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빌레뜨],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폭풍의 언덕],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 페이퍼를 쓰기 위해 책장에서 책을 꺼내오고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무얼 말할까,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들춰보면서, 와 진짜 케이트 밀렛 대단하다, 하는 생각을 다시했다. 책 전체에 밑줄 긋고 싶을만큼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일단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빌레뜨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통해 함께 읽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2] 에 언급된 책이라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 책을 시작하면서, 혹은 진행하면서 이미 완독하셨을거라 짐작한다. 나 역시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결론에는 결국 주인공 루시와 사랑하게 되었던 루시의 애인인 폴이 죽으면서 끝난다. 한 남자의,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라 불러도 좋을 중요한 인물이, 우리의 여자주인공에게 애정을 주었던 남자가 죽었는데, 우리의 케이트 밀렛은 이렇게 쓴다.
















그리고 애인으로 전락한 폴은 익사한다.

루시는 자유롭다. 자유란 혼자를 말한다. (당시 기분 좋은 표현이었던) '사랑'과 자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루시는 섹슈얼리티를 희생하고라도 자신을 뒷받침해온 개인주의적 인간성을 유지하기로 한다. 감상적 독자라면 루시를 '비뚤어졌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샬럿 브론테는 강인한 마음의 소유자 였으므로 함께 살면서도 여성을 자유롭게 해주는 남자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을 결혼시키는 경우조차도 그러한 해피 엔딩은 부정직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브론테는 보여주려 한다. 따라서 그러한 결혼은 풍자처럼 읽히기도 하고 사랑에 반대하는 냉소적 책자처럼 읽히기도 한다. 브론테 자매가 실제 그러했듯 루시의 입장에서 다른 해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 정치학의 해법은 결혼에 있지 않으므로 논리적인 루시는 결혼하지 않는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여성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폴은 조용히 바다에 묻힌다. -p.299



잘은 모르겟지만 케이트 밀렛이 이 책을 발표했을 당시 위의 구절을 읽었다면 사람들이 다 놀라지 않았을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 주인공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그것에 대한 슬픔이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루시는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나. '해피 엔딩은 부정직하고 공허하다'고 표현하고 '논리적인 루시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폴은 조용히 바다에 묻힌다'니. 이 구절을 사람들이 읽었을 때 케이트 밀렛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폴의 죽음을 루시의 자유로 생각하다니, 다른 사람들과는 정말 다른 감상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거다. 그러다가 문득, 어? 나도 그 책 읽었고 폴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쓴 글을 부랴부랴 찾아봤다. 나는 백자평을 썼고,이렇게 썼다.



딱히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고 식탐도 없어 보이는(!) 샬럿 브론테는 여성에게 쾌락과 자유가 동시에 주어질 순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존도 뽈도 둘다 싫다!! 했던 나를 숙연해지게 만드는 결말, 그러나 비로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 -2022년 12월 19일 백자평



아니, 나도 그랬네? 나도 폴의 죽음을 숙연하다고 해놓고서는 바로 '비로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해놨네? 케이트 밀렛 후계자세요? 남자의 죽음에 자유를 느껴버린 나란 여자... 하-

나는 남자들에게 좋은 여자가 결코 될 수 없어.....



자, 이 책의 놀라운 많은 부분들 중에서 내가 오늘 얘끼하고 싶은 부분은 케이트 밀렛이 '에릭슨'의 책 [Womanhood and the Inner Space]을 언급한 부분이다. 함께 읽어보자.



에릭슨이 여자아이의 놀이를 단순히 수동적이 아니라 평화주의적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여성의 '영역'이 인형의 집과 같은 내적 공간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될 때는 그 어떤 사회적 실행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점에서 우리를 울적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폭력에 대한 남성의 집착이 아니라 한곳에 정주하려는 여자아이의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꿈이다. 여자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가만히 앉아(여성에게 기대되는 '양육' 행위도 하지 않고) "남자와 동물의 침입"(이는 참으로 놀라운 결합이다)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p.430



에릭슨을 모르고 에릭슨이 쓴 책을 읽어본 적도 없지만, 여기서 케이트 밀렛이 말하려는 바,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남자와 동물의 침입을 기다린다'고 말한 부분에서, 나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엄청나게 빡쳐서 리뷰를 썼던 책,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나버렸다. '가만히 앉아서 남자의 침입을 기다린' 대표적인 인물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바로 그녀가 아닌가. 




내가 쓴 리뷰는 여기 https://blog.aladin.co.kr/fallen77/8954224












남주 로버트는 일에 있어서 프로이며 어디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바람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인데 프란체스카는 어떠한가. 나는 당시 리뷰에 이렇게 써두었다.



게다가 프란체스카는 젊은 시절 남자만 기다리는 타입의 여자였으니, 그 또한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눌러붙어 있는 사람은 사실, 내 타입이 아니다. 물론 상황이란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의 삶을 한 순간에 놓고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나로서는 매력을 느낄 수 없는 타입의 여자랄까. 집에만 조용히 가만히 있는데 인생사랑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2016년 12월 6일



나는 이게 정말이지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결혼해서 애낳고 그러고서도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인생 사랑 걸어들어오고 그러나 인생 사랑 떠나가도 여자는 또 가만히 거기에 있고... 물론 어떤 사람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졌다는 걸 알고있지만, 이 남자작가의 로맨스 소설은 전형적으로 움직이는 남자와 기다리는 여자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소설을 그래서 싫어한다. 물론 에릭슨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처럼 야육도 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남자랑 살던 집에서 잠깐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남자가 침입해버렸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흠.



아주 오랜 시간 세상은 여자에게 가만히 집에만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교육도 일자리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여자들이 실제로도 그렇듯이 책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은채 갇혀 살아야 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다가도 나는, 당시의 주인공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면, 여행이 자유로웠다면, 그 마을에서 한정적인 남자 보고 사랑한다고 속박되었을까, 를 생각한 적이 있더랬다. 



"그렇지만 세상에 잘생기고 돈 많고 젊은 사람은 많아요. 어쩌면 그분보다 더 잘생기고 돈이 많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나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 눈앞에는 없잖아. 난 에드거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 -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P130












그 마을에만 살면서 한 동네 남자들만 보니까 사랑도 그 남자들 중에서만 하게 된다. 하- 너무 답답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 눈앞에는 없어'서, 내 눈앞에 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운명이라니. 너무 엿같지 않은가.


결국 내 닉네임을 '다락방'으로 하게 만들었던 너무나 인상적인 소설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은 청소년기 시절에 다락방에 갇혀 지내야 하는 4남매가 등장한다. 주인공 캐시와 크리스는 십대 청소년이었고 그 당시에 다락방에 갇혀 서로만 보고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몇 년 갇혀있다보니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섹스하게 된다. 근친상간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것이라는 인식을 하더라도,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필요한거다. 한정된 공간, 한정된 사랑.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 그게 주어진 운명이라는게 너무 비극아닌가. 물론 버지니아 앤드류스 소설에서는 그 한정적 공간이 캐시에게만 주어진 건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엄마 말을 무조건 따라야했던 크리스에게도 같이 주어진 환경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던거다, 한정된 공간 그리고 한정된 사람. 아니야 여자들아, 바깥으로 나가라, 더 넓은 세상이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있다. 지금 니가 아는 그 최선의 남자는 결코 최선의 남자가 아니라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는 어떠한가.

어린 시절부터 혼자 지내면서 엄마가 강조한 자매애를 느낄 수는 없었다. 여자드은 아무도 카야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집밖으로의 외출이 자유로웠던 남자들은 카야를 찾아온다. 카야를 찾아와서 글을 알려주고 사랑한다 속삭이고 섹스를 한다. 카야는 자신의 집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남자들로부터 글을 배우고 섹스를 하고 그리고 배신도 경험한다. 카야야말로 이동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으면서 침입하는 남자들을 기다리기만 했다. 그 침입한 남자들이 모두 나쁜건 아니었지만, 좋은 남자도 있었지만, 만약에 카야가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자매애도 경험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굳이 남자와 섹스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주어진 환경에서 받아들이는 것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지금은 에릭슨의 말을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겠지만, 어쨌든 여자들에게 나가라고, 돌아다니라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만 하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다. 왜 이리저리 떠도는 잭 리처는 남자인가. 왜 여자 잭 리처는 없는가. 짐 하나 없이 가볍게 돌아다니다가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저기서 자면서 오늘 이 남자랑 자고 내일은 저 남자랑 자고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러나 만약 여자 잭 리처가 있다면, 그녀가 남자 잭 리처처럼 싸움을 잘하지 않는한, 그녀에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성추행범 강간범 여성혐오범죄자.. 에릭슨은 책으로 여성을 눌러 앉히려고 했다면, 지금의 남자들은 글이 아니어도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여자를 눌러앉히려고 한다. 그런다고 눌러앉아있나봐라. 돌아다닐 것이다. 막 다니자, 막!!



성 정치학 밑줄 그은 부분 다시 보는데 진짜 너무 좋다. 성 정치학 좋으네. 케이트 밀렛 언니 쎄다.



내가 싱가폴에 입국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날은 8월 9일이었고 내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내게 주고자 했던 친구들은 내가 떠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부분 상품권으로 내게 선물을 줬는데, 나는 워낙에 상품권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알라딘 상품권이란 얼마나 좋은가. 너무 좋아서 역시 알라딘 상품권 짱이야, 으뜸이야, 히죽히죽하면서, 싱 갔다오면 책 잔뜩 사야지, 했었단 말이다. 그러나 미래는 예측불허, 나는 이곳에서 전자책을 사게 되었고, 그 때 알라딘 상품권은 너무나 유용한 것이었다. 만세!! 알라딘 상품권으로 가난한 유학생은 전자책을 삽니다. 브라보!!


감사합니다, 친구여!!



아 페이퍼 하나 또 쓰고 싶은데 사이먼 만나러 가야겠다.

나 왜 사이먼 좋아. 사이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이 책 영어 원서 같이 읽기로 해서 일단 번역본 읽어보고 있는데, 예상 외로 사이먼 좋아서 당황하고 있다. 그간 샐리 루니 책을 이것말고 두 권 더 읽었는데, 샐리 루니가 그려내는 남자를 내가 좋아할 줄은 몰랐어서 심히 당황스럽다. 독서괭 님이 일전에 이 책 원서 읽으시면서 사이먼 언급 하셨는데, 독서괭 님, 제가 독서괭 님 전화번호 알았다면 사이먼 좋아서 카톡 보냈을 겁니다.

단발머리 님, 이 책 좀 읽어주면 안돼요? 우리 사이먼 얘기해요!! ㅠㅠ









이만 총총.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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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9-03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알라딘 상품권이라는 게 있었군요?!😹
샐리 루니 저 책은 저도 읽었는데…. 사이먼….. 음…. 전 답답했던 거 같아요! ㅋㅋㅋ

암튼 성정치학도 빨랑 읽어야지…..

다락방 2025-09-03 09:13   좋아요 2 | URL
잠자냥 님 이 책 읽고 글 남기신 것 봤어요. 안좋아하셨더라고요. ㅎㅎ
저도 안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네요. 그래서 당황스럽습니다. 저는 사이먼 고유의 매력에 빠졌다기 보다는 아일린이 되어 사이먼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 앞에서 쪼그라드는 아일린에게 깊이 공감하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성정치학 너무 좋아요, 잠자냥 님, 얼른 읽어주세요! >.<

잠자냥 2025-09-03 09:43   좋아요 0 | URL
사랑이 쉬운 잠자냥은 ㅋㅋㅋㅋ 사랑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샐리 루니 캐릭터들이 답답합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다락방도 사랑이 쉬운 거 같은데... 왜 쪼그라든 캐릭터에 감정이입해?! (대리 경험?! ㅋㅋㅋ)

다락방 2025-09-03 10: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에 쪼그라드는 사람에게 깊이 공감했어요. 사랑을 이룬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제 마음속 어딘가에 쭈구리가 있는걸까요? 저는 왜그렇게 사랑에 아픈 사람에게 이입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아일린이 되어 사이먼을 사랑합니다. 하아- 저도 제가 왜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런 쪽에 이입하고 제가 이입 못하는 건 원나잇 하는 캐릭터들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어머 이게 뭐얏, 내가 지금 뭐한거지?‘ 이런 캐릭터에 이입 1도 안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03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싱가폴에서 우리 다락방님 케이트 밀렛한테 이렇게 진지하실 건가요? 저 이 책 두 번 읽었는데, 한 번 더 읽고 싶어지네요. 진짜 선구자, 참 예언자인 케이트 밀렛은 지금에 가져와 읽어도 혁명의 선봉, 우리 시대가 담기에도 차고 넘치오며....
케이트 밀렛 후계자 다락방님은 그의 가르침대로 참 자유를 선택해 아예 다른 나라로!!

우아, 이렇게 신기할 수 있습니까. 제가 어제 알라딘 ㅊㄴㅁ님에게 ‘긴 글 쓰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랬단 말이에요. 다정한 ㅊㄴㅁ님이 ‘아... 마침 책을 주문해서 오고 있는데, 어찌 알았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어제부터 샐리 루니 읽고 있어요. 맥파든 한 권 끝나서 다음 맥파든으로 안 넘어가고요. 왜냐하면, 독서괭님 완독 소식에 놀라서요ㅋㅋㅋㅋㅋㅋㅋ 어제, 펠릭스 만났습니다. 곧, 사이먼 만나겠어요!!

다락방 2025-09-03 09:30   좋아요 1 | URL
꺅 단발머리 님, 사이먼 만나면 꼭 좀 알려주세요. 제가 위에 잠자냥 님 댓글에도 썼지만, 사이먼 고유의 매력이 저를 끌어당긴다기보다는 ‘아일린이 사랑하는‘ 사이먼을 제가 아일린이 되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항상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이입하는 편입니다. 왜일까요.. 어제 샐리 루니 읽다가 급박하게 메모도 한 줄 써두었습니다. 그건 나중에 페이퍼를 쓸 때를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그런데 독서괭 님, 완독하셨대요? 어머낫! 저는 아직 원서는 시작도 안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바람돌이 2025-09-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정치학 뽐뿌에 샐리 루니 뽐뿌까지... 그러나 저는 영어로는 읽지 않습니다. ㅎㅎ

다락방 2025-09-05 13:05   좋아요 1 | URL
샐리 루니 영어로 시작하는데 너무 어렵네요. 한국책으로 일단 읽었으니 대충 봐야겠어요. ㅋㅋ
 

퇴사하고나서 책을 제대로 못읽었는데 싱가폴 오고 나서는 아예 못읽고 있다가 8월이 다 가기 전에야 두 권 읽었다. 

한 권은 어제랑 그제 리뷰랑 페이퍼 썼던 [로지 프로젝트] 이고 한 권은 백자평 쓴 [성 정치학]. 성 정치학도 페이퍼 하나 쓰고 싶다. 이제 슬슬 읽고 쓰는거 예전처럼 해봐야지. 그제 오랜만에 로지 프로젝트 페이퍼 쓰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뭔가, 퇴사하기 전의 내가 된듯한 느낌적 느낌? ㅋㅋ 그래,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었어! 바로 내가 왔다 만세! 막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다음날 리뷰도 썼고 또 내친김에 성정치학 페이퍼까지 쓸랬는데, 그건 못썼네. 이건 봐서 오늘 쓰던가 해야될텐데 책이 집에 있네. 하여간,


책을 몇 권 가져오긴 했지만 다른 책이 읽고 싶어져서 급하게 사서 읽은 책이 로지 프로젝트였다. 다행히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잇었네. 그래도 종이책이 좋아 한국에서 종이책 좀 배달시킬까 했더니 배송료가 너무 크더라. 찾아보니 싱가폴에 한국책 파는 서점도 있어 최근 나온 츠바이크 책 재고 있냐 물었더니 주문해야 하고 우리돈으로 3만원 정도란다. 하.. 못사겠네. 


한국에 있을 때는 출근길에 책 읽는 재미가 정말 컸다. 아침 시간에 집중도 잘되었었는데, 싱가폴에서 등굣길에 책을 읽는게 어렵다. 일단 지하철로 20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앉아서 갈 수가 없고, 사람이 많단 말이지. '흐음, 이런 상태라면 나는 출근길에 맨날 인스타만 봐야 하나?' 하다가 퍼뜩, 아 전자책! 해서 [로지 프로젝트]를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책을 전자책으로 읽고 있다. 10월에 한국 한 번 나가면 종이책 좀 더 가져와야지. 하여간 전자책 읽기를 시도하려고 전자책 좀 사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크레마 신제품 살 걸 그랬나봐.. 히융.
















오늘 아침 학교를 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내려야할 역에 내렸는데 얼라리여~ 비가 엄청 쏟아진다. 아니, 이건 맞을 수 잇는 비가 아니고 나는 우산이 없어.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전혀 비 올 것 같지 않았는데 20분만에 이런 비가 내린다고? 게다가 걸어서 10분 걸리는데 여길 어쩌나.


제버릇 개 못준다고, 나는 학교 다니면서도 이곳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이다. 그래봤자 공부하는 건 아니고 딴짓 하긴 하지만, 오늘도 가장 먼저 오는 학생일 수 잇었는데 우산이 없어서 이걸 어쩌지 이걸 어쩌지 하고 생각했다. 도저히 맞을 비가 아니고 그렇다고 그치길 기다리자니 그게 언제야? 학교 가는 길에 편의점도 없었던 것 같은데, 하다가 집 근처 지하철역 내부에 세븐일레븐 잇던게 생각나, 얼른 챗지피티 열어서 '지금 이 역 내부에도 세븐일레븐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랫더니 있다는거다! 만세! 그런데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네. 지도 보고는 역 내부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한테 물어가며 세븐 일레븐 가서 우산을 샀고, 그 우산 쓰고 학교 왔더니 학급에는 이미 다른 학생들 몇 명이 도착해있었다. 그래도 비 안맞고 와서 다행이야. 싱가폴에서는 항상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 내가 방심했다.


엊그제는 처음으로 잘 때 좀 무서워서 깼는데 천둥번개가 우르릉쾅쾅 한거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식구들 다 있어도 천둥 번개 소리를 좀 무서워하곤 햇다. 이 세상이 끝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엊그제는 그 새벽에 처음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진짜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학교 수업중에 잠깐 쉬는 시간이다.

나는 내가 집에서 만들어온 간식 프렌치 토스트를 가지고 휴게실에 가서 자판기 아메리카노를 뽑아 마시며 간식을 먹었는데, 누가 가만히 어깨에 손을 댄다. 응? 이 학교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 놀라서 돌아보니 엥크리가 안녕하세요! 한다 ㅋㅋㅋ 커피 뽑으러 왔단다. ㅋㅋㅋㅋㅋㅋㅋ 내 입 안에는 프렌치 토스트가 한가득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내가 포크로 프렌치 토스트 하나 찍어주며 먹어볼래? 했더니 손으로 가져가면서 이게 뭐에요, 한다. 그래서 내가 프렌치 토스트라고, 내가 만들었다고 했다. 엥크리는 먹더니 '맛있어요!' 라고 한국어로 답했다. 하나 더 줄까? 했더니 됐다고 했다.


엥크리는 4레벨 수업 들어서 나랑 메디컬 체크업 때 한 번 보고는 길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는게 전부인데 그 때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한다. 너무 좋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프렌치 토스트 먹고 커피 마시다가 양치하고 지금 다시 수업 들으러 강의실 왔다. 지금 읽고 있는 전자책 속 부부가 너무 또라이들 같다. 다 읽으면 백자평 써야지. 이게 지금 얘기였으면 정말  몰카범죄다 이 남편새끼야. 


로지 프로젝트 영어책도 싱가폴 서점에 주문 넣어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어로 궁금한 문장들이 제법 많다. 아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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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9-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 이야기 다락방 좋다.

다락방 2025-09-01 20:52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속이 다 시원합니다! 지금은 저녁 19:52 버거킹 왔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ㅋㅌ

망고 2025-09-0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에 들어왔다 가시는군요 비교적 가까우니 이런점은 좋네요
로지 프로젝트 읽고 앤드류랑 이야기 좀 하셨을까요?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01 20:51   좋아요 0 | URL
로지 읽고 쓴 페이퍼는 안줬고요 ㅋㅋ 로지 읽고 쓴 리뷰는 앤드류에게 줬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저희도 점점 서로에게 뜸해지고 있어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먼 산)

단발머리 2025-09-0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싱가폴 갔을 때 저도 비를 만났더랬죠 ㅋㅋㅋㅋ 그러나 식당 안이었다는ㅋㅋㅋ밥 다 먹으니 그쳤더라구요.
20분 출근길 독서도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5-09-01 23:34   좋아요 0 | URL
여기 거의 매일 비와요, 단발머리 님! 우산 챙기는게 필수인데 우산 챙기는게 너무 싫어서 안챙겼다가 오늘 쓸데없이 또 우산을 사는 일이 발생했네요. 에휴...
학교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20분도 안돼요 아 놔.. 가까워서 좋은데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전자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제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뽜이팅!

바람돌이 2025-09-0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에 신경쓸 일도 많았는데 성정치학을 완독했다니 그게 정말 대단하십니다.
점점 학교의 인싸로 나아가는 다락방님 화이팅입니다

다락방 2025-09-01 23:35   좋아요 1 | URL
성정치학 재미있어요, 바람돌이 님. 어렵지도 않고 케이트 밀렛이 엄청 잘 씹어줘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요.
그나저나 애들이 미성년자들이 대부분이라 술친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바람돌이 2025-09-01 23:37   좋아요 0 | URL
미성년자 ㅠㅠ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성 정치학
케이트 밀렛 지음, 김유경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예나 지금에나 섹스에 미치고 여성혐오에 미친 남자들에 대한 케이트 밀렛의 대놓고 까기.
케이트 밀렛은 똑똑하고 거침이 없고 남자들은 다 좆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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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9-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01 23:36   좋아요 0 | URL
앤드류도 남자사람이지요. 그 점이 참... 거시기한것입니다.. (어쩐지 소주를 한 잔 들이켠다)
 
[전자책] 로지 프로젝트
그레임 심시언 지음, 송경아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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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유전학 부교수이며 다른 사람들과는 '배선이 다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것이 힘들다. 그런 그가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데이트를 시도할 때마다 무언가 어긋나 첫 만남에서 바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는 공감능력도 부족할 뿐더러 사회성도 부족해서 자신의 파트너를 설문지를 통해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을 설문지로 골라내자, 는 거다. 이 설문지를 뿌려놓으니 대답하는 사람이 많고, 그 과정에서 돈은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기대에 백프로 부응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가장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만나서 데이트를 해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른바 아내 프로젝트.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도저히 예측불가능한 여성, 로지를 만난다.


이 책의 남자주인공이 모든걸 분단위로 계획하는 사람이고, 계획대로 되어야 인생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로맨스 조금 읽어봤다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다음 등장할 여주인공의 성격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이라는 것을 전혀 세우지 않는 예측불가능한 여성. 


로지가 바로 그랬다. 로지는 심지어 그 설문지를 작성한 사람도 아니었고, 나중에 돈이 이 설문지를 작성해 아내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는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 시켰다며 분노하기도 한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지속가능한 해산물은 먹을 수 있는 사람이고 약속시간에 언제나 늦는다.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인줄로만 알았더니 알고보니 심리학과 대학원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싶어하고, 이 일을 알게된 '돈'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도구를 이용해서 의심되는 사람을 DNA 검사를 해 로지의 아버지를 찾아주겠다고 한다. 이른바 아버지 프로젝트.


돈은 로지를 만나는 첫날부터 자꾸 자신의 시간표가 어긋남을 맞닥뜨려야 한다. 분단위로 계획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무언가 하나 어긋나버리면 그 다음 과정들까지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거짓말이 그 다음 거짓말을 부르듯이, 하나의 어긋남은 그 다음의 어긋남을 자연스레 불러낸다. 내가 오늘 오후 세 시에 집에서 나가기로 했고 네 시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면 두 시에 샤워를 해야 하는데, 만약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아 샤워를 할 수 없었다면 나는 두 시에 샤워를 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세 시에 집에서 나갈 수 없었을 것이며 네 시에 친구를 만나는 일은 불가해진다.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나의 늦음을 사과하고 다섯시에 그 자리에 갔어야 했을것이다. 계획이라는 것은 지켜질 때는 안정적이지만 하나가 어긋나 다른 것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작동한다.


돈은 일주일의 식단까지도 다 미리 정해두는 사람이고 딱 그만큼의 재료를 챙겨두는 사람이다. 약속 장소에 몇시몇분에 도착할지도 다 정해두는 사람인데, 로지를 만난 후로는 자꾸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어긋나고 취소하고 수정하고.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돈은 로지를 만난다. '너 왜 내 아버지 찾는 일을 돕냐'는 말에 자기도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지만, 하여간 로지를 돕는다. 그리고 로지를 만나는 동안 일정을 취소하고 수정하면서, '그런데 즐겁다'고 생각한다.



나는 빼앗긴 잠을 보충하기 위해장보기를 취소하면서 이미 오늘 스케줄을 수정했었다. 대신 저녁으로 조리 식품을 사 먹을 것이다. 때때로 나는 유연성이 없다고 비난받는데, 이 일은 아주 이상한 주변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내 능력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책속에서



"방금 테라스 쪽에 2인용 테이블이 났습니다. 그쪽으로 옮기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침에 오늘먹으려고 시장에서 산 식료품을 다음 토요일에 먹기 위해 냉동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영양분이 손실될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본능이 논리를 대신했다. -책속에서


한 여성이 내게 전화번호를 주며 연락하라고 했다. '재킷 사건', '발코니 식사, 심지어앞으로 수행할 '아버지 프로젝트'의 흥분보다이것이 내 세계를 더 망쳐놨다. 이런 일이 정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안다. 책, 영화, 텔레비전 속 사람들도 로지처럼 했다. 그러나내게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책속에서



어느날 돈은 자신이 받은 아내 프로젝트의 설문지 중에서 자신에게 너무나 잘 맞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을 써낸 여성 '비앙카'를 만나게 된다. 어, 바로 이 여성이다. 모든게 나랑 딱 맞아! 그는 비앙카와 무도회에 함께 참석하기로 한다. 모든 대답이 내 기대와 일치하는 바로 그 여성! 그녀가 춤을 잘춘다고 해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춤 연습도 이미 해둔 터다. 이 아내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참 이상하다.


"돈과 나는 마시지 않아요."

그녀가 내 잔도 뒤집으며 말했다. 진이 내게 활짝 미소 지었다. 내 쪽에서 짜증 억누르기 반응이 일어나다니, 이상했다. 비앙카는분명히 원래 설문지대로 반응했는데. -책속에서


춤을 연습한 것과 실전은 다른 문제여서 춤도 제대로 되지 않고, 비앙카는 모든 설문에서 돈에게 맞는 사람이었지만 실전에서 돈이 비앙카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모든게 내가 기대한 여성인데 짜증이나지? 비앙카가 돌아선 뒤 로지와 춤을 췄다. 예상하지 못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은 너무나 즐겁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여성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 즐거워! 돈은 이것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돈은 이 불편하지 않음은, 스텝을 밟기 위해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정말, 스텝에 집중해서 일어난 일이었을까? 그것은 상대가 '로지'여서 일어난 일은 아닌걸까? 그러니까 상대가 로지여서 일어난 일인데, 돈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려는걸까? 아니면 정말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걸까? 다른 사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인지하기까지 어떤 사람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법이다.


바로 이 일을, 그러니까 '스텝에 집중하느라 이 시간이 즐거웠어' 라고 생각한 바로 이 일을 바로 얼마전에 내가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을 읽다가 비로소 나야말로 알아채지 못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른 일들을 잊고 또 내가 그동안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을 수 있었던 것이, 내가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내내 했었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치면 대화가 되지 않으니, 이 시간의 즐거움에 몰입하고 내가 그동안의 나를 잊었던 것은, 내가 외국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그게 아닐 수도 있는걸까? 어쩌면 외국어로 얘기하는 다른 상황, 다른 사람에게서라면 이게 불가능했던걸까? 나야말로 돈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것을 보지 않으려고 돌아 앉아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했던 건 내가 집중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인걸까?



돈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돈은 자신에게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랑이 찾아온 후에도 이게 사랑인 줄은 몰랐다. 돈이 자신에게 온 것이 사랑이라고 인지하기 까지는 자신이 한 일,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일에 대해서 몇 차례의 분석과 해석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나서야, 아 나는 로지를 사랑하는 것이구나, 깨닫게 된거다. 그래서 그는 로지에게 구애하기로 한다. 로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로지의 사랑을 얻기로 한다. 이른바 로지 프로젝트.



나는 규칙을 존중했다.

그러나 지난 구십구 일 동안 나는 법적, 윤리적, 개인적인 규칙을 많이 어겼다. 나는 그것이 언제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았다. 로지가 내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고 내가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르 가브로슈'의 예약 시스템을 해킹한 날이었다.

"한 여자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고?" 진이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완전히 비합리적이야."

나는 당황했다. 사회적 오류를 범하는 것과, 합리성이 내게서 떠났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책속에서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그러나 미래만 예측불허인 것이 아니라 사랑도 예측불허이다.

사랑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나 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까지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다. 내 계획이 다른 물리적인 조건들로 인해 틀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틀어질 확률이 더 높다. 하다못해 여행을 가더라도 동행이 있다면 가고 싶은 때, 가고 싶은 장소에 대해 계속 얘기해봐야 한다.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밥을 언제 먹을지 무얼 먹을지도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나 역시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여행만 해도 그런데 사랑이야 오죽할까.

이 사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 사람의 표정을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말은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뜻일까? 무엇보다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아 이사람과 나는 사랑하게 되겠구나' 하는 것도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은 그 때 바로 거기에 있었고, 우리가 그렇게 만났고, 그런데, 영문을 모르겠지만, 내게 최고의 시간들을 만들어준다.



지난 팔 주 동안 나는 성인이된 뒤 인생에서 누린 최고의 시간 세 번 중 두번을 경험했다. 자연사 박물관 방문을 전부하나의 사건으로 칠 때 말이다. 그 시간은 두번 다 로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 로지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이를 알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책속에서



물론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시간을 선물한 뒤 내 인생에서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한 순간의 인연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준 사람이라면 붙잡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떻게해야 내 마음을 받아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그동안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까지 생각하면서, 조용히 내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러면서 상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는 일을, 해야하는게 아닌가. 그래야 내 인생에 최고의 시간을 선물해준 사람과 함께할 수 있고, 그래야 인생 최고의 순간을 또 맞이하게 될 수 있는거 아닐까. 


사랑은 붕괴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에서 누구보다 유능했던 형사인 남자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 일에 철저했던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신념이 붕괴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붕괴되었어요"라는 말은, 여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선언하는 셈이다. 

이 책속의 '돈'도 마찬가지. 


십오 분도 못 돼 내 스케줄은 전부 찢어지고, 부서지고, 쓸모없게 됐다. 로지가 접수했다. -책속에서



철저한 사람이 스케쥴이 찢어지고 부서지고 쓸모없게 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드는 상대를 계속해서 만나는 일. 사랑은 그렇게 붕괴와 함께 온다. 


일반적인 신체 접촉을 불쾌하게 느끼는 돈은, 그러나 이제 섹스가 가능한 남자가 되었고, 섹스를 한 후에는 섹스없이도 단순히 포옹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사랑이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이 깨닫게 해주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로맨스 소설이 하는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은 그걸 잘 해내었다.



"자네는 그런 말로 표현하는군. 약간 낭만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면, 나는 자네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겠어." -책속에서


나는 39세이고,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지적이고, 부교수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와 평균 이상의 수입을 가지고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나는 광범위한 여성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동물의 왕국에서라면 나는 재생산에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뭔가 여성들이 매력적이지않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 나는 친구를 만드는 일이 쉽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결함이 내가 낭만적인 관계를 맺으려 시도할 때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P8

"VGA 케이블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6시58분이에요."
"괜찮아요. 우리는 7시 15분 전에 시작한적이 없어요. 커피 한잔하실래요?" 줄리가 말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이토록 낮게 평가할까? 이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잡담을 하게 될 것이다. 십오분 동안 집에서 합기도 연습을 할 수도 있었는데. - P17

로지는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학창 시절기억이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이. - P121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P204

왜 우리는 다른 일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떤 일에 집중할까?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이 빠져 죽지 않게 구하려 하지만, 아이 수십 명을 굶어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기부는 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데도 대량 생산과 설치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부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는데더 효율적인 공공시설 프로젝트에 기부하기보다 태양 전지판을 설치한다.
이런 영역에서 내 의사 결정이 사람들 대부분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도 같은 종류의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즉각적인 자극에 반응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돼 있다. 우리가 직접 인지할수 없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반응에는 이성을적용시킬 필요가 있고, 이성은 본능보다 약하다. - P217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서 AM 2:30에 알람을 맞춰 놓고 침대에 들었다. 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진과 달리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다. 가라테도 건너뛸 것이다. - P226

"그럼 나는 필요 없겠네요." 로지가 말했이건 진짜 이상한 반응이었다. 지금까지도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로지가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 P289

나는 감정을 탐지하고 인지하고 분석하면서 완벽하게 행복했다. 그것은 유용한 기술이었고, 나는더 잘하고 싶었다. 때때로 감정을 즐길 수도있었다. 힘든 때에도 나를 방문했던 누나에게느낀 감사, 와인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 느끼는 원초적인 행복감.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우리를 못쓰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P297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가 커다란 부정적 가치-가장 심각한 것은 엉망이 된 스케줄와 커다란 긍정적 가치-그 결과 겪은 즐거운 경험ㅡ 를 동시에 담은 방정식을 다루고있기 때문이었다. - P300

지난 팔 주 동안 나는 성인이된 뒤 인생에서 누린 최고의 시간 세 번 중 두 번을 경험했다. 자연사 박물관 방문을 전부하나의 사건으로 칠 때 말이다. 그 시간은 두번 다 로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 로지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이를 알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 P439

"성인이 된 뒤로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어요." 내가 말했다. - P452

"젠장, 돈, 자네는 규칙을 어겼어. 언제부터자네가 규칙을 어겼나?" - P529

내 스케줄을 소거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케줄 없이 여드레를 보냈고, 수많은 문제와 마주쳤지만 비효율이나 시간이 조직화되지 않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에 미친 엄청난 혼란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로지를 둘러싼 불확실성. - P544

굴 한 개를 전자렌지에 넣고 몇 포 데웠다. 그러자 쉽게 열렸다. 따뜻했지만 맛있었다. 이번에는 레몬즙을 조금 짜고 후추를 쳐봤다. 환상적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느낌이었다. 새로 익힌 기술을 로지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굴이 지속 가능했으면 하고 바랐다. - P547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예측하기 어렵지요." - P575

"난 오늘 밤 여기서 당신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여생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걸 깨달으면 그 여생을 가능한 빨리 시작하고싶으니까요.
" - P586

"바로 지금인 것 같아요. 내가 살아오면서한 모든 일이 여기 있는 당신에게로 오는 길을 열어 줬어요." - P586

나는 로지를 껴안을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나와 함께 살기로 동의한 이후 내가 가장큰 공포를 느꼈던 문제였다. 나는 일반적인 신체 접촉이 불쾌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섹스는 확실히 예외였다. 섹스는 신체 접촉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이제 섹스를 하지 않고도 껴안을 수 있고, 이것은 분명 때때로 편리하다. - P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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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8-3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쪽 말이에요. ‘나는 잘생겼고’ 그 말이 없어서 여성들에게 매력 어필 못한거 아닌가요? ㅋㅋㅋㅋㅋㅋㅋ 아니라고요? ㅋㅋㅋㅋㅋ

사랑에 빠지게 될때 다른 사람, 그러니깐 외부의 그 사람의 내면의 변화보다 나의 변화를 감지하기가 쉽잖아요. 저는 거기에서 오래 머문 사람이었거든요. 지금 저 사람을 좋아하는 내 마음… 이걸 확인하는데 오래 걸려요 ㅋㅋㅋㅋ돈이 저 같네요. 자신이 로지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린…

소설 읽는 남자도 드문데 로맨스 읽는 남자라니ㅋㅋㅋㅋㅋ 이런순😘😍🥰

다락방 2025-08-30 22:31   좋아요 0 | URL
앗, 단발머리 님 덕에 ‘나는 잘생겼다‘ 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역시.. ㅋㅋㅋ

저도 그가 이 책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검색했을 때 그것이 로맨스 소설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제가 한 생각은 ‘역시 로맨스 시장은 대한민국과 세상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역시 로맨스 소설을 영어로 써야한다‘ 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는 이 소설을 로맨스 적으로 저에게 얘기한건 아니었고, 어린 시절 자신이 돈하고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분단위로 계획하고 연애할 때 조차도 그걸 반영해야 했던 사람이요. 그래서 재미있게 읽었대요. 제가 항상 남자들이 로맨스 소설을 읽어야한다고 부르짖어 왔는데,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세상에, 읽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여간 저는 붕괴되었다가 회복되었습니다. 흠흠.

잠자냥 2025-09-0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에 한 권이라니 무슨 일이야.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01 23:36   좋아요 0 | URL
그나마 한 권이라도 읽었다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진짜 역대급으로 독서 못한 몇개월이었어요 와.. 이제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5-09-0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다락방 초 경제독서 ㅋㅋㅋㅋㅋ 한 권 읽은 이걸로 리뷰/페이퍼 다 뽑힘!🤣🤣🤣 책 사~!!

다락방 2025-09-05 17: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게나 말입니다. 로지 프로젝트가 큰일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만세!!!!!!!!!!!!!
 















'돈'은 대학의 유전학 부교수이다.

그는 분단위로 계획을 세워두고 그대로 지켜나가는 사람이고, 이런 그의 특이한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윤리적으로 옳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고 약속은 지켜야 하는 사람인 그가, 어느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케빈 유'가 레포트를 직접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건 분명한 부정행위이고,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보고를 했다. 케빈은 퇴학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학장은 그 학생의 문제를 그런식으로 처리하기는 곤란하다고 했다. 학장은 학교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유지되고 있고 학생들에게는 학교의 도움이 필요하며 또 케빈은 겨우 한 학기가 남았다고 하는거다. 그러나 그가 교칙을 어긴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돈은 그를 봐줄 생각이 없었고 학장의 말도 돈에게 닿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위를 마주하면 바로 그 행위에 대해 판단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돈의 행위가 '옳았'고 케빈의 행위는 '부정'했다고 당연히 판단했다. 자신의 과제를 누군가 일부라도 대신해준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과제를 하려는 사람에게 얼마나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인가.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됐다면, 그 학생이 퇴학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러나, 돈이 달라졌다.

규칙대로 살아야 하고 계획한 대로 살아야하는 돈은, '로지'라는 예측불가능한 여성을 만나 자신의 성격의 변화를 느낀다. 계획했던 많은 것들을 취소해야 했고 예상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마주해야 했으며, 전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에 공감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던 그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좀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된것이다. 그래서, 그는 케빈 유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에게 왜 그가 직접 레포트를 쓰지 않았는지 물었다.



나는 내 사무실로 케빈을 불렀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왔고, 대략 28세(BMI 19 추정)였다. 나는 그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초조하다' 라고 해석했다. 나는 그의 개인 교사가 부분 혹은 전체를 써준 리포트를 그에게 보여 줬다. 나는 명백한 질문을 했다. 왜 직접 쓰지 않았는가?

케빈은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게 양심에 거리껴서라기보다 존경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시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퇴학당할지도 모른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가 중국에 있고, 아직 그들에게 이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이민 올 수 있기를, 그렇게 안 된다면 최소한 유전학 분야에서 일하기를 바랐다. 그의 현명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그와, 거의 사 년 동안 그 없이 버틴 아내의 꿈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전자책 중에서


케빈의 개인적 사정이 어쨌든, 그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사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모두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 언젠가 이민 올 수 있기 바랐다면, 그의 아내와 아이가 중국에서 자신의 학업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는 부정행위를 저질러서는 안되었다.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한거다. 그런데,


과거라면 나는 이것이 슬프지만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규칙을 깼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나도 규칙 위반자였다. 나는 규칙을 고의로 위반하지 않았다. 최소한 의식적으로 위반하지는 않았다. 아마 케빈도 나처럼 경솔하게 행동했으리라.

"유전자 변형 농산물 사용에 반대해 발전할 주요 논지는 무엇이지요?" 나는 케빈에게 물었다.

그 리포트는 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제기된 윤리적, 법적 논점에 대한 것이었다. 케빈은 종합적으로 요약해 대답했다. 심화 질문을 계속했지만, 케빈은 그것도 잘 대답했다. 그는 그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직접 쓰지 않았지요?" 나는 물었다.

"전 과학자입니다. 영어로 도덕적, 문화적 문제에 대해 쓰는 건 자신 없어요. 낙제하지 않도록 확실히 잘하고 싶었어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전자책 중에서



나는 돈이 케빈에게 전공 지식에 대해 재차 질문해본 것이 현명햇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이렇게 잘 알고 이해하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리포트를 직접 쓰지 않았는지 묻는것이야말로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케빈의 대답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유전학을 공부하고 싶고 유전학 분야에서 일하고 싶지만, 중국에서 유학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영어로 리포트를 써야하는 것, 그것이 도덕적, 문화적 문제에 대해 써야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이 어렵게 느껴질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유학온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이 어려움이 내게 남일같지가 않았다. 내 전공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외국어로 도덕과 문화를 접목시켜 글을 쓰라고? 그것을 잘할 자신이 없는 것, 그 마음은 충분히 짐작가능한 것이 아닌가.


나는 싱가폴에서 집 계약을 하던 내가 어쩔 수없이 생각났다.

외국인 집주인과 외국인 중개인을 만나 외국어로 써진 계약서를 눈앞에 받아들었던 일이. 그전에 내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계약을 좀 미루자던 얘기를 듣던 일을. 그 때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두려웠는지. 나는 학교 리포팅 데이에 참석해서 학교 직원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다. 이러이러해서 내가 계약을 못하고 있어, 그래서 거주지 주소가 없어, 라고. 직원은 '그 레터로 충분히 집 계약 가능한거야, 왜 안해주는거지? 전화하게 해줘' 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바로 이 때다 싶어 얼른 중개인에게 전화를 했고 학교 직원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내가 영어로 설명하지 못한 일을 학교 직원은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 중개인에게 설명해주었다. 한참 통화를 한 후 직원은 나를 바꿔주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중개인은 계약하자고 했다, 학생비자 나오면 그 때 보완하기로 하고 지금 레터로 계약하자고. 나는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햇고 직원에게도 재차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직원이 이 일을 자신의 상사에게도 얘기한 것 같았다. 다음날 메디컬 체크업 받으러 갔을 때 만난 그 상사가 나를 보더니 '너 집 어떻게 됐어?' 라고 물었다. 나는 '계약하기로 했어' 라고 답했다. 그래 잘됐다, 하면서 직원은 내게 이렇게 덧붙였다. "너 만약 문제 생기면 꼭 다시 얘기해." 나는 알겠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 뒤로 집 계약이 잘 되었고 또 학생비자가 나와 보완하면서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지만, 그 때 내가 얼마나 두렵고 매일이 긴장이었는지 그리고 그 때 도와준 학교 직원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가 생각났다. 계약서를 챗지피티 통해 번역해 읽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이걸로 된다는데 왜 안해주는거냐, 라고 충분히 설득하는 일을 내가 잘하지 못했는데, 학교 직원이 도와준 덕에 가능해졌던 일이. 


나는 케빈 유의 일이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물론 그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었고, 나였다면 그런 부정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내 전공에 대해 외국어로 글을 잘 써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엄청나게 크게 나를 압박했을 것이다. 잘하지 못하면 어쩌지, 잘하지 못하면 어쩌지, 내 모든 것들이 이 리포트로 인해 날아가버리면 어쩌지. 이런 고민은 나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케빈 유는 그 걱정이 지나쳐서 어긋난 결정을 했지만, 그러나 그의 그 걱정과 두려움이 나는 어쩐지 이해가 되고만것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이 로맨스 소설에서 나는 케빈 유의 사정에 눈물이 핑 돌아버린 것이다. 오, 신이시여. 사람의 환경이란 무엇인가요.


돈은 생각한다.

케빈은 분명 잘못했다. 그러나 케빈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를 이대로 과연 퇴학처리하는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는 케빈의 이야기를 듣고 케빈의 전공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고 그리고 케빈을 앞에 두고 생각을 한 뒤에 이렇게 결정한다.



"보충 과제를 낼 겁니다. 아마 개인 윤리에 대한 리포트 한 편을 써내야 할 겁니다. 퇴학 대신으로요."

나는 케빈의 표정을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해석했다. -전자책 중에서



아. 나는 이 보충 과제라는 결론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느 부분에서 그에게 더 특별한 대우가 주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자, 너의 실력으로 다시 써볼 기회를 줄게, 라는 것은 현명한 대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이어서 그런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에 어학연수를 와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그 때도 나는 이것이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확실한 건, 사람은 분명히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케빈과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니고 같은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 때도 나는 이 대응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열심히 썼는데? 나라고 영어가 쉬웠는줄 알아? 


그런데 지금은 안심이 됐다.

돈이 케빈 유에게 다시 한 번 실력으로 리포트를 쓸 기회를 준것에 정말 안심이 됐다.


새삼 외국에서 공부중인 모든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힘내자. (콧물 한 번 훌쩍 마셔주고) 힘내자, 여러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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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8-2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요, 힘내^^

다락방 2025-08-29 22:36   좋아요 0 | URL
네, 힘내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빠샤!

단발머리 2025-08-2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돈‘의 결정이 마음에 들어요.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 너무 좋은 거 같고요. 읽고 있는 자리가 다르니까 다른 이해, 다른 해석이 가능해지네요.
싱가폴 독서 라이프도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5-08-29 22:37   좋아요 0 | URL
네, 다른 이해를 해보라고 제가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있는건가 봅니다.
이제 슬슬 독서 해봐야지요. 그동안 책을 한글자도 못읽고 살았어요. 휴.. 화이팅!

망고 2025-08-2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처음 보는 거라 눌러 봤더니 작가가 호주 사람이로군요 흠흠 호주라...ㅋㅋㅋㅋㅋㅋㅋㅋ호주 하면 앤드류씨인데 말이죠😍

다락방 2025-08-29 22:3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앤드류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고 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어릴적의 자기가 이 책의 주인공하고 비슷했다고 하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나저나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전자책을 .. 좀 사야겠어요. 종잉책 사려니까 배송료가 책값만큼 나오네요 ㅠㅠ

망고 2025-08-29 22: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쩐지 그럴거 같더라니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8-29 22:46   좋아요 0 | URL
너무 뻔했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8-30 07:43   좋아요 0 | URL
망고님 철저하신 분 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보고.... 엥? 락방님 이런 책 좋아하셨던가? 하고 말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끝에 앤드류라니요 ㅋㅋㅋㅋㅋㅋ 명탐정 망고님!

다락방 2025-08-30 14:4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이 책은 로맨스 소설입니다. 방금 이 소설의 리뷰를 썼습니다. 만세! 저 8월달에 책 이거 한 권 읽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