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해서라면 진작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번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 지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책에 다루어진 모든 얘기들 중에서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얘기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웠던 얘기를 하고싶은데, 그것은, 그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계 라고 불러도 좋고 사랑 이라도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닭살스럽게도 소울메이트,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이 아프다.
이 책의 저자 '호프 자런'은 과학자이다. 그녀는 식물에 대해 연구하고 싶지만, 돈이 되는 것이 전쟁무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연구를 하면서 연구기금을 따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도 내내 언급한다. 호프 자런도, 나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은 늘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나는 일주일에 40시간은 폭발물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또다른 40시간은 곁가지로 진행하는 식물학 실험에 바치겠다는 기만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엄청나게 과로해야 했고, 모든 과학 프로젝트에 있기 마련인 후퇴와 작은 실패들에 대해 더욱 참을성이 없어지고 절박해졌다. (p.40)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빌'이라는 동료를 만나 함께하게 된다. '혼자'인 빌. 어릴 적부터 땅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놀던 빌. 지금도 구덩이와 담배만 있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괴상하다 생각되어지는 인물이겠지만, 호프 자런에게 빌은 너무나 좋은 친구이며 동료이다. 이정도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호프 자런의 말대로, '이란성 쌍둥이'라 여겨질만한 존재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빌을 만나고 또 빌과 호프 자런의 대화를 보면서, 이 책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내내 궁금했다. 이렇게 연구를 같이 하는 시간이 긴데, 서로가 서로를 미친듯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그런데 왜 이들은 따로 사는걸까. 왜 한 명은 집에서 살고 한 명은 차에서 지내는 걸까. 같이 지내면 안되는걸까. 나는 내내 아쉬워하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 호프 자런이 빌과 함께 있는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다 실수를 저질렀고, 그래서 실험기구들이 폭발한다. 다행스럽게 빌과 호프 자런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호프 자런은 자책한다. 아, 내가 여기서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계속 과학자를 할 수 있을지 절망속으로 떨어지며, 자신에게 있는 나쁜 습관이 여지없이 튀어나오고야 만다. 자신의 피부를 깨무는 습관.
나는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끌어안은 채 손등을 깨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습관이었다. 실험실에서 장갑을 끼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그 순간 몸 전체를 엄습하는 초조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오른손의 마디들을 이로 물어뜯다 보니 얇게 앉은 딱지들이 떨어지면서 입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피부가 짖어지는 그 느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편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시작했다. 나는 관절 사이에 상처가 난 곳에 이를 대고 문지르고, 뼈를 깨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절박하게 손등을 빨았다. 몇 달만 지나면 교수가 될 나였지만, 그 날 밤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빌은 담배를 한껏 빨아들였다. "우리 집에 자기 발을 깨무는 개가 한 마리 있었어." 그가 회상하듯 말했다.
"더러워 보인다는 거 나도 알아." 나는 수치심이 몰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나는 손을 배에 대고 굽힌 몸으로 꾹 눌러 입에 손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냐, 그 녀석 정말 굉장한 개였어. 발을 깨물든지 말든지 우린 상관하지도 않았지."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똑똑한 개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최고지." 나는 머리를 무릎에 대고 눈을 꼭 감았다. 빌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우리 둘은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p.125-126)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읽는 순간 정말이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쁘니까 하지마' 라는 누구나 하는 위로 대신에, '그렇게 똑똑한 개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최고지' 라고 말하다니. 아, 쓰면서도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ㅠㅠ 너무 좋지 않은가!
그녀가 손을 물어 뜯기전, 실수와 실패를 알고 망연자실했을 때, 그때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고 했었다.
"이봐, 담배 좀 피우고 와도 될까?" 한참 후에 빌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로 그렇게 물었다. 그의 차분한 태도 때문에 모든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몸을 움찔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미칠 듯이 아팠다.
빌은 사방에 우박처럼 깔린 유리 조각 사이를 우적우적 걸어서 문 쪽으로 갔다. 문 앞에 선 그가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 "오는 거야?" 그가 물었다.
"난 담배 안 피워." 내가 비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빌은 복도 쪽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가르쳐줄게." (p.124)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빌은 호프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들을 건넨다. 그 말들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가 닿고, 그녀는 그로 인해 단단해지는 것 같다. 빌과 호프는 함께 있는 시간도 많다. 둘 다 연구하는 시간이 길고 그래서 같이 일하고 같이 성공하며 같이 실패한다. 나는 이렇게나 잘 맞는 이들이 결국은 서로와 함께 살기를, 일터에서도 그랬듯이 집에서도 함께 하기를 바랐다. 잘 맞는 상대와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싱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같이 살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세상 천지 어디에 이런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했던 거다.
이렇게 내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흔한 게 아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조금은 안맞는, 그러나 좋은 상대와 적응하며 살아가지 않던가. 어쩌다가 이렇게 맞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누구나 내 평생 함께 갈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하는데, 아, 호프는 빌을 만났어! 물론 이들이 결혼으로 묶이지 않아도 좋다. 이들이 서로에게 그들 자신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족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하루는 호프가 우울에 잠겨 빌에게 새벽에 전화한다. 자신의 우울함을 토로하는데 빌은 '네가 못자니 너의 개도 못자겠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들은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빌은 호프의 개에게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야..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아이참, 왜 병원이나 그런 델 안가보는 거야?" 그렇게 묻는 빌의 목소리에 거의 애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웃어넘겼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그리고 뭐 하러?" 내가 대답했다. "기껏 스트레스 좀 덜 받게 하라고 할 게 뻔한데."
"의사가 프로잭(우울증 치료제-옮긴이)이라도 처방해주게 말이야."
"난…난 프로잭 같은 거 필요 없어." 내가 말했다.
빌은 바로 쏘아붙였다. "그럼 먹지 마. 네 실험실에 사는 집 없는 남자한테 주면 되잖아."
새로운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것은 빌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한테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볼게." 내가 약속했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소리를 빌이 듣지 않도록 수화기를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고 싶었던 말을 일부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전화했을 때 받아줘서 고마워." (p.250-251)
나는 그동안 연인들과 24시간 이상을 함께 지내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였고, 그래서 함께 있기를 선택한거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내내 좋지는 않았더랬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와 오래 함께하기 보다는, 나 혼자 지내면서 가끔 시간을 같이 보내는 쪽을 선호하며, 그것이 잘 맞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그동안의 반복되는 연애에서 해왔었다. 내게 연인이 있을 때조차 그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를 선택하기 보다는, 조금은 거리감을 두는 내 성격을 알고 역시 그 거리감을 지켜주려는 다른 친구들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내게 연인이란 언제나 거리감을 없애기에 급급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 지내는 것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때로는 오래 함께 있어본 뒤에 헤어지기도 했다. 아, 역시 나는 이게 안맞아. 그런데 호프는, 빌과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더 편해진다고 말한다.
몇 안되는 사람들과 함께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로 인해 금방 숨 막히는 기분이 들기가 쉽다. 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곳에 가기 전에 나는 누구와도 몇 주 내내 하루 24시간을 붙어서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어려워지기는커녕 더 쉬워졌다. (p.284)
호프의 성격 자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편하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호프도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이 숨 막히는 기분이 든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빌은 '다르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더 쉬워진'다니. 이런 사람이 살면서 대체 몇이나 내게 찾아올까? 나는 내게 그게 가능할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더 쉬워지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같이 있는 것이 더 쉬워지는 사람과, 왜 같이 살지 않는걸까????
그런데 호프 자런에게는 사랑이 찾아온다. 나는 내심 빌이 호프 자런의 사랑은 아닐까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호프는 다른 사람, 클린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주 단단한 사랑에.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너무도 쉬웠고, 내게 과분했기에 더 달콤했다.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돈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나와 나눌 것이고, 나는 내 상상력을 그와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말도 안 되게 남아도는 것들을 요긴하게 쓸 용도를 찾을 것이다. (p.293-294)
나는 호프가 빠져버린 사랑이 아주 단단하다는 것을 안다. 진심으로 사랑에 푹 빠졌다는 것을 안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없지만 그 없이 살고 싶지 않다는 그 절절한 마음이 뭔지 너무나 잘 안다. 잘 알아서 그런 사랑에 빠진 호프가 부러우며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을 살면서 사랑에 빠져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호프, 당신에겐 어마어마한 사랑이 찾아왔네요. 축복해주어야 할 일이라는 걸 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코 헤어진 채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던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절절한 사랑의 마음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빌을 생각한다.
아, 빌.
이 책에서 빌이 호프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빌이 호프에게 느끼는 것은, 호프가 그런 것처럼 이란성 쌍생아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내 짐작으로 빌의 마음이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오만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아프다. 호프는 마지막에 빌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기를 바라는데, 빌이 가정을 이루길 바라는데, 그런 호프를 볼 때는 좀 실망스러웠다.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 그 막연한 죄책감, 알 수 없는 미안함이야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사람은 살면서 진실한 영혼의 쌍둥이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 또 살면서 늘 함께 하고 싶은 사랑을 만날 수도 있지만, 역시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런데 호프는 영혼의 쌍생아라 표현하는 연구동료가 있고, 강인함과 상상력을 함께 나눌 사랑도 찾았다. 호프는 자신이 얼마만큼의 행운을 거머쥐었는지 알고 있을까? 게다가 클린트는 빌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빌 역시 초반에, 갑작스레 호프의 결혼소식을 듣고는 당황해 했지만, 금세 연구동료로서 호프의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진다. 아주 오래 함께 해오면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함께이며, 그리고 여전히 좋은 친구이다. 나는 빌이 호프를 위로할 때, 그리고 호프가 빌을 위로할 때,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장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울고싶어졌다.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동시에 너무 아프기도 해서. 너무 좋은데 너무 슬프다. 어떤 이에게는 '너만 있으면 돼'가 가능한데, 왜 어떤 이에게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필요해'가 되는걸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성격과 성향을 갖고 있고 또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지만, 똑같은 이유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빌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빌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절대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는 그의 친구가 있다고, 그 친구들은 절대 빛이 바래거나 녹아 없어지지 않을, 피보다 더 진한 무엇인가로 그와 튼튼하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빌이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숨을 쉬는 한 그가 배고프거나 춥거나 엄마 없는 아이처럼 살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두 손이 다 있지 않아도, 주거지가 불명확해도, 폐가 깨끗하지 않아도, 사회적 예절이 부족해도, 사람들이 좋아하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명랑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다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내 첫 임무는 세상에 구덩이 하나를 팍 ㅗ빌이 들어가서 괴팍한 자기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살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p.351)
나는 양쪽 팔로 나를 스스로 끌어안고 모로 누워 엉엉 울고 싶어졌다. 한참을, 아주 한참을 울고 나면 이 아픔이 덜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빌을 생각하고 싶다. 빌은 어쩌면 지금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좋아하며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릴없이 내가 슬퍼하고 있다. 내가 아파하고 있다. 영혼의 쌍생아라는 위치를 오히려 마음에 들어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역할이 좋은지 싫은지도 알지 못하면서 하염없이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