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또래에 비해 한글을 일찍 깨우쳤다. 한글을 습득하는 것은 내게 꽤 재미있는 일이었고,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 이모로부터 한글을 배우면서 글자 읽는 걸 즐겨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한 학급에 60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미 나만큼 한글을 알고 있는 애는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글자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친구네 집이나 선생님 집, 엄마의 이웃집에 놀러가서도 눈에 보이는 책 아무거나 골라 잡아 글을 읽었는데, 이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신기해하며 '너 진짜로 글자 읽어서 읽는거냐?' 고 묻고는 내게 읽어보라 시켜보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글자를 읽으면 아주머니들은 환호했더랬다. 어머, 얘가 읽네, 진짜 읽어!
가끔 생각해보는데, 우리 엄마아빠가 좀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집에 돈이 많아서 내게 영재교육을 시켰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 어마어마한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집에 태어나서, 애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응?)
엄마는 내게 세계문학전집 100권짜리 책을 사주셨지만, 그건 이미 국민학교 4학년 즈음의 일이고, 그 책들이 있기 까지는 집에 책이 있던 기억이 없다. 나는 고모네 집에 가서 나보다 2학년 앞선 친척 오빠의 국어책 읽기를 즐겨했고(정말 신나서 고모네 집에 가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신문 기사를 읽곤 했다. 이모의 어른용 책을 읽기도 했고. 내게 읽을 거리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엄마는 어릴 적에 내게 책을 읽어주었었다 했지만(그러니까 아기였을 때 말이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너무 어릴 적의 일이라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엄마의 기억이 너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린이책을 읽을 줄 모른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그림책과 동화책들, 그러니까 어린이책들을 읽어보고자 사서 그림을 보고 글씨를 읽노라면 나는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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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대체 이 책을 왜 좋다고 하는걸까, 어디에서 좋은걸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보다 한글도 빨리 깨우쳤고!! 공감능력도 뛰어나고!! 이해심도 어마어마하고!! 개구리가 되어볼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인데!!! 그런데!!!!!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겠다. 한 번은 엄마를 원망해 투덜댄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나 어릴 적에 책을 안읽어줘서 내가 그림책 볼 줄을 모르잖아! 하고. 엄마는 역시 대답하셨다. 아니, 읽어줬다니깐!! 하고. ... 그렇단 말이야? 믿을 수 없군. 그렇다면, 내가 왜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거지? 왜 이 그림이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지? 아니, 애시당초 그림에 관심이 가질 않아....이 그림책 이 내용......왜때문에 써진거지? 뭘 말하는거지? 내가 너무 주입식교육에 찌들어있어서, 어린이책으로부터 주제를 찾으려하나??? 그것이 나의 문제인가??? 그렇게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 나의 컴플렉스는 쌓여만 갔다. 아, 나는 어째서, 왜때문에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는가........ 왜 남들이 좋다는 책을 사두고도 아무 느낌이 없나...... 이런 노래 가사도 있었는데..무슨 노래였지...
왜 아무 느낌이 없나...
아, 신해철? 커다란 무대 위... 가만, 가사를 찾아보고 오자.
커다란 무대 위 화려한 조명 속에
더 작아 보이는 너의 모습
옷자락 가득한 붉은 장미 사이로
더 창백해지는 너의 얼굴
넌 그렇게도 슬픈 얼굴로
흔한 사랑을 얘기하지만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없나
조명은 꺼지고 텅 빈 무대 위에는
아직 남아 있는 시든 꽃다발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노래 속에
다시 돌아오는 너의 느낌
넌 무대 위로 쓰러져 갈 때
웃고 즐거워하던 사람들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없나
넌 무대 위로 쓰러져 갈 때
웃고 즐거워하던 사람들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춤추는) 너의 모습은
(슬프게) 무너져 가는데
(나는 왜) 아무 느낌이
(다시 또)
자, 이렇게 잠깐 딴 길로 샌 뒤에 다시 돌아와서.
그런데 이런 내게! 이런 내게 딱 맞는 맞춤형 책이 나왔단다. 어린이책 읽는 법, 어린이책 읽는 가이드! 아니, 세상은 정말이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게다가 이 책을 누가 썼냐? 네꼬님이 썼다. 네꼬님이, 네꼬님이!! 꺅>.<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네꼬님이 누군가! 어린이책에 대해 맛깔스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시는 분이 아닌가. 글을 잘 쓰는것 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사랑스럽게 쓰는 바로 그 분이, 본인이 가장 애정해마지않는 어린이책 읽는 법을 알려주신다니, 아아, 너무 고마운 일 아닌가. 책 표지에 보면 '남녀노소 누구나' 라고 되어있다. 이 책은 나에게 아주 맞춤한 가이드가 됨과 동시에 재미까지 보장할 만한 책이 아닐까. 네꼬님이, 재미없게 썼을 리가 없잖아?
나, 이 책 읽으면 어린이책까지 잘 읽게 되는건가. 무릇 나는 이 세상에서, 하늘 아래 최고되는 것인가. 못하는 게 없는 바로 그런 여자사람이 되는 것인가...아아, 나의 발전의 끝은 어디인가.....
라고 네꼬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하면서 내 잘난척이 끝이 없구나.
아무튼지간에 나는 이 책을 사서 읽고! 지금보다 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 세상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는 그런 여자사람이 되어가지고, 널리널리 이름을 퍼뜨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