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고 원망하죠, 그대만을.
















나는 피로하다. 지저분하다. 말하기도 지쳤다. 내 마음은 레이 헤거티의, 시에나의, 애니 로빈슨의 망가진 인생이 남긴 파편들로 가득하다. 집에 가고 싶다. 샤워를 하고 싶다. 자고 싶다. 딸들을 두 팔로 안고 싶다.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멀쩡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p.529)



어제 이 책을 다 읽은 내가 딱 이런 기분이었다. 피로했고, 조의 인생과 시에나의 인생 그 외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삶이 내 머릿속에 가득해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문제점을 떠올렸다. 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볼 수도 있고, 심지어 개구리가 되어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어본 뒤에 다시 나로 돌아오기까지 때로 시간이 걸린다는 것. 때로 내가 몰입한 상대와 나의 분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 어제가 바로 그랬다. 이 책의 주인공 조가 되어서 함께 잠을 못이루고, 함께 피곤하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원하고.. 책장을 다 덮고서는 조와 나를 분리해서 나는 다시 현실의 내가 되어야 하는데, 어제는 가끔 그러듯이, 잘 되질 않았다. 그렇게 힘들었다.


이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인것 같다. 내가 나를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것. 실제로 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자꾸 내가 되지 말고 분리해라'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어떨 때는 정말이지 잘 되지가 않는다. 얼마전에는 SNS 에 성폭력 해시태그들을 들여다보다가, 이 피해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는 거기에서 빠져나오질 못해 잠들기 전에 엉엉 울었다. 일전에도 애인이 이런 나 때문에 좀 힘들어하기도 했다. '너는 네 문제에 대해서는 안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걸 보는게 힘들다'고 그가 말했었다. 그래서 나도 진짜 분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게 아마도 내 중심축인가 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조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 같은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은, 그러니까 나를 이루는 중심축이 너무 강하며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조와 나 같은 사람은, 연애나 결혼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조,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순 있지만 스스로를 변화시킬 순 없어요, 당신도 떨어져서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나처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연애에도 결혼에도 부적합한 사람. 인간 자체가 연애나 결혼에 맞춰져 있지 않은, 적성에 맞지 않은 사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자주 만나고 함께 사는 게 가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게 불편할 수도 있다. 상대와 내가 똑같이 그런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느 한쪽만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최근에 나는, 연애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또 그랬다.


피로하고, 분리가 잘 안되어서 힘들고, 이 과정에 있어서 역시 또 나를 끌어 올리고 어떻게든 분리를 하는 것이 내 몫이다. 나는 이렇게 분리가 잘 안되고 울적해질 때, 동굴속으로 들어가버리는데, 그 동굴속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끌고 나오기는 쉽지가 않다. 그건 철저히 내 몫이다. 이렇게 동굴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는, 사람들이 그걸 알아채고 노력해도, 나 스스로 걸어나오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가 알아서 괴로워하고 내가 알아서 고통스러워하고 내가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러니까, 혼자여야 한다. 


계속 연애하면서 살아왔지만, 연애는 내게 맞는 옷이 아니다.



얼마전에 함께 술을 마신 e 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분리를 잘 못해서 힘들어하는 걸 잘 아는 친구인데, '너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건 니가 뭐든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다른 사람, 제삼자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니가 해결할 수가 없으니 무력함을 느끼고, 그게 너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고. 내가 느끼는 피로함과 무력함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어제는 이 책을 다 읽고 그래서 새삼 다짐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나의 본질은 여전히 이렇게 있겠지만, 그래도 분리하는 훈련을 하자, 라고. 자꾸 분리하자고 생각해야지, 분리할거야, 라고. 어제 저녁처럼, 어젯밤처럼, 하루종일 조가 되어가지고 허우적대는 일 좀 그만하자, 라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곰곰 생각해보고 생리주기 어플을 열어봤다. 이토록 오래, 한글을 알고나서부터 독서를 시작했는데, 게다가 생리한 지는 이십년도 넘었는데, 이제서야 이런 방법을 떠올리다니. 그러니까 생리전 증후군이 있을 즈음에는 소설을 읽지 않는 거다. 나는 생리전증후군으로 우울증이 있고, 그 때에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악을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생리가 시작되어야 우울증이 사라지는데, 이럴 때 이렇게 몰입되는 슬픈 주인공이라니, 안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슬픈 소설을 읽지말자, 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슬픈 소설에서 슬픈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게 아니라, 어제 이 책처럼, 추리 소설에서도 이상하게 몰입을 해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연애소설 읽어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엉엉 우는 조연에게 이입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아예 소설을 읽지 않는 거다. 평상시에도 가끔 이렇게 분리가 안되는데, 생리전에는 완전 미치겠구먼, 싶어지는거다. 생리전 우울증이 찾아왔다 싶으면, 소설 읽기를 금해야지. 비소설을 그 때 읽어야겠다. 내가 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책들. 분리하려고 이를 악물지 않아도 되는 책들. 그런 책들은 집에 널리고 널렸다. 내가 그동안 사둔 게 얼만데... 그런데 지금은 일단 마이클 로보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이 작가의 책을 더 사야겠다. 검색해보니 내가 읽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네?



그나저나, 나는 지하철 쩍벌남들이 너무 싫은데, 왜 대체 한자리 이상을 차지하면서 그렇게 다리들을 쩍쩍 벌려대는지, 지하철에 빈자리가 있으면 옆에 남자면 앉기가 싫다. 좁아... 모든 남자들이 쩍벌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남자들은 지나치게 쩍벌한다. 진짜 꼴도 보기가 싫어. 그런참에 어제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었다.



에디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나더러 앉으라고 하더니 자신도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 허벅지를 어찌나 쩍 벌리는지 누가 보면 불알이 자몽만한 줄 알겠다. (p.348-349)



아.... 이거 써먹고 싶다. 그러니까 지하철에서 쩍벌남을 만난다면, 나도 이렇게 얘기하고 싶은 거다.


"아저씨, 아저씨는 아저씨 불알이 자몽만한 줄 아세요?"



아...너무나 써먹고 싶어서 좀이 쑤신다...............................................그렇지만.....................안되겠지..................자몽만한 불알...................자몽.................................그러고보니 올여름엔 자몽에이드를 안 사마셨네. 그러고 여름이 가버렸어. 대체 왜 그냥 가버린거냐, 여름아. 나는 좀 더 너랑 지낼 수 있어.



어제 퇴근무렵 남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 먹고 들어올거냐 묻는 전화였다. 


-난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집에 가서 아빠랑 같이 먹어.

-그래? 아빠가 고기 먹자고 하던데.

-그래?

-응. 그럼 말어?

-아니, 칼퇴해서 집으로 튀어갈게.

-누나 원래 어떡할라 그랬는데?

-회사 앞에서 혼자 짬뽕 먹고 갈라 그랬어.

-푸하하하하하하 뭐냐. 혼자 짬뽕 먹을라 그랬다고? 다이어트 식 먹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

-다이어트 할거라며?

-그거 내일부터. 오늘은 일단 너무 배고파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았어. 빨리와.

-응. 근데 아빠가 쏴야 돼. 아빠가 쏘면 먹을거야. 

-그렇게 전하마.



그렇게 집으로 가서 아빠와 남동생과 함께 갈비집에 갔다. 갈비를 먹고 김치찌개를 시켜서 밥을 남동생과 절반씩 나누어먹는데 배가 부른 거다. 


-아빠, 난 요즘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

-그게 니가 나이 들었다는 증거야.

-그런가?


이때 남동생이 빵터져 웃으면서 아빠한테 말했다.


-아빠, 이 누나 많이 먹었어. 뼈까지 들고 뜯는 거 아빠도 봤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뼈도 뜯어 이누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빠가 빵터져서 웃는데, 내가 많이 먹었나? 갸웃갸웃 해서, 나 많이 먹었나? 하고 물었더니 남동생이 누나 많이 먹었어, 라고 답한다. 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많이 먹어서 배부른거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요즘 적게 먹어도 배부른줄 알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나 좀 멋진 것 같다.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해결방법을 찾아내는 것.... 참..근사한 캐릭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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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lly0517 2016-11-0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아..넘 웃겨요ㅋㅋ 지하철인데 완젼 빵터져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ㅜㅜㅋㅋㅋㅋ

다락방 2016-11-03 12:59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웃기면 웃어야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미화 2016-11-03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 필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6-11-03 12:58   좋아요 1 | URL
이 댓글엔 제가 어떻게 답해야할지 모르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ellas 2016-11-03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사랑스러운 분>_<

다락방 2016-11-03 12:58   좋아요 1 | URL
아니 어디가 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ellas 2016-11-03 13:19   좋아요 1 | URL
모르신다니 더더욱 ㅋㅋㅋㅋㅋㅋ 러블리>_<

붉은돼지 2016-11-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뜻 자몽이 얼만큼 큰지 잘 기억이 안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어요 ㅎㅎㅎㅎㅎ

자몽은 선뜻 와 닿지가 않아서.....수박 정도는 되어야.... 하다가.....이건 또 너무 한 것 같고....
.......그래서 곰곰 궁리해 본 것이...한라봉.....그 정도가 똭!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요....

다락방 2016-11-03 12:58   좋아요 0 | URL
저는 내내 시장에서 본 자몽을 떠올렸습니다. 음.... 그랬습니다.
이 댓글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킁킁.

시이소오 2016-11-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로보톰의 다른 책은 갈등관계가 이 책과 똑같아서 살짝 지루하더라구요.

남자지만 쩍벌남 저도 싫어요. 자몽은 좀 작지 않나요? 키위는 어떨지요 ㅋ 이마나 맞빡인가요?


붉은돼지 2016-11-03 12:5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 자몽도 뭐 작은 거는 아니라는 생각이에요.....자몽만 해도 대단하죠...ㅋㅋㅋㅋㅋ

다락방 2016-11-03 12:57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 자몽 ... 사이즈를 혹시 착각하고 계신건 아닌지요. 자몽이면, 어, 생활 자체가 초큼 불편할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ㅎㅎ

시이소오 2016-11-03 13:04   좋아요 0 | URL
ㅋ 그러고보니 작지 않군요 마니 불편할듯 합니다 ^^

단발머리 2016-11-03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자몽... 자몽... 하셔서 위의 댓글들 바로 밑에 댓글다는 것에 심한 압박감을 느낍니다. ㅋㅋㅋ
시절이 하 수상한데 다락방님과 다락방님 남동생분 덕분에 한 번 웃습니다. 하하하^^

다락방 2016-11-03 14:2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서 이렇게 분위기를 바꿔주시면 되는겁니다! ㅎㅎㅎㅎㅎ

자몽 자몽 하니까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하몽 하몽] 생각이 나네요... 음....

날 추워요, 단발머리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단발머리 2016-11-03 14:24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어요. 별일 없는데 은근 바쁘게요~~ ㅎㅎ
나라 걱정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지만...
나라 걱정이 많이 되는 요즘입니다.
다락방님은 빨강빨강 넘 이뻐요~~

다락방 2016-11-03 15:23   좋아요 0 | URL
이놈의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걸까요, 단발머리님...하아-
나라도 걱정이고 저도 걱정이고 ㅠㅠ
삶은 걱정의 연속인것 같아요. ㅠㅠㅠ

빨강은 진리 ♡

매너나린 2016-11-03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다락방님 덕분에 크게 웃었네요ㅎㅎ
정말 근사한 캐릭터 맞습니당^^

다락방 2016-11-04 09:07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ㅋㅋㅋㅋㅋㅋ
으흐흐흐흐흐흐흐흐

transient-guest 2016-11-04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으면 말 없이 자몽을 즈려 밟고 지나가겠습니다만.....-_-ㅎㅎ

다락방 2016-11-04 09:0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즈려 밟고 지나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킁킁.

꿈꾸는섬 2016-11-04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다락방님은 멋진 사람입니다. 근사한 캐릭터도 맞구요.
이 새벽~ 웃으며 시작하네요.^^

다락방 2016-11-04 09:08   좋아요 1 | URL
아이쿠. 왜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꿈섬님?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세요? 새벽부터 웃으셨다니 좋으네요. 헤헷
:)

꿈꾸는섬 2016-11-04 09:10   좋아요 0 | URL
ㅎㅎ일찍자고 일찍 일어나요. 남편이 새벽부터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
유쾌한 글 속에 당당함을 겸비하고 좋은 책까지 덤으로 알려주는 멋진 다 락방님^^

다락방 2016-11-04 09:15   좋아요 1 | URL
아 저는 대한민국에서 제가 제일 일찍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저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아하하하하.
저도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일찍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언젯적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젊은 시절에는 새벽 두세시에 자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하아-

꿈꾸는섬 2016-11-04 09:17   좋아요 0 | URL
전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사람인데 결혼후 바뀌었어요.^^
새벽에 일하시는분들 은근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