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밤늦도록 집안-거의 책-정리를 했고, 몇 권의 책과 이별 예정이거나 이별했고, 서재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놓고 있고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늘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환해졌다. 거울이, 겨울이 평생 나와 함께 하듯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어떤 일은 완수보다 시작(始作)이 조급함과 불안을 더 달래준다. 책을 읽는 일은 의무감이 아니라 떨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괴로움과 두려움보다 떨림이 더 많은 일, 독서. 나는 많은 책들 속에서 그런 연애의 떨림을 바라는 독서 난봉꾼ㅎ;;

묵은 포장을 풀고 작년에 신던 털신을 꺼내 신으며 발끝으로 전해지는 올겨울 온기를 음미했다. 날카롭고 낯선 새 신이 아니어서 편안함도 같이 전해졌다.
새해란 새 시작의 의미보다 뒤를 돌아보며 한때 혹은 계속 원해 왔던 과거를 다시 불러오려는 제의(祭儀)이자 구호(救護)의 재정립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민음사 판, p15)려 한 이 책의 주제처럼 말이다.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읽으며, 국일 미디어에서도 눈길이 멈췄던 대목에서 멈췄다. 멈추고 나서 그 사실을 떠올렸다는 게 더 정확하다. 언제나 내 눈이 밑줄이다. 번역이 천차만별이어도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어떤 진실은 원석처럼 거기 있었다. 누군가 알아보고 깎고 다듬기 전까지 원석은 빛나지 않는다. 보석은 지고한 손길에서 탄생하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기쁘게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모두가 나눠 가질 수 있는 행복이며, 인간의 발명 중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 (민음사, p19)

**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국일 미디어, p10)



현실적으로든(읽다가 자게 만든다) 소설적으로든(나도 불면! 나도 몽상! 공감하게 만든다) 모든 불면자의 친구, 프루스트. 그가 회고하는 방들, 밤들, 사람들.
잃어버린 창조의 시간을 꿈꾸며 잠 못 드는 이가 마술사가 되는 겨울밤들을 상상해본다.
이 순간 나는 조금 행복하다. 아주 어둡고 추운 밤에도 어떤 꽃은 피어 있다. 내 한밤의 꿈처럼.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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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2-17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파이팅이요. 저도 스완네 집 쪽으로는 읽었는데 다음 권부턴 책장에 있어요. 교수님이 완역해주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 이번에 나오는 3부도 일단 사둘거예요. 그래야 4부도 얼른 나올 것 같다는 생각...ㅎㅎ

AgalmA 2015-12-17 21:50   좋아요 1 | URL
최근에 민음사판 5권, 6권 나왔더군요. 우리 박차를 가해야 될 때가 왔어요^^

해피북 2015-12-17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떨림이 중요하다`는 말이 깊이 공감되는 저녁입니다. 늘 읽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책장에서 방치된지 오래인데 저도 먼지 좀 털어줘야겠어요. 으흐흐^~^

AgalmA 2015-12-17 21:55   좋아요 1 | URL
책 하면 뭐니뭐니 해도 떨림 아닙니까. 만남부터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다들 집에 프루스트 책들 가지고 있잖습니까ㅎㅎ 연말은 늘 프루스트 먼지청소 주간~~
올해 제 독서계획에 프루스트 완독이 2순위였는데 이렇게 흘러가게 할 순 없다! 작정했지요. 새 번역판 1권이라도 봐야지! 하면서^^ 읽다보면 또 2권, 3권 그렇게 이어질테고 :)

2015-12-17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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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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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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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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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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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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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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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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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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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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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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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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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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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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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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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8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차를 가하려면 일단 말부터 ...있어야..할텐데..그쵸?

AgalmA 2015-12-18 05:45   좋아요 1 | URL
책이 말 아니겠습니까^^ 五車書라는 말도 있으니 통 크게 수레를 가져와야 할까요ㅎ;;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면 수레급이긴 하죠ㅎㅎ 프루스트 평전도 샀다가 감당 못하고 보냈지요;;
아, 생각해보니 민음사 번역이 다 안 나온 걸 두고 말이 없다 말씀하신 게지요^^; 그동안 묵혀 둔 국일미디어를 읽으면 되지 싶어서 저는 조급하지 않던 중ㅎ;; 어차피 두 번역을 다 읽어야겠다 했으니까요.
감기는 좀 나으셨는지. 그장소님 약골이신 거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킁킁))

[그장소] 2015-12-18 05:52   좋아요 0 | URL
에구..본전 못찾을 곳에서..ㅎㅎㅎ
한번만 봐 주십쇼~^^;;;
수레고 말이고 놓고 줄행랑 36계 할랍니다..!
저도 잘 익혀먹을까..녹여먹을까...
남는게 시간이라..
바쁜 분들껜 죄짓는 말인데..ㅋㅎ...
감기 약 먹고 칠일 안먹어도 일주일..이런다..
! 농담이고요..약이 영..고때뿐..ㅠㅠ

AgalmA 2015-12-18 06:52   좋아요 1 | URL
취향 차이일 뿐인데, 뭘 그렇게 땀을;;; 장르 소설 열혈 탐독에는 제가 땀을 좀;;;;
정말 그렇죠. 약은 먹으나 안 먹으나 비슷하고 주사가 좀 빠른 듯도 하고...앓고 난 뒤의 개운함을 어서 맞으시길 빌 뿐입니다/
귤과 따뜻한 차가 제겐 감기 마들렌^^

[그장소] 2015-12-18 06:33   좋아요 1 | URL
주사 이번엔 다들 주사를 권하는데 몸이 붓고있을땐 주사도 함부로 못맞아서..상처가나면
안된다고..침도 뭐도..암튼 그렇다네요..면역이 약해서..ㅇㄹㅈ
차는 종일..마시고..카페인 금지..중..ㅎㅎ;
저야 취향존중!^^
얼른 깨운해지고 시포요~
축농증인분들 어찌 사는지..참..ㅠㅠ;
감기 조심하세요 ^^♡

AgalmA 2015-12-18 06:51   좋아요 1 | URL
면역력 강화 음식을 찾아봐야 하는 우리ㅜㅜ...운동은 또 얼마나 안 하는지(저만은 아니죠ㅎ;;;? 이봐, 어디서 도매질이야! 하셔도 됩니다;;;)
카페인은 탈수 증상을 만드니 감기엔 정말 안 좋죠. 몸을 건조하게 만든니까...
크리스마스 케익을 아무 맛도 못 느끼고 드시면 안될 텐데 어쩌나요;;; 어서 쾌차~ 으쌰으쌰~~🍰

[그장소] 2015-12-18 06:56   좋아요 1 | URL
크리스네랑 마스네 생일은 같이 축하 안할려구요.
관례처럼 다들하니 인사는 하지만. .저한텐 별 의미없어요.. (카톨릭은 ..이제 그만 ㅋㅎ)
걍 빨간날...
집에서라도 좀 움직움직거렸던 때가 있었는데..
멸치근육이라도 좀 만들어보려구...걍 살기로했어요.
여기서 면역강화를 핑계로 먹기를 더 잘함..생계에 빨간불들어올 지도 모름..엥겔지수 높다고..ㅎㅎㅎ

AgalmA 2015-12-18 06:5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생일축하는 핑계고 맛난 거 먹는 건수 올리는 거 아니던가요. 어떻게든 엥겔지수는 강력ㅎㅎ

AgalmA 2015-12-18 06:59   좋아요 1 | URL
근육 그장소님 상상이 안돼😅 하지만 건강한 미소는 상상됨. 어서 쾌차하세요 :)

[그장소] 2015-12-18 07:03   좋아요 1 | URL
계란한판 채우고 생일 안챙기고 있어서..
우핫~아무날도 아닌 날로 조용히지나가 주는게
선물인데...^^
Agalma 님! 고요를 침묵을 2종셋트 선물로 받아요..그날은..ㅎㅎㅎ

AgalmA 2015-12-18 07:08   좋아요 1 | URL
이장욱 시집<생년월일>이 문득 읽고 싶어지네요ㅎ

[그장소] 2015-12-18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이~곧 접수토록하겠나이다~^^
이까짓 감기 ..ㅎ,,ㅎ ! ㅋㅋㅋ
고마워요 ~^^Agalma 님!!♡

[그장소] 2015-12-18 07: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생년월일

 

                          이장욱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

 

  수평선은 생후 12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36년 전의 그날이 12년 전의 그날이다가,

 

  수평선이다가,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연인들은 슬픔에 빠지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 시집, 생년월일 중 수록


AgalmA 2015-12-18 07:51   좋아요 2 | URL
전 역시 이장욱 소설가보다 시인이 더 좋더라는 :)


[답시]

자동차 안에서*
ㅡ불한당들의 세계사 5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몇몇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엽서를 써서
우리에게 최종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했지.

몇몇은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어.
밤에도 태양을 보기 위해서였지.

하나의 인생이 결코
사적이 아님이 확실한 곳에서도
몇몇은 사랑에 빠졌지.

몇몇은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극단적인 각성을 꿈꾸었지.

몇몇은 세상을 뜬 영화배우들처럼 앉아서
이 세상에 살아남을
올바른 순간을 기다렸어.

몇몇은 자신들의 일을 위해서 죽지 못한 채
그냥 죽어갔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자동차 안에서* :볼프 본드라체크의 시. 이 시를 읽고 읽노라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아름다운 노래를 듣듯이, 나는 자주 이 시를 내 두 눈으로 쓴다. 내 몸이 갈 수 없는 곳에도, 아름다운 노래는 여전히 간다. 가서는 또 다른 노래가 되고, 노래가 되지 못한 것들은 별이 되거나 나뭇잎이 되어, 여전히 이 세상의 풍경이 일부가 되어, 나를 흔들고 내 속의 또 다른 노래를 흔든다.

박정대 <단편들> (세계사, 1997) 중


두 시인 사이는 별로 안 좋은데 우리끼리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ㅎㅎ;;;

[그장소] 2015-12-18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 시를 읽은지 얼마 안되서..소설을 먼저 알았거든요.
시를 더 잘 써요..확실히..^^
느낌도 좋고..

[그장소] 2015-12-18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안좋은데요?난 그런건 몰라서..둘이 싸울일이..있었나요?
그러든지 말든지..시로는 뭐 화해시키죠..화합의 장 이랄지..
우리끼리 파티랄지..^^

AgalmA 2015-12-18 07:59   좋아요 1 | URL
제 농담이었어요ㅋ;;

[그장소] 2015-12-18 08:00   좋아요 0 | URL
아...저 혼자 밥상차려 먹은거군요..그러니까..
아침 일찍 부지런 떨어서 ㅋㅋㅋ
덕분에 배 두둘기며 띵가띵가..놀아야겠어요~^^

AgalmA 2015-12-18 08:06   좋아요 1 | URL
그러나 저는 문득 치명상을...입고 이젠 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시길. 그장소님. 뮤즈 같은 친구님 :)

[그장소] 2015-12-18 08:10   좋아요 1 | URL
해뜨니 환함을 덮고 주무시구려~
치명상은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고 말터~^^
잘 자요~(성시갱)
잠옷을 입자 ㅡ (이 제목이 맞던가?)ㅎㅎ
또 봐요!♡

물고기자리 2015-12-18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책에도, 스쳐 지나가며 잠깐 본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이 책 이야길 하더라고요. 1Q84에선 아오마메가 모처에서 은신해야 했을 때, 이 책을 완독할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읽기 시작하는데 하루키가 말하는 이 책의 감상은 제가 카프카를 읽을 때의 느낌과 거의 흡사해서 깜짝 놀랐어요^^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읽을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뜻인 것도 같은데,, 조만간 제게도 기회가 오긴 오겠죠..ㅎ

AgalmA 2015-12-18 20:06   좋아요 1 | URL
자꾸 내 눈에 띈다는 것은 내 관심이 행동으로 진입하려는 조짐 아닐까요. 관심 없음 소 귀에 경읽기ㅎ;; 하지만 관심은 점점 쌓여서 결국 펼치게 만들고... 우리가 우연을 필연으로 느낀다? 만든다? 그렇게 되듯 말예요.
1Q84 1,2권만 읽고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는데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읽었던 책 얘기는 한때 사귀고 헤어진 연인의 몰랐던 혹은 공감하는 얘길 듣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해요...싱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