 없어서 그냥 여행책자 들고 갔던 기억이...;;;;;
아 그래도 다시 가고 싶네요. 쿠알라룸푸르 먹방여행이라닛! 으. 놀고 싶어요.

다락방 2017-06-13 16:02   좋아요 0 | URL
저도 여행책자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사진 않았는데, 여행책자 들고가는 건 싫은데 ㅠ 그것 말고는 답이 없을 듯. 베트남은 국수책 들고 가면 진짜 끝내줬는데요!

비공개 2017-06-13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 말레이시아에 살던 2013년에 3주간 가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갈데가 쇼핑몰밖에 없더라구요.. 쇼핑몰에서 유모차에 꽂아둔 아이폰을 잃어버렸던 기억만 ㅠ 말레이시아 먹방은 몰까 궁금합니다. 다녀오셔서 후기 남겨주세요^^

다락방 2017-06-13 16:03   좋아요 1 | URL
ㅎㅎ 거기 꼬치도 있고 면도 있고 그래서, 제가 며칠 안있겠지만, 가서 죄다 먹어보고 오겠습니다! ㅎㅎ
지금 당장 갈 건 아니고요, 여름에 갈 거예요. 휴가때요. 후훗.
아이폰 조심해야 하는군요.
호치민 갔을 때 안그래도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제 손에 든 아이폰을 보고는 가방에 넣으라고 충고해주시더라고요. ㅠㅠ
 

















만약 내가 이 책,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끔찍해서 가족과 연을 저버리며 백인인척 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 베트남전에 참전하고난 후 아시아인만 보면 쏴죽이고 싶었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흑인과 참전이라는 건 내게 막연한 것이었고 어떤 구체적인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가 이 책 하나 더 읽었다고 해서 그전보다 깊게 그들을 이해했다고 보는 건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아, 이정도인건가, 하는 충격을 받은건 사실이다. 특히 참전후에 후유증에 시달리며, 아시안 음식점에 가서 음료 주문하나 조차도 힘겨워하는 사람을 보는 건, 대단히 힘든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힘들었다면, 피부색 옅은 흑인이 자신의 엄마에게 '나는 이제 가족과 연을 끊고 백인으로 살아가겠소' 하는 것도 너무 놀라운 장면이었고. 그 장면들, 그 고민들마다 필립 로스는 아주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필립 로스는 대단한 작가구나, 필립 로스가 아니면 대체 이런 책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나는 진짜로 했다.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진짜 너무 좋아, 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진짜다. 정말 그랬단 말이다.



그러나 1권의 끝부터, 페미니스트 교수에 대한 언급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 

인종차별로 노(老)교수를 고발한 페미니스트 여자교수가, 실은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그게 안되어 분해서(!)그런 것처럼 그린 것부터, 어???????????????????????????????????? 이렇게 되었는데, 그래, 똑똑한 페미니스트 여자가, 자신이 사랑받고 싶었던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니, 분명 속상하고 화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나는 특유의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되살아나, 그렇게 애써 모른척하며 1권을 덮었던 거다.

그런데 2권에서부터는 도무지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2권에 이르면, 이 프랑스에서 온 페미니스트 여자교수를, 미국의 페미니스트 여자교수들이 싫어한다는 거다. 왜냐고? 인기가 많고 명품을 쓰는 사람이라서!!



읭???



필립 로스에게 페미니스트는...뭐지?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페미니스트는, 예쁘고 돈 많고 남자에게 인기 많은 여자를 질투하는, 그런 사람인가? 그러니까 내 개인의 성취는 별로 없어서, 그래서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사람이란 말인가? 페미니스트는 값비싼 물건을 써서는 안되는 사람인거야?




그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신중하지 못할테지만,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 여자들이 그녀보다 훨씬 페미니스트답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신중하지 못한 이유는 그 여자들이 이미 충분히 그녀를 멸시하고 있고,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는 것처럼 보이며, 언제나 그녀의 동기와 목적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젊고 날씬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맵시가 나며, 단시간에 높은 자리까지 승진하면서 대학 외부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기 때문에, 파리에 있는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아테네 여교수들이 쓰는 진부한 말들(기저귀족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거세되고 싶어하며 사용하는 그 진부한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 사용할 필요도 없다. (2권, p.113)



그러니까, 이 프랑스에서 온 젊은 여자교수 '델핀'이 페미니스트 답지 못한 건, 그녀가 젊고, 날씬하고, 매력적이고, 맵시가 나고, 유명하기 때문...인거야? 




사실, 그녀는 아테나 대학의 페미니스트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인습에서 자유로운 여성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등졌고, 즉 프랑스를 대담하게 떠나왔고, 교수로서 열심히 일하고, 논문 발표도 열심히 하고, 성공하고 싶어한다. 기댈 데가 없는 만큼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집과 모국에서도 벗어나 완전히 혼자다. 타향살이. 자유롭기는 하나 대개는 몹시 쓸쓸한 타향살이. 야심만만하다고? 공교롭게도 그녀가 철저히 독립적인 저 페미니스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도 야망이 큰 건 사실이다. (2권, p.114)




델핀은 자유롭고 페미니스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야망이 크단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들이 왜 그녀를 싫어하냐고?



여자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끌리기 때문이고, 그런 남자들 가운데 아서 서스먼 같은 유명인사가 있기 때문이며, 그녀가 장난삼아 샤넬 빈티지 재킷에 스키니진을 입거나 여름에는 슬립드레스를 입고 캐시미어와 가죽 옷을 즐겨 입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여자들의 끔찍한 옷차림에 대해 절대 상관하지 않는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녀의 옷차림을 두고 상습범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걸까? 그 여자들이 자신에 대해 불쾌하하며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그녀는 다 안다. 그 여자들은 그녀가 마지못해 존중해주는 남자 교수들과 똑같은 소리-그녀가 협잡꾼이며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겠다고-를 하는데 그것이 더 큰 상처를 준다. "그 여자는 학생들한테 사기 치는 거야." 그들은 말한다. "학생들은 어째서 그 여자의 본 모습을 못보는 걸까?" 그들은 말한다. "학생들한테는 그 여자가 여자 옷만 걸친 프랑스 남성우월주의자라는 게 안 보이나?" 그들은 그녀가 학과장이 된 건 더 좋은 수가 없어서였다고 말한다. (2권, p.114)



필립 로스에게는 철저히,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보다. 그러나 여자의 적은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과 상황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오늘 너랑 적이어도 내일은 친구가 될 수 있고, 내가 오늘 너랑 연대해도 내일은 너랑 반대 입장으로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직장 내에서도 나는 남자들과 경쟁하기도 해야 하고 그건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여자사람인 내 입장에서의 적은 여자가 될 수도 있고 남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때로 어떤 여자들을 미워하지만 대부분 많은 여자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 입장에서 친구는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남자들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또 어떤 남자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누며 애정을 갖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 역시 그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옷을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고 비싼 옷을 입을 수도 있다. 세련되게 입을 수도 있고, 옷 따위 그저 걸치는 것일 뿐, 이라며 심드렁할 수도 있다.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랑스의 페미니스트가 좋은 옷을 입고 학생들과 잘 지낸다고 싫어한다. 그래서 분개한다. 만약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프랑스의 페미니스트에게 분개했다면, 그 이유가 정말로, 단지, 남자들이 그녀에게 끌리기 때문이란 말인가?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글쎄다. 여자인 내가, 페미니스트인 내가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여자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닌 늙은 남자가 참 잘도 아네? 아마도 그런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그 숱한 대한민국의 지식인 남자들처럼 '야, 문제는 여성비하만이 아니야, 더 크게 봐' 라는 말 같은 거 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이 프랑스에서 온 '델핀'이, 모두의 미움을 받으면서 어떤 꿋꿋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녀는 외롭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인기 많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겐 여자사람 친구가 없고 남자연인도 없다. 그녀는 섹스는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지적인 대화까지 함께 할 사람을 원하는데, 그런 남자가 진짜 없다. 자신과 지적인 교류를 할 남자가 없어. 결국 그녀는 남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게 되는데, 자신이 어떤 남자를 원하는지 써놓고 보니, 그게 자신이 고발한 그 인종차별 교수인거다. 자신을 사랑해주길 원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 교수. 아아, 사실 나는 그 사람을 원해, 그 사실이 끔찍하지만, 그 사람이어야 해,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 그를 망하게 할거야, 이러면서 그녀 스스로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형, 남성적인 매력에 지적인 대화까지 할 수 있는 걸 갖춘 남자가, 그 늙은 교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 교수는 이 대학의 여자청소부-나는 교수인데 그녀는 청소부야!!-와 연인관계다. 게다가 그 청소부는 문맹인데!!!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흠이 없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건 내 삶의 축을 이루는 모토가 될 순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들로부터 받게 되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옳다고 하는 바를 실천하려 하고 행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그러면 그때마다 비난과 욕을 먹게 될 것이고. 그렇지만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델핀과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하찮게 느껴진다. 니네 그렇게 성평등 주장하곤 하지만 사실은 남자한테 사랑받지 못해서 부들부들하지, 라는 느낌이 자꾸 드는 거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이 현상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주 아프고 잔인하게 얘기하는데, 그건 대학 청소부-문맹이며 젊은 여자-와 이 대학의 학장까지 지낸 늙은 남자교수가 연인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외부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건 남자가 권력으로 여자를 누른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여자는 이 관계를 정말 좋아했다니까?' 를 아주 강하게 주장하는 거다. 어떻게? 그들의 관계를 알지도 못하는 채로 비난하는 한 게시물에 의해서.



열네 살에 가출해 정규교육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가 전부이며, 그 이후 짧은 생애 내내 기능적 문맹으로 살았던 이 여성의 곤경에 대해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 누구보다 전제적인 학장으로 십육 년 동안 아테나에 재직하며 총장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둘렀던 은퇴한 대학교수의 농간에 맞서야 했던 이 여성을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강력한 힘 앞에서 그녀가 얼마나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에게 굴복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악한 남성적 힘에 노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린 자신의 육체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의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하리라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가늠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2권, p.146-147)





물론, 남자와 여자가 어떤 입장이건 간에 그들 사이에 사랑과 친밀함이 싹틀 수 있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가 하고자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고, 그 지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것을 일단 비난하기에 앞서, 그 안에 있는 사정 혹은 사연에 대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분명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겉보기에 그런것 같은 일이라면, 우리는 '이들이 사랑했을것이다'를 먼저 전제하기 보다는 '이 여자는 폭력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를 당연히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그 여자가 어릴 때부터 계부에 의한 성폭력에 시달렸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었는데, 자신이 잡역부로 일하는 학교의 총장까지 지냈던 늙은 남자와 함께 있었다고 했을 때, 폭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생각은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우리가 무조건 비난하기에 앞서,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사연에 대해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렇지만, 이런 사회와 현상을 만든건 혹시 모를 그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폭력을 저질러온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앞으로도 필립 로스의 작품을 읽고 싶다. 그가 얘기하는 것들에는 귀기울일만한 것들이 많으니까. 이번 책도 나는 여러가지로 좋았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시선만큼은 그저 흔한, 지식인인 '체'하는 그저 그런 남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아 당황했고, 게다가 책에서 이렇게 미묘하게 잘 비난해놔서, 찬란한 글빨로 무시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이정도의 글을 쓰는 작가가, 이정도의 지명도가 있는 작가가 이런 시선을 갖고 있다니,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이 휴먼 스테인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니콜 키드먼 주연이라는데... 




새삼 스티븐 킹이 고맙네... 




그간 필립 로스의 작품을 읽어왔는데, 내가 그의 책 속에서 그가 여자들 혹은 페미니스트를 보는 시선에 대해 불편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가 그런 시선을 보이지 않아서였는지, 혹은 그 책들을 읽을 때 나의 페미니즘 감수성이 무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내가 또 필립 로스를 읽을 때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갖게 될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읽을 그의 작품들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휴먼 스테인에서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시선 만큼은 지워지지 않고 내내 그를 따라다닐 것 같다. 너무 속상한 게, 나는 필립 로스를 내치고 싶지 않았었다. 글 잘 쓰는 작가, 앞으로 계속 읽고 싶은 작가로 생각하고 있었던건데, 나는 이제 좋아하는 작가에 필립 로스를 말할 수가 없다. 그전에도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글 잘 쓰는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제 뭔가 관심 밖의 영역으로 밀려나버렸다고 해야할까. 그러보고면, '린디 웨스트'가 자신의 책 《Shrill》에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는 너무나 명백하고 자명한 이치인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걸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바보같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니야, 아닐 거야, 자꾸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뭔가 훌륭한 작가를 내친다는 게 스스로 잘 받아들여지질 않아서.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서 잊으려 해도 자꾸만 곱씹어지고, 곱씹을수록 너무 괘씸한거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속상하다. ㅠㅠ




필립 로스는, 주인공 콜먼의 여동생 입을 빌어 이런 얘길 한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들은 왜 미워하지 말아야 하죠? 저세상 사람이 된 제 남편은 왜 미워하지 말아야 하죠? 제가 성자와 결혼한 건 분명 아니거든요. 아무리 남편을 사랑했어도 눈이 먼 건 아니에요. 게다가 제 아들은 어떻고요? 미워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은 녀석인데. 아주 미워하기 쉽게 늘 엇나가주니까요. 하지만 증오가 위험한 건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예상보다 백배는 더 괴롭기 때문이에요.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어요. 미워하는 마음보다 통제하기 힘든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미움을 다스리는 것보다 차라리 술을 끊는게 훨씬 쉬워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죠. (2권, p.199)



나는 미움이, 미움을 가진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어오면서 이 부분을 읽으니, 이 부분 역시 예사로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진다. 


아니, 나는 미운 행위를 한 사람들을 계속 미워할거야. 미워하면서, 술 마실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만 한정하겠어. 난 그럴거야.





"찰스 드루 박사는," 그녀가 말했다. "혈액응고를 막는 법을 발견해 혈액을 저장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가 교통사고로 다쳤을 때,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유색인 환자를 받지 않는 바람에 출혈과다로 사망했죠." (2권,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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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6-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는 중이니깐 다락방 리뷰는 잠심 패스하고,
어제 잠들기전에 루(프랑스인 교수)교수의 실수를 읽었다오!!!!!!!!!!!!!!!!!!!!! 두둥!!!!!!!!

과연 그 뒤는 ........ 읽고 싶다.

다락방 2017-06-09 16:22   좋아요 0 | URL
응 그래요. 얼른 다 읽고 컴온!

clavis 2017-06-1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스티븐 킹에게 고마웠다,에서 빵터졌음당♥

저는 몇 일전에 알라딘에게서 통보를 하나 받게 되었습니다

무려,락방님의 매니아가 되었다고 뙇아~!!♥♥ㅋ

다락방 2017-06-11 12:18   좋아요 1 | URL
아니, 매니아라니요! 아아,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거침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것의 매니아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아, 좋군요! 히히히히히

clavis 2017-06-1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 두 가지에서 마니아인데요,바흐의 187번째.그리고 ㅇㅇ경님의 18번째 마니아라구요!!!
 
시사IN 제506호 : 2017.05.27
시사IN 편집부 지음 / 참언론(잡지)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밀렸다 읽는 시사인에서 이런 걸 보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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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6-09 09:22   좋아요 0 | URL
저는 시사인을 받으면 뒤에서부터 읽거든요. 그래서 이 페이지를 먼저 읽는 편이에요. 이번 글은 특히나 좋았어요.

나비종 2017-06-11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며칠동안 고민고민하다가 갔던 산부인과 의사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감기 걸리면 콧물이 나듯 이건 그저 질에 걸리는 감기일 뿐이라고요. 대수롭지 않은 거라는 말에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글이 참 좋네요. 무지가 자아내는 공포를 훅 날려버리는 통쾌함이 있습니다ㅎㅎ

다락방 2017-06-11 12:1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다가 너무 좋아서 같이 읽자고 가져왔어요. 저 역시 질염으로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해지기도 했었는데, 그냥 나타났다가 자연치유 되기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우울해하지 말자, 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산부인과 가는 것도 처음엔 겁났었는데, 이제는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고민없이 가자고 생각하고 있고요. 여전히 산부인과에 가는 건 참 어렵지만, 다른 병원 가듯이 드나들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조카들이 왔다. 제 삼촌과 베개 싸움을 실컷 하더니, 이모 방으로 들어와서는 두 녀석 다 이모 옆에 눕고 싶다고 한다. 나는 타올로 두 녀석의 베개를 만들어 주고는 아이들의 요청대로 음악을 틀어 주었다. 누워서 자겠다는 녀석들은 갑자기 일어나서는 저마다 내 책장 앞으로 가 그림책을 꺼내들고 온다. 그리고는 이모 책 읽어줘, 하며 책을 내민다. 큰 녀석이 골라온 책을 읽으면 작은 녀석이 이제 자기가 고른 걸 읽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조카들에게 읽어준 책들은 아래 네 권이다.

















 [천하장사 옹기장수]를 읽을 때는 '이모 소변이 뭐야?' 하고 묻는다. '응 오줌이야. 오줌을 소변이라고 해. 똥은 대변이라고 해' 라고 말해주었다. [에밀리]를 읽을 때는 '흰옷'이라는 부분에서 '어디어디, 그림 잘 볼래, 흰옷인가' 하며 그림을 열중해 보았다.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고나서는, 이모는 어디가 제일 좋아? 묻는다. 나는,



나는 기다립니다. "미안해" 라는 한마디를...



이라고 쓰여진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며, 이모는 여기가 제일 좋아, 말했다. 조카는 왜? 라고 묻더라. 그림에는 빨간 끈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마구 엉켜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이 둘 사이에 이렇게 끈이 꼬여있잖아, 이걸 풀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미안해 라는 말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이 페이지가 이모는 제일 좋아, 하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플까봐]를 읽을 때는, 내가,


울었다.



이미 읽었던 책이고 리뷰도 썼던 책인데, 예전에 읽을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와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 이거 뭐지, 왜 한 장 한 장 죄다 슬픈거지. 나는 약간 울고는,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이모는 이 책 너무 슬퍼, 얘기했다.



책을 읽어주는 사이, 큰 조카가 갑자기 자신의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면서, 



"이모랑 헤어지기 싫어"



라고 말했다. 나는 조카에게 



"헤어지지 않으면 되지" 라고 말해주었다.




조카들을 보내고는 내 방에 들어와서 다시 가만, [마음이 아플까봐]를 읽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기분으로, 녹음해 보았다. 오랜만에,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굿나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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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6-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어려운 이야기네요. 어렵게 들어서이겠지요.
내가 꺼내지 못하는 마음을 다른이가 꺼내주어요. 어린 아이가.

다락방님 울음이 내일의 웃음이 되기를...
잘 들었습니다. 굿나잇 될 것 같아요 덕분에.

다락방 2017-06-07 08:14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읽으면서 저 어린아이는 어디서 나온걸까, 왜 어린아이가 등장한걸까 싶었어요. 그 부분이 잘 이해가 안돼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잃고 딸을 얻은 건가...이 부분은 이해가 안되는데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빈의자를 볼 때 어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 후에 아이가 마음을 병 속에 넣을 때 말예요.

굿나잇 되셨어요, 나인님?

moonnight 2017-06-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소리도 아름다우신 다락방님^^ 마음이 아플까봐 너무 슬프죠ㅠㅠ 저도 조카들 읽어주며 눈물나서 혼났던 기억 있어요ㅠㅠ 너무 좋지만 너무 슬픈 책ㅠㅠ

다락방 2017-06-07 08:15   좋아요 0 | URL
마음을 빈 병에 넣고 살아가는 거, 그래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다운 시선을 잃어버린 게 너무 슬프더라고요. 꺼내려고 해도 이제 방법을 모르겠는... ㅠㅠ 할아버지의 빈의자도 너무나 쓸쓸하죠 ㅠㅠㅠㅠㅠ 이거 이렇게 슬펐었나, 몇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ㅠㅠㅠ

보슬비 2017-06-0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조카들은 상냥해요. 울 조카들에게 볼수없는 풍경이예요. 부럽사옵니다~~^^

다락방 2017-06-07 08:17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오자마자 제 방 뒤져가면서 뭐 가져갈 거 없나? 막 이래요 ㅠㅠㅠㅠ 이번에는 매니큐어 발라달라고 난리난리 쳐서 두 녀석 모두에게 매니큐어 발라줬어요. 얘네들 오면 제가 잠시도 쉴 틈이 없어요. 하하하

비연 2017-06-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소리 넘 예쁘세요~
이 책 몰랐었는데.. 마음이 아프네요... 왠지.

다락방 2017-06-07 08:17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요! ㅎㅎ

이 책 저 예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도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뭔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온 느낌이에요. 휴...

Forgettable. 2017-06-0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점심을 먹으며 들었는데 배부르네요.. 하하

다락방 2017-06-07 08:17   좋아요 0 | URL
그건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아의서재 2017-06-0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찬 바람이 불면..노래까정 듣고 잡니다요. ^^

다락방 2017-06-07 10:23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굿나잇이요, 달걀부인님!
:)

clavis 2017-06-0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운서 같으시네요^^
도대체 못하는게 뭐래요?♡♡♡♡♡♡♡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다락방 2017-06-09 09:21   좋아요 1 | URL
아니, 이런 칭찬이라니! 클래비스님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맙습니다!

안단테 2017-06-0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늘 눈팅만 하다가 첨으로 댓글 달아봐요. 목소리가 넘 좋으셔요...!

다락방 2017-06-09 19:36   좋아요 0 | URL
어머! 처음으로 다는 댓글을 이리도 아름답게 달아주시네요. 히힛. 고맙습니다!!!!!
 
















어쩌면 몇 번 이 공간을 통해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나는 회사 동료 남자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당시 그 동료남자의 여자친구가 내게 따로 연락을 했었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라는 거였다. 나는 이런 연락을 받는게 너무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그 남자동료에게, 이런 연락을 받았다, 얘기를 했고, 그 동료는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내 여자친구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이랬지? 하며 당황스러워 했더랬다. 나는 그 당시에 참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는데, 아아, 그 남자동료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멀어진 사이, 그랑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데이트는 길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너는 니 여자친구에게 갈 거잖아' 라고 말을 하며 마지막 만남에서 그에게 '노'를 얘기했는데, 그때 그는 내게 그랬다. '내가 여자친구한테 안간다고 해도 너는 나랑 어쩔 생각이 전혀 없잖아!' 라고. 당시에 남자동료는 다른 여자동료에게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는데, 그 여자동료가 나를 불러서는 '그 사람 여자친구도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던 적이 있더랬다. 나는 그사람의 여자친구에게 그런 추궁을 당할때조차,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랑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던 거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고, 어쩌면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뭔가 일을 벌일 사이라는 어떤 촉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했다.



반대로 이런 일도 있었다.

내 남자친구의 '어떤' 여자사람친구가 내게 몹시 거슬렸다. 나도 아는 여자였고 나랑도 친한 여자였는데, 다 좋았는데, 이상하게 이 여자가 내 남자친구랑 만난다고 하면, 나보다 먼저 알았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기분이 나쁘고 신경이 쓰이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가 무슨 못된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잘못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쁜거다. 뭔가 내가 그들의 의심되는 행동을 보거나 들은 것도 아니라서 남자친구에게 '그 여자 만나지마' 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여자를 만났다고 할 때마다 내 기분은 상했더랬다. 아, 신경쓰여, 유독 저 여자를 만난다고 하면 신경쓰여... 그러던 차에 다른 남자로부터 내 남자친구와 그 여자가 예전에 사귀던 사이었음을 듣게 됐다. 아... 몰랐는데..... 내가 괜히 기분 나쁜게 아니었구나... 이 촉이 그냥 이런 게 아니었어....




헨리가 약국에 새 여직원 데니즈를 고용했을 때, 올리브가 느꼈던 것도 이런 촉이 아니었을까. 다짜고짜 올리브는 헨리에게 그녀가 '생긴 게 꼭 생쥐같다'면서 험담을 한다. 데니즈가 일도 잘하고 친절해서 헨리는 그녀를 많이 아끼는데, 올리브는 영 내키지가 않는거다. 올리브가 워낙에 퉁명스러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올리브의 입장에서 데니즈는 참 꼴도 보기 싫은 여자다. 게다가 일터에서 만나는 사이이니, 깨어있는 시간에는 오히려 올리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데니즈랑 보낸다. 


데니즈에게도 남편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남편의 이름 역시 '헨리'였다. 데니즈의 남편은 자신들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헨리에게 깍듯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그렇게 올리브의 집에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데, 식사 자리에서 (나이 든) 헨리가 케첩을 쏟았고, 이에 올리브는 툴툴댄다. 그리고 디저트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왔는데,




이윽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덩이씩이 각자의 푸른 디저트 그릇 가운데로 미끄러져 내렸다. "바닐라 맛을 제일 좋아해요."

데니즈가 말했다.

"그래?" 올리브가 대꾸했다.

"나도야." 헨리 키터리지가 맞장구쳤다. (p.16)




하아- 너무 은밀하고 답답한 장면이다. 헨리는 가뜩이나 예뻐라하는 데니즈가 자신과 똑같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니 반가운 마음에 불쑥,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툴툴대고 있던 올리브는, 저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속으로, 아아, 밉다밉다 하니까 더 미운 짓만 골라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데니즈는 올리브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너무 치명적이었어.

나랑 이 책을 함께 읽던 친구도, 저 때 헨리가 저렇게 말하는 건 눈치없는 짓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차에 데니즈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데니즈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다. 당연히 슬퍼하고 상심하는 데니즈에게, 헨리는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고양이를 한마리 선물한다. 고양이덕에 데니즈는 살만해진 것 같았는데, 아아, 그 고양이마저 사고로 죽게 된다. 이 일을 감당하기 힘든 데니즈는, 당연하게도 헨리에게 전화해 울부짖는다. 원래도 '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라는 이 사람이, 헨리에게 전화를 한다. 




"가보시지." 올리브가 말했다. "기가 막혀. 가서 당신 애인이나 위로해주라구."

"그만해, 올리브." 헨리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잖아. 데니즈는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지금 자기 고양이까지 치었어. 당신은 동정심도 없어?"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고양이를 갖다주지 않았으면 빌어먹을 고양이도 안치었을 거잖아!" (p.46-47)




고양이를 사고로 잃고 상심한 데니즈에게 올리브가 너무 심한걸까? 어쩌면, 그러니까 데니즈와 헨리가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올리브는 너무 예민한 걸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어느 밤, 그녀가 붉은 벙어리장갑 한 짝을 떨어뜨렸다. 헨리는 허리를 숙여 장갑을 주운 다음 장갑의 입구를 벌려주고 그녀의 작은 손이 쏙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p.32)



이 은밀하고 내밀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나눌 수 없었을 것 같은 작고 사소한, 그러나 큰 일은, 헨리에게는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해프닝, 이 작은 사건, 헨리가 드니즈에게 벙어리장갑을 끼워준 사소한 사건은, 올리브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알지 못하지만, 올리브는 거침없이 데니즈가 헨리의 애인이라고 말을 한다. 올리브가 잘못 느낀것일까? 헨리가 드니즈와 호텔을 드나들던 사이는 아니라는 이유로, 올리브의 의심이 생뚱맞다 할 수 있을까?




밤늦게 데니즈의 작은 아파트에 앉아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토니를 생각하자 가슴을 찌르던 질투와 분노. 자신을 둘러싸고 미로처럼 뻗어나가던 끈적끈적한 거미줄 속에서 익사하는 듯하던 느낌. 데니즈가 계속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던 마음. 그리고 데니즈는 그를 계속 사랑했다. 헨리가 빨간 벙어리장갑을 집어 데니즈가 손을 집어넣도록 잡아주었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쓰라리고 격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p.48)




헨리와 데니즈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사이도 아닌 게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한 교감을 나눴고 특별한 관계였다. 데니즈와 약국에서 보냈던 시간들 한때를, 헨리는 가장 완벽하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들은 특별했다. 그것을 그들이 사랑이라 부른들 혹은 우정이라 부른들, 그들이 특별했던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런 상대일거라고 의심했던 올리브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올리브가 저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러니까 툴툴대는 성격의 올리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 고양이를 잃어서 상심했겠어요 얼른 가서 위로해주고 와요,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어쩌면 인류애적으로, 헨리가 데니즈에게 달려가 위로해주는 것은 옳을 것이다. 옳지. 상심한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해주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야 할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해서, 올리브가 '으응, 이 일은 당연하니까 나는 괜찮아, 아임 오케이, 잘 다녀와, 스윗허트~'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밖에 답할 수가 없다. 헨리가 데니즈에게 '인간적인 도리'로 찾아갔던 것도 아닐 뿐더러, 왜 그녀는 자신의 불행과 상심 앞에, 내가 사랑하는, 나와 함께 사는 남자를 부르는가? 왜 이 남자를 찾는가? 물론 그녀는 지금 혼자다. 찾을 다른 남자가 없다. 그런데 왜 하필, 내 옆에 있는 남자란 말인가. 이런 사이를, 이런 관계를, 이런 여자를, 내가 미워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도리이므로, 내 입장이야 어찌됐든, 그래, 그래야 인간이지, 하고 살포시 미소 지어야 하는건가? 사람이, 그게 되나? 그리고 올리브는, 어떻게 그렇게 알게 됐을까. 벙어리장갑 사건은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가장 커다란 촉 같은 걸 언제나 예민하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자마자 생쥐 같다고 탁- 싫은 티를 낼 수 있었을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지옥 천국>에도 나온다. 여자가 프라납을 좋아하지만 프라납과 맺어질 수는 없는 처지다. 그런 상황에서 프라납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걸 알고 소개 받게 되는데, 엉덩이가 크다면서 그녀를 험담하는 거다. 프라납의 애인이 엉덩이가 정말 커서, 그래서 엉덩이가 크다고 험담한걸까. 설사 엉덩이가 크다고 한들, 그것이 여자가 험담할 이유가 되나. 아니다. 내가, 나만, 특별해야 되는데, 그의 옆에 내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 아닌가. 아, 내가 어딘가에 그 문장 써놨을 거 같아서 찾아보고 싶은데, 제기랄,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어. 뒤져보고 와야겠다.


제기랄..찾았는데.......영어로 인용해놨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란 여자는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 종잡을 수가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In a few weeks, the fun will be over and she’ll leave him.” (p.68)


I found her utterly beautiful, but according to my mother she had spots on her face, and her hips were too small. (p.68)



앗. 엉덩이가 크다는 게 아니라 작다는 거였네???????????????????????????????????? 오. 마이. 갓!! 내 기억력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나 욕한다고 생각해서 크다고 기억하고 있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헨리가 데니즈와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걸 보면서, 올리브가 그렇게 퉁명스런 말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리브가 좀 더 부드럽다면 좋을텐데, 하고. 그렇지만 올리브가 퉁명스럽기 때문에 헨리가 데니즈에게 빠진걸까? 저 상황에서 올리브가 어떻게 부드럽게 대했던들, 어차피 헨리는 데니즈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나랑 함께 있는 사람이 어떤 게 부족해서, 라기 보다는, 자신의 느낌, 자신의 의지가 그렇게 행한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누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 수 있듯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신경이 다른 데 쏠린 것도 눈치챌 수 있지 않나? 올리브가 아예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아닌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만약 헨리와 올리브가 굳건한 사이었다면, 그들 사이가 굳건한 신뢰로 똘똘 뭉쳐 있었다면, 올리브 역시 고양이의 죽음에 데니즈를 찾아가는 헨리에 대해서 '애인에게나 가보시지' 하고 쏘아붙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다른 여자에게 어쩌면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면, 가서 충분히 위로해주고 와, 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도 혹은 불현듯 찾아온 그 촉이란 것도, 그럴만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그랬으므로 촉을 작동시켜야 했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촉은 맞아 떨어지는 거지. 




이것이 약국의 이야기이고, 헨리와 올리브는 이 일을 겪고도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한 편 한 편 따로 써나가야 할텐데, 계속 쓸지는 모르겠다. 함께 살아간다는 거 너무 좋은데, 그래서 또 너무 쓸쓸한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쓸쓸할 수밖에 없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이 계속 쓸쓸한건가. 




언젠가 아는 사람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연애가 지겨워서 결혼을 하게 됐다고. 알아가고 헤어지고 이런 일들을 반복하는 거 그만 하고 싶어서 결혼을 선택했다고. 그들은 잘 살고 있는데, 새삼,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에서의 헨리와 올리브는 오십대였는데(육십대였나?), 여전히 긴장하고 의심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며 살고 있네. 물론 그런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일흔 넷에도 또다른 사랑이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짜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됐고, 어느 정도의 연애를 겪어봤으면, 이제 모든 걸 가벼운 미소로 대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감정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팔딱팔딱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셈인가...




그나저나,

밀물 얘기는 할 수 있을까? 아마 밀물 얘기는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 일흔 넷의 올리브 이야기는 간혹 했었고, 아직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내도 쏟아내도 계속 넘쳐나는 이야기들이 이 책속에 있다. 정말이지, 할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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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6-0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정말 좋아요.
읽으면서 혼자 키햐~~를 연발했네요.
다락방님 글은 재밌거나 유익하거나
혹은 재밌으면서 유익한데, ‘촉‘에 대한 고민 & 생각들이 특별하네요. <심규선 내 영혼의 쌍둥이> 글과 함께 금주의 best예요^^

다락방 2017-06-07 08:19   좋아요 0 | URL
저는 늘상 제가 좋아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단발머리님의 격려를 받으면, 이런 격려와 칭찬이 여태까지 나를 글쓰게 하는 힘이구나, 싶습니다. 늘 고마워요, 단발머리님. 흑흑 ㅠㅠ

올리브 키터리지는 정말 할 많이 많은 책이에요, 단발머리님. 머릿속에 생각이 진짜 엄청 많아져요! >.<

비연 2017-06-0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읽어야겠어요... 으헝. 넘 좋아요.

다락방 2017-06-07 08:20   좋아요 1 | URL
우엇 진짜 너무나 좋지요? 처음 읽을 때도 좋아했지만, 다시 읽는 올리브 키터리지는 예전보다, 제 기억보다 훨씬 좋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