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개, 디지언트.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정말로 돌봐야 하는 존재의 대용품에 불과해. 너도 언젠가는 아기가 뭘 의미하는지,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거고, 그러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런다면 예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이 실제로는-." 로빈은 퍼뜩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넓은 시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야."

동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소리였다.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기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승화된 것이라는 식의 주장 말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정말 넌더리가 난다. 애나도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생에서의 기타 모든 성취를 재는 잣대는 아니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일이고 어떤 변호도 필요치 않은 천직이다. (p.60-61)



















이 책속에서 '디지언트digient'란, 가상 세계 속에서 사는 디지털 존재를 의미한다. 가상의 생물이라 볼 수 있을텐데, 애완동물과도 닮지 않았고, 사람도 아닌, 그러니까 독자적인 디지털 존재이다. 사람들은 디지언트들에게 식량을 주고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성장 시킨다. 놀이공원을 데려가고 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예전에 동물원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던 '애나'는 그 경험이 경력이 되어 디지언트를 개발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거기에서 디지언트를 학습하며 자신이 맡은 디지어트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많은 시간을 디지언트와 함께 보낸다. 그런 애나에게 직장 동료가 '네가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래'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거다.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 가상의 존재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마치 '애가 없어서' 나오는 현상인 것처럼. 아, 진짜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된다. 로빈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리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쉽게, '니가 이걸 안해봐서 그래' 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니가 지금 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이것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담겨있다. 최고치를 경험한 나와, 그렇지 못한 너.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이 왜 웃는지, 왜 우는지 관심이 많고, 인간에게 많이 실망하지만 꼭 그만큼 인간에게 기대를 한다. 악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선한 인간이 많다는 것도 확신한다.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엉망인 세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일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 있지만, 그러나 내 회사동료 e 에게 관심대상은 고양이이다. 우리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얘기하다가도 나는 우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고 e 는 길고양이에게 시선을 준다. 동시에 우리 앞에 아이와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각자 다른 대상을 향하는 거다. 내가 그런 e 에게 '야, 인간이 최고지' 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보는 내 시선이 나의 조카가 태어난 이후 달라진 건 사실이다. 조카가 태어난 후에 시야가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관심대상이 더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다고 해서, 아직 조카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도 이모가 되어보면 알거야' 라고 함부로 그들의 경험치를 낮게 평가하는 게 온당하다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한다는 건, 내 시야가 넓어졌다는 게 모두 개구라...개뻥...헛소리.. 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닌가? 임신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아이가 아닌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닌 동물과 함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대체존재로'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양이가, 햄스터가, 디지언트가 좋아서, 관심이 가서, 애정이 생겨서 선택한 것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존재들이 반드시 '내 아이가 생겨서'인 것도 아니다. 내 임신과 출산 경험과는 무관하게 아이란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일전에 정희진 쌤 강연을 들을 때 선생님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아주 많이 받았었다는 얘길 했었다. 그중에는 '너 성추행 당했었냐?'도 있었다고 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성폭력 경험으로 아파서' 라는걸  전제한다고 생각한다니... 말이야 방구야.....너무 무식해서 부끄럽다 진짜.... 그게 할 말이냐.... 


으음 쓰다보니 갑자기 여기까지 왔군. 자,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애나는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쏟고 시간을 많이 들인다. 디지언트와 많이 대화한다. 그리고 디지언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직장동료 '데릭'과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지게 된다. 디지언트를 만들었던 회사는 이제 문을 닫았지만, 그들은 전직장동료로서 여전히 관계를 유지한다. 그도 그럴것이, 디지언트에게 관심과 애정과 시간을 쏟는 것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데릭의 아내도 데릭이 디지언트에게 너무 관심을 갖는다고 불만을 갖는다. 그런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만이 쌓여갈수록, 데릭의 마음은 애나를 향한다. 애나와는 디지언트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데릭은 아내와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애나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자꾸 쌓이고, 데릭은 애나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아, 애나는 다른 남자인 '카일'과 사귀기 시작했고, 하아- 같이 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애나곁의 다른 남자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면서, 데릭은 애나가 카일과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같지 않은 희망을 품기도 한다. 카일도 어쩌면 디지언트의 존재를 꺼려하지 않을까? 



애나가 폴리토프사에 취직한다면, 그녀와 카일 사이에는 균열이 생겨날 것이다. 그 점은 데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훌륭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반면에 데릭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번에는 그와 애나 사이에 균열이 생겨날 것이고 언젠가 그녀와 맺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애당초 애나와 맺어질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릭은 몇 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환상은 졸업하는 쪽이 자신을 위해서도 낫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므로. (p.191)



아아, 데릭. 지금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여자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나와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니. 이것은 정녕 희망인가 절망인가. 스스로도 '그녀와 그 사이에 분열이 생긴다면 나에게 기회가 올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라고는, 훌륭한 생각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 속에 생겨난 솔직한 바람임을 알고 있다. 아아, 내가 맺어지고 싶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렇지만, 내 마음이 한없이 착하고 선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하다면 난 괜찮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지'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지상에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데릭이었다면, '어쩌면 칼이 디지언트를 사랑하는 애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둘 사이가 안좋아질 수도 있고, 그렇다면 디지언트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나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애나는 결국 내게로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거야. 그러면서 스스로 그런 걸 기대하고 바라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겠지. 아아,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랑이여!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데릭의 마음을 아주 잘 알겠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의 내 모든 위로는 데릭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알아, 아주 잘 알아. 데릭...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당신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놈인건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인생은 뭘까.

타이밍은 뭘까.

사랑은 뭘까.

기다림은 뭘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오늘은 데릭 때문에 너무 슬퍼서 저녁에 육개장이나 먹어야겠다.

데릭, 한국에 올래요? 내가 육개장 사줄게요. 나랑 육개장이나 한 사발 하십시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교사이기도 하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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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5-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죠.
나도 나름대로 공부하고 생각할거에요. 계속 계속 말해줘요. 친구!

다락방 2017-05-16 10:4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책을 읽는 건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자꾸 생각할 거리가 생기고 자꾸 고민할 거리가 생기니까요. 결국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계속 고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방법인 것 같아요.

moonnight 2017-05-1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조카아이들을 사랑하는 걸 가지고 ‘네 아이가 없어서 그렇지.‘ 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 많죠. 바보들-_-

다락방 2017-05-16 14:00   좋아요 0 | URL
어떻게 그렇게 단정짓고 함부로 말할 수 있죠? 아 사람들 진짜 무식해요. 조카를 사랑한다는 건, 말그대로 조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아-

치니 2017-05-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누군가에게 두리가 이제 12세가 되어간다고 하자, ˝그럼 곧 죽겠네요˝ 라고 바로 답변하길래 어찌 그리 잔혹하게 말하냐니까 개들은 원래 그 정도 사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자기는 사람과도 헤어지면 그냥 다른 사람 또 만나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고...으음, 그분에게 대체 그럼 왜 이 세상 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각자의 경험치가 다르고 그렇게 사는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요. 있겠지만 생명 경시하는 말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이어가기 싫더라고요.

다락방 2017-05-16 14:10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너무 무식한 발언이네요. 정말이지 입이 있다고 말을 막하고 다니는 사람들 많은 것 같아요. 개와 같이 살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그런 막말을 하지요? 그사람은 어차피 죽을 인생 왜 사는 걸까요? 치니님이 말씀하셨듯이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치니님이 그 사람과 대화를 할 필요는 전혀 없어보이네요. 대화라는 게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액션이 있으면 적절한 리액션이 있어야 대화가 성립되는데,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뭐랄까,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일 것 같아요. 어휴..무식한 사람들... Orz

clavis 2017-05-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그 육개장 제가 사겠습니다 데릭님도 락방님도 저도 한 그릇씩 하면서 마음을 달랩시다!오늘의 위로를 모두 그에게 주신것 고맙습니다~한국엔 언제?

다락방 2017-05-16 16:1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데릭이 시간이 나야할텐데 애나 생각에 꼼짝도 안할것 같아요. 흙흙
클래비스님이 사주시는 육개장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지네요. 아아,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트 뿅뿅 ♡

clavis 2017-05-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사랑이 아름답다 하셔서 다시 한번 락방님의 글을 읽었더니요ㅠ아름답긴커녕 마음만 쓰라란걸 워째요ㅠ
육개장의 맛이 아름다울 것이에요..데릭을 데려옵시다..데리릭~!!

다락방 2017-05-16 17:41   좋아요 1 | URL
크- 그렇지요. 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어디 가슴 아픈 걸 가지고 아름답다고 뻥을 쳤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육개장이나 먹읍시다. 데릭, 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