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1973년 9월 네루다가 사망하기 직전에 마무리한 시집이다. 잠언 같기도 한 316개의 물음표를 가진 시들. 시가 무엇인지 그는 아주 빠르게 스케치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는 시. 새삼 내게 시간이 있다니 놀랍다. 그게 내 관념으로 충만한 매트릭스 세계일 지라도.
시로 시를 가르치기. 최근 나온 이성복 시론집과 또 다른 시창작 강의라 할 수 있다.
이성복 시론집 중 <무한화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집과 같이 번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25
말 앞에서 나를 열어두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쓰세요. 말을 앞세우면 감정은 따라오지만, 감정을 앞세우면 감정도 날아가버려요.
ㅡ 이성복 <무한화서>(2015)
네루다의 이 시집은 정확히 그 지침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네루다의 이 시집이 내 생각엔 더 직접적이며 창의적이다.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야 된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넌? 대화 수업 같다고 할까. 답을 줄 수도, 줄 생각도 없는 선생님. 네루다식 시창작 강의로 한국 대중 감성에 맞는 시가 나올 지는 미지수. 통할 것은 통하는 법. 물음으로 가득한 문장 형식이 이성복 시인도 강조하는 ˝입말˝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쉽고 가볍게 와서 독자를 툭 건드린다.
질문 앞에 당황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번호로 이루어진 제목에 4~5개의 질문이 달려 있다. 한 문장만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확장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여백이 많으므로 노트 필요없이 여기저기 내 생각을 쓸 수 있다. 해마다 들춰보며 해마다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피사체 하나를 두고 이리저리 수많은 데생을 하듯.
질문 하나에 한 편의 시를, 소설을 쓸 수도 있다. 혹은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 수도. 세상의 모든 걸 생각하게 될 테니까.
잘 알다시피 좋은 글은 많이 읽는 것보다 많이 써보는 게 더 효과가 큰데, 그 속에서 생각하고 수정하며 스스로 배우고 터득해나가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의외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라고 하진 않겠다. 쿨럭)) 중요한 건 훌륭한 맛의 음식이 좋은 재료에서 나오듯 좋은 질문을 가져야 한다. 이 시집은 그런 질문 자체이며 그런 질문을 갖게 한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에서 시에 눈 뜬 우편 배달부가 섬 가득 울리던 종소리 같이 정신을 깨우는 울림. 그렇게 이 시집을 읽고 시를 쓴 시인들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한다. 어딘가에서 지금도.
국내 번역된 네루다 시집 중 가장 좋았다. 네루다 전문 번역인 정현종 선생 :)
네루다가 임종을 맞은 이슬라 네그라 바닷가 집에서 쓴 질문 49를 마주 했을 땐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소설이 스쳐갔다. 바다와 육지의 좁은 간격을 모래밭에서 느끼듯 다가온 죽음과 삶 사이에서 느끼던 그 복잡한 심경이.
49
내가 바다를 한 번 더 볼 때
바다는 나를 본 것일까 아니면 보지 못했을까?
파도는 왜 내가 그들에게 물은 질문과
똑같은 걸 나한테 물을까?
그리고 왜 그들은 그다지도 낭비적인
열정으로 바위를 때릴까?
그들은 모래에게 하는 그들의 선언을
되풀이하는 데 지치지 않을까?
ㅡ파블로 네루다(1904~1973, 칠레)
(그 외 발췌들)
10
내 피를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내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11
어쨌든 11월은 몇 살이나 되었을까?
13
오렌지 나무 속에 들어 있는 햇빛을
오렌지들은 어떻게 분배할까?
15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17
겨울은 어떻게
그 많은 청색 층을 모았을까?
누가 봄한테
그 맑은 공기의 왕국을 청했나?
19
파타고니아에서는, 한낮에
안개가 초록이라는 걸 당신은 아나?
21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
24
죄수가 빛에 대해 숙고할 때
그건 당신한테 비추는 빛과 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