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目不忘. -<<晉書>>-

"눈길만 지나가도 잊지 않는다."

 


 

  • 過 지날 과
  • 目 눈 목
  • 不 아닐 불
  • 忘 잊을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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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十遍不如寫一遍. -<<鶴林玉露>>-

"열 번 읽는 것은 한 번 베끼는 것만 못하다.

 


 

  • 讀 읽을 독
  • 十 열 십
  • 遍 번(횟수) 편, 두루 편
  • 不 아닐 불
  • 如 같을 여
  • 寫 베낄 사
  • 一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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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7~1805

Marx, Karl Heinrich, 1818.5.5~1883.3.14

  연암과 마르크스. 이 둘은 왠지 닮은 듯한 느낌이다. 손자가 그린 연암의 초상을 보면 마르크스보다는 다소 얼굴형이 가냘프지만 연암과 마르크스의 이미지는 우선 냉철한 느낌, 강인함, 大人의 풍채, 흰 수염(연암의 수염이 다소 얄팍하지만) 등등. 내가 연암을 먼저 알았고, 그의 초상을 보았으며, 후에 마르크스를 알았고, 그의 사진을 보았다. 아하!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연암이 읽혀졌고, 마르크스를 보면서 연암의 초상이 떠올랐으니, 왜일까? 다만 이 둘이 외양만 닮았던 것이라면 아무리 그러해도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연암이 읽히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연암이라는 사람을 조금더 가까이 둘 수 있었던듯 하다. 거기에서 연암이 태양인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내가 볼 때 마르크스 또한 다분히 태양인이 아닐까 한다. 내가 뭐 사상체질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구체적인 이유를 댈 수는 없겠지만, 그냥 내 느낌이 그러하다.

  그런데, 연암과 마르크스를 엮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외양 이전에, 그 둘의 사상에 어떤 공통점이 있으리란 생각, 바로 그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흔히 북학파의 대두격이라 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일맥은 아닐테지만 상통은 한다. 마르크스 사상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세상의 변혁, 즉 혁명을 통한 세상의 변화 아닌가?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와 연암을 공부하기로 한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연암의 사상의 공통점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 혹은 예감, 아니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이루어내지 못할지라도 누군가 그러한 일을 해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에 이 글을 쓴다.

  아 참 많이 닮았다. 또한 더 많이 닮았으리라. 연암과 마르크스가 동시대 인물은 아니지만, 설령 동시대인이었더라도, 연암이 마르크스를 알 수 없었고, 마르크스 또한 연암을 알 수 없었을 테지만, 그 둘 사이에는 시대를 넘고 공간을 넘는 무언가 일맥하는 상통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오늘부터 이 기대를 잡고 시작해 보려 한다. 우선 마르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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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 MBC의 ‘느낌표’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이 그야말로 참담함을 인식하고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 만들어진 어쩌면 획기적이면서도, 또 한 면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부진한 도서 판매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 국민이 ‘느낌표’에서 선정하는 책을 따라 읽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열심히 그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비롯해, 《괭이부리말 아이들》, 《백범일지》, 《삼국유사》등등, 많은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니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압박하는 좋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많이 미뤄두었던 책들임에 분명했고, 어지간해서는 읽어내기 따분한 책들도 열심히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책《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하지만 그리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잠들어 있던 이 책이 크게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느낌표’에 선정된 탓이었다. 내가 ‘느낌표’에서 선정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던 와중에 조금씩 지루해가고 있을 즈음, 이 책은 나에게 진정으로 책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느낌표’가 내게 준 값진 선물이었던 것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시인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그 안에서 시인을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기행문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시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인들이 나고 자란 고향, 그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걸었던 길들을,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걸으면서, 시인이 느꼈던 느낌 그대로를 또한 새롭게 느껴보고, 그러함으로써 그들이 남긴 시들을 살펴본다. 이것은 하나의 외재적 비평 방법으로, 우리에게 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도,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에 재미와 기쁨을 더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나는 이 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목월의 향토색 짙은 밝은 색깔의 이미지가 무엇에 연유하는가도 알았으며, 영랑의 맑은 노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알았다. 또 어떤 시인의 어느 부분이 과장되고 어느 부분이 축소되었는가도 확인됐다. 이 동안에 어느 면 닫혀 있던 내 시관도 많이 수정되었다. 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이 기행을 하는 동안 늘 들떠 있었다. 시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들떠 있’지 않을 수 없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곰곰이 물어 본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큰 효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단순히 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자기가 보았던 풍경, 사물,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현실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 시를 놓고 거기에 쓰인 언어 기호 자체만을 풀어내려고 하고, 분석해 내려 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 읽기는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다. 아니 시는 “마음이 흘러간 바”를 적은 것이기에 그 마음을 느껴야 하건만, 이러한 시 읽기는 우리에게 ‘감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가 아닐 수 없기에, 이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만나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시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찾아떠난 그 길을 나도 어느새 걸어가고 있으며, 주옥같은 시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간 내 머릿속에서 좀체 설명되지 않던 구절들이 물흐르듯이 흘러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강한 감동으로 흘러내렸다.

 

  이 책을 만나고 나는 꼭 한 번 다시 읽고, 신경림 시인이 찾아 갔던 그 길을 나 또한 걸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하지만 책장 깊이 박아두고 있다가, 근래 다시 읽게 되었다. 아직 그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처음 읽던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친다. 이 책 한 권을 들고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다 못해 나를 힘들게 한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느낌표’를 통해 재간되고 나서 얼마 후 아쉬웠던 내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권이 나왔다. 내가 그것을 바로 구해 읽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1권은 이미 작고한 시인들을, 2권은 생존 시인들을 다루고 있다. 작고한 시인들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1권 못지않게 2권은 살아있는 시인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때론 술 한 잔 주고받기까지 더욱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2권의 책은 시 해설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니 어떤 시 해설서보다 더욱 충실한 해설서, 해설다운 해설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의 박진감과 현장감, 그리고 살아있는 시를 만나게 해주는 귀한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작 저자 자신, 즉 ‘신경림을 찾아서’는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경림,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


  이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주천강’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신경림 시인이 본 그 모습을 나는 가서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그 감동 그 느낌 그대로를 느껴보고, 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도 걸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웃음’도 웃어보면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 나도 한 번 그 길을 걸어가 보자. 꼭 결심을 실행해 보리라. 어쩌면 나도 ‘시인을 찾아서’ 한 권 쯤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즐거운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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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배정표 첫 집단 거부… 제주 5개 사립고
 

[국민일보 2006-01-06 00:35]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05&article_id=0000231312

  어제 뉴스를 통해 제주도의 사립학교들이 신입생들의 입학신청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여기에서 꼭 한 가지 집고가야 할 것은, 문제가 되고 있고 찬반 양자간의 치열한 대립을 낳고 있는 핫이슈 사학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러한 대립 가운데 희생될 수 밖에 없고, 그 피해를 온전히 받을 수 밖에 없는 이 나라 이 땅의 저 죄없는 학생들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사학법의 정당성을 논하고 싶지 않다. 현재의 이러한 대립과 반목 가운데 온당한 논의는 존재할 듯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사학법은 정당한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비난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사학법은 그 자체를 그대로 악법이라 치부하고 그것을 찬성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 폭언하니, 이 극렬한 대립의 상황에서 더이상 어떠한 토론과 토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대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러한 상황이 있기까지 사학법을 마구잡이로 밀어부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통과시킨 여당이나, 사학법을 사악법이라 규정하고 온전한 논의를 막무가내 무시한 야당이나, 모두 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비난을 뒤로 미루고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현재 사학측에서 2006년도 신입생들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정부측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러한 불법행위에 대해 제재를 가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저 죄없는 우리 학생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바로 여기에 사학법을 두고 대립하는 양자가 지켜야할 도리가 있으며, 원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즉, 우리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피해와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학생들이 이 나라 이 땅에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은 이 나라 이 땅이 망하는 길이라 단언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는 헌법에 명시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임에 틀림없다. 과연 이 사학법에 학생들의 권리를 저당잡혀야 하겠는가? 아니, 지금 바로 이 학생들의 권리가 저당잡혀 있음을 볼 때 나는 탄식을 금치 못 한다.
교육이 백년지계라 함을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그것을 온전한 논의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통과시킨 정부여당에도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을 학생들을 볼모로 하여 반대하는 무리들은 그들의 주장의 정당성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오는 악행이다.

  나는 여기서 단 한 가지를 그들 모두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라나는 학생들이 어떠한 이유로든 피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명한 이치이다. 정부나 여당 측에서는 대화의 길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고, 사학법에 반대하는 사학법인 및 단체들은 그들의 교육자적 자세에 입각하여 정당한 반대를 해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막아내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앞으로 교육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사학관계자들에게 가장 깊은 우려와 탄식으로 고언하고 싶다. 교육자가 지켜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가르치고 기르는 저 학생들이 아닌가? 더이상 그들을 볼모로 내세워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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