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주말에 조카네 식구들과 함께 텔레비젼을 시청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동티모르 남자가 나왔는데, 주변에 동티모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말이면 집 안에서 혼자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은 동티모르에서 남자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남자가 외국에 나가 돈을 벌 수 밖에 없었고, 이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동티모르에서 아빠와 남편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 셋과 여자는 나름대로 밥벌이를 찾아가며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재워두고 여자는 혼자서 밥먹으며 울기도 한다. 삶이 너무 힘겨워서.


외국에서 외롭게 혼자 일하는 남자도 삶이 결코 쉽지 않다 느낄것이다. 몸은 몸대로 힘들지, 환경은 낯설지, 아는 사람은 없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외롭지..

고국에서 남편 없는 삶을 사는 여자도 힘들것이다. 생활은 나아지질 않지, 아이들 셋을 돌보는 건 온전히 혼자의 몫이지. 그녀에게 하루는 얼마나 길고 고될까.


이런 삶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제부는 생활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 수밖에 없지 않나, 자기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저런 결정을 내릴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그게 궁극적인 답인지는 모르겠다. 함께 행복하자고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생활을 도무지 유지할 형편이 안되어서 이렇게나 멀리,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그들이 결혼하고 함께 살기로 한 이유는 다 무엇일까. 게다가 그렇게 떨어져 사는 것에 기약도 없지 않나. 3년 일하고 고국에 돌아가면 형편이 나아지고 다 괜찮아졌을까? 아이가 셋인데, 3년 외국에서 일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남자가 외국에서 3년을 일하거나 13년을 일해도 이 가족의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 거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가난하게 태어나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렇게 떨어져서 그 가족이 살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힘들어하면서, 우리는 언제 함께 살까, 우리는 언제 넉넉해질까, 같은 것들만 희망고문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건가. 게다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아빠가 돌아오고 아이들도 성장했다고 하면, 그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남동생과 나의 결론은 같았다. 그 아이들은 자기 아빠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든 함께 살면서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억지로 찾아내며 사는 게 답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먹고 사는 것이 편안해지도록 낯선 땅에 와서 열심히 일하며 떨어져사는 게 답일까. 가난한 자에게는 궁극적인 답 같은 것은 없는 게 아닐까. 어떻게 살아도, 어떤 결정을 해도 힘든 게 아닐까.



동티모르 가족의 삶을 화면에서 보고 주말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내가 문학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러나 완전히 그들이 되지는 않고 떨어져 사는 삶. 이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말했던,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적 삶,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분별있는 관찰자의 자세가 아닌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특정한 세계를 상상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얻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보편적인 마음의 자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04)



분별 있는 관찰자라는 장치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주목하는 분노, 공포 등의 부분을 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일 나의 친구가 부정의한 상황을 겪고 있다면, 나는 그를 대신하여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에 따르면, 그 분노는 그에게 가해진 그릇된 행동에 대한 분노의 복수심에 불타는 강렬함을 갖지는 않는다. 또 만일 나의 친구가 실연의 아픔에 슬퍼하고 있다면, 나는 그의 비탄을 공유할 것이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그 슬픔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한다. 스미스가 보기에 이러한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시민의 자질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타인의 행복을 위해 애쓰지만, 우리가 타인을 위해 고려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지 않는 능력 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미스가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입장과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문학 작품 읽기(그리고 드라마에서 관찰자의 입장 되어보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덕적 길잡이의 원천이 되는 문학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중요성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시민이자 재판관에 걸맞은 태도를 자연스럽게 기르게 하여 분별 있는 관찰자적 태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을 읽음으로써 사건에 몰두하고 또 깊은 관심을 가진 참여자가 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장면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드어, 우리가 루이자와 스티븐 블랙풀 모두에게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 우리를 그들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진정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생각에서 생기는 특수하면서도 때론 혼란스러운 감정의 격렬함은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당사자인 루이자와 스티븐보다 균형 잡힌 형태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우리가 그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수많은 독자들이 있으며, 분별 있는 독자들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지식을 통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으로는 독서의 과정이 독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p.163-164)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이용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예를 든다. 그들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살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얼마전에 읽었던 김영란의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영란은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문학작품들이 자신의 업무(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음을 얘기했었고, 정혜신 역시, 자신이 치유상담을 하는 과정에 문학 작품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말했었다. 영화배우겸 탤런트인 김혜수 역시 마찬가지. 사람들은 왜그렇게 책을 읽냐고 자신에게 말하지만, 자신의 삶과 일에 책읽기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음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특히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 나는 소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들은, 소설읽기를 잘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아는 만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접했으니 알 수 있는 것인데, 소설읽기야말로 하면 할수록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총 세 권의 책에 대해 언급을 계속 한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포스터의 『모리스』가 그것인데, 어려운 시절에서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사는 사람, 즉 소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의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며, 미국의 아들 에서는 흑인으로 사는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그의 범죄를 판단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모리스에서는 동성애자인 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소설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아, 정말이지, 소설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몇해전에 미국의 아들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이란 행위에 대해, 그 이면에 아주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알게 됐었고, 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사회적 구조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놀라며 깨달았던 기억이 났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누가 내게 그런 강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물론 마사 누스바움은, 이토록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독서라는 행위에 있어서, 문학 작품 자체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얘기해준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런데 왜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일까, 왜 이사람은 이런 시선으로밖에 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서 좀 찜찜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에 대해 마사 누스바움이 어려운 시절에서의 시선 역시 그러했음을 얘기해주는 거다.



첫째, 문학 작품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을 거짓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디킨스가 노동조합 운동을 상당 부분 잘못 묘사한 것이나, 많은 소설가들이 여성 혹은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의 가능성에 대해 왜곡된 묘사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둘째, 문학 작품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피해의 중대성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실제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또는 가볍게 여기도록 하면서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디킨스가 노동자들은 오직 기분 전화을 하고 여가 시간을 주면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계급적 위계 자체에 내포된 피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디킨스는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에 팽배했던 결혼과 고질적으로 결부된 권리의 불평등이 여성에게 가한 피해를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p.165)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책읽기를 해야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내가 왜 이 작가는 이 혁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까, 라고 생각하고, 최근에는 많은 문학 작품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한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책을 읽는 것 모두, 비판적 책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잘못 쓰여진 것은, 또 그런대로 우리에게 나름의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주변에서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잘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을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이 독후활동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나면, 그걸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거나 혹은 기록하라고 얘기한다. 사람들에게 책 읽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거기에 대해 의견을 말하면서, 그 책이 그제야 내 것이 된다고. 또한 기록하면서 내것이 된다고. 읽고나서 책장을 덮고 끝- 이 아니라, 그 후의 활동들을 하라고. 글을 쓰는 게 힘들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단순히 그 책의 줄거리를 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소설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비판적인 판단을 연습할 필요가 있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다른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비판적 판단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웨인 부스는 이러한 과정을 '공동-추론'이라 불렀다. 즉, 이 과정은 본성상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는 빈연역적이고, 비교를 통한 실천적인 추론이다. 공동-추론의 과정에서 문학 작품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윤리 이론과 상호 간의 조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교해지며, 이는 우리가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적인 경험을 엄청나게 바꾸어 버릴 것이다. (p.165-166)



요컨대 나의 견해는 문학 작품에 대한 순진하고 무비판적인 의존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문학적 경험에 근거하여 내리는 결론들은 도덕적·정치적 사유, 우리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직관, 타인의 판단 등에 근거하여 지속적인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p.166)




아아, 문학 작품의 역할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토록이나 문학적 상상력을 중시하고 그것이 삶에 있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비판적 읽기가 가능해야 한다고 덧붙이지 않나. 아, 진짜 문학작품을 읽고 또 그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내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소설 읽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 읽기의 쓸모를 알고, 믿는다.




소설은 이성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면서 진실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공상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이성을 활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p.105)




소설 읽기가 사회정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읽기는 정의의 미래와 그 전망의 사회적 입법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p.46)

달의 분화구를 얼굴로 생각하는 것, 별에게 대화를 건네는 것, 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등은 경제학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상상력이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소설이 말하듯, 거기에는 사실적 증거 너머의 것들에 닿고자 하는 의지 속에 담긴 너그러움이 있고, 이 너그러움은 더 큰 삶의 너그러움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p.93)

오직 움직이는 물리적 대상으로만 신체를 보는 것은 빈곤한 성생활을 낳는다. 바로 이것이 `대상화objectification`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의 근본에 놓여 있는 사유이다. 대상화란 성적 파트너를 사물과 같이 바라보는 경향으로 결국 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도록 만든다. (p.97)

내가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진리와 이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다. 이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이 독단적으로 인간 존재와 인간 삶의 복잡함을 교조적으로 잘못 드러내는 한, 진리를 구현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이 불충분한 인식과 조악한 심리학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한다면 이성을 구현하는 데도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이성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면서 진실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공상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이성을 활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p.105)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함양된 능력들이 사실 경제학 및 도덕·정치 이론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물론 이러한 능력의 함양 없이 추상적 이론은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도 무력해지기 쉽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소설 읽기의 경험은 함축적으로 인간의 어떤 활동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활동이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해주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 이는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는 뜻이다. (p.106)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통찰력은 그것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 논거에 의한 확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장르로서의 소설은 그것의 기본 구조와 목적의식에 있어 모든 인간 삶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무비판적 전통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계몽적`이상의 수호자이다. 이는 경제학의 영역에서 유사 과학적pseudoscientific 접근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이상을 왜곡하는 것에 반대하고, 또한 이야기가 갖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를 무감각하게 적용하는 것에도-이상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반대한다. (p.108)

소설 익기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며,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판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p.110)

소설은 삶의 질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형태의 정보를 제공해주며, 독자로 하여금 평가를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이는 이후의 양적인 평가에 근거한 단순화된 모델이 형성되어야 할 범위 내에서, 공적인 업무에 적합한 종류의 상상력의 틀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현명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상상력의 능력을 길러주면서 동시에 그 한 예를 제시한다. (p.119)

소설이 주장하는 바는 시민의식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 있어 문학적 상상력이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p.120)

씨씨는 공리주의자인 자신의 선생님으로부터 100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에서 길에서 굶어 죽는 이는 오직 25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듣게 된다. 맥초우컴차일드 선생은 씨씨에게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응당 이는 낮은 수치라며 안도하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씨씨는 "굶어 죽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100만 명이든, 100만 명의 100만 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답한다. 또한 일정 기간 동안 10만 명의 선원이 장거리 항해를 떠났는데 그중 500명만이 익사했다는 사실을 듣고, 씨시는 이러한 낮은 퍼센트 따위는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숫자로 표시된 분석은 우리를 안도하게 만들고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즉, 맥초우컴차일드가 말하듯 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낮은 퍼센트인가. 그러니 분명 이에 대한 어떠한 행동도 필요치 않다. 감정이 없는 지성은 가치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엔 감정에 내재하는 판단이 제공해주는 사람 목숨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다.(p.150-151)

씨씨의 감정적 대응은 죽은 이들에게 인간성의 가치를 부여한다. 배고픈 자들에게 굶주림이란 무엇이며, 비탄에 빠진 자들에게 상실이란 무엇인지를 느끼며 씨씨가 타당하게 지적하길, 낮은 수치는 그들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으며, 낮은 수치에 근거한 안일함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은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느 ㄴ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항해를 책임지던 사람들이 더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숫자를 다루게 되면 "이 수치라면 괜챃아"라고 말하기 쉽다. 왜냐하면 이러한 숫자들 중 어떤 것도 심오한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p.151)

비극적 실패로 끝나는 루이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즉, 성장 과정에서 감정에 근거하는 교육은 사실상 어른이 되고 나서의 삶에 있어서 위험한 형태의 욕구나 취약함을 제거해준다는 것이다. 감정이 충만한 교육은 루이자의 삶의 방식에서 형성된 인격보다 훨신 안정된 중심을 가진 성품, 즉 균형 잡힌 감정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균형 잡힌 실천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식을 만들어준다. 반대로 유년 시절의 감정에 대한 억압은 분명 감정을 보다 파괴적이고 극히 비합리적인 형태로 후퇴시켜놓을 것이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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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6-10-3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김영하 팟캐에서 권여선의 `이모`를 듣다 잤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나름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저는 그 글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받지 못했어요. 이럴 때마다 생각해요. 요즘 내가 부쩍 현실적이 되어버린 것일까, 문학적 상상력 또는 감수성 따위 애저녁에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 작품 중에 정말 읽을 만한 소설이 드문 것일까.
그래서 독서의 여왕 다락방 님께 또 여쭙니다. (맨날 추천해달라 해서 좀 지송;;) 이런 저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푹 빠져 읽게 될 한국 소설, 뭐가 있을까요!?

다락방 2016-11-01 08:1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댓글 읽고 아아, 어쩐담, 하면서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 생각나지 않아요, 치니님. `문학상 상상력`이란 단어 앞에 진짜 한국 소설 하나도 생각이 안나네요. 제 개인 취향을 물으신다면, 죽으나사나 이승우 지만, 이승우를 치니님이 좋아하실지는...모르겠어요. 저는 이승우가 가지고 노는 언어가 너무 좋거든요. 이참에 이승우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아, 혹시 벌써 읽어보셨는데.. 별로 셨을까요? 저는 [지상의 노래]를 추천해보겠습니다.
음..아닌가........ 음.........

이승우 말고는 한창훈을 좋아하는데, 한창훈도 어쩐지 치니님 스타일은 아닐 것 같고...요즘 핫한 [쇼코의 미소]는 보셨던가요? 최은영도 좋고요. 음.....

치니 2016-11-01 09:29   좋아요 0 | URL
오, 이승우는 좋아합니다. 잊고 있었네요. 지상의노래는 읽었을 텐데 이젠 전혀 기억이 안 나요 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한창훈은 음, 맞아요, 그닥 제 취향이 아닌 듯.
최은영도 나중에 한 번 읽어 볼게요. 우선은 이승우. :)

다락방 2016-11-01 10:14   좋아요 0 | URL
네, 치니님은 한창훈보다는 최은영이 맞을 듯요. ㅎㅎ

AgalmA 2016-10-3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4번째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과학이 절대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토마스 쿤의 유명한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요즘 읽고 있는 훌리안 마리아스 이 표현은 생각할 거리를 주죠.
˝과학은 하나의 대상물로부터 구축되며, 특정 시기에 그 대상물에 적용되었던 앎으로부터 구축된다˝
우리의 잣대는 자신의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지요.

다락방 2016-11-01 08:13   좋아요 1 | URL
사람이 아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발언할 수가 있잖아요. 제가 과학적인 것에 대해 정말 너무나 무지해서, 하나도 몰라서, 어떤 입장 표명을 할 수가 없어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에 비해 감성을 무시하고, 감성적인 사람은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것만 알아요. 그렇지만 그 논리를 들이미는 것도 감정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결국 우리 모두에게 가장 처음 영향을 미치는 것,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감정인데, 왜 그걸 인정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살아야되는데..

아갈마님, 저도 제 확신이 가장 무서워요. 제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확신할까봐 무서워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의심하자 라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10-3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킨스에 대한 마사 누스바움의 비판은 다소 논쟁적이네요. 19세기에 디킨스만큼 가난한 사람들 입장을 지지한 소설가도 드물텐데요.

제가 디킨스 소설을 다 읽어본건 아니라서. 디킨스 소설에 악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발언을 디킨스의 주장이라 해석한건 아닐지.

이래저래 궁금한 책이네요^^



다락방 2016-11-01 08:10   좋아요 0 | URL
악인들의 발언을 그렇게 주장한 건 아닐거라 생각해요. 제 경우에 [두 도시 이야기] 읽으면서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란 생각을 했는데요, 혁명이 추구한 것 보다는 혁명이 가져온 나쁜 점들만 부각시켰달까요. 저는 그 책 읽으면서 디킨스가 가난한 사람, 약자의 편에 서려고는 했지만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마사 누스바움이 느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일전에 빨간 책방이었나, 출처는 불분명한데요(기억이 잘 안나요) `찰스 램`과 `찰스 디킨스`에 대해 비교해준 적이 있거든요. 디킨스도 램도 모두 글을 잘 썼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했고, 글로 성공했는데, 여기까진 공통점이고 그 후에 차이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램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는데, 디킨스는 성공한 후에 약자를 무시하고 업신 여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작가가 그랬다는 것에 사람들이 많이 실망했다고요. 제가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도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네요.

저 역시 디킨스의 작품을 두 개 밖에 안읽어 본 것 같은데요, 그 재미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두 도시 이야기] 보다는 역시 [위대한 유산] 쪽이 좋더라고요. 제 동료 한 명은 두 도시 이야기에 엄청 감동 받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데, 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언급할때마다 너무 찝찝해서요... 위대한 유산 쪽이 훨씬 좋았어요.

이 책, 시이소오님도 아주 좋게 읽으실 것 같아요. 저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시이소오 2016-11-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대한 유산이 너무 좋아서 필사했어요. ^^ 디킨스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네요. 두 도시 이야기는 그래서 읽다 말았을까요? ㅎㅎ

다락방 2016-11-01 10:13   좋아요 0 | URL
저 위대한 유산 읽다가 마지막에 막 울었어요 ㅠㅠ 뭐랄까 너무 숭고하다고 해야 하나 ㅠㅠ 막판에 그냥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시이소오님은 필사까지 하셨군요!! >.<

시이소오 2016-11-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웃어서 눈물 났어요. ^^
필사하면서도 계속 한참 웃느라....ㅋ
마지막에 울진 않았지만 그 기분은 알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