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몇 번 이 공간을 통해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나는 회사 동료 남자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당시 그 동료남자의 여자친구가 내게 따로 연락을 했었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라는 거였다. 나는 이런 연락을 받는게 너무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그 남자동료에게, 이런 연락을 받았다, 얘기를 했고, 그 동료는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내 여자친구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이랬지? 하며 당황스러워 했더랬다. 나는 그 당시에 참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는데, 아아, 그 남자동료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멀어진 사이, 그랑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데이트는 길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너는 니 여자친구에게 갈 거잖아' 라고 말을 하며 마지막 만남에서 그에게 '노'를 얘기했는데, 그때 그는 내게 그랬다. '내가 여자친구한테 안간다고 해도 너는 나랑 어쩔 생각이 전혀 없잖아!' 라고. 당시에 남자동료는 다른 여자동료에게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는데, 그 여자동료가 나를 불러서는 '그 사람 여자친구도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던 적이 있더랬다. 나는 그사람의 여자친구에게 그런 추궁을 당할때조차,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랑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던 거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고, 어쩌면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뭔가 일을 벌일 사이라는 어떤 촉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했다.
반대로 이런 일도 있었다.
내 남자친구의 '어떤' 여자사람친구가 내게 몹시 거슬렸다. 나도 아는 여자였고 나랑도 친한 여자였는데, 다 좋았는데, 이상하게 이 여자가 내 남자친구랑 만난다고 하면, 나보다 먼저 알았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기분이 나쁘고 신경이 쓰이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가 무슨 못된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잘못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쁜거다. 뭔가 내가 그들의 의심되는 행동을 보거나 들은 것도 아니라서 남자친구에게 '그 여자 만나지마' 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여자를 만났다고 할 때마다 내 기분은 상했더랬다. 아, 신경쓰여, 유독 저 여자를 만난다고 하면 신경쓰여... 그러던 차에 다른 남자로부터 내 남자친구와 그 여자가 예전에 사귀던 사이었음을 듣게 됐다. 아... 몰랐는데..... 내가 괜히 기분 나쁜게 아니었구나... 이 촉이 그냥 이런 게 아니었어....
헨리가 약국에 새 여직원 데니즈를 고용했을 때, 올리브가 느꼈던 것도 이런 촉이 아니었을까. 다짜고짜 올리브는 헨리에게 그녀가 '생긴 게 꼭 생쥐같다'면서 험담을 한다. 데니즈가 일도 잘하고 친절해서 헨리는 그녀를 많이 아끼는데, 올리브는 영 내키지가 않는거다. 올리브가 워낙에 퉁명스러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올리브의 입장에서 데니즈는 참 꼴도 보기 싫은 여자다. 게다가 일터에서 만나는 사이이니, 깨어있는 시간에는 오히려 올리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데니즈랑 보낸다.
데니즈에게도 남편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남편의 이름 역시 '헨리'였다. 데니즈의 남편은 자신들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헨리에게 깍듯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그렇게 올리브의 집에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데, 식사 자리에서 (나이 든) 헨리가 케첩을 쏟았고, 이에 올리브는 툴툴댄다. 그리고 디저트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왔는데,
이윽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덩이씩이 각자의 푸른 디저트 그릇 가운데로 미끄러져 내렸다. "바닐라 맛을 제일 좋아해요."
데니즈가 말했다.
"그래?" 올리브가 대꾸했다.
"나도야." 헨리 키터리지가 맞장구쳤다. (p.16)
하아- 너무 은밀하고 답답한 장면이다. 헨리는 가뜩이나 예뻐라하는 데니즈가 자신과 똑같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니 반가운 마음에 불쑥,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툴툴대고 있던 올리브는, 저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속으로, 아아, 밉다밉다 하니까 더 미운 짓만 골라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데니즈는 올리브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너무 치명적이었어.
나랑 이 책을 함께 읽던 친구도, 저 때 헨리가 저렇게 말하는 건 눈치없는 짓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차에 데니즈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데니즈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다. 당연히 슬퍼하고 상심하는 데니즈에게, 헨리는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고양이를 한마리 선물한다. 고양이덕에 데니즈는 살만해진 것 같았는데, 아아, 그 고양이마저 사고로 죽게 된다. 이 일을 감당하기 힘든 데니즈는, 당연하게도 헨리에게 전화해 울부짖는다. 원래도 '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라는 이 사람이, 헨리에게 전화를 한다.
"가보시지." 올리브가 말했다. "기가 막혀. 가서 당신 애인이나 위로해주라구."
"그만해, 올리브." 헨리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잖아. 데니즈는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지금 자기 고양이까지 치었어. 당신은 동정심도 없어?"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고양이를 갖다주지 않았으면 빌어먹을 고양이도 안치었을 거잖아!" (p.46-47)
고양이를 사고로 잃고 상심한 데니즈에게 올리브가 너무 심한걸까? 어쩌면, 그러니까 데니즈와 헨리가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올리브는 너무 예민한 걸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어느 밤, 그녀가 붉은 벙어리장갑 한 짝을 떨어뜨렸다. 헨리는 허리를 숙여 장갑을 주운 다음 장갑의 입구를 벌려주고 그녀의 작은 손이 쏙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p.32)
이 은밀하고 내밀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나눌 수 없었을 것 같은 작고 사소한, 그러나 큰 일은, 헨리에게는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해프닝, 이 작은 사건, 헨리가 드니즈에게 벙어리장갑을 끼워준 사소한 사건은, 올리브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알지 못하지만, 올리브는 거침없이 데니즈가 헨리의 애인이라고 말을 한다. 올리브가 잘못 느낀것일까? 헨리가 드니즈와 호텔을 드나들던 사이는 아니라는 이유로, 올리브의 의심이 생뚱맞다 할 수 있을까?
밤늦게 데니즈의 작은 아파트에 앉아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토니를 생각하자 가슴을 찌르던 질투와 분노. 자신을 둘러싸고 미로처럼 뻗어나가던 끈적끈적한 거미줄 속에서 익사하는 듯하던 느낌. 데니즈가 계속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던 마음. 그리고 데니즈는 그를 계속 사랑했다. 헨리가 빨간 벙어리장갑을 집어 데니즈가 손을 집어넣도록 잡아주었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쓰라리고 격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p.48)
헨리와 데니즈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사이도 아닌 게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한 교감을 나눴고 특별한 관계였다. 데니즈와 약국에서 보냈던 시간들 한때를, 헨리는 가장 완벽하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들은 특별했다. 그것을 그들이 사랑이라 부른들 혹은 우정이라 부른들, 그들이 특별했던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런 상대일거라고 의심했던 올리브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올리브가 저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러니까 툴툴대는 성격의 올리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 고양이를 잃어서 상심했겠어요 얼른 가서 위로해주고 와요,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어쩌면 인류애적으로, 헨리가 데니즈에게 달려가 위로해주는 것은 옳을 것이다. 옳지. 상심한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해주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야 할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해서, 올리브가 '으응, 이 일은 당연하니까 나는 괜찮아, 아임 오케이, 잘 다녀와, 스윗허트~'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밖에 답할 수가 없다. 헨리가 데니즈에게 '인간적인 도리'로 찾아갔던 것도 아닐 뿐더러, 왜 그녀는 자신의 불행과 상심 앞에, 내가 사랑하는, 나와 함께 사는 남자를 부르는가? 왜 이 남자를 찾는가? 물론 그녀는 지금 혼자다. 찾을 다른 남자가 없다. 그런데 왜 하필, 내 옆에 있는 남자란 말인가. 이런 사이를, 이런 관계를, 이런 여자를, 내가 미워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도리이므로, 내 입장이야 어찌됐든, 그래, 그래야 인간이지, 하고 살포시 미소 지어야 하는건가? 사람이, 그게 되나? 그리고 올리브는, 어떻게 그렇게 알게 됐을까. 벙어리장갑 사건은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가장 커다란 촉 같은 걸 언제나 예민하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자마자 생쥐 같다고 탁- 싫은 티를 낼 수 있었을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지옥 천국>에도 나온다. 여자가 프라납을 좋아하지만 프라납과 맺어질 수는 없는 처지다. 그런 상황에서 프라납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걸 알고 소개 받게 되는데, 엉덩이가 크다면서 그녀를 험담하는 거다. 프라납의 애인이 엉덩이가 정말 커서, 그래서 엉덩이가 크다고 험담한걸까. 설사 엉덩이가 크다고 한들, 그것이 여자가 험담할 이유가 되나. 아니다. 내가, 나만, 특별해야 되는데, 그의 옆에 내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 아닌가. 아, 내가 어딘가에 그 문장 써놨을 거 같아서 찾아보고 싶은데, 제기랄,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어. 뒤져보고 와야겠다.
제기랄..찾았는데.......영어로 인용해놨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란 여자는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 종잡을 수가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In a few weeks, the fun will be over and she’ll leave him.” (p.68)
I found her utterly beautiful, but according to my mother she had spots on her face, and her hips were too small. (p.68)
앗. 엉덩이가 크다는 게 아니라 작다는 거였네???????????????????????????????????? 오. 마이. 갓!! 내 기억력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나 욕한다고 생각해서 크다고 기억하고 있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헨리가 데니즈와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걸 보면서, 올리브가 그렇게 퉁명스런 말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리브가 좀 더 부드럽다면 좋을텐데, 하고. 그렇지만 올리브가 퉁명스럽기 때문에 헨리가 데니즈에게 빠진걸까? 저 상황에서 올리브가 어떻게 부드럽게 대했던들, 어차피 헨리는 데니즈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나랑 함께 있는 사람이 어떤 게 부족해서, 라기 보다는, 자신의 느낌, 자신의 의지가 그렇게 행한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누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 수 있듯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신경이 다른 데 쏠린 것도 눈치챌 수 있지 않나? 올리브가 아예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아닌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만약 헨리와 올리브가 굳건한 사이었다면, 그들 사이가 굳건한 신뢰로 똘똘 뭉쳐 있었다면, 올리브 역시 고양이의 죽음에 데니즈를 찾아가는 헨리에 대해서 '애인에게나 가보시지' 하고 쏘아붙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다른 여자에게 어쩌면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면, 가서 충분히 위로해주고 와, 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도 혹은 불현듯 찾아온 그 촉이란 것도, 그럴만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그랬으므로 촉을 작동시켜야 했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촉은 맞아 떨어지는 거지.
이것이 약국의 이야기이고, 헨리와 올리브는 이 일을 겪고도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한 편 한 편 따로 써나가야 할텐데, 계속 쓸지는 모르겠다. 함께 살아간다는 거 너무 좋은데, 그래서 또 너무 쓸쓸한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쓸쓸할 수밖에 없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이 계속 쓸쓸한건가.
언젠가 아는 사람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연애가 지겨워서 결혼을 하게 됐다고. 알아가고 헤어지고 이런 일들을 반복하는 거 그만 하고 싶어서 결혼을 선택했다고. 그들은 잘 살고 있는데, 새삼,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에서의 헨리와 올리브는 오십대였는데(육십대였나?), 여전히 긴장하고 의심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며 살고 있네. 물론 그런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일흔 넷에도 또다른 사랑이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짜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됐고, 어느 정도의 연애를 겪어봤으면, 이제 모든 걸 가벼운 미소로 대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감정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팔딱팔딱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셈인가...
그나저나,
밀물 얘기는 할 수 있을까? 아마 밀물 얘기는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 일흔 넷의 올리브 이야기는 간혹 했었고, 아직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내도 쏟아내도 계속 넘쳐나는 이야기들이 이 책속에 있다. 정말이지, 할 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