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개, 디지언트.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정말로 돌봐야 하는 존재의 대용품에 불과해. 너도 언젠가는 아기가 뭘 의미하는지,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거고, 그러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런다면 예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이 실제로는-." 로빈은 퍼뜩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넓은 시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야."

동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소리였다.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기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승화된 것이라는 식의 주장 말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정말 넌더리가 난다. 애나도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생에서의 기타 모든 성취를 재는 잣대는 아니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일이고 어떤 변호도 필요치 않은 천직이다. (p.60-61)



















이 책속에서 '디지언트digient'란, 가상 세계 속에서 사는 디지털 존재를 의미한다. 가상의 생물이라 볼 수 있을텐데, 애완동물과도 닮지 않았고, 사람도 아닌, 그러니까 독자적인 디지털 존재이다. 사람들은 디지언트들에게 식량을 주고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성장 시킨다. 놀이공원을 데려가고 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예전에 동물원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던 '애나'는 그 경험이 경력이 되어 디지언트를 개발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거기에서 디지언트를 학습하며 자신이 맡은 디지어트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많은 시간을 디지언트와 함께 보낸다. 그런 애나에게 직장 동료가 '네가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래'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거다.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 가상의 존재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마치 '애가 없어서' 나오는 현상인 것처럼. 아, 진짜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된다. 로빈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리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쉽게, '니가 이걸 안해봐서 그래' 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니가 지금 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이것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담겨있다. 최고치를 경험한 나와, 그렇지 못한 너.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이 왜 웃는지, 왜 우는지 관심이 많고, 인간에게 많이 실망하지만 꼭 그만큼 인간에게 기대를 한다. 악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선한 인간이 많다는 것도 확신한다.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엉망인 세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일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 있지만, 그러나 내 회사동료 e 에게 관심대상은 고양이이다. 우리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얘기하다가도 나는 우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고 e 는 길고양이에게 시선을 준다. 동시에 우리 앞에 아이와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각자 다른 대상을 향하는 거다. 내가 그런 e 에게 '야, 인간이 최고지' 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보는 내 시선이 나의 조카가 태어난 이후 달라진 건 사실이다. 조카가 태어난 후에 시야가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관심대상이 더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다고 해서, 아직 조카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도 이모가 되어보면 알거야' 라고 함부로 그들의 경험치를 낮게 평가하는 게 온당하다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한다는 건, 내 시야가 넓어졌다는 게 모두 개구라...개뻥...헛소리.. 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닌가? 임신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아이가 아닌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닌 동물과 함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대체존재로'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양이가, 햄스터가, 디지언트가 좋아서, 관심이 가서, 애정이 생겨서 선택한 것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존재들이 반드시 '내 아이가 생겨서'인 것도 아니다. 내 임신과 출산 경험과는 무관하게 아이란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일전에 정희진 쌤 강연을 들을 때 선생님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아주 많이 받았었다는 얘길 했었다. 그중에는 '너 성추행 당했었냐?'도 있었다고 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성폭력 경험으로 아파서' 라는걸  전제한다고 생각한다니... 말이야 방구야.....너무 무식해서 부끄럽다 진짜.... 그게 할 말이냐.... 


으음 쓰다보니 갑자기 여기까지 왔군. 자,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애나는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쏟고 시간을 많이 들인다. 디지언트와 많이 대화한다. 그리고 디지언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직장동료 '데릭'과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지게 된다. 디지언트를 만들었던 회사는 이제 문을 닫았지만, 그들은 전직장동료로서 여전히 관계를 유지한다. 그도 그럴것이, 디지언트에게 관심과 애정과 시간을 쏟는 것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데릭의 아내도 데릭이 디지언트에게 너무 관심을 갖는다고 불만을 갖는다. 그런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만이 쌓여갈수록, 데릭의 마음은 애나를 향한다. 애나와는 디지언트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데릭은 아내와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애나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자꾸 쌓이고, 데릭은 애나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아, 애나는 다른 남자인 '카일'과 사귀기 시작했고, 하아- 같이 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애나곁의 다른 남자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면서, 데릭은 애나가 카일과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같지 않은 희망을 품기도 한다. 카일도 어쩌면 디지언트의 존재를 꺼려하지 않을까? 



애나가 폴리토프사에 취직한다면, 그녀와 카일 사이에는 균열이 생겨날 것이다. 그 점은 데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훌륭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반면에 데릭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번에는 그와 애나 사이에 균열이 생겨날 것이고 언젠가 그녀와 맺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애당초 애나와 맺어질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릭은 몇 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환상은 졸업하는 쪽이 자신을 위해서도 낫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므로. (p.191)



아아, 데릭. 지금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여자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나와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니. 이것은 정녕 희망인가 절망인가. 스스로도 '그녀와 그 사이에 분열이 생긴다면 나에게 기회가 올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라고는, 훌륭한 생각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 속에 생겨난 솔직한 바람임을 알고 있다. 아아, 내가 맺어지고 싶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렇지만, 내 마음이 한없이 착하고 선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하다면 난 괜찮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지'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지상에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데릭이었다면, '어쩌면 칼이 디지언트를 사랑하는 애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둘 사이가 안좋아질 수도 있고, 그렇다면 디지언트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나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애나는 결국 내게로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거야. 그러면서 스스로 그런 걸 기대하고 바라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겠지. 아아,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랑이여!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데릭의 마음을 아주 잘 알겠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의 내 모든 위로는 데릭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알아, 아주 잘 알아. 데릭...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당신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놈인건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인생은 뭘까.

타이밍은 뭘까.

사랑은 뭘까.

기다림은 뭘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오늘은 데릭 때문에 너무 슬퍼서 저녁에 육개장이나 먹어야겠다.

데릭, 한국에 올래요? 내가 육개장 사줄게요. 나랑 육개장이나 한 사발 하십시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교사이기도 하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81)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와 2017-05-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죠.
나도 나름대로 공부하고 생각할거에요. 계속 계속 말해줘요. 친구!

다락방 2017-05-16 10:4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책을 읽는 건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자꾸 생각할 거리가 생기고 자꾸 고민할 거리가 생기니까요. 결국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계속 고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방법인 것 같아요.

moonnight 2017-05-1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조카아이들을 사랑하는 걸 가지고 ‘네 아이가 없어서 그렇지.‘ 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 많죠. 바보들-_-

다락방 2017-05-16 14:00   좋아요 0 | URL
어떻게 그렇게 단정짓고 함부로 말할 수 있죠? 아 사람들 진짜 무식해요. 조카를 사랑한다는 건, 말그대로 조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아-

치니 2017-05-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누군가에게 두리가 이제 12세가 되어간다고 하자, ˝그럼 곧 죽겠네요˝ 라고 바로 답변하길래 어찌 그리 잔혹하게 말하냐니까 개들은 원래 그 정도 사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자기는 사람과도 헤어지면 그냥 다른 사람 또 만나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고...으음, 그분에게 대체 그럼 왜 이 세상 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각자의 경험치가 다르고 그렇게 사는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요. 있겠지만 생명 경시하는 말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이어가기 싫더라고요.

다락방 2017-05-16 14:10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너무 무식한 발언이네요. 정말이지 입이 있다고 말을 막하고 다니는 사람들 많은 것 같아요. 개와 같이 살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그런 막말을 하지요? 그사람은 어차피 죽을 인생 왜 사는 걸까요? 치니님이 말씀하셨듯이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치니님이 그 사람과 대화를 할 필요는 전혀 없어보이네요. 대화라는 게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액션이 있으면 적절한 리액션이 있어야 대화가 성립되는데,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뭐랄까,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일 것 같아요. 어휴..무식한 사람들... Orz

clavis 2017-05-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그 육개장 제가 사겠습니다 데릭님도 락방님도 저도 한 그릇씩 하면서 마음을 달랩시다!오늘의 위로를 모두 그에게 주신것 고맙습니다~한국엔 언제?

다락방 2017-05-16 16:1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데릭이 시간이 나야할텐데 애나 생각에 꼼짝도 안할것 같아요. 흙흙
클래비스님이 사주시는 육개장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지네요. 아아,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트 뿅뿅 ♡

clavis 2017-05-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사랑이 아름답다 하셔서 다시 한번 락방님의 글을 읽었더니요ㅠ아름답긴커녕 마음만 쓰라란걸 워째요ㅠ
육개장의 맛이 아름다울 것이에요..데릭을 데려옵시다..데리릭~!!

다락방 2017-05-16 17:41   좋아요 1 | URL
크- 그렇지요. 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어디 가슴 아픈 걸 가지고 아름답다고 뻥을 쳤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육개장이나 먹읍시다. 데릭, 컴온!!
 

나는 내 또래에 비해 한글을 일찍 깨우쳤다. 한글을 습득하는 것은 내게 꽤 재미있는 일이었고,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 이모로부터 한글을 배우면서 글자 읽는 걸 즐겨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한 학급에 60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미 나만큼 한글을 알고 있는 애는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글자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친구네 집이나 선생님 집, 엄마의 이웃집에 놀러가서도 눈에 보이는 책 아무거나 골라 잡아 글을 읽었는데, 이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신기해하며 '너 진짜로 글자 읽어서 읽는거냐?' 고 묻고는 내게 읽어보라 시켜보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글자를 읽으면 아주머니들은 환호했더랬다. 어머, 얘가 읽네, 진짜 읽어! 

가끔 생각해보는데, 우리 엄마아빠가 좀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집에 돈이 많아서 내게 영재교육을 시켰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 어마어마한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집에 태어나서, 애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응?)



엄마는 내게 세계문학전집 100권짜리 책을 사주셨지만, 그건 이미 국민학교 4학년 즈음의 일이고, 그 책들이 있기 까지는 집에 책이 있던 기억이 없다. 나는 고모네 집에 가서 나보다 2학년 앞선 친척 오빠의 국어책 읽기를 즐겨했고(정말 신나서 고모네 집에 가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신문 기사를 읽곤 했다. 이모의 어른용 책을 읽기도 했고. 내게 읽을 거리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엄마는 어릴 적에 내게 책을 읽어주었었다 했지만(그러니까 아기였을 때 말이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너무 어릴 적의 일이라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엄마의 기억이 너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린이책을 읽을 줄 모른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그림책과 동화책들, 그러니까 어린이책들을 읽어보고자 사서 그림을 보고 글씨를 읽노라면 나는 순식간에



??????????????????????????????????????????????????????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대체 이 책을 왜 좋다고 하는걸까, 어디에서 좋은걸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보다 한글도 빨리 깨우쳤고!! 공감능력도 뛰어나고!! 이해심도 어마어마하고!! 개구리가 되어볼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인데!!! 그런데!!!!!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겠다. 한 번은 엄마를 원망해 투덜댄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나 어릴 적에 책을 안읽어줘서 내가 그림책 볼 줄을 모르잖아! 하고. 엄마는 역시 대답하셨다. 아니, 읽어줬다니깐!! 하고. ... 그렇단 말이야? 믿을 수 없군. 그렇다면, 내가 왜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거지? 왜 이 그림이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지? 아니, 애시당초 그림에 관심이 가질 않아....이 그림책 이 내용......왜때문에 써진거지? 뭘 말하는거지? 내가 너무 주입식교육에 찌들어있어서, 어린이책으로부터 주제를 찾으려하나??? 그것이 나의 문제인가??? 그렇게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 나의 컴플렉스는 쌓여만 갔다. 아, 나는 어째서, 왜때문에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가........ 왜 남들이 좋다는 책을 사두고도 아무 느낌이 없나...... 이런 노래 가사도 있었는데..무슨 노래였지... 



왜 아무 느낌이 없나...



아, 신해철? 커다란 무대 위... 가만, 가사를 찾아보고 오자.



커다란 무대 위 화려한 조명 속에
더 작아 보이는 너의 모습

옷자락 가득한 붉은 장미 사이로
더 창백해지는 너의 얼굴

넌 그렇게도 슬픈 얼굴로
흔한 사랑을 얘기하지만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없나

조명은 꺼지고 텅 빈 무대 위에는
아직 남아 있는 시든 꽃다발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노래 속에
다시 돌아오는 너의 느낌

넌 무대 위로 쓰러져 갈 때
웃고 즐거워하던 사람들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없나

넌 무대 위로 쓰러져 갈 때
웃고 즐거워하던 사람들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다시 또)








자, 이렇게 잠깐 딴 길로 샌 뒤에 다시 돌아와서.


그런데 이런 내게! 이런 내게 딱 맞는 맞춤형 책이 나왔단다. 어린이책 읽는 법, 어린이책 읽는 가이드! 아니, 세상은 정말이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게다가 이 책을 누가 썼냐? 네꼬님이 썼다. 네꼬님이, 네꼬님이!! 꺅>.<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네꼬님이 누군가! 어린이책에 대해 맛깔스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시는 분이 아닌가. 글을 잘 쓰는것 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사랑스럽게 쓰는 바로 그 분이, 본인이 가장 애정해마지않는 어린이책 읽는 법을 알려주신다니, 아아, 너무 고마운 일 아닌가. 책 표지에 보면 '남녀노소 누구나' 라고 되어있다. 이 책은 나에게 아주 맞춤한 가이드가 됨과 동시에 재미까지 보장할 만한 책이 아닐까. 네꼬님이, 재미없게 썼을 리가 없잖아? 

나, 이 책 읽으면 어린이책까지 잘 읽게 되는건가. 무릇 나는 이 세상에서, 하늘 아래 최고되는 것인가. 못하는 게 없는 바로 그런 여자사람이 되는 것인가...아아, 나의 발전의 끝은 어디인가.....
라고 네꼬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하면서 내 잘난척이 끝이 없구나.



아무튼지간에 나는 이 책을 사서 읽고! 지금보다 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 세상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는 그런 여자사람이 되어가지고, 널리널리 이름을 퍼뜨리겠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7-05-15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네꼬님이 쓰셨군요. 표지도 귀여운 개구쟁이같아요. ^^

다락방 2017-05-15 09:20   좋아요 0 | URL
네, 네꼬님이 책을 내셨습니다. 얼른 읽어보고 싶어서 막 몸이 꼬여요. 후훗.

비연 2017-05-1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디너 작가가 계속 양산중!^^ 네꼬님 멋지네요~ 관심있던 분야를 이렇게 책으로.
저도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7-05-15 09:33   좋아요 1 | URL
네,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비연님!
저는 이 책을 포함해서 우산 하나 더 받으려고 장바구니 놀이 하고 있어요. 하하하하핫.
월요일 아침부터 신나는 장바구니 놀~~이!!

moonnight 2017-05-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당장 바구니에 담습니다. 궁금궁금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네꼬님처럼 어린이책을 읽을 수 있게 되려나 꿈꿔봅니다^^

다락방 2017-05-15 11:55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나 궁금해요! 장바구니 놀이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결제를 못하고 있는데, 속히 결제해 얼른 받아보고 싶습니다. 꺅 >.<

레와 2017-05-1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슝~ 담았습니다! 네꼬님 책이라니 근사해요!!

다락방 2017-05-15 13:57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읽어봅시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돼요. 훗 :)

아무개 2017-05-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책=시집
둘다 못읽는 인간이지만,
네꼬 님의 책이라니 꼭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17-05-15 13:58   좋아요 0 | URL
앗 그러고보니 저도 시를 잘 못읽는군요! 어린이책과 시집은 뭔가 같은 종족인걸까요??? 왜 나도 그 둘 다 못읽지?????

ㅇㅇ 2017-05-15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염, 프로폴리스가 정말 효과 있는 것 같아요? ㅜㅜ

다락방 2017-05-16 08:24   좋아요 1 | URL
저도 몇 년전에 잠깐 먹었을 때는 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았는데요, 최근에 몇 개월간 계속 먹어서 그런지 이번 봄에는 비염을 앓지 않고 지나갔어요. 제가 해마다 봄,가을에 비염을 심하게 앓거든요. 물론, 이걸 먹고서도 효과 없다는 분들도 당연히 계십니다. 먹어봐야 자신한테 효과가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로폴리스는 알러지 증상이 잘 나타나기로도 유명한가봐요. 후기 링크해드릴테니 꼼꼼히 살펴보시고 선택하세요. 저한테 효과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https://kr.iherb.com/r/Y-S-Eco-Bee-Farms-Propolis-1000-90-Veggie-Caps/23691/?p=1

clavis 2017-05-1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넘 사랑스러우셔요^^
그런 여자 사람 저도 되고파요^^

다락방 2017-05-16 16:12   좋아요 2 | URL
우리 함께 지상에 하지 못할 것이 없는, 그런 능력있는 파워 우먼이 됩시다!! ㅎㅎㅎㅎㅎ

아롱바라기 2017-05-22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나저나 한글을 아니 책을 일찍 읽으셨군요 전 학교 들어가서 읽었어요 ㅎ

다락방 2017-05-22 09:05   좋아요 1 | URL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 들어와서 선생님으로부터 한글을 배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글 떼고 학교가기 시작하더라고요...어쩐지 아이들 너무 안됐어요. ㅠㅠ
 
[eBook] 오후의 아내
유정선 지음 / 벨아모르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이 안되는 말들. 기가 막힐 정도로 말이 안된다. 이 책에서 세상은 똥이여....
재미있고 에로틱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건가. 내가 쓰는 게 답인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찬성 2017-05-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써주세요 꼭

다락방 2017-05-15 11:08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17-05-1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쓰시면 재미와 수준을 모두 보장하리라 믿습니다. 써주세요!^^

다락방 2017-05-15 12:15   좋아요 0 | URL
아아. 한 번 써봐야 할까요..... (고민고민)

레와 2017-05-1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시도(여러가지면에서)를 해볼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써줘요. 다락방!!

다락방 2017-05-15 15:03   좋아요 0 | URL
다양한 시도...음...그렇군요...음....좋은 아이디어야...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혜윰 2017-05-1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리뷰는 서민적이며 해학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동시에 미래지향적(다락방표 에로스 기대)이네요 ㅋㅋㅋㅋ 나 오늘 이런 식으로만 댓글 쓸 건가봐요 ㅎㅎ

다락방 2017-05-16 18:5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신한 댓글 스타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침 출근길에 양재역에서 버스를 탔고, 버스엔 자리가 많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 앞으로 누군가 와서 선다. 아니, 자리도 많은데 이 남자는 왜 내 앞에 선담? 하고 눈을 부라리며 도대체 어떤 놈인가 보자, 했는데, 한참을 올려봐야 되는군, 키가 커, 어? 타부서 L과장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 버스에 같이 타고 있는줄 몰랐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장은 내게 내려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한다. L과장은 스타벅스 매니아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타벅스 카드가 언제나 빵빵하게 충전되어 있고 화이트초코모카 인가 하는 달디단 커피 중독자이다. 늘 벤티로 마셔. 어쨌든 나는 '오늘 아침은 커피를 마시지 않겠어!

'라고 결심했지만 L과장이 커피를 마시자는 말에 네! 하고는 쪼르르 쫓아 한정거장 전에 내려서는 같이 스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커피를 얻어마신다. 훗. 아침에 커피를 얻어 마시는 건 꿀맛이여.... 




















'사이먼'은 게이 고등학생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게이인 익명의 '블루'와 이메일 교환을 한다. 너는 언제 커밍아웃할거야? 같은 걸 물어보면서 수시로 이메일을 주고 받는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사랑이 싹튼다. 사이먼과 블루는 이메일의 끝에 언제나 '사랑해'라고 덧붙인다. 아직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러니까, 서로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사이먼은 주변의 남자 아이들을 보며 '혹시 쟤가 블루가 아닐까'를 추측해본다. 그렇지만 쟤인것 같다가 아닌 것 같고 얘인것 같다가 아닌것 같고.... 그렇게 사이먼과 블루의 사랑은 아직 보지 않은 채로 깊어진다.



사실 이 소설은 2/3 지점까지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이먼과 블루가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그게 내게 막 와닿지는 않았더랐다. 어쩌면 나는 이 책속의 주인공들보다 세상을 이십년 더 살아와서 '야, 만나고나면 달라질 수가 있어'라는 시큰둥한 마음이 들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시절 그 뭐더라, 무슨 채팅 사이트가 확 떴을때, 그때 같은 과 친구가 채팅으로 알게된 남자와 허구헌날 통화하면서 '사랑해' 하고 속삭였는데, 실제 만나고나서는 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더랬다. 나도 채팅으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고, 내 생각과 달라 실망한 적이 당연히 있었는데, 나는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즐겁게 놀다 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상대에게 예의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미안합니다 ㅠㅠ


물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어서 만났을 때 와, 좋다! 했던 적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 멋진 남자가 나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과는 아주 오래 관계를 유지했더랬다. 잘생겨서가 아니라 서로 호감이 있어서 그랬다. 그렇지만 그렇게 멋진 남자라고 해서 영화 [나의 ps 파트너]에서처럼 지성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나온 적은 결코, 결코 없었다. 그게 진짜 영화니까 그렇지, 무슨 모르고 만났는데 남자는 지성이고 여자는 김아중이여... 어쨌든지간에 그건 너무나 철저히 영화적인 사람들이었고, 내가 이메일로 혹은 채팅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현실에서 좋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0 퍼센테이지는 아니지만, 극히 낮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 사이먼은 드디어 블루를 만난다. 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아...잘생겼어.............. 평소에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남자야......게다가 이들은 이메일을 통해 이미 서로에 대해 은밀한(?) 상상까지 했었음을 고백했던 터다. 아아, 나는 이들이 만나고나서부터 함께 미쳐버리고만다. 아, 설레임이여, 사랑의 시작이여, 은밀한 상상이여, 그리고 사랑이여....




아무래도 난 이메일 속의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생각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그리고 그 귀여움을 마음속에서 실감 나는 이미지로 바꾸어 망상 비슷한 걸 하느라 말이지. -블루, p.193



이메일은 좀 더 길었지만 사이먼은 특히 '망상 비슷한 것에 꽂혀 회신한다.



특히 '비슷한 거'라는 부분 말인데, 좀 자세히 설명해 줘. 

추신: 정말이야. 비슷한 거라니? -사이먼, p.193



아아, 나도 궁금해. 망상 비슷한 것이라니. 크- 아아 사이버 섹스여....(응?)

무슨 망상인지 말해줘, 말해줘, 말해줘. 나도 궁금해. 하앍-



드디어 블루와 사이먼이 만난다! 아아, 너무 떨려. 너무 긴장돼! 그리고 그들은, 이메일에서 그러했던것처럼 서로에게 빠진다. 블루는 중간에 사이먼이 사이먼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사이먼은 블루가 이사람인지 몰랐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들은 만나서도 서로에게 변함없이 사랑에 빠져있음을 확인한다. 아, 너무 두근두근해서 막 신났어..


이게,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하면 안되겠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라서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터뜨리기로 한다. 펑- 그러니까, 사이먼은, 자신이 이메일을 나누는 블루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백인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처럼. 그러나 만나고나서 그가 백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사이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하지만 난 바보다. 바보가 맞다. 난 블루가 칼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막연히 블루가 백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내 자신을 한 대 쳐 주고 싶다. 이성애자가 기본이 아닌 것처럼 백인도 기본이 아닌데 말이다. 애초에 기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p.301)


자, 어쨌든 이들이 만났다. 그리고 두근두근, 손을 잡고 싶다.



"근데 말이야, 네가 날 위해서 디스코 팡팡을 다 타다니 믿겨지질 않아."

"내가 정말로 널 좋아하나 보지." 블루가 대꾸한다.

그 말에 난 블루에게 몸을 기댄다. 입을 여는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만 같다. "너랑 손잡고 싶어." 난 조그맣게 속삭인다.

우린 공공장소에 있으니까. 블루가 커밍아웃을 한 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잡아." 블루가 대답한다.

난 그렇게 한다. (p.302-303)



위 인용문에서는 블루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걸 내가 일부러 블루로 수정했다. 누구인지 밝히면 책을 읽는 게 재미가 없을테고 신비감이 떨어지니까. 비밀유지!

아아, 손을 잡고 싶어, 라고 말하고 그럼 잡아, 라고 하는 거.. 너무 좋지 않나.

누구랑 다정하게 손을 잡아본 지가 언제인가..


어제 점심때 k 과장하고 밥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뒤에서 차가 왔고, k 과장은 나더러 뒤에 차온다고 비키라며 살짝 안아서 나를 옆으로 이끌었다. 허리에는 k 과장의 팔의 감촉이 남아있었고, 나는, 아아, 나를 살려줬고 안아준거야? 누가 나 안아준 거 오랜만이라 설레어....라고 했더랬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누가 나를 안아준다는 거, 포옹한다는 거, 이런 기분이었던거지.... 아....좋은 경험이었다................ k 과장은 나를 들어올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유감이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해, 들어올리기엔 좀....무겁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지간에 사이먼과 블루가 손을 잡아서 내가 몹시 부러웠는데, 그러다가 나의 지난 일이 생각나 혼자 빵빵터져 웃었더랬다.



그러니까 헤어진 애인과 나도 사실 온라인에서 알게 됐고, 그렇게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서 사귀게 됐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가 첫인상이 어땠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게 된거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만나면 예쁜 여자가 없나봐, 내 똘레랑스를 벗어났어, 그렇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라고 했다더라. 나는 씩씩대면서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못생겼는데 삼십초 지나면 그 못생김을 잊게 되고 그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 라고 그에 대해 했던 과거의 발언에 대해 얘기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둘다 서로 상대가 한 말에 씩씩댔더랬다. 그는 내게 '야 그래도 내가 너 못생겼다는 말은 안했어!!' 하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그러나 똘레랑스를 벗어난 외모같은 것들, 못생겼다는 말들....다 무슨 소용인가요? 빠져버렸는데. 풍덩- 허우적허우적...... 외모는 뭐다? 사랑에 빠지는 데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니까 물론 예쁘고 잘생기면 좋겠지만, 사랑에 빠지게 하는 요소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서로의 외모에 대해 예쁘지 않다, 잘생기지 않았다 고 생각했으면서도, 우리는 만날 첫날부터 키스했다. 아, 인생이여.....(응?) 당신은 내게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지...................나 안예쁜데 왜그랬어? 아,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의 만남이여.........아, 당신의 성적 매력이여...........그보다 더한 나의 성적 매력이여.........인생.......럽......에로틱................어쨌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 잘생긴 외모가 아닌데 내가 푹 빠졌다고 일전에 어느 알라디너한테 비밀댓글을 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알라디너가 내게 말했었다. 못생긴 남자한테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네요....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페이퍼가 점점 더 갈 길을 잃고 헤매이는구나. 자, 다시 자리를 찾자.



블루와 사이먼은 학교 장기자랑인가 뭐 암튼 그런거에 같이 가서 옆에 나란히 앉는다.



난 블루에게 몸을 바짝 기댄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무릎에 손도 올려놓는다. 블루가 살며시 움직이더니 내 손에 자기 손을 깍지 낀다.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 가장자리에 입술을 누른다.

블루는 그 자세로 잠시 가만히 있는다. 배꼽 아래에 예의 당겨지는 듯한 펄떡임이 느껴진다.

그러고는 깍지 낀 채로 손을 다시 무릎에 내려놓는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는 게 이런 거라면, 도대체 내가 왜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p.326)



아아, 이 부분 읽는데 진짜 내 아랫배가 뒤틀려가지고... 나 역시 내가 왜 비연애 상태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아니, 나 왜 연애 안하지?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손에 깍지 끼고 응? 무릎도 닿고, 응? 그리고 허벅지에 손도 올리고 응? 스윽스윽 쓸어보기도 하고 응? 왜 안하지, 나?


아아 그리고 얘네들봐라? 아주 그냥 욕망에 불타오른다. 아아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블루의 눈빛이 내게로 날아온다.

그리고 빗줄기는 커튼처럼 우리를 가려 준다. 완벽한 상황이다. 왜냐면 갑자기 난 기어 위로 몸을 굽혀 블루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으니까. 블루의 입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몸을 숙여 블루에게 키스한 순간 부드럽게 벌어진 그 입술 말고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고요함, 압력, 리듬, 그리고 호흡. 처음엔 우리의 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곧 알게 되고, 다음 순간 내가 아직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눈을 감는다. 블루의 손가락 끝이 내 목덜미를 훑는다. 끈질기게, 가만가만히.

블루가 한동안 가만히 멈춰 있어서 난 스르륵 눈을 뜬다. 블루가 웃는다. 그래서 나도 웃는다. 그러자 블루는 다시 몸을 굽혀 내게 입 맞춘다. 달콤하고도 깃털처럼 부드럽게. 지나치게 완벽한 순간이다. (p.309)




그런 다음 난 블루에게 정말로 진하게 키스하고, 블루도 내게 키스한다. 블루의 두 손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우리는 숨 쉬듯이 오랫동안 깊게 키스한다. 배 속이 미친 듯이 팔딱거린다. 어느새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다. 블루의 두 손은 내 목을 두르고 있다.

"좋은데." 내가 입을 열자 헐떡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자. 매일매일."

"그래."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학교도 가지 말고, 밥도 안 먹고, 숙제도 하지 말자."

"너한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블루가 웃으며 말한다. 블루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영화 안 봐. 영화 따윈 질색이야."

"아, 그래?"

"진짜야, 진짜라니까. 뭐하러 다른 사람들 키스하는 걸 보러 가겠어." 내가 속삭인다. "너랑 키스할 수 있는데 말이야." 

블루도 반박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날 더 끌어당겨 마구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갑자기 난 발기한다. 그리고 블루도 발기해 있다. 짜릿하고, 야릇하고, 또 엄청 두려운 기분이다. (p.338)



아...내 배가 뒤틀리는 것 같다............ 미친듯이 뛰고 싶다......달려, 런! 런! 치티치티뱅뱅....런! 미친듯이 달려서 내 안의 욕망을 부숴버렷!!!!!!!!!!!!!!!!!!!!!!!!!!!!!!!!!!!!!!!!!!!!!!!!!!!!!!!!!!!! 지친 채 잠들어버렷!!!!!!!!!!!!!!!!!!!!!!!!!!!!!!!!!!!!!!!!!!!!!!!!!!!!!!!!!!!!!!!!!!!!!!!!!!!!!!!

아 위의 부분들을 읽다가 다시 연애를 시작해볼까...생각했는데, 갑자기 또 확 귀찮아져버리네... 아, 귀찮아.... 다 귀찮아...세상에 쓸모있는 놈 하나도 없어.... 이놈이나 그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서 와인이나 홀짝이며 평온한 삶을 살자.............. 남자 대신 지구본을 품에 안겠어!




책은 아주 똑똑하게 쓰여졌다. 해야 할 말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 '아 블루가 얘였어?'하고 난 뒤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책을 훑어보니, 오오, 완전 새롭게 읽히는거다. 사이먼, 너는 비록 블루가 다른 아이이길 바랐지만, 얘를 보고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네?! 이런 거 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서, 지금 다시 읽으면 또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중간 넘어서까지도 딱히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뒤에 얼마 안남기고 급재미있어져서 ㅋㅋㅋㅋㅋㅋㅋ 씐나서 읽었다.


이 책이 좋은 이유중의 하나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늘상 몰려다니는 사이먼을 포함한 네 명의 친구들 사이. 그 안의 애정과 갈등 같은 것들. 사이먼은 애비에게 제일 먼저 커밍아웃을 하는데, 애비와 친하지만 친하게 된 건 몇 개월 되지 않았다. 6년간 친구였던 레아는 사이먼이 애비에게 '먼저' 커밍아웃 했다는 데에 상당히 서운해하며 화를 내는데, 나는 그런 레아의 기분이 뭔지 너무 잘 알겠는거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장 먼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사실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이미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닌 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까. 나는 나라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보니 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됐다. 나는 인간에 대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나는 욕심으로 똘똘 뭉쳐있더라. 내 안의 욕심을 버리는 것, 누군가에게 언제나 우선 순위가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내게 내려진 과제인데, 이걸 해내려다 보니 자꾸 힘에 부친다. 나 스스로 세컨드라고, 세상의 세컨드이며, 누구에게든 세컨드라고 마음 먹으려고 김경미 시인의 시를 떠올려 보지만, 어떤 것들은 반복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것만 깨달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똥구멍까지 욕심이 찬 채로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분열을 자꾸만 일으키면서... 내 남은 삶은 계속해서 내가 나를 다독이고 타이르고 놀라고 쓰다듬어 주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친구가 페미니즘 북토크 소식을 알려왔다.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알려 모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 달에 월급이 평소보다 훨씬 쪼들리지만, 이번 해에 내가 페미니즘 공부에 더 돈을 많이 쓰기로 한 것을 떠올리고는, 망설임없이 참가신청을 했다. 뭐, 술 몇 번 참지. 지난 몇 해의 나와 최근 몇 해의 내가 달랐던 것처럼, 지금의 나와 또 앞으로의 나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번 해의 테마를 페미니즘과 여행으로 결정했고, 이것이 지금 내게는 최대의 관심사이다. 며칠전에는 여행친구와 내년 베트남 여행까지 예약해 놓았다. 친구야, 분보남보 먹게 해줄게! 라고 내가 말했다. 부지런히 할부를 갚자!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되어 여유로운 웃음을 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말들을 뱉어놓고 후회하고 또 어떤 행동들을 해놓고 후회한다. 대부분의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스스로 잘했다고 확신하지만, 그런 틈틈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때로는 내 모든 선택이 잘못됐다는 절망에 휩싸여 우울해지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나는 너무 못생겼고, 못났고, 멍청하다는 생각에 푹 빠져서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고.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후회화 고민의 연속인 것 같고, 어른이 된다는 것도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 같다. 그렇다면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한 나 자신을 깨닫는 건 너무 아프다. 



아, 설레이는 책 얘기를 써두고는 페이퍼가 또 이상하게 흘러갔네.

아무튼지 간에 오랜만에 아랫배가 찌릿찌릿해지는 책이었다. 덕분에 그와 내가 처음 만났던 시간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사랑은 시작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오래 부르짖어 왔지만, 어떤 사랑은 진행 과정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나저나 내가 사정상 오늘 점심을 굶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인생 얼마나 산다고, 살아봤자 백 년일텐데, 한 끼 굶는다고 생각하니 서럽다. 흙 ㅠㅠ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17-05-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대신 지구본을 품에 안겠어! .... 이 대목에서 그만.. 육성으로 빵 터졌네요 ..허허허허;;;;

다락방 2017-05-12 10:10   좋아요 1 | URL
저 멋지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17-05-12 10:31   좋아요 0 | URL
완전요! ^^

다락방 2017-05-12 10:35   좋아요 0 | URL
히힛 👍🏻

단발머리 2017-05-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부분이요.


미친듯이 뛰고 싶다......달려, 런! 런! 치티치티뱅뱅....런! 미친듯이 달려서 내 안의 욕망을 부숴버렷!!!!!!!!!!!!!!!!!!!!!!!!!!!!!!!!!!!!!!!!!!!!!!!!!!!!!!!!!!!! 지친 채 잠들어버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멋쟁이!!!

다락방 2017-05-12 10:2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한 순간이라도 단발머리님을 웃게 해드렸다면, 제 삶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불끈!

레와 2017-05-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때문인지 [엠 아이 블루]가 계속 떠올랐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ㅎㅎㅎㅎㅎ

그러고보니 우리도 온라인으로 알게된 사이!! ♡

다락방 2017-05-12 11:42   좋아요 0 | URL
응 맞아요. 나도 엠 아이 블루 생각났어요. 이 책 좋으네요, 레와님. 사소하지만 중요한 메세지들을 자꾸자꾸 던져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처음엔 좀 심심하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재미있어져요. 후훗.

그러네. 우리도 온라인으로 알게된 사이네! ♡

clavis 2017-05-1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멋져요..♥♥

다락방 2017-05-15 08:43   좋아요 0 | URL
히죽히죽 ^__________________^

마를린 2019-12-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고 책 사려고 들어왔다가 웃고 갑니다. 아랫배의 찌릿함을 해소해줄 좋은분은 만나셨나요?

다락방 2019-12-27 16: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요.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에 대해서라면 진작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번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 지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책에 다루어진 모든 얘기들 중에서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얘기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웠던 얘기를 하고싶은데, 그것은, 그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계 라고 불러도 좋고 사랑 이라도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닭살스럽게도 소울메이트,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이 아프다.



이 책의 저자 '호프 자런'은 과학자이다. 그녀는 식물에 대해 연구하고 싶지만, 돈이 되는 것이 전쟁무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연구를 하면서 연구기금을 따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도 내내 언급한다. 호프 자런도, 나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은 늘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나는 일주일에 40시간은 폭발물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또다른 40시간은 곁가지로 진행하는 식물학 실험에 바치겠다는 기만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엄청나게 과로해야 했고, 모든 과학 프로젝트에 있기 마련인 후퇴와 작은 실패들에 대해 더욱 참을성이 없어지고 절박해졌다. (p.40)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빌'이라는 동료를 만나 함께하게 된다. '혼자'인 빌. 어릴 적부터 땅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놀던 빌. 지금도 구덩이와 담배만 있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괴상하다 생각되어지는 인물이겠지만, 호프 자런에게 빌은 너무나 좋은 친구이며 동료이다. 이정도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호프 자런의 말대로, '이란성 쌍둥이'라 여겨질만한 존재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빌을 만나고 또 빌과 호프 자런의 대화를 보면서, 이 책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내내 궁금했다. 이렇게 연구를 같이 하는 시간이 긴데, 서로가 서로를 미친듯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그런데 왜 이들은 따로 사는걸까. 왜 한 명은 집에서 살고 한 명은 차에서 지내는 걸까. 같이 지내면 안되는걸까. 나는 내내 아쉬워하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 호프 자런이 빌과 함께 있는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다 실수를 저질렀고, 그래서 실험기구들이 폭발한다. 다행스럽게 빌과 호프 자런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호프 자런은 자책한다. 아, 내가 여기서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계속 과학자를 할 수 있을지 절망속으로 떨어지며, 자신에게 있는 나쁜 습관이 여지없이 튀어나오고야 만다. 자신의 피부를 깨무는 습관.



나는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끌어안은 채 손등을 깨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습관이었다. 실험실에서 장갑을 끼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그 순간 몸 전체를 엄습하는 초조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오른손의 마디들을 이로 물어뜯다 보니 얇게 앉은 딱지들이 떨어지면서 입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피부가 짖어지는 그 느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편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시작했다. 나는 관절 사이에 상처가 난 곳에 이를 대고 문지르고, 뼈를 깨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절박하게 손등을 빨았다. 몇 달만 지나면 교수가 될 나였지만, 그 날 밤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빌은 담배를 한껏 빨아들였다. "우리 집에 자기 발을 깨무는 개가 한 마리 있었어." 그가 회상하듯 말했다.

"더러워 보인다는 거 나도 알아." 나는 수치심이 몰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나는 손을 배에 대고 굽힌 몸으로 꾹 눌러 입에 손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냐, 그 녀석 정말 굉장한 개였어. 발을 깨물든지 말든지 우린 상관하지도 않았지."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똑똑한 개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최고지." 나는 머리를 무릎에 대고 눈을 꼭 감았다. 빌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우리 둘은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p.125-126)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읽는 순간 정말이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쁘니까 하지마' 라는 누구나 하는 위로 대신에, '그렇게 똑똑한 개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최고지' 라고 말하다니. 아, 쓰면서도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ㅠㅠ 너무 좋지 않은가! 



그녀가 손을 물어 뜯기전, 실수와 실패를 알고 망연자실했을 때, 그때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고 했었다.



"이봐, 담배 좀 피우고 와도 될까?" 한참 후에 빌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로 그렇게 물었다. 그의 차분한 태도 때문에 모든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몸을 움찔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미칠 듯이 아팠다.

빌은 사방에 우박처럼 깔린 유리 조각 사이를 우적우적 걸어서 문 쪽으로 갔다. 문 앞에 선 그가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 "오는 거야?" 그가 물었다.

"난 담배 안 피워." 내가 비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빌은 복도 쪽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가르쳐줄게." (p.124)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빌은 호프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들을 건넨다. 그 말들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가 닿고, 그녀는 그로 인해 단단해지는 것 같다. 빌과 호프는 함께 있는 시간도 많다. 둘 다 연구하는 시간이 길고 그래서 같이 일하고 같이 성공하며 같이 실패한다. 나는 이렇게나 잘 맞는 이들이 결국은 서로와 함께 살기를, 일터에서도 그랬듯이 집에서도 함께 하기를 바랐다. 잘 맞는 상대와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싱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같이 살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세상 천지 어디에 이런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했던 거다. 


이렇게 내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흔한 게 아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조금은 안맞는, 그러나 좋은 상대와 적응하며 살아가지 않던가.  어쩌다가 이렇게 맞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누구나 내 평생 함께 갈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하는데, 아, 호프는 빌을 만났어! 물론 이들이 결혼으로 묶이지 않아도 좋다. 이들이 서로에게 그들 자신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족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하루는 호프가 우울에 잠겨 빌에게 새벽에 전화한다. 자신의 우울함을 토로하는데 빌은 '네가 못자니 너의 개도 못자겠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들은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빌은 호프의 개에게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야..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아이참, 왜 병원이나 그런 델 안가보는 거야?" 그렇게 묻는 빌의 목소리에 거의 애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웃어넘겼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그리고 뭐 하러?" 내가 대답했다. "기껏 스트레스 좀 덜 받게 하라고 할 게 뻔한데."

"의사가 프로잭(우울증 치료제-옮긴이)이라도 처방해주게 말이야."

"난…난 프로잭 같은 거 필요 없어." 내가 말했다.

빌은 바로 쏘아붙였다. "그럼 먹지 마. 네 실험실에 사는 집 없는 남자한테 주면 되잖아."

새로운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것은 빌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한테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볼게." 내가 약속했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소리를 빌이 듣지 않도록 수화기를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고 싶었던 말을 일부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전화했을 때 받아줘서 고마워." (p.250-251)



나는 그동안 연인들과 24시간 이상을 함께 지내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였고, 그래서 함께 있기를 선택한거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내내 좋지는 않았더랬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와 오래 함께하기 보다는, 나 혼자 지내면서 가끔 시간을 같이 보내는 쪽을 선호하며, 그것이 잘 맞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그동안의 반복되는 연애에서 해왔었다. 내게 연인이 있을 때조차 그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를 선택하기 보다는, 조금은 거리감을 두는 내 성격을 알고 역시 그 거리감을 지켜주려는 다른 친구들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내게 연인이란 언제나 거리감을 없애기에 급급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 지내는 것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때로는 오래 함께 있어본 뒤에 헤어지기도 했다. 아, 역시 나는 이게 안맞아. 그런데 호프는, 빌과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더 편해진다고 말한다.



몇 안되는 사람들과 함께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로 인해 금방 숨 막히는 기분이 들기가 쉽다. 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곳에 가기 전에 나는 누구와도 몇 주 내내 하루 24시간을 붙어서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어려워지기는커녕 더 쉬워졌다. (p.284)



호프의 성격 자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편하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호프도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이 숨 막히는 기분이 든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빌은 '다르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더 쉬워진'다니. 이런 사람이 살면서 대체 몇이나 내게 찾아올까? 나는 내게 그게 가능할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더 쉬워지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더 쉬워지는 사람과, 왜 같이 살지 않는걸까???? 




그런데 호프 자런에게는 사랑이 찾아온다. 나는 내심 빌이 호프 자런의 사랑은 아닐까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호프는 다른 사람, 클린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주 단단한 사랑에.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너무도 쉬웠고, 내게 과분했기에 더 달콤했다.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돈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나와 나눌 것이고, 나는 내 상상력을 그와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말도 안 되게 남아도는 것들을 요긴하게 쓸 용도를 찾을 것이다. (p.293-294)



나는 호프가 빠져버린 사랑이 아주 단단하다는 것을 안다. 진심으로 사랑에 푹 빠졌다는 것을 안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없지만 그 없이 살고 싶지 않다는 그 절절한 마음이 뭔지 너무나 잘 안다. 잘 알아서 그런 사랑에 빠진 호프가 부러우며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을 살면서 사랑에 빠져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호프, 당신에겐 어마어마한 사랑이 찾아왔네요. 축복해주어야 할 일이라는 걸 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코 헤어진 채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던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절절한 사랑의 마음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빌을 생각한다. 



아, 빌.



이 책에서 빌이 호프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빌이 호프에게 느끼는 것은, 호프가 그런 것처럼 이란성 쌍생아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내 짐작으로 빌의 마음이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오만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아프다. 호프는 마지막에 빌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기를 바라는데, 빌이 가정을 이루길 바라는데, 그런 호프를 볼 때는 좀 실망스러웠다.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 그 막연한 죄책감, 알 수 없는 미안함이야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사람은 살면서 진실한 영혼의 쌍둥이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 또 살면서 늘 함께 하고 싶은 사랑을 만날 수도 있지만, 역시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런데 호프는 영혼의 쌍생아라 표현하는 연구동료가 있고, 강인함과 상상력을 함께 나눌 사랑도 찾았다. 호프는 자신이 얼마만큼의 행운을 거머쥐었는지 알고 있을까? 게다가 클린트는 빌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빌 역시 초반에, 갑작스레 호프의 결혼소식을 듣고는 당황해 했지만, 금세 연구동료로서 호프의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진다. 아주 오래 함께 해오면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함께이며, 그리고 여전히 좋은 친구이다. 나는 빌이 호프를 위로할 때, 그리고 호프가 빌을 위로할 때,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장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울고싶어졌다.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동시에 너무 아프기도 해서. 너무 좋은데 너무 슬프다. 어떤 이에게는 '너만 있으면 돼'가 가능한데, 왜 어떤 이에게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필요해'가 되는걸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성격과 성향을 갖고 있고 또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지만, 똑같은 이유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빌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빌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절대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는 그의 친구가 있다고, 그 친구들은 절대 빛이 바래거나 녹아 없어지지 않을, 피보다 더 진한 무엇인가로 그와 튼튼하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빌이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숨을 쉬는 한 그가 배고프거나 춥거나 엄마 없는 아이처럼 살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두 손이 다 있지 않아도, 주거지가 불명확해도, 폐가 깨끗하지 않아도, 사회적 예절이 부족해도, 사람들이 좋아하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명랑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다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내 첫 임무는 세상에 구덩이 하나를 팍 ㅗ빌이 들어가서 괴팍한 자기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살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p.351)






나는 양쪽 팔로 나를 스스로 끌어안고 모로 누워 엉엉 울고 싶어졌다. 한참을, 아주 한참을 울고 나면 이 아픔이 덜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빌을 생각하고 싶다. 빌은 어쩌면 지금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좋아하며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릴없이 내가 슬퍼하고 있다. 내가 아파하고 있다. 영혼의 쌍생아라는 위치를 오히려 마음에 들어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역할이 좋은지 싫은지도 알지 못하면서 하염없이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사 2017-05-1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책을 읽으셨군요..다락방님

다락방 2017-05-10 11:46   좋아요 0 | URL
네, 테레사님이 좋아하신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저도 좋았어요. 가슴이 너무 아팠지만요.

레와 2017-05-1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토닥토닥,
다락방을 달래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다락방 2017-05-10 16:52   좋아요 0 | URL
으응. 괜찮아. 이러다 금세 괜찮아져. 자고 일어나면 돼. 걱정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