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줄리안이 층계 위에 나타난다. 얇은 면 잠옷을 입고 있다. 등지고 있는 전등에 드러난 몸매의 실루엣이 주교라도 맹세를 깨게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무슨 일이야?" 줄리안이 묻는다.

"가서 다시 자. 난 가봐야 해."

"내가 싫은 게 바로 이거야, 조."

"알아." (p.536)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이루는 가장 중심적인 축은,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를 이루는 부수적인 많은 것들은, 어떤 요인으로 인해 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내가 이럴 줄 몰랐어' ,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내가 이런것 까지 하게 되다니' 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짐을 확인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아주 중심적인 것은, 여전히 나인채로 있게 된다. 내가 아무리 다른 상황을 원해도, 나에게 변하지 않는 그 중심 축이 있으므로, 상황을 바꾸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생기곤 하는 것이다. 이별은, 그럴 때 오는 것 같다.


'조 올로클린' 은 심리학 교수이다. 파킨슨 병을 앓고 있으며 아내와 두 딸을 지독하게 사랑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전편인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조는 아내 줄리안으로부터 별거하자는 얘길 듣게 되고, 그렇게 별거중이다. 조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해서, 아이들을 아내와 번갈아 돌보면서 거의 매일 만나는 동시에, 자기와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는 가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앞으로 가서는 물끄러미, 그림자와 실루엣을 바라본다. 그는 예전처럼 그가 이 가족의 일원이기를 원하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이고 싶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고 싶다. 조는 여전히 아내 줄리안을 사랑한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고, 여전히 줄리안과 얘기를 하는 시간이 너무나 좋다. 조는 줄리안과 다시 함께 살고 싶다. 여전히 줄리안을 사랑한다.


그러나 조는, 줄리안이 가장 싫어하는 점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많은 범죄 사건들에 연루되는 것, 그 사건을 모른척 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밤에 불려가기 일쑤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도 잦다. 전(前)편에서는 아내와 딸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다. 줄리안은 조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아빠임을 잊지 말고 자신을 지키면서, 그렇게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조는, 자꾸 피해자들을 도우려하고, 가해자들을 어떻게든 잡고 싶어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그래서 가해자가 그러는 '이유'를 알고자 범죄 현장에 가면서 경찰들을 돕고, 피해자에게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심문 과정에서도 도움을 준다. 그래서 그는 범죄가 일어나고 가해자가 뻔히 판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무시할 수가 없다.


어느 늦은 밤, 그는 전날 잠을 못자 너무 피로했고, 줄리안의 '소파에서 자고 가' 라는 말에 기대어 오랜만에 가족들의 곁에서 잠을 청한다. 그는 그렇게 푹 아침까지 잘 수도 있었을텐데, 경찰로부터 새벽에 연락을 받고는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하는 거다. 줄리안이 그렇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 자기가 그토록 줄리안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서, 그렇게 그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간다. 그렇게 꾸역꾸역 현장에 갈 수밖에 없다면, 그걸 너무나 싫어하는 줄리안과 함께 살 순 없다. 그러나 조는, 줄리안을 여전히 사랑한다. 다시 함께 살고 싶다. 하아-




조는 줄리안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 아이들 이야기를 함께 할 때면 여전히 너무 좋고, 한 동네에 살고 있으므로 자주 만나는데, 그때마다 아내에게 사랑을 느낀다. 여전히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여전히 그녀와의 대화가 좋다고 생각한다. 번번이 만날 때마다 그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걸 보노라니,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함께할 수 없는데, 너무 사랑하고 자주 만나고 번번이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내가 몰입해버리고 나니, 나와 분리되질 않았다. 그게 너무 힘겹더라.



조의 딸 찰리의 친구가, 고작 열 네살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다. 이에 조는 진짜 범인을 찾아내고,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피를 뒤집어쓴 딸의 친구의 트라우마를 없애주고 싶어한다. 조는 심리학자라는 직업 탓인지, 사람들을 만나서 관심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는 피해자의 편이다. 가해자가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하고 싶다. 조는 철저히 '개인'에게 집중한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야 할 '개인'에게. 그게 내가 이 소설을 시작부터 좋아하게 된 이유다.



소설의 시작, 조는 '리암 베이커'라는 청년의 정신건강 심사위원회에 참석한다. 리암 베이커는 18살에 '조 헤거티'라는 여자애를 죽도록 패서 불구로 만들어 놓았다. 리암은 3년간 갇혀 있었고, 리암의 담당의사는 그것은 '순간적 광기' 였다며, 이제 리암을 풀어줘도 좋다고 한다. 리암은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이 반성하고 달라졌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한 심리학자 '조'는, 그가 언제든 다시 그런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리암을 심문하면서 기분을 건드리자 리암이 다시 폭력을 썼던 것. 이에 리암은 풀려나지 못하고 다시 갇혀야 하는 상황이 온다. 리암의 담당의는 분노한다.



"……저는 지난 18개월을 리암과 함께 보냈어요. 교수님은 기껏해야 리암이 선고 받기 전에 한 여섯 번 만나신 게 전부고요. 리암의 진보를 판단하기에는 교수님보다 제가 훨씬 나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이 리암한테 뭐라고 속닥거렸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건 정말 공정하지 못했어요."

"누구한테 공정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리암한테, 그리고 저한테요." (p.24)



리암의 담당의는 리암이 여전히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고 그래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조에게 따졌다. 너, 그렇게 하는 거, 그거 공정한 거 아니야, 라고. 리암과 나에게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라고.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대화, 조가 피해자를 더 신경쓰는 다음 대화가, 나는 너무나 좋았다.



"저는 조 헤거티에게 공정하려고 했습니다.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시겠지만, 박사님, 저는 방금 제가 박사님께 엄청난 도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박사가 코웃음을 친다.

"저는 10년간 이 일을 해왔어요, 교수님. 누가 사회의 위험요소인지 아닌지쯤은 안다고요."

나는 박사의 말을 자른다.

"저는 사회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개인이죠." (p.24-25)



아, 정말 너무 좋지 않은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정하려고 하고, 개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이 소설에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나와 너무 괴로운데, 그런 피해자를 만나는 조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도 역시 너무 괴로웠다. 그는 개인을 걱정하고, 개인을 위하고 싶고, 개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이건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고 그 자신이 신경쓰는 일인데, 아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은.... 여전히 별거중인 아내를 원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아내는, 자신의 그런 삶을 싫어하고...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원해, 그런데 당신이 싫어하는 이걸 포기할 수가 없어..


아.. 이럴 땐 진짜 어떡한단 말인가.


나는 조가 개인에게 관심을 가진 게 좋고, 피해자의 입장에 되려는 게 좋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응원하는 마음도 든다. 또한, 누군가는 그 일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그가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남자라면, 나라고 줄리안과 다른 결정을 내릴 것 같진 않다. 위험에 노출되고, 낮이든 밤이든 수시로 경찰에게 불려나가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남자랑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떨어져 사는 것이 최선의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줄리안이었어도 줄리안과 같은 선택을 했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자꾸만 조가 되어서, 간절히 원하는 걸 차마 가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본인 중심의 축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과 분리가 안되어서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진짜 너덜너덜해졌다.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이렇게나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런데 내가 여전히 이런 나야....하는 생각으로 허우적댔다. 



이런 조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다른 여자가 있지만, 조는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다. 관심을 주려고 해봐도 줄리안만 사랑해. 하아- 그런데 줄리안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가 없는 자신이라니..... 아이고야, 뒤로 쓰러지겠다.



이 책이 우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내가 너무 우울함을 잡고 놓질 않아서 그렇지, 간혹 유머가 튀어나오는데, 살찐 고양이에 대한 부분에서도 피식 웃었다. 경찰인 로니가 별거중이라 혼자 지내는 조에게 새끼 고양이를 줬더랬다. 가끔 그 고양이를 보기 위해 조의 집에 들르는데, 아, 이 고양이가 살이 찐 게 아닌가!


마치 큐 사인이라도 받은 듯 스트로베리가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 들어와 로니의 신발에 대고 코를 킁킁거린다. 엄마 냄새가 나는 걸까. 경감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 한 손으로 고양이를 들어올리더니 심문하듯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살쪘잖아요."

"나무늘보 혼종이라 그래요."

"밥을 너무 주셨군." (p.66-6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무늘보 혼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나무늘보 혼종인걸까??????????????????????



여러가지 의미로 지독한 책이다.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마음까지 휘두르는 쌍놈이 나와서 지독하고, 원하지만 자신의 중심을 내버릴 수 없는 남자가 나와서 지독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지독해서, 다리에 힘이 풀린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


어쩌면 줄리안이, 내가 더 강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너무 그리워서 울다가 잠든 밤들도 있었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내 에너지를 마지막 1그램까지 다 가져가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밤들도 있었어. 그러기엔 에너지가 모자랐어. 앞으로도 계속 모자랄 거고."

"이해해."

"정말?"

"돌아오게 해줘."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 만큼 강하지 못해, 조. 나는 당신 없이 겨우 살 수 있을 만큼만 강해."

"어째서?"

"왜냐하면 당신은 늘 여기 있지 않을 테니까." (p.207-208)













"자, 말해주세요." 그녀가 말한다. "일단은 친구 사이라고 해두고요. 무슨 일을 하세요?"
"저는 임상심리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냥 조라고 불러주세요."
"당신 아내가 당신을 그렇게 불러요?"
"네."
"그러면 저는 조지프라고 부를래요." (p.220)

거울 속 자신을 뜯어본다. 입가에 애니의 립스틱이 묻어 있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섹스 없는 2년이라니, 가뭄을 넘어 사막 같았다. 사하라를 건너왔더니 이제는 물을 마시는 법조차 잊어버린 모양이다. (p.264-265)

나는 여전히 쿱이 말한, 어딘가로 이어지거나 뭔가 의미가 있는 삶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내 삶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일종의 연옥에서, 과정들의 도중에서 맴돌고 있다. 아내가 나를 도로 받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루하루를 꼭 붙들고 하루하루가 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할 이때에.
지금 내 모습은 교통체증에 갇혀서, 무엇 때문에 지체되는지 누가 다쳤는지 또는 제 시간에 집에 도착해 저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남자 같다.
그 대신 나는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생각을 하는 남자가 되고 싶다. 삶을 부둥켜안고 빨리감기를 하는 것처럼 사는 남자, 입맞춤을 자주 하고, 부끄러움 없이 포옹을 하고, 하루하루를 더없이 짧은 연애처럼 맞이하는 남자가 되고 싶다.
왜 나는 그런 남자가 될 수 없을까? (p.283)

"내가 가정과 일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었더라면 미란다는 그 불안감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이 나가서 밥을 먹을 때나, 디너 파티에 갔을 때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나 미란다는 내가 일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았어. 그게 너무 심해지다 보니까 가끔은 집에 가는 게 싫어지더라고. 변명을 지어내서 서에 남아 있곤 했지. 너도 그게 문제야, 조. 가정과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 (p.302)

에디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나더러 앉으라고 하더니 자신도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 허벅지를 어찌나 쩍 벌리는지 누가 보면 불알이 자몽만한 줄 알겠다. (p.348-349)

루이츠는 그 총탄과 점차 돌아오는 기억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하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극심한 압박에도 침착함과 집중력을 유지하는 한편, 어떤 사람들은 공황을 일으키고 무너진다. 우리는 위기를 맞았을 때 제 성격을 내보인다. 상황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갈 때 말이다. 진정한 생존자들은 언제 움직이고 언제 뒤로 물러설지 안다.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내린다.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능독적 수동성`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무언가를 한다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뜻할 수 있다. 무위가 행위일 때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 역설이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p.433)

나는 피로하다. 지저분하다. 말하기도 지쳤다. 내 마음은 레이 헤거티의, 시에나의, 애니 로빈슨의 망가진 인생이 남긴 파편들로 가득하다. 집에 가고 싶다. 샤워를 하고 싶다. 자고 싶다. 딸들을 두 팔로 안고 싶다.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멀쩡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p.529)

부모 노릇이란 공중곡예 같다. 언제 놓아줄지 알아야 하고, 아이가 공중제비를 돌고 다음 순간 손을 뻗어 고리를 잡는, 자신을 시험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언젠가 그 애가 이쪽으로 다시 날아올 때 잡아줄 준비를 하고, 다시 세상으로 쏘아 보내주는 것이다. (p.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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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마지막 키스 2016-11-03 10:22 
    나는 피로하다. 지저분하다. 말하기도 지쳤다. 내 마음은 레이 헤거티의, 시에나의, 애니 로빈슨의 망가진 인생이 남긴 파편들로 가득하다. 집에 가고 싶다. 샤워를 하고 싶다. 자고 싶다. 딸들을 두 팔로 안고 싶다.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멀쩡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p.529)어제 이 책을 다 읽은 내가 딱 이런 기분이었다. 피로했고, 조의 인생과 시에나의 인생 그 외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삶이 내 머릿속에 가득해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매너나린 2016-11-0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재미있을거 같아요.다락방님의 리뷰를 읽으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주문하러 가야겠습니당~~^^휘리릭~~

다락방 2016-11-03 13:00   좋아요 1 | URL
매너나린님, 이 책 재미있어요.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사실 그보다는 아프게 읽었지만... 마이클 로보텀 책이 세 권 번역 되어 있더라고요. 전 그 중 두 권을 읽었고요. 나머지 한 권도 읽어봐야겠어요.

매너나린 2016-11-03 15:05   좋아요 0 | URL
저도 세권 다 보려구요^^
덕분에 넘 조아하는 스타일의 책을 접하게 되서 넘 감사해요~~!

푸른희망 2016-11-0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회에는 관심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건 개인이죠
저도 이 대사가 너무 좋아서 이책은 무조건 좋습니다~~

다락방 2016-11-04 07:57   좋아요 0 | URL
크- 푸른희망님도 저 대사가 좋으셨군요. 저 진짜 너무 좋더라고요. 게다가 피해자에게 공평하려고 했다는 거요. 그것도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이 작가의 시선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다른 책도 번역되는 족족 다 읽어보고 싶어요. 참 좋아요.

moonnight 2016-11-0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어제 알라딘에 세번 주문했어요.달력 종류별로 받고 싶어서요. 오늘 또 주문을 부르는 다락방님의 페이퍼^^ 저도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16-11-04 11:22   좋아요 0 | URL
아아... 저도 달력 받아야 되는데....저는 월급 받으면 지르려고요. 그래서 꾹 참고 있어요. 히히.
이 책 재미있어요, 문나잇님. 그렇지만, 어, 조금 힘들기도 하고요 ㅠㅠ

마음의소리 2016-11-0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겁게 읽은 작품이에요. 이런 정성어린 리뷰를 보니 반성이 되네요. 저도 리뷰 작성해두면 좋았을 것을... 읽은지 시간이 지나서 자세히 생각이 안나네요. 이렇게 그때그때 작성해두면 후에도 다시 읽어보고 좋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6-11-06 21:59   좋아요 0 | URL
네, 독후 활동을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읽은 후에 곱씹는 역할도 하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책 읽은 후에 가급적 글로 남기려고 하는 편이에요. 이게 나중에도 너무 좋더라고요.
이 책 좋아서 오늘 만난 친구에게도 선물했어요. 헤헷.
 
누구나의 연인
플로리앙 젤러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제나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던 그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여자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그가 특정한 한 여자와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아멜리만이 예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가졌던 확신에 혼란을 야기했다. 그녀에게 점차적으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했던 것이다. (p.16)



사랑의 속성은 그 '예외'에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은 수많은 '예외'를 허용하는 게 아닐까. 그동안의 나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지만, 당신을 만나고난 후의 나는 이렇게 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지 않았지만 당신에게만은 이렇게 돼. 수많은 예외를 만들고 스스로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트리스탕은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했는데, 남자 경험 한 번 없던 아멜리가 그의 삶에 찾아와 그와 동거를 하게 된다. 이 모든 설정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렇지만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은 밀란 쿤데라의 책처럼 재미있거나 공감할 수가 없다. 이 작품을 작가는 23세에 썼다고 했는데, 나는 이미 그보다 두 배 정도의 나이를 더 살았기 때문인지, 여자 경험 많은 남자가 남자 경험 없던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구속력을 느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진부하고 뻔하다. 게다가 이즈음의 나는 '남자 경험 없는 여자'가 사랑에 절절 매며 이 남자가 언제 나를 떠날지 몰라,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건 알지만 추궁하면 나를 떠나겠지, 하고 참고 사는 것도 너무나 바보 같아서 짜증이 난다. 이 책속의 남자는 한마디로 머저리 같고 여자는 멍청이 같다.



사랑이 구속력을 갖는 건 사실이다.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바로 그 구속 안으로 들어간다. 그 구속은 단지 네가 몇 시에 어디에 가있느냐, 를 묻는다거나, 네가 오늘 누구를 만나느냐, 를 묻는다는 등의 실질적인 구속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 그 안에 걸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테면,

언제 그가 불러낼지 몰라 긴장한 채로 전화기만 쳐다본다든가,

그가 전화했을 때 혹여라도 받지 못할 상황이 되는 게 싫어 만나던 남자들을 다 정리한다던가 등등.

시키지도 않은 구속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한 때의 나는, 언제 우연히 어딘가에서 그를 만날지 몰라 허구헌날 예쁘게 하고 다니려고 노력해서, 매일매일이 힘겨웠다. 매일 예쁜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은 발 아픈 일인지라, 아아, 이 남자를 갖다버리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거다. 그가 나를 구속하기 이전에, 내가 그 구속안으로 풍덩 빠져버려서.




트리스탕은 아멜리를 사랑하는 것 같다가 아닌 것 같다가, 자신이 늘상 여자를 바꿔가며 만났던 과거를 그리워하다가, 지금이라고 안될게 뭐야, 하고는 아멜리와 동거를 시작한 후에도 여자들을 '후리고' 다닌다. 책 속에서 트리스탕의 나이는 29세인데, 갑자기 오래전에 봤던 프랑스 영화 [미스트리스] 생각이 난다. 거기에서 여자주인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속삭였더랬다. '서른 여섯, 남자를 후리기엔 늙은 나이지' 라고. 스물 아홉은 괜찮냐..그렇다면 서른 여섯을 넘긴 나는 남자를 후리고 다닐 수 없냐... 어쨌든 트리스탕은 그렇게 여자들을 만나서 자고 다니는데, 그렇다고 예전의 그 기쁨과 쾌락이 고스란히 찾아들질 않는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왜 이렇게 기쁘지 않지... 트리스탕이 다른 여자랑 아무리 자고 다녀도,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아멜리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다. 그가 다시 예전처럼 기뻐지려면, 아멜리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 그러나 이 부서질듯 연약한 여자(라는 설정도 너무 똥같다..)에게 상처를 주는 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네가 나를 떠나줘, 라며 끊임없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는데...



아아, 이 머저리와 멍청이의 사랑(인지 아닌지)을 보는 건 딱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자꾸 어린아이에 비유하는 것도 짜증나고..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플로리앙 젤러. 다음에도 그를 작품 속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p.175)



스물 셋의 나이에 이런 책을 쓰다니, 재능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대단하다고도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좋은 건 아니다. 젊은 나이에 데뷔한 이 잘생긴 작가가 하도 유명해서 '젤러주의자'도 생겼다는데, 나는 아니올시다, 플로리앙 젤러, 당신은 이제 그만 만나도 되겠다.


안녕.





그녀를 떠날 것인가? 어쩌면 그것이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통받게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두 번의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실망시키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p.56)

아멜리는 그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초기 몇 달간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몹시 행복했던 그녀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종종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곤 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두 개의 세계, 막 떠나온 꿈속의 세계와 이제 다시 절실하게 마주해야 할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머무르곤 했던 것이다. 그 감미로운 불확실성 속에서 수많은 불안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현실은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옆에는 트리스탕이 있었고, 안심이 되고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이처럼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그녀에게 그를 제외한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세상이 다 죽어 버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p.104)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아니, 그와 반대로 누군가 자신을, 그의 팔짱을 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 주기를 원하게 되었다. 함께 산책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사람들이 분명히 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행복을 믿느냐고 물어 왔다면, 그녀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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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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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조카네 식구들과 함께 텔레비젼을 시청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동티모르 남자가 나왔는데, 주변에 동티모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말이면 집 안에서 혼자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은 동티모르에서 남자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남자가 외국에 나가 돈을 벌 수 밖에 없었고, 이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동티모르에서 아빠와 남편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 셋과 여자는 나름대로 밥벌이를 찾아가며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재워두고 여자는 혼자서 밥먹으며 울기도 한다. 삶이 너무 힘겨워서.


외국에서 외롭게 혼자 일하는 남자도 삶이 결코 쉽지 않다 느낄것이다. 몸은 몸대로 힘들지, 환경은 낯설지, 아는 사람은 없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외롭지..

고국에서 남편 없는 삶을 사는 여자도 힘들것이다. 생활은 나아지질 않지, 아이들 셋을 돌보는 건 온전히 혼자의 몫이지. 그녀에게 하루는 얼마나 길고 고될까.


이런 삶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제부는 생활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 수밖에 없지 않나, 자기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저런 결정을 내릴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그게 궁극적인 답인지는 모르겠다. 함께 행복하자고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생활을 도무지 유지할 형편이 안되어서 이렇게나 멀리,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그들이 결혼하고 함께 살기로 한 이유는 다 무엇일까. 게다가 그렇게 떨어져 사는 것에 기약도 없지 않나. 3년 일하고 고국에 돌아가면 형편이 나아지고 다 괜찮아졌을까? 아이가 셋인데, 3년 외국에서 일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남자가 외국에서 3년을 일하거나 13년을 일해도 이 가족의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 거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가난하게 태어나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렇게 떨어져서 그 가족이 살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힘들어하면서, 우리는 언제 함께 살까, 우리는 언제 넉넉해질까, 같은 것들만 희망고문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건가. 게다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아빠가 돌아오고 아이들도 성장했다고 하면, 그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남동생과 나의 결론은 같았다. 그 아이들은 자기 아빠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든 함께 살면서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억지로 찾아내며 사는 게 답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먹고 사는 것이 편안해지도록 낯선 땅에 와서 열심히 일하며 떨어져사는 게 답일까. 가난한 자에게는 궁극적인 답 같은 것은 없는 게 아닐까. 어떻게 살아도, 어떤 결정을 해도 힘든 게 아닐까.



동티모르 가족의 삶을 화면에서 보고 주말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내가 문학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러나 완전히 그들이 되지는 않고 떨어져 사는 삶. 이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말했던,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적 삶,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분별있는 관찰자의 자세가 아닌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특정한 세계를 상상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얻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보편적인 마음의 자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04)



분별 있는 관찰자라는 장치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주목하는 분노, 공포 등의 부분을 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일 나의 친구가 부정의한 상황을 겪고 있다면, 나는 그를 대신하여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에 따르면, 그 분노는 그에게 가해진 그릇된 행동에 대한 분노의 복수심에 불타는 강렬함을 갖지는 않는다. 또 만일 나의 친구가 실연의 아픔에 슬퍼하고 있다면, 나는 그의 비탄을 공유할 것이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그 슬픔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한다. 스미스가 보기에 이러한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시민의 자질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타인의 행복을 위해 애쓰지만, 우리가 타인을 위해 고려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지 않는 능력 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미스가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입장과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문학 작품 읽기(그리고 드라마에서 관찰자의 입장 되어보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덕적 길잡이의 원천이 되는 문학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중요성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시민이자 재판관에 걸맞은 태도를 자연스럽게 기르게 하여 분별 있는 관찰자적 태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을 읽음으로써 사건에 몰두하고 또 깊은 관심을 가진 참여자가 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장면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드어, 우리가 루이자와 스티븐 블랙풀 모두에게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 우리를 그들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진정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생각에서 생기는 특수하면서도 때론 혼란스러운 감정의 격렬함은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당사자인 루이자와 스티븐보다 균형 잡힌 형태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우리가 그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수많은 독자들이 있으며, 분별 있는 독자들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지식을 통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으로는 독서의 과정이 독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p.163-164)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이용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예를 든다. 그들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살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얼마전에 읽었던 김영란의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영란은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문학작품들이 자신의 업무(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음을 얘기했었고, 정혜신 역시, 자신이 치유상담을 하는 과정에 문학 작품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말했었다. 영화배우겸 탤런트인 김혜수 역시 마찬가지. 사람들은 왜그렇게 책을 읽냐고 자신에게 말하지만, 자신의 삶과 일에 책읽기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음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특히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 나는 소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들은, 소설읽기를 잘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아는 만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접했으니 알 수 있는 것인데, 소설읽기야말로 하면 할수록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총 세 권의 책에 대해 언급을 계속 한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포스터의 『모리스』가 그것인데, 어려운 시절에서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사는 사람, 즉 소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의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며, 미국의 아들 에서는 흑인으로 사는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그의 범죄를 판단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모리스에서는 동성애자인 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소설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아, 정말이지, 소설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몇해전에 미국의 아들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이란 행위에 대해, 그 이면에 아주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알게 됐었고, 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사회적 구조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놀라며 깨달았던 기억이 났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누가 내게 그런 강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물론 마사 누스바움은, 이토록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독서라는 행위에 있어서, 문학 작품 자체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얘기해준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런데 왜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일까, 왜 이사람은 이런 시선으로밖에 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서 좀 찜찜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에 대해 마사 누스바움이 어려운 시절에서의 시선 역시 그러했음을 얘기해주는 거다.



첫째, 문학 작품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을 거짓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디킨스가 노동조합 운동을 상당 부분 잘못 묘사한 것이나, 많은 소설가들이 여성 혹은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의 가능성에 대해 왜곡된 묘사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둘째, 문학 작품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피해의 중대성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실제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또는 가볍게 여기도록 하면서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디킨스가 노동자들은 오직 기분 전화을 하고 여가 시간을 주면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계급적 위계 자체에 내포된 피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디킨스는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에 팽배했던 결혼과 고질적으로 결부된 권리의 불평등이 여성에게 가한 피해를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p.165)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책읽기를 해야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내가 왜 이 작가는 이 혁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까, 라고 생각하고, 최근에는 많은 문학 작품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한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책을 읽는 것 모두, 비판적 책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잘못 쓰여진 것은, 또 그런대로 우리에게 나름의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주변에서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잘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을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이 독후활동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나면, 그걸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거나 혹은 기록하라고 얘기한다. 사람들에게 책 읽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거기에 대해 의견을 말하면서, 그 책이 그제야 내 것이 된다고. 또한 기록하면서 내것이 된다고. 읽고나서 책장을 덮고 끝- 이 아니라, 그 후의 활동들을 하라고. 글을 쓰는 게 힘들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단순히 그 책의 줄거리를 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소설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비판적인 판단을 연습할 필요가 있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다른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비판적 판단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웨인 부스는 이러한 과정을 '공동-추론'이라 불렀다. 즉, 이 과정은 본성상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는 빈연역적이고, 비교를 통한 실천적인 추론이다. 공동-추론의 과정에서 문학 작품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윤리 이론과 상호 간의 조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교해지며, 이는 우리가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적인 경험을 엄청나게 바꾸어 버릴 것이다. (p.165-166)



요컨대 나의 견해는 문학 작품에 대한 순진하고 무비판적인 의존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문학적 경험에 근거하여 내리는 결론들은 도덕적·정치적 사유, 우리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직관, 타인의 판단 등에 근거하여 지속적인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p.166)




아아, 문학 작품의 역할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토록이나 문학적 상상력을 중시하고 그것이 삶에 있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비판적 읽기가 가능해야 한다고 덧붙이지 않나. 아, 진짜 문학작품을 읽고 또 그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내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소설 읽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 읽기의 쓸모를 알고, 믿는다.




소설은 이성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면서 진실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공상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이성을 활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p.105)




소설 읽기가 사회정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읽기는 정의의 미래와 그 전망의 사회적 입법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p.46)

달의 분화구를 얼굴로 생각하는 것, 별에게 대화를 건네는 것, 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등은 경제학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상상력이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소설이 말하듯, 거기에는 사실적 증거 너머의 것들에 닿고자 하는 의지 속에 담긴 너그러움이 있고, 이 너그러움은 더 큰 삶의 너그러움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p.93)

오직 움직이는 물리적 대상으로만 신체를 보는 것은 빈곤한 성생활을 낳는다. 바로 이것이 `대상화objectification`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의 근본에 놓여 있는 사유이다. 대상화란 성적 파트너를 사물과 같이 바라보는 경향으로 결국 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도록 만든다. (p.97)

내가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진리와 이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다. 이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이 독단적으로 인간 존재와 인간 삶의 복잡함을 교조적으로 잘못 드러내는 한, 진리를 구현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이 불충분한 인식과 조악한 심리학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한다면 이성을 구현하는 데도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이성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면서 진실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공상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이성을 활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p.105)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함양된 능력들이 사실 경제학 및 도덕·정치 이론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물론 이러한 능력의 함양 없이 추상적 이론은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도 무력해지기 쉽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소설 읽기의 경험은 함축적으로 인간의 어떤 활동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활동이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해주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 이는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는 뜻이다. (p.106)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통찰력은 그것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 논거에 의한 확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장르로서의 소설은 그것의 기본 구조와 목적의식에 있어 모든 인간 삶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무비판적 전통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계몽적`이상의 수호자이다. 이는 경제학의 영역에서 유사 과학적pseudoscientific 접근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이상을 왜곡하는 것에 반대하고, 또한 이야기가 갖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를 무감각하게 적용하는 것에도-이상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반대한다. (p.108)

소설 익기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며,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판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p.110)

소설은 삶의 질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형태의 정보를 제공해주며, 독자로 하여금 평가를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이는 이후의 양적인 평가에 근거한 단순화된 모델이 형성되어야 할 범위 내에서, 공적인 업무에 적합한 종류의 상상력의 틀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현명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상상력의 능력을 길러주면서 동시에 그 한 예를 제시한다. (p.119)

소설이 주장하는 바는 시민의식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 있어 문학적 상상력이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p.120)

씨씨는 공리주의자인 자신의 선생님으로부터 100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에서 길에서 굶어 죽는 이는 오직 25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듣게 된다. 맥초우컴차일드 선생은 씨씨에게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응당 이는 낮은 수치라며 안도하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씨씨는 "굶어 죽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100만 명이든, 100만 명의 100만 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답한다. 또한 일정 기간 동안 10만 명의 선원이 장거리 항해를 떠났는데 그중 500명만이 익사했다는 사실을 듣고, 씨시는 이러한 낮은 퍼센트 따위는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숫자로 표시된 분석은 우리를 안도하게 만들고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즉, 맥초우컴차일드가 말하듯 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낮은 퍼센트인가. 그러니 분명 이에 대한 어떠한 행동도 필요치 않다. 감정이 없는 지성은 가치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엔 감정에 내재하는 판단이 제공해주는 사람 목숨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다.(p.150-151)

씨씨의 감정적 대응은 죽은 이들에게 인간성의 가치를 부여한다. 배고픈 자들에게 굶주림이란 무엇이며, 비탄에 빠진 자들에게 상실이란 무엇인지를 느끼며 씨씨가 타당하게 지적하길, 낮은 수치는 그들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으며, 낮은 수치에 근거한 안일함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은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느 ㄴ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항해를 책임지던 사람들이 더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숫자를 다루게 되면 "이 수치라면 괜챃아"라고 말하기 쉽다. 왜냐하면 이러한 숫자들 중 어떤 것도 심오한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p.151)

비극적 실패로 끝나는 루이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즉, 성장 과정에서 감정에 근거하는 교육은 사실상 어른이 되고 나서의 삶에 있어서 위험한 형태의 욕구나 취약함을 제거해준다는 것이다. 감정이 충만한 교육은 루이자의 삶의 방식에서 형성된 인격보다 훨신 안정된 중심을 가진 성품, 즉 균형 잡힌 감정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균형 잡힌 실천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식을 만들어준다. 반대로 유년 시절의 감정에 대한 억압은 분명 감정을 보다 파괴적이고 극히 비합리적인 형태로 후퇴시켜놓을 것이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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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6-10-3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김영하 팟캐에서 권여선의 `이모`를 듣다 잤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나름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저는 그 글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받지 못했어요. 이럴 때마다 생각해요. 요즘 내가 부쩍 현실적이 되어버린 것일까, 문학적 상상력 또는 감수성 따위 애저녁에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 작품 중에 정말 읽을 만한 소설이 드문 것일까.
그래서 독서의 여왕 다락방 님께 또 여쭙니다. (맨날 추천해달라 해서 좀 지송;;) 이런 저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푹 빠져 읽게 될 한국 소설, 뭐가 있을까요!?

다락방 2016-11-01 08:1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댓글 읽고 아아, 어쩐담, 하면서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 생각나지 않아요, 치니님. `문학상 상상력`이란 단어 앞에 진짜 한국 소설 하나도 생각이 안나네요. 제 개인 취향을 물으신다면, 죽으나사나 이승우 지만, 이승우를 치니님이 좋아하실지는...모르겠어요. 저는 이승우가 가지고 노는 언어가 너무 좋거든요. 이참에 이승우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아, 혹시 벌써 읽어보셨는데.. 별로 셨을까요? 저는 [지상의 노래]를 추천해보겠습니다.
음..아닌가........ 음.........

이승우 말고는 한창훈을 좋아하는데, 한창훈도 어쩐지 치니님 스타일은 아닐 것 같고...요즘 핫한 [쇼코의 미소]는 보셨던가요? 최은영도 좋고요. 음.....

치니 2016-11-01 09:29   좋아요 0 | URL
오, 이승우는 좋아합니다. 잊고 있었네요. 지상의노래는 읽었을 텐데 이젠 전혀 기억이 안 나요 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한창훈은 음, 맞아요, 그닥 제 취향이 아닌 듯.
최은영도 나중에 한 번 읽어 볼게요. 우선은 이승우. :)

다락방 2016-11-01 10:14   좋아요 0 | URL
네, 치니님은 한창훈보다는 최은영이 맞을 듯요. ㅎㅎ

AgalmA 2016-10-3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4번째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과학이 절대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토마스 쿤의 유명한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요즘 읽고 있는 훌리안 마리아스 이 표현은 생각할 거리를 주죠.
˝과학은 하나의 대상물로부터 구축되며, 특정 시기에 그 대상물에 적용되었던 앎으로부터 구축된다˝
우리의 잣대는 자신의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지요.

다락방 2016-11-01 08:13   좋아요 1 | URL
사람이 아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발언할 수가 있잖아요. 제가 과학적인 것에 대해 정말 너무나 무지해서, 하나도 몰라서, 어떤 입장 표명을 할 수가 없어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에 비해 감성을 무시하고, 감성적인 사람은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것만 알아요. 그렇지만 그 논리를 들이미는 것도 감정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결국 우리 모두에게 가장 처음 영향을 미치는 것,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감정인데, 왜 그걸 인정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살아야되는데..

아갈마님, 저도 제 확신이 가장 무서워요. 제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확신할까봐 무서워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의심하자 라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10-3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킨스에 대한 마사 누스바움의 비판은 다소 논쟁적이네요. 19세기에 디킨스만큼 가난한 사람들 입장을 지지한 소설가도 드물텐데요.

제가 디킨스 소설을 다 읽어본건 아니라서. 디킨스 소설에 악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발언을 디킨스의 주장이라 해석한건 아닐지.

이래저래 궁금한 책이네요^^



다락방 2016-11-01 08:10   좋아요 0 | URL
악인들의 발언을 그렇게 주장한 건 아닐거라 생각해요. 제 경우에 [두 도시 이야기] 읽으면서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란 생각을 했는데요, 혁명이 추구한 것 보다는 혁명이 가져온 나쁜 점들만 부각시켰달까요. 저는 그 책 읽으면서 디킨스가 가난한 사람, 약자의 편에 서려고는 했지만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마사 누스바움이 느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일전에 빨간 책방이었나, 출처는 불분명한데요(기억이 잘 안나요) `찰스 램`과 `찰스 디킨스`에 대해 비교해준 적이 있거든요. 디킨스도 램도 모두 글을 잘 썼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했고, 글로 성공했는데, 여기까진 공통점이고 그 후에 차이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램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는데, 디킨스는 성공한 후에 약자를 무시하고 업신 여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작가가 그랬다는 것에 사람들이 많이 실망했다고요. 제가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도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네요.

저 역시 디킨스의 작품을 두 개 밖에 안읽어 본 것 같은데요, 그 재미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두 도시 이야기] 보다는 역시 [위대한 유산] 쪽이 좋더라고요. 제 동료 한 명은 두 도시 이야기에 엄청 감동 받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데, 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언급할때마다 너무 찝찝해서요... 위대한 유산 쪽이 훨씬 좋았어요.

이 책, 시이소오님도 아주 좋게 읽으실 것 같아요. 저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시이소오 2016-11-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대한 유산이 너무 좋아서 필사했어요. ^^ 디킨스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네요. 두 도시 이야기는 그래서 읽다 말았을까요? ㅎㅎ

다락방 2016-11-01 10:13   좋아요 0 | URL
저 위대한 유산 읽다가 마지막에 막 울었어요 ㅠㅠ 뭐랄까 너무 숭고하다고 해야 하나 ㅠㅠ 막판에 그냥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시이소오님은 필사까지 하셨군요!! >.<

시이소오 2016-11-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웃어서 눈물 났어요. ^^
필사하면서도 계속 한참 웃느라....ㅋ
마지막에 울진 않았지만 그 기분은 알것 같습니다.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모든 강간은 권력의 표현이다." 수잔 브라운밀러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서 『의지에 반하여: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p.39)




읽기에 몹시 힘겨운 책이었다. 트윗의 타임라인에서도 성폭행 피해가 줄을 잇는데 내가 굳이 이 책을 지금 읽었어야 했을까 후회했다. 며칠간 삶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에게. 이 여자들이 자기가 속한 곳 그 어디에서든-학교, 직장, 모임등등-, 가해자와 함께 있어야 하면서 겪었어야 할 고통, 또한 다른 누군가로부터 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게다가 가해자가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또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걱정까지, 이 여자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어느 곳에서나 권력을 쥐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라는 것이 너무 씁쓸했다. 게다가 그 권력으로 약자인 여자를 눌러서 자신이 위치한 곳까지 올라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게 자기들끼리의 권력을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나치게 절망적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남자들은, 그들이 가진 신체적인 힘과, 그들이 가진 유명세와, 그들이 가진 이름과, 그들이 차지한 자리를 어떻게든 여자를 압박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데 쓰고 있다. 





아는 이에게 강간을 당한 애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남자를 때리거나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나는 '착한 여자'니까 다른 사람이 나쁘게 굴더라도 나는 그렇게 해동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p.160)



어릴적부터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걸 교육하는 것이 강간과 성폭력을 없애는 방법이라는 것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이미 너무나 만연한 성범죄에 대해서, 궁극적인 이상향을 말하는 것같아, 너무 먼 얘기로만 들린다. 권력을 제멋대로 성범죄에 이용한 남자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들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사실 나는 친구와도 얘기했지만, 죽창 들고 다니면서 남자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입버릇처럼 더 진급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말했었는데, 그때마다 친구가 '네가 더 올라가야해' 라고 말했더랬다. 회사의 다른 여직원들도 '차장님이 임원이 되어주세요' 한다. 내가 있는 회사에 아직 여자임원이 없다. 나는 싫다고, 더 진급하지 않을거라고 늘상 말해왔지만, 내가 올라가야 하는걸까.. 내가 권력을 가져야할까, 지금보다 더한 권력을 가져야 할까. 내가 권력을 가지는 게 답일까. 그렇지만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책임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입맛이 쓰고 갈길도 멀다. 

 



다른 얘긴데,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절망과 좌절, 스스로를 믿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일.



이 책에서 드러나는 많은 사례들에서, 강간 피해자들은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얘기하지 못한다. 얘기했을 때 듣게 될 말들이 두려워서. 그런데, 한 피해자의 엄마는, 그걸 눈치채준다. 그 부분 읽다가 울어버렸는데, 쓰려니까 또 눈물나네.



한편 인터뷰 과정에서 만난 여성 중에는 다행히 가족 관계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한 이도 있었다. 열아홉에 데이트 강간을 당한 로리가 그 예로, 로리의 어머니는 평소 활달하던 딸이 몇 주 동안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고 우울해 보이자 로리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등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로리 어머니와 그녀의 친구가 로리를 데리고 나가 외식을 하던 중에, 어머니의 친구는 자신이 과거에 겪은 데이트 강간 경험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저를 보더니 "너한테도 이런 일이 있었니?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라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그냥 "응"이라고 짧게 대답했죠. 그러자 엄마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달라고 해서 설명을 해드렸어요.


이후 로리의 어머니는 데이트 강간에 관해 다룬 기사를 로리에게 주면서 읽어보기를 권했고, 로리는 "그 기사를 읽고 나서야 데이트 강간에 대해, 그리고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p.192-193)




어떤 부모는 강간 피해로 자식을 잃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성범죄를 예방하는 캠페인도 했다. 자식을 잃은 경험으로 고통스러울텐데도, 이런 일이 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액션을 취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늘 벅찰 정도로 감동적이다.



1986년, 레이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진 앤은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같은 학교 친구에 의해 강간 및 살해를 당했다. 졸지에 딸을 잃은 하워드, 콘스탄스 클레리 부부(펜실베니아 브린마워 거주)는 그 사건의 영향으로 '안전 관련 질의서'를 만들어, 자녀가 진학을 고려하는 대학 당국에 부모들이 그것을 보내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p.276-277)




우리, 부디 살아있자.



앞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많은 지침과 방법들을 제시했지만, 그럼에도 막상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당신이 가해자를 이기거나 그의 통제로부터 탈출하기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가해자와 타협하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현명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당신은 알아야 한다. 강간하겠다는 협박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기에, 그에 항복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더욱이 가해자가 완력을 써서 당신이 성관계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동의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강요도 없이, 서로 자유롭게 합의하여 공동으로 내린 결정에 의해 성사된 것만을 동의하에 이루어진 성관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당신을 강간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스스로를 질책하지 말라. 피해자로서 당신이 유일하게 책임져야 할 것은 당신 자신뿐이다. 당신이 강간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상을 입거나 죽을 필요는 없다. 그 대신, 부디 살아 있으라. (p.259)





포스트잇 플래그를 많이 붙였다. 아래에 죄다 인용하겠다.






우리는 여성에게 괜찮아 보이는 남성들까지 의심하라고 조언해야 할까? 데이트를 하거나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고, 술을 마시지도 성적인 감정도 느끼지 말라고 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강간은 피해자가 유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42)

저는 강간을 당한 느낌이었지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어요. 그저 제 자신이 마지못해 그 행위에 참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사실 저는 그 남자보다도 저 자신을 탓했죠. 상대방이 마약을 먹이거나 때려서 여자를 쓰러뜨린 후 강간한 다음 살해했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여자한테 책임이 있는 거라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사건이 일어난 밤에도, 고환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눈을 가격해서 그 남자애를 다치게 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착한 여자애는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그 대신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놔두고 결과에 순응해야 하지요. (p.65-66)

니나는 래리를 고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법정에서의 공방을 견딜 만큼 자신이 정서적으로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73)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살도록 사회화되었다 하더라도 여성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 신호를 보내는 `내면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을 무시하며 살아가기 예사다. 자기의 내면에서는 조심하라고 경고를 보내지만, 사회화된 자아는 타인을 일단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남자아이들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배운다. 착한 여자아이는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상냥해야 한다는 것도. (p.73-74)

에이프릴을 강간한 가해자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둘은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만난 사이로, 데이트를 한 적도 성관계를 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가 에이프릴이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을 돕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사건 당일 에이프릴을 바닥으로 밀치며 머리를 구석에 박았고, 몸싸움을 벌인 끝에 강제로 삽입했다.


일을 다 끝낸 다음에 그 사람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원래 섹스할 때 이렇게 많이 싸우는 편이냐고요. 그때 알았죠. 그는 결코 저를 강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p.96)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향을 받았는지와 무관하게, 많은 남성들이 과도한 남성성을 학습해왔고 여전히 그것을 동경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UCLA 의 연구자 닐 말라뮤트Neil Malamuth는 1986년에 발표한 자료를 통해, 자신이 시행한 설문에 응한 남성 중 30퍼센트가 "검거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강간을 저지를 것"이라 답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설문 문항에 쓰인 `강간`이라는 단어를 `강제로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문장으로 바꾸자 50퍼센트 이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p.107)

미즈에 글을 쓴 앤드류 머톤은 남학생클럽연합의 전국대회에 참가해 "언어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독일놈, 쪽바리, 구크Gooks(동남아시아인과 동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단어) 혹은 슬로프Slopes(황인종을 비하하는 단어)라고 부르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더 쉬워진다. 이는 여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성을 비인간적인 형용사를 이용해 묘사하다 보면 그녀들이 실제로는 완전한 인격체임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 순간 그녀들을 학대하게 된다. (p.144)

"폭력은 생물학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강간은 남성성의 본질이 아니며, 다만 폭력적으로 사회화된 남성들이 자신의 성적 자아를 표출하는 방법인 거죠.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적 가치와 생명의 숭고함을 존중하도록 교육받은 남성은 결코 여성을 강간하지 않습니다." (p169-170)

"가해자가 아는 사람일 경우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인식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신속하게 상담을 하거나 도움을 찾는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 더 오랫동안 후유증이 지속될 수 있다." (p.171-172)

메릴은 이렇게 말한다. "그 끔찍했던 밤이 지나고 제가 배운 것은 제 내면의 자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또한 누구와 데이트를 할지에 대해 정말 주의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상대에게 어떤 의심이 들 때는 주저하지 말고 돌아서서 가능한 한 빠르게 뛰쳐나와야 한다는 것도요."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 `나쁜 느낌`이 들 때, 당신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을 당신 내면이 보내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믿어라. 그리고 위험을 내재한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라.
"그 작은 목소리를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파울라는 덧붙여 이렇게 조언한다. "내면에서 어떤 신호가 왔을 때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대신 일단 재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신호는 상황이 정말 위험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경고니까요. 다행히 저는 제 안의 소리를 믿도록 배웠어요. 아마도 가끔은 조심하는 정도가 지나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또다시 저 자신이 취약해지는 위험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아요." (p.247)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당신은 자신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술에 취하고, 남자가 차로 태워다주겠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혹은 그 남자의 아파트에 가는 등) 스스로 판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누구도 당신에게 강간당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세상에 강간당해 마땅한 사람은 없고, 강간당할 만한 행동 또한 없기 때문이다. (p.253-254)

작가 티모시 베네크는 『Men On Rape』라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강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강간하는 남성들, 집단적인 파워를 지닌 남성들이다."
이는 남성들이 모든 유형의 강간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려면 남성 스스로 여성과 성에 관한 믿음을 점검하고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60-261)

흔히 성폭력 가해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자신이 취한 상태였음을 강조하곤 하는데, 그것이 합법적인 변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가해자는 혈중 알코올 함량과 상관없이 그저 가해자일 뿐이고, 따라서 반드시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명심하라. (p.263)

섹스는 즐거운 저녁 시간을 베푼 대신 받는 보상이 아니다. 당신은 백 명의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고도 여전히 좋은 섹스나 사랑, 혹은 `진짜` 남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있다. 사정을 하느냐 마느냐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서로의 합의 아래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들이 성관계 횟수를 세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또한 그 친구들이 `정복한 여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서로 궁금해하며 성적인 `승리`에 대해 떠벌린다면, 당신은 주저하지 말고 새로운 친구를 찾아라. (p.264)

당신 친구들이 항상 하는 이런 말-"여자는 좋아도(혹은 좋을 때)안 된다고 한다"-따위는 사실이 아니므로 이제 잊어버려라. 여자가 "No"라고 말할 때는 정말로 "No"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 (p.26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묻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이 또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녀가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성관계를 하지 말라.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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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2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빨리 캐치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아니다 싶을 때 강력하게 이의를 표시하고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미적대다보면 상대에게 말리기 십상이죠. 자기 주체성, 빠른 판단력을 키우는데 여성들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다락방 2016-10-26 10:25   좋아요 1 | URL
그동안 너무 상냥해야 한다고 사회화 되었어요. 절대 상냥할 필요가 없어요. 조신할 필요도 없고요. 저부터 계속 으르렁 거릴 참입니다.

AgalmA 2016-10-26 11:01   좋아요 0 | URL
상냥함, 착함이 일종의 방어나 무기가 된다고 생각한 오류도 있었죠. 남성 경우 이 특성을 전방위적으로 사용하지 않죠. 학습된 사회적인 영향도 있지만 여성들은 너무 내면화한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주체성이 약해지죠. 남성은 밖으로 표출하는 성향이 강한데 부정적으로 강해진 경우가 마초성이겠죠.
대응이 버겁고 힘들 때 많지만 의지를 잃지 않고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청래의 국회의원 사용법
정청래 지음 / 푸른숲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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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청래를 응원하는 마음에 샀고 끝까지 다 읽었지만, 재미없었다. 


2. 딱히 내게 유용한 것도 없었고 ..


3. 시민운동가들이 국회의원이 되기도 한다는 부분을 읽고서는 친구1 생각이 나서, 네가 국회의원이 되어주련, 했으나 거절당했다.

 일전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나오면서 같이 본 친구2에게 '너는 왜 친구인 나에게 선물할 호텔도 없고 유명화가의 그림도 없냐, 너 왜 부자가 아니야? 절교해!' 한 적이 있었는데, 국회의원을 하지 않겠다는 친구에게 절교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난 부자 친구도 없고 국회의원 친구도 없어...


4. 2017년 대선 개표방송은 한 방향을 보며 같은 걸 염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설레였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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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9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2017년 저도 설렘이 큽니다...

다락방 2016-10-20 08:04   좋아요 0 | URL
전 너무 재미없었어요...
2017년, 투표합시다!!!! (불끈)

달걀부인 2016-10-20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팟케스트에 정청래의원이 나와서 요즘 책 팔려고 좌쪽 사이트들 들어가서... 대뜸 저 정청래인데..책좀 사주세요, 해서 사람들이 인증샷 올리라고 난리였다고 하더라구요. 재미는 없군요. ㅜ ㅜ 어쨌든 저도 응원하는 일인입니다. 오늘, 이대 총장 사퇴하는 동영상보고 조금 울었구요. 교수님들도, 학생들도 울더라구요..

암튼 내년 대선이 기대되긴하지만 그 전에 정권퇴진시키는 민중의 힘이 응집되면 좋겠다해요. 하지만, 정말..우리모두 다 먹고살기가 힘든 세상이라서... 음...^^;

다락방 2016-10-20 08:06   좋아요 0 | URL
이대 총장 사퇴한것처럼 대통령도 ..

저 역시 대선 전에 정권이 바뀌길 바라지만 .. 가능할까요?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 거, 알고 있을까요?

정청래 의원은 필리버스터 때부터 인상 깊었거든요. 아주 가끔 팟캐스트 듣는데 그때마다 정청래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샀건만 너무 재미없어서 ㅎㅎㅎㅎㅎㅎㅎㅎ 재미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면 막 뽐뿌질 하는 글도 써서 더 많이 팔리게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데.... 저부터 재미없어서... 하아-

달걀부인 2016-10-20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다니까 어떻게라도 읽어야할 이유를 좀 말해주는 글을.. 주변에 재미있는사람 많은데.. 왜 정청래의원은 재미없게 썼는지..쩝.. 안타깝네요.

다락방 2016-10-20 08:20   좋아요 0 | URL
정청래 의원은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 책 읽으면 그게 느껴지거든요. 요령도 있고요. 그런데 이 책은.. 글쎄요. ㅎㅎㅎㅎ 정청래의 다른 책이라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yureka01 2016-10-2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인이 쓴 책 치고 재미가 있는 소설같은 책은 어려울 겁니다.정치가 워낙 재미 없거든요.ㅎㅎㅎ 아닌게 아니라 다락방님의 전문가적 독서의 경향으로 봤을 때 그간 얼마나 많은 재미를 준 책이 있었겟어요..그러니 비교 어렵겟지요.^^.그런데 정치를 외면 했을 때 받는 대가는 참 크더군요.지금 한 대학이 훅 갈 지경 이더라구요.

다락방 2016-10-20 08:18   좋아요 1 | URL
정치인이 쓴 책도 재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치도 관심을 가지면 아주 재미있을 수 있고요. 김어준이나 안철수, 정봉주의 책은 제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흥미롭게 읽었거든요. 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이런 거구나, 하면서요. 근데 이 책은...........읽기전과 읽고난 후에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책이더라고요. 정청래 의원의 다른 책을 읽는다면 또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모르겠어요.

비연 2016-10-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에 찬성이네요^^

다락방 2016-10-20 09:03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두근두근하지요?

웽스북스 2016-10-20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012년에 그랬다가... (이하생략)

다락방 2016-10-21 07:52   좋아요 0 | URL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