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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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형 컨버터블 `들라주`로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생각해보면 제임스 설터의 소설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지겨워하면서도 삶을 치장하는 데 노련한 왕년의 스타 같은 눈썰미. 그것은 밉지 않으면서 어쩐지 처연하다. 소설 속 욕망들도 그렇게 다가온다. 여가나 백일몽 같이 기회를 살피며 충동적이다.
나는 투우에서 투우사와 황소의 현란하며 긴 대결, 지치고 노한 황소에게 내리꽂는 창, 열광들 그 모든 게 끔찍했다. 그것은 에로스적 사랑과도 닮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도 그런 비유가 있었고, 조르주 바타유는 투우와 에로티즘을 연결해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설터의 표현은 좀 더 건조하고 예리하다. 19금 표현 수위가 많아 다소 낮은 것으로 가져왔다.

*
그건 그저 하나의 달콤함 사건, 어쩌면 환상의 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토록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립된 느낌, 나아가 살기殺氣까지 느껴진다. (p85)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주인공들이 한밤 내내 돌아다니던 풍경들이 겹쳤다.
나-딘-안마리를 서술하는 격자식 구성, 시점 변화도 흥미롭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 암석면 같은, 이미 지나갔으나 줄곧 어른거리는 프랑스의 이미지들˝(p125) 같은 묘사와 비유는 문장 사이사이 빛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며 느끼게 되는 심상처럼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화법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소설은 거의 풍작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 이 사람은 참 소설가 같군, 바보 같은 감탄을 여러 번 했다.

˝고요하다는 점에서만 탁월한 겨울의 나날˝(p97), ˝아침이 점차 추워지는데 나는 아무 대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p66) 처럼 그의 소설을 또 읽게 되는 밤.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 소설을 나보코프 <롤리타>와 비교한 건 타당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서로에게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주인공은 딘과 안마리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리저리 대입해본다.
이 책 덕분에 사놓고 읽기를 미뤄두고 있던 <롤리타>를 좀 더 빨리 펼칠 것 같다~
겨울밤 독서로 꽤 괜찮았다.


ㅡAgalma

몇 가지 것들을 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기억한다. 양복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동전처럼 시간이 흘러 조금 퇴색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부들은 오래전에 변형되었거나 재편되어 다른 세부들이 전면에 드러났다. 실제로 몇 가지는 분명히 진짜가 아닌데, 그렇다고 덜 중요하지는 않다.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꿔야 한다.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그 양식에 진짜 의미가 있다. 실제로 내가 줄곧 변화를 시도할 경우 그때까지 조화롭던 모든 일이 오래된 신문지처럼 내 손 안에서 부서져버릴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만 해도 참기 어렵다. 무수한 과거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사라져간다. 다만 그 안 어딘가에 다이아몬드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파편들이 존재할 뿐이다.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수집한다면 우리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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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12-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소설 에로틱의 걸작, 포르노 그래피 등등 이란 말에 혹해서 사 읽었는데 눈이 쫑긋해지지는 않고 몸이 늘어지던데요 ㅋㅋ 롤리타는 읽는 재미는 있던데 말이죠. 소설은 잘 모르겠습니다. ^^

AgalmA 2015-12-17 02:55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들라주 얘길 괜히 한 게 아닙니다. 예전 미키루크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던 에로틱 영화 보면 굉장히 느슨하잖아요.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은근한 제스춰로 서로에게 뭔가 여지를 주잖아요. 주인공이 딘과 안마리 사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고 서술하는데 그걸 포르노 그래피적이라고 보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