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양재역에서 버스를 탔고, 버스엔 자리가 많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 앞으로 누군가 와서 선다. 아니, 자리도 많은데 이 남자는 왜 내 앞에 선담? 하고 눈을 부라리며 도대체 어떤 놈인가 보자, 했는데, 한참을 올려봐야 되는군, 키가 커, 어? 타부서 L과장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 버스에 같이 타고 있는줄 몰랐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장은 내게 내려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한다. L과장은 스타벅스 매니아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타벅스 카드가 언제나 빵빵하게 충전되어 있고 화이트초코모카 인가 하는 달디단 커피 중독자이다. 늘 벤티로 마셔. 어쨌든 나는 '오늘 아침은 커피를 마시지 않겠어!

'라고 결심했지만 L과장이 커피를 마시자는 말에 네! 하고는 쪼르르 쫓아 한정거장 전에 내려서는 같이 스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커피를 얻어마신다. 훗. 아침에 커피를 얻어 마시는 건 꿀맛이여.... 




















'사이먼'은 게이 고등학생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게이인 익명의 '블루'와 이메일 교환을 한다. 너는 언제 커밍아웃할거야? 같은 걸 물어보면서 수시로 이메일을 주고 받는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사랑이 싹튼다. 사이먼과 블루는 이메일의 끝에 언제나 '사랑해'라고 덧붙인다. 아직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러니까, 서로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사이먼은 주변의 남자 아이들을 보며 '혹시 쟤가 블루가 아닐까'를 추측해본다. 그렇지만 쟤인것 같다가 아닌 것 같고 얘인것 같다가 아닌것 같고.... 그렇게 사이먼과 블루의 사랑은 아직 보지 않은 채로 깊어진다.



사실 이 소설은 2/3 지점까지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이먼과 블루가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그게 내게 막 와닿지는 않았더랐다. 어쩌면 나는 이 책속의 주인공들보다 세상을 이십년 더 살아와서 '야, 만나고나면 달라질 수가 있어'라는 시큰둥한 마음이 들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시절 그 뭐더라, 무슨 채팅 사이트가 확 떴을때, 그때 같은 과 친구가 채팅으로 알게된 남자와 허구헌날 통화하면서 '사랑해' 하고 속삭였는데, 실제 만나고나서는 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더랬다. 나도 채팅으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고, 내 생각과 달라 실망한 적이 당연히 있었는데, 나는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즐겁게 놀다 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상대에게 예의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미안합니다 ㅠㅠ


물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어서 만났을 때 와, 좋다! 했던 적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 멋진 남자가 나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과는 아주 오래 관계를 유지했더랬다. 잘생겨서가 아니라 서로 호감이 있어서 그랬다. 그렇지만 그렇게 멋진 남자라고 해서 영화 [나의 ps 파트너]에서처럼 지성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나온 적은 결코, 결코 없었다. 그게 진짜 영화니까 그렇지, 무슨 모르고 만났는데 남자는 지성이고 여자는 김아중이여... 어쨌든지간에 그건 너무나 철저히 영화적인 사람들이었고, 내가 이메일로 혹은 채팅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현실에서 좋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0 퍼센테이지는 아니지만, 극히 낮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 사이먼은 드디어 블루를 만난다. 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아...잘생겼어.............. 평소에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남자야......게다가 이들은 이메일을 통해 이미 서로에 대해 은밀한(?) 상상까지 했었음을 고백했던 터다. 아아, 나는 이들이 만나고나서부터 함께 미쳐버리고만다. 아, 설레임이여, 사랑의 시작이여, 은밀한 상상이여, 그리고 사랑이여....




아무래도 난 이메일 속의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생각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그리고 그 귀여움을 마음속에서 실감 나는 이미지로 바꾸어 망상 비슷한 걸 하느라 말이지. -블루, p.193



이메일은 좀 더 길었지만 사이먼은 특히 '망상 비슷한 것에 꽂혀 회신한다.



특히 '비슷한 거'라는 부분 말인데, 좀 자세히 설명해 줘. 

추신: 정말이야. 비슷한 거라니? -사이먼, p.193



아아, 나도 궁금해. 망상 비슷한 것이라니. 크- 아아 사이버 섹스여....(응?)

무슨 망상인지 말해줘, 말해줘, 말해줘. 나도 궁금해. 하앍-



드디어 블루와 사이먼이 만난다! 아아, 너무 떨려. 너무 긴장돼! 그리고 그들은, 이메일에서 그러했던것처럼 서로에게 빠진다. 블루는 중간에 사이먼이 사이먼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사이먼은 블루가 이사람인지 몰랐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들은 만나서도 서로에게 변함없이 사랑에 빠져있음을 확인한다. 아, 너무 두근두근해서 막 신났어..


이게,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하면 안되겠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라서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터뜨리기로 한다. 펑- 그러니까, 사이먼은, 자신이 이메일을 나누는 블루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백인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처럼. 그러나 만나고나서 그가 백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사이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하지만 난 바보다. 바보가 맞다. 난 블루가 칼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막연히 블루가 백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내 자신을 한 대 쳐 주고 싶다. 이성애자가 기본이 아닌 것처럼 백인도 기본이 아닌데 말이다. 애초에 기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p.301)


자, 어쨌든 이들이 만났다. 그리고 두근두근, 손을 잡고 싶다.



"근데 말이야, 네가 날 위해서 디스코 팡팡을 다 타다니 믿겨지질 않아."

"내가 정말로 널 좋아하나 보지." 블루가 대꾸한다.

그 말에 난 블루에게 몸을 기댄다. 입을 여는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만 같다. "너랑 손잡고 싶어." 난 조그맣게 속삭인다.

우린 공공장소에 있으니까. 블루가 커밍아웃을 한 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잡아." 블루가 대답한다.

난 그렇게 한다. (p.302-303)



위 인용문에서는 블루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걸 내가 일부러 블루로 수정했다. 누구인지 밝히면 책을 읽는 게 재미가 없을테고 신비감이 떨어지니까. 비밀유지!

아아, 손을 잡고 싶어, 라고 말하고 그럼 잡아, 라고 하는 거.. 너무 좋지 않나.

누구랑 다정하게 손을 잡아본 지가 언제인가..


어제 점심때 k 과장하고 밥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뒤에서 차가 왔고, k 과장은 나더러 뒤에 차온다고 비키라며 살짝 안아서 나를 옆으로 이끌었다. 허리에는 k 과장의 팔의 감촉이 남아있었고, 나는, 아아, 나를 살려줬고 안아준거야? 누가 나 안아준 거 오랜만이라 설레어....라고 했더랬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누가 나를 안아준다는 거, 포옹한다는 거, 이런 기분이었던거지.... 아....좋은 경험이었다................ k 과장은 나를 들어올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유감이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해, 들어올리기엔 좀....무겁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지간에 사이먼과 블루가 손을 잡아서 내가 몹시 부러웠는데, 그러다가 나의 지난 일이 생각나 혼자 빵빵터져 웃었더랬다.



그러니까 헤어진 애인과 나도 사실 온라인에서 알게 됐고, 그렇게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서 사귀게 됐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가 첫인상이 어땠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게 된거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만나면 예쁜 여자가 없나봐, 내 똘레랑스를 벗어났어, 그렇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라고 했다더라. 나는 씩씩대면서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못생겼는데 삼십초 지나면 그 못생김을 잊게 되고 그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 라고 그에 대해 했던 과거의 발언에 대해 얘기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둘다 서로 상대가 한 말에 씩씩댔더랬다. 그는 내게 '야 그래도 내가 너 못생겼다는 말은 안했어!!' 하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그러나 똘레랑스를 벗어난 외모같은 것들, 못생겼다는 말들....다 무슨 소용인가요? 빠져버렸는데. 풍덩- 허우적허우적...... 외모는 뭐다? 사랑에 빠지는 데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니까 물론 예쁘고 잘생기면 좋겠지만, 사랑에 빠지게 하는 요소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서로의 외모에 대해 예쁘지 않다, 잘생기지 않았다 고 생각했으면서도, 우리는 만날 첫날부터 키스했다. 아, 인생이여.....(응?) 당신은 내게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지...................나 안예쁜데 왜그랬어? 아,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의 만남이여.........아, 당신의 성적 매력이여...........그보다 더한 나의 성적 매력이여.........인생.......럽......에로틱................어쨌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 잘생긴 외모가 아닌데 내가 푹 빠졌다고 일전에 어느 알라디너한테 비밀댓글을 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알라디너가 내게 말했었다. 못생긴 남자한테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네요....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페이퍼가 점점 더 갈 길을 잃고 헤매이는구나. 자, 다시 자리를 찾자.



블루와 사이먼은 학교 장기자랑인가 뭐 암튼 그런거에 같이 가서 옆에 나란히 앉는다.



난 블루에게 몸을 바짝 기댄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무릎에 손도 올려놓는다. 블루가 살며시 움직이더니 내 손에 자기 손을 깍지 낀다.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 가장자리에 입술을 누른다.

블루는 그 자세로 잠시 가만히 있는다. 배꼽 아래에 예의 당겨지는 듯한 펄떡임이 느껴진다.

그러고는 깍지 낀 채로 손을 다시 무릎에 내려놓는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는 게 이런 거라면, 도대체 내가 왜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p.326)



아아, 이 부분 읽는데 진짜 내 아랫배가 뒤틀려가지고... 나 역시 내가 왜 비연애 상태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아니, 나 왜 연애 안하지?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손에 깍지 끼고 응? 무릎도 닿고, 응? 그리고 허벅지에 손도 올리고 응? 스윽스윽 쓸어보기도 하고 응? 왜 안하지, 나?


아아 그리고 얘네들봐라? 아주 그냥 욕망에 불타오른다. 아아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블루의 눈빛이 내게로 날아온다.

그리고 빗줄기는 커튼처럼 우리를 가려 준다. 완벽한 상황이다. 왜냐면 갑자기 난 기어 위로 몸을 굽혀 블루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으니까. 블루의 입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몸을 숙여 블루에게 키스한 순간 부드럽게 벌어진 그 입술 말고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고요함, 압력, 리듬, 그리고 호흡. 처음엔 우리의 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곧 알게 되고, 다음 순간 내가 아직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눈을 감는다. 블루의 손가락 끝이 내 목덜미를 훑는다. 끈질기게, 가만가만히.

블루가 한동안 가만히 멈춰 있어서 난 스르륵 눈을 뜬다. 블루가 웃는다. 그래서 나도 웃는다. 그러자 블루는 다시 몸을 굽혀 내게 입 맞춘다. 달콤하고도 깃털처럼 부드럽게. 지나치게 완벽한 순간이다. (p.309)




그런 다음 난 블루에게 정말로 진하게 키스하고, 블루도 내게 키스한다. 블루의 두 손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우리는 숨 쉬듯이 오랫동안 깊게 키스한다. 배 속이 미친 듯이 팔딱거린다. 어느새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다. 블루의 두 손은 내 목을 두르고 있다.

"좋은데." 내가 입을 열자 헐떡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자. 매일매일."

"그래."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학교도 가지 말고, 밥도 안 먹고, 숙제도 하지 말자."

"너한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블루가 웃으며 말한다. 블루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영화 안 봐. 영화 따윈 질색이야."

"아, 그래?"

"진짜야, 진짜라니까. 뭐하러 다른 사람들 키스하는 걸 보러 가겠어." 내가 속삭인다. "너랑 키스할 수 있는데 말이야." 

블루도 반박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날 더 끌어당겨 마구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갑자기 난 발기한다. 그리고 블루도 발기해 있다. 짜릿하고, 야릇하고, 또 엄청 두려운 기분이다. (p.338)



아...내 배가 뒤틀리는 것 같다............ 미친듯이 뛰고 싶다......달려, 런! 런! 치티치티뱅뱅....런! 미친듯이 달려서 내 안의 욕망을 부숴버렷!!!!!!!!!!!!!!!!!!!!!!!!!!!!!!!!!!!!!!!!!!!!!!!!!!!!!!!!!!!! 지친 채 잠들어버렷!!!!!!!!!!!!!!!!!!!!!!!!!!!!!!!!!!!!!!!!!!!!!!!!!!!!!!!!!!!!!!!!!!!!!!!!!!!!!!!

아 위의 부분들을 읽다가 다시 연애를 시작해볼까...생각했는데, 갑자기 또 확 귀찮아져버리네... 아, 귀찮아.... 다 귀찮아...세상에 쓸모있는 놈 하나도 없어.... 이놈이나 그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서 와인이나 홀짝이며 평온한 삶을 살자.............. 남자 대신 지구본을 품에 안겠어!




책은 아주 똑똑하게 쓰여졌다. 해야 할 말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 '아 블루가 얘였어?'하고 난 뒤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책을 훑어보니, 오오, 완전 새롭게 읽히는거다. 사이먼, 너는 비록 블루가 다른 아이이길 바랐지만, 얘를 보고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네?! 이런 거 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서, 지금 다시 읽으면 또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중간 넘어서까지도 딱히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뒤에 얼마 안남기고 급재미있어져서 ㅋㅋㅋㅋㅋㅋㅋ 씐나서 읽었다.


이 책이 좋은 이유중의 하나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늘상 몰려다니는 사이먼을 포함한 네 명의 친구들 사이. 그 안의 애정과 갈등 같은 것들. 사이먼은 애비에게 제일 먼저 커밍아웃을 하는데, 애비와 친하지만 친하게 된 건 몇 개월 되지 않았다. 6년간 친구였던 레아는 사이먼이 애비에게 '먼저' 커밍아웃 했다는 데에 상당히 서운해하며 화를 내는데, 나는 그런 레아의 기분이 뭔지 너무 잘 알겠는거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장 먼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사실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이미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닌 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까. 나는 나라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보니 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됐다. 나는 인간에 대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나는 욕심으로 똘똘 뭉쳐있더라. 내 안의 욕심을 버리는 것, 누군가에게 언제나 우선 순위가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내게 내려진 과제인데, 이걸 해내려다 보니 자꾸 힘에 부친다. 나 스스로 세컨드라고, 세상의 세컨드이며, 누구에게든 세컨드라고 마음 먹으려고 김경미 시인의 시를 떠올려 보지만, 어떤 것들은 반복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것만 깨달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똥구멍까지 욕심이 찬 채로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분열을 자꾸만 일으키면서... 내 남은 삶은 계속해서 내가 나를 다독이고 타이르고 놀라고 쓰다듬어 주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친구가 페미니즘 북토크 소식을 알려왔다.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알려 모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 달에 월급이 평소보다 훨씬 쪼들리지만, 이번 해에 내가 페미니즘 공부에 더 돈을 많이 쓰기로 한 것을 떠올리고는, 망설임없이 참가신청을 했다. 뭐, 술 몇 번 참지. 지난 몇 해의 나와 최근 몇 해의 내가 달랐던 것처럼, 지금의 나와 또 앞으로의 나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번 해의 테마를 페미니즘과 여행으로 결정했고, 이것이 지금 내게는 최대의 관심사이다. 며칠전에는 여행친구와 내년 베트남 여행까지 예약해 놓았다. 친구야, 분보남보 먹게 해줄게! 라고 내가 말했다. 부지런히 할부를 갚자!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되어 여유로운 웃음을 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말들을 뱉어놓고 후회하고 또 어떤 행동들을 해놓고 후회한다. 대부분의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스스로 잘했다고 확신하지만, 그런 틈틈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때로는 내 모든 선택이 잘못됐다는 절망에 휩싸여 우울해지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나는 너무 못생겼고, 못났고, 멍청하다는 생각에 푹 빠져서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고.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후회화 고민의 연속인 것 같고, 어른이 된다는 것도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 같다. 그렇다면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한 나 자신을 깨닫는 건 너무 아프다. 



아, 설레이는 책 얘기를 써두고는 페이퍼가 또 이상하게 흘러갔네.

아무튼지 간에 오랜만에 아랫배가 찌릿찌릿해지는 책이었다. 덕분에 그와 내가 처음 만났던 시간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사랑은 시작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오래 부르짖어 왔지만, 어떤 사랑은 진행 과정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나저나 내가 사정상 오늘 점심을 굶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인생 얼마나 산다고, 살아봤자 백 년일텐데, 한 끼 굶는다고 생각하니 서럽다. 흙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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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5-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대신 지구본을 품에 안겠어! .... 이 대목에서 그만.. 육성으로 빵 터졌네요 ..허허허허;;;;

다락방 2017-05-12 10:10   좋아요 1 | URL
저 멋지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17-05-12 10:31   좋아요 0 | URL
완전요! ^^

다락방 2017-05-12 10:35   좋아요 0 | URL
히힛 👍🏻

단발머리 2017-05-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부분이요.


미친듯이 뛰고 싶다......달려, 런! 런! 치티치티뱅뱅....런! 미친듯이 달려서 내 안의 욕망을 부숴버렷!!!!!!!!!!!!!!!!!!!!!!!!!!!!!!!!!!!!!!!!!!!!!!!!!!!!!!!!!!!! 지친 채 잠들어버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멋쟁이!!!

다락방 2017-05-12 10:2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한 순간이라도 단발머리님을 웃게 해드렸다면, 제 삶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불끈!

레와 2017-05-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때문인지 [엠 아이 블루]가 계속 떠올랐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ㅎㅎㅎㅎㅎ

그러고보니 우리도 온라인으로 알게된 사이!! ♡

다락방 2017-05-12 11:42   좋아요 0 | URL
응 맞아요. 나도 엠 아이 블루 생각났어요. 이 책 좋으네요, 레와님. 사소하지만 중요한 메세지들을 자꾸자꾸 던져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처음엔 좀 심심하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재미있어져요. 후훗.

그러네. 우리도 온라인으로 알게된 사이네! ♡

clavis 2017-05-1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멋져요..♥♥

다락방 2017-05-15 08:43   좋아요 0 | URL
히죽히죽 ^__________________^

마를린 2019-12-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고 책 사려고 들어왔다가 웃고 갑니다. 아랫배의 찌릿함을 해소해줄 좋은분은 만나셨나요?

다락방 2019-12-27 16: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요.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