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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a(심규선) - 꽃그늘 EP - 2곡의 보너스트랙(CD Only) + 스페셜 패키지
심규선 (Lucia) 노래 / 파스텔뮤직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심규선의 이번 앨범에는 무려 [서문] 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는 당신을 마치
4월의 상아빛 봄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낮술 한 잔 하고 싶어지는 서문이 아닌가.
심규선의 앨범이 나오자 그렇게 팔짝 뛰며 좋아했는데 처음 앨범의 노래들을 듣고서는 어어,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잖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고 나자 자꾸 심규선의 노래들이 생각나는거다. 그래서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뿔싸, 심규선 노래의 가사들은 이제 마치 그녀 앨범의 서문처럼, 그렇게, 가슴에 날아들어 콕콕 새겨진다. 햇빛이 유독 좋은 날, 손으로 이마 위에 그늘을 만들어도 눈이 부신것처럼, 외면하려해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노래들을 그녀가 불러주고 있어서, 제기랄, 같이 흐느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녀의 노래중에 4번트랙 「5월의 당신은」을 볼까. 거기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대가 웃는 웃음소리
걸음걸이와 너의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아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하아- 이런 가사들을 대체 이 뜨거운 봄날에-대체 왜 봄날이 뜨거운걸까?- 어떻게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자꾸만 기억속으로, 추억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가말이다. 나는 감상에 쩌는 리뷰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감정이 절절절절 묻어나게 글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심규선을 듣는 요즘의 나는 누가 툭, 치기만 해도 감성을 줄줄 뿜어낼 것만 같다. 그리고,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음식을 반드시 다 삼키고 말해야 하는 그의 습관을, 불쑥불쑥 내 몸에 닿던 손을, 가끔은 아이같고 가끔은 오빠같았던 말투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잠시동안 내 손을 꽉 쥐던 그 순간을, 차마 묻지도 못했던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던 그 순간순간들을, 나를 향해 뛰어오던 그 모습을,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을 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그의 모든 것과 그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나를 쥐고 흔들었는지를. 당신은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았지.
그러나 우리는 왜그렇게 가까워지는게 힘들었을까. 심규선은 5번트랙 「담담하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대가 말한 온갖 작품을
가슴 속에 새기고 듣고 보고 외워도
우리의 거린 좀처럼 좁혀지질 않네요
나는 자꾸 우리 사이에 거리를 느꼈고, 같이 걸을 때 역시 선명히 떨어져 있던 두 어깨를 기억한다. 그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도. 오, 심규선은 나를 정녕 무너뜨리려고 작정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절절한 가사들을 어찌나 잘 불러내는지. 나는 이 봄, 금세 사라질 봄, 여름같은 봄에 심규선에 푹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반복해 듣다보니 좋아서 별 넷을 줘야겠구나, 했는데, 오, 이 앨범의 모든 곡을 심규선이 작사 작곡했다는 걸 안 순간 나는 그녀에게 거의 존경심이 생기며 별 다섯을 기꺼이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게 되버리고 말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작사 작곡까지 하다니, 무엇보다 저런 가사들을 그녀가 써낸거라니!!! 버틸래야 버틸수가 없어, 나는 오늘 그녀의 콘서트를 예매하고 말았다. 규선씨, 내가 갈게. 당신은 예술가야!


처음 시디를 받았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알라딘 노트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 시디장에 어떻게 꽂으라고 저런 케이스야...난 이런거 싫어. 시디 케이스가 그 안에 담겨있다면 가사집인 이 노트를 빼버리고 시디케이스만 진열할텐데, 아뿔싸, 시디는 저렇게 뒷 표지에 꽂혀있다. 힁. 어떻게 보관하라고. 그러나 이 불만도 잠시, 시디케이스(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겸 노트를 한 장씩 펼쳐보노라니, 오, 이건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탄생한 앨범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목차가 나오고,

이렇게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꽃 그림이 나오기도 하고


한 귀퉁이에 가사가 적혀있기도 하고, 나나나나~ 하는 게 흩어져 있기도 해서


어디를 봐도 빈 공간이 많아서 내가 무언가를 적을 수도 있겠는거다. 심규선 노래의 가사들을 다시 한 번 써봐도 좋을테고, 전혀 다른 글들을 내 마음대로 적어도 좋을테고. 물론,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한 권의 시집 같기도 할테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툭, 개화開花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노래의 가사와 제목은 이렇게.


앨범의 노래들이 노래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럽지만, 이 앨범은 만족할만한 선물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이 앨범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도 좋을것이고-그대가 웃는 웃음소리 걸음걸이와 너의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아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5월의 당신은 中)-, 이별 선물(그런게 있다면!)-수 많은 약속들이 하나 둘씩 햇빛에 산산이 부서져 벚꽃잎처럼 허공에 멍들고 시선 가 닿는 곳마다 터뜨려지는 저 눈부신 봄망울 입술 깨물고 길 걷게 만드는 형벌 같은 이 봄(그런 계절中)- 로도 적절할 것이다. 이별 선물이라니, 써놓고 나니 꽤 근사하네.
봄은 항상 노랑빛이거나 파랑빛, 연두빛이거나 분홍빛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봄은, 붉은빛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빛일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