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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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언젠가 만날 카에이루가 있다.

엎치락뒤치락 일어나고 눕는 여러 날을, 자라는 풀의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어둠을 향해 가는 노을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빛을 품은 어둠을 주시한다. 잠속에서도 빛은 오색으로 터진다. 사실 이 모두는 서로의 끝을 잡고 순환하는 하나 잖은가.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꿈의 꿈>인 거라 생각한다.
현실의 꿈도, 잠속의 꿈도 결국 나를 무너뜨릴 것이다. 결국 무엇을 두려워하리. 내가 나를 철저히 마주하며 무게를 감당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빅뱅은 물리적 현상만이 아닌 우리가 은유화했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알아보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창조해야 할 무엇을 느낀다. 일종의 의무감. 안토니오 타부키는 그런 재창조를 원했고 이 책을 썼다.
`다이달로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체코 안졸리에리, 프랑수아 비용, 프랑수아 라블레, 카라바조라 불린 미켈란젤로 메리시, 프랑시스코 고야 아 루시엔테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카를로 콜로디, 자코모 레오파르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아르튀르 랭보, 안톤 체호프, 클로드 아실 드뷔시,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페르난두 페소아,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패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ㅡ 페소아가 탄생시킨 異名들과는 조금 다르게 ㅡ 안토니오 타부키가 원했고 이미 존재하고 있던 異名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서로의 꿈을 꾸다 만나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안토니오 타부키를 만나 그의 꿈과 내 꿈을 맞춰보게 됐다. 그가 페소아와 자신의 꿈을 맞춰본 순간처럼.

ㅡAgalma

곧바로 물의 자비로움을 느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바다를 사랑했고, 바다에 음악을 한 편 헌정하고 싶었다.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고, 물의 표면은 반짝거렸다. 드뷔시는 숨을 잔뜩 들이쉰 채 조용히 다시 들어갔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 샴페인 병을 꺼내 반쯤 마셨다.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음악은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

ㅡ 음악가이자 심미주의자, 클로드 아실 드뷔시의 꿈



고모할머니가 큰 쟁반을 들고 왔고, 거기에는 차와 과자가 있었다. 카에이루와 페소아는 과자와 차를 들었다. 페소아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었는데, 그건 우아하지 않은 태도였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선원복의 칼라 매무새를 가다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저의 선생님입니다. 그가 말했다.
카에이루는 한숨을 쉬고 나서,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긴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 꼬치꼬치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똑똑해요. 줄거리를 건너뛰어도 이해할 겁니다. 이것만 알아두시오. 내가 당신입니다.
더 설명해주세요. 페소아가 말했다.
난 당신의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당신의 어두운 부분이지요. 이것 때문에 난 당신의 선생입니다.
근처 마을에서 종이 몇 번 울렸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페소아가 물었다.
내 목소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잘 때 내 목소리를 들을 텐데, 때로는 흐트러져 들릴 것이고, 때로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들어야만 하고, 이 목소리를 들을 용기를 가져야만 할 겁니다. 위대한 시인이길 원한다면 말이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소아가 말했다. 약속드리지요.
그가 일어나 작별인사를 했다. 마차가 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 성인이 되었고 수염이 자라났다. 어디로 모셔야 합니까? 마부가 물었다. 꿈의 끝으로 데려다주시오. 페소아가 말했다. 오늘은 내 삶이 승리한 날이오.
3월 8일이었고, 페소아의 창문으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ㅡ시인이자 위장꾼, 페르난두 페소아의 꿈


*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1887~1935, 포르투칼, 시인)는 죽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4년 3월 8일 "그의 내부에서 그의 주인이 솟아났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세 필명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알베르토 카에이로(Alberto Caeiro)고, 다음은 "젊어서 죽은" 이 사람의 두 제자, 리카르도 레이스(Ricardo Reis)와 알바로 드 캄포스(Alvaro de Campos)다.
페소아는 이름마다 다른 다른 이력과 기질, 외양 등을 부여해 칠십 여 개 넘는 이명異名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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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2-1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소아 혹시 남자 아니였나요? 제가 잘 모르는 작가라서요. 차 마실 때 새끼손가락 얘기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생각납니다. 70여개 이명을 사용할 걸 보면 정체성을 적절히 분리할 줄 알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2015-12-15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5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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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15 22:39   좋아요 2 | URL
˝정신이 아닌 육안으로 전원시˝를 쓴다는 건 카에이루가 유물론자 설정이기 때문이겠죠. 헌데 카에이루 시집보면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성향도 강해서 정신을 멀리 한다는 개념으로 단정해서 볼 수 없습니다. 그 신비주의, 정신성이 더 강해진 캐릭터가 의사 시인 레이스고, 그걸 극단으로 가져간 게 캄푸스라고 생각합니다.

페소아의 이명 캐릭터들이 ˝정체성의 분절-분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융의 정신분석처럼 우리 안에 내재된 모든 속성을 드러내며 그 캐릭터들이 각기 다른 삶을 겪도록 만들며 페소아 자신도 그 삶을 같이 살았다고 봐요. 사실 작가들이 캐릭터를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한한 삶 속에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대리만족이자 실험같은... 매순간 불변하는 존재로 살 수 없는 인간 삶 자체가 이미 불안이라는 걸 페소아는 잘 알았던 것이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 우리는 어린이와 청년, 노인 등 많은 삶을 겪게 되는데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희한한 경험입니까. 사회적 역할이 더해지며 또 무수한 정체성을 갖게 되고...
리처드 세라의 조각을 보니 저는 70여 명의 페르난두 페소아에 대한 공동비문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 비문에는 아마 70여명의 작품 구절들이 다 들어가 있을 걸요^^ 그러니 사람으로도, 글로도, 그 관계성으로도 검은색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일테고.

<불안의 책>과 <말테의 수기>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해요. 언제가 이 둘을 비교해 볼 시간이 날런지..ㅜ,ㅜ

페소아는 포루투칼에서 거의 체 게바라 급이더군요. 거리, 대문에 페소아 그래피티 엄청 나답니다ㅎ 그래서 페소아를 슬픔의 아이콘으로 보기보다 생의 다층을 보려한 혁명가로 보는 게 더 타당할 지도...그 투쟁의 지도를 공감하며 보는 우리에겐 매우 비극적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2015-12-15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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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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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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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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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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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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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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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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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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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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