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은 아빠 생신이다.
토요일에 식구들이 모여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이모가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이번엔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새로운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딱히 성공적이진 않았고.. 이건 투비에 써야지. 하여간 와인을 마시면서 티비를 보려는데, 보통 여행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우리는 수다를 떠는데 이번에는 내가 <스페인 하숙>을 다시 보기 하기로 했다. 일전에 방영당시 몇차례 보긴 했었는데, 최근에야 그 프로그램에서 유해진이 매일 달렸다는 걸 알게된거다. 달리는 유해진을 보고싶은 마음에 다시보기로 1회부터 시작했는데, 오오, 아직 유해진이 달리기하는게 본격적으로 나오진 않았는데 뜻밖에 스페인어하는 배정남을 보게 됐다.
흐음. 일단 스페인어 하기 전의 배정남은 비호감이었다. 그전에 그의 존재를 모르다가 스페인하숙에서 처음 보게 됐는데, 그 나이 되도록 양파 한 번 까본적 없고 마늘 한 번 까본 적 없다는거다. 딱 봐도 서른이 넘었는데, 삼십대의 성인 남자가 아직까지 마늘을, 양파를 안까봤다고? 나는 여기에서 분노했는데 아빠랑 이모는 '안해봤으면 모를 수 있지' 라고 하는거다. 아니, 그러니까 안해보면 모르는거 당연히 맞는데 그걸 어떻게 안해보냐, 살면서 마늘이랑 양파를 안먹진 않았을텐데 그렇다면 그걸 누가 다 대신해줬다는거 아니냐, 했던거다. 지금 검색해보니 어린 시절이 불행했으며 외할머니랑 살았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는데, 음.. 고생을 '안해서' 양파를 까본 적이 없는건 아니구나.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른 삶이 뒤에 있었던 거였구나, 싶기는 하지만, 그런 대화속에 이모가 이모 아들도(삼십대) 해본 적 없다고 해서 내가 더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여러분, 내 말 뭔지 알쥬?
하여간 그런데 이 배정남이 세상에,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거다.
정육점이든 야채가게든 가서 뭘 사는데 막힘이 없어. 단순히 하나 달라 두 개 달라가 아니라 조금 더 달라 같은 말을 한다니까? 내가 너무 놀라서 와 어떻게 저렇게 스페인어를 하지? 했더니 배정남이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는게 아닌가. 장을 보러 가기 전에도 뭘 사야할지 수첩에 항상 메모를 한다. 그리고 방송으로 배정남의 수첩을 찍어 보여줬는데, 와, 내가 너무 놀란건, 스페인어가 죄다 한글발음으로 적혀있는거다. 이를테면 스페인어의 mas 는 영어의 more 와 같은 뜻인데 그걸 mas 로 적어놓지 않고 '마스' 로 적어놓은거다.
와. 이건 정말 엄청난데?
저렇게 한글 발음으로 적어놓고 스페인어를 하려면, 정말이지 달달달달 외워야하는게 아닌가!! 이거 너무 대단하잖아?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차근차근 스펠링부터 배우면서 듣고 그래야할텐데, 이건 무작정 외우기잖아? 와- 진짜 너무 대단한 거 아닌가. 한글 발음으로 써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진짜 엄청엄청 노력했을 것 같은거다. 사실 외우기에 소질 없는 나는 저게 엄두가 안나. 어떻게 저걸로 다 외우고 대화가 될까. 진짜 너무나 대박인것이다. 와...
그래서 대화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이렇게 한국어로 발음 써놓고 외우는 것은 좀 문제가 나타날 수 있는게, 한국어의 발음 그대로가 스페인어의 발음과 같지 않아 내가 외우고 아는 단어여도 상대에게 그 뜻이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배정남도 스페인사람에게 내일 가게 오픈하는지 물어보고 싶어 스페인어의 내일을 발음하는데, 스페인어의 내일은 manana 이고 흐음, 이걸 읽어본다면 만야나 정도가 되어야할텐데 배정남은 이걸 '마나나' 라고 발음하는거다. 상대는 그걸 자꾸 '바나나' 로 듣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어 표기 외우기의 치명적 단점.
그런데 진짜 대화 너무 잘한다. 차승원도 배정남과 쇼핑하고 와서 '정남이 오늘 스페인어 만오천단어 쯤 했어' 라고 말한다. 만오천 단어라는 건 과장이지만,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옆에서 들으면 그건 정말이지 엄청나잖아요? 배정남은 듀오링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수첩에다 냅다 쓰고 냅다 외웠는데 대화가 된다. 너무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야, 노력하면 안되는게 없구나. 저걸 외우다니, 증맬루 대단하다!
이게 내가 듀오링고로 스페인어를 조금 공부해보기 전이었다면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스페인어를 조금 보고 있고(진도 나가다보니 어려워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 있다 ㅎㅎ) 그러다보니 배정남의 회화가 증맬루 진짜루 최고로 대단해보이는 거다. 대단합니다..
책을 샀다.
모든 학문은 어떻게든 공부하다보면 결국 철학으로 향하지 않을까, 라고 몇년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철학 관련 책을 이것저것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있지만, 그건 다른 모든 책도 마찬가지. 어제 회사 동료에게 책을 빌려주려고 책장 보다가 내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서 화들짝 놀라버렸다. 흐미.. 내가 가진 책장에 책이 죄다 두겹으로 쌓여있어서, 어제 추리소설 뭐 빌려줄만한 거 없나, 하고 앞쪽 책 들어내보니 뒤쪽에서 갑자기 툭, 마틴 에덴이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어어? '내가 이걸 팔 리가 없는데' 라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아 '그런데 팔았나보지?' 했건만, 뒤에 숨어있었구나! 나는 마티 에덴을 가지고 내 방으로 왔다. 회사 동료 h 에게 빌려주기 위해서.
[언어의 위로]는 얼마전 친애하는 알라디너 분의 밑줄긋기를 보고 사게됐는데, 받아보니 작가 이름 '곽미성'이 낯설지가 않은거다. 하아- 나 이 작가 책 뭔가 있는것 같은데, 읽었나? 하고 검색해보니, 내가 가진 책은 이거였다.
산 지 얼마 안된 이 책 이었어.
이 책은 사는 당시에 이탈리아어 공부하는 걸로 알고 샀는데 [언어의 위로]를 읽다보니 작가는 프랑스어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에서 산 지 20년... 아아... 그렇다면 한국어도 하고 프랑스어도 하고 이탈리아어도 하시는거에요? 대단하십니다. 멋지다. 아, 그러고보니 위의 배정남과 연결되네. 아아, 외국어를 공부하는 건 너무 근사하고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근사하다!!
저 [7분]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샀는데, 인스타에서 낚이지 말자! 라면서도 자꾸 사버리는 나란 사람.. 제발 재미있기를요..
자, 다시 책장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그렇게 마틴 에덴을 꺼내와 h 에게 빌려주기로 한 책이 있고 또 이미 h 에게 빌려준 책이 많지만, 오늘 아침엔 [뱀이 깨어나는 마을] 가지고 와서 s 에게 빌려주었다.
s 의 작년 생일에는 내가 [미 비포 유]를 선물했는데 이걸 조금 읽고 여태 완독을 하지 못하길래, 아 어떤 사람들은 1년에 한 권 읽기도 힘들어 하는구나, 라는걸 다시 깨달았단 말이지. 그런데 최근에 s 가 이수정 교수의 [스토킹]이란 책을 구입한거다.
s 는 티비 프로그램으로도 범죄 재연물을 자주 본다는게 아닌가. 그래서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서점 갔다가 샀다는거다. 그런데 이 책도 얼마 못읽고 더 이상 읽지 않길래 왜 안읽냐 물어보았다.
"제가 생각한 그런게 아니더라고요."
"사례가 나올 줄 알았던거지?"
"네."
"그런데 통계가 잔뜩 나오지?"
"네."
그런 s 의 이번 생일에, 나는 [하우스 메이드]를 선물했다.
아니, 이건 곧잘 읽는게 아닌가.
심지어 뒤에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내게 "이런 책 또 있어요?" 묻기까지 하는거다!! 나는 당연하지! 하며 여러권, 스릴러물 추천을 해주고 s 는 부지런히 받아 썼다. 자신은 무서운걸 좋아한다고 한다. 아아, 미 비포 유는 전혀 취향을 저격하지 못했고 하우스 메이드는 취향을 저격했구나! s 의 핸드폰 메모장에는 내가 알려준 책들이 가득해졌고, 오늘 아침, s 는 내게 주말동안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고 했다.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사려고 했는데 그 책은 없었고, 너무 무섭다던 [금지된 장난]을 샀다고.
하우스 메이드 다 읽었고 이거 시작했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애초에 취향을 알았으면 미 비포 유는 안사주는건데.. 아니, 그래도 그 책이 한 번 읽어보면 좋다니까? 생각할 거리가 많아!!
오늘은 옛친구 몇 명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다들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면서 나랑은 자연스레 멀어진 내 친구들.
그 중의 두 명이 특히 더 생각나 크리스마스 겸 선물을 보내면서 연락을 했는데, 둘다 선물도 반갑지만 내 연락이 반갑다고 했다. 그중에 k 언니는 나의 이십대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던 언니고 거의 매일 만났던 언니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언니는 대학원생으로 처음 아르바이트 하다가 만났고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학교도 빠져가면서 만나 놀고 그랬다. 그러다 내가 취업하고 직장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는데, 이 언니랑 국내 여행도 같이 다니기도 했고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만났던 터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연애를 할 때도 그 언니만큼 누군가를 자주, 열심히 만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오늘 언니가 내 연락을 반가워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십대 시절의 내가 제일 밉고 싫거든. 인생에서 들어내버리고 싶은데, 그런데 그 때 만난 언니는 참 소중했어. 아주 버릴 것만 있던 시간은 아니었구나 싶어.>
그러자 언니로부터 이런 답장이 왔다.
<내가 본 너의 이십대는 그렇지 않았는데.. 힘들어하긴 했지만 정말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았고 생각도 깊어서 내가 언니인게 부끄러울 때가 많았거든. 내가 본 이십대의 락방이는 멋졌어.>
이 답장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나 내가 버리고 싶어했던 이십대를 누군가 멋졌다고 말해준 일은 처음이었다.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니 '맞지, 내가 열심히 살긴 했지' 라는 20대에 대한 자기 긍정도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다. 좀 근사한 답장인 것 같다.
오늘 점심 메뉴나 생각해봐야겠다.
며칠전에 인스타에서 본건데 <진짜 똑똑한 사람들은 "오늘 뭐 먹지"만 하루종일 생각해요> 라고 써있더라.
세상에... 나 이 세상 대박 천재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