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 MBC의 ‘느낌표’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이 그야말로 참담함을 인식하고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 만들어진 어쩌면 획기적이면서도, 또 한 면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부진한 도서 판매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 국민이 ‘느낌표’에서 선정하는 책을 따라 읽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열심히 그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비롯해, 《괭이부리말 아이들》, 《백범일지》, 《삼국유사》등등, 많은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니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압박하는 좋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많이 미뤄두었던 책들임에 분명했고, 어지간해서는 읽어내기 따분한 책들도 열심히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책《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하지만 그리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잠들어 있던 이 책이 크게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느낌표’에 선정된 탓이었다. 내가 ‘느낌표’에서 선정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던 와중에 조금씩 지루해가고 있을 즈음, 이 책은 나에게 진정으로 책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느낌표’가 내게 준 값진 선물이었던 것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시인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그 안에서 시인을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기행문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시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인들이 나고 자란 고향, 그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걸었던 길들을,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걸으면서, 시인이 느꼈던 느낌 그대로를 또한 새롭게 느껴보고, 그러함으로써 그들이 남긴 시들을 살펴본다. 이것은 하나의 외재적 비평 방법으로, 우리에게 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도,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에 재미와 기쁨을 더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나는 이 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목월의 향토색 짙은 밝은 색깔의 이미지가 무엇에 연유하는가도 알았으며, 영랑의 맑은 노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알았다. 또 어떤 시인의 어느 부분이 과장되고 어느 부분이 축소되었는가도 확인됐다. 이 동안에 어느 면 닫혀 있던 내 시관도 많이 수정되었다. 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이 기행을 하는 동안 늘 들떠 있었다. 시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들떠 있’지 않을 수 없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곰곰이 물어 본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큰 효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단순히 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자기가 보았던 풍경, 사물,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현실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 시를 놓고 거기에 쓰인 언어 기호 자체만을 풀어내려고 하고, 분석해 내려 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 읽기는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다. 아니 시는 “마음이 흘러간 바”를 적은 것이기에 그 마음을 느껴야 하건만, 이러한 시 읽기는 우리에게 ‘감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가 아닐 수 없기에, 이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만나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시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찾아떠난 그 길을 나도 어느새 걸어가고 있으며, 주옥같은 시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간 내 머릿속에서 좀체 설명되지 않던 구절들이 물흐르듯이 흘러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강한 감동으로 흘러내렸다.

 

  이 책을 만나고 나는 꼭 한 번 다시 읽고, 신경림 시인이 찾아 갔던 그 길을 나 또한 걸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하지만 책장 깊이 박아두고 있다가, 근래 다시 읽게 되었다. 아직 그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처음 읽던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친다. 이 책 한 권을 들고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다 못해 나를 힘들게 한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느낌표’를 통해 재간되고 나서 얼마 후 아쉬웠던 내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권이 나왔다. 내가 그것을 바로 구해 읽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1권은 이미 작고한 시인들을, 2권은 생존 시인들을 다루고 있다. 작고한 시인들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1권 못지않게 2권은 살아있는 시인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때론 술 한 잔 주고받기까지 더욱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2권의 책은 시 해설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니 어떤 시 해설서보다 더욱 충실한 해설서, 해설다운 해설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의 박진감과 현장감, 그리고 살아있는 시를 만나게 해주는 귀한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작 저자 자신, 즉 ‘신경림을 찾아서’는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경림,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


  이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주천강’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신경림 시인이 본 그 모습을 나는 가서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그 감동 그 느낌 그대로를 느껴보고, 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도 걸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웃음’도 웃어보면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 나도 한 번 그 길을 걸어가 보자. 꼭 결심을 실행해 보리라. 어쩌면 나도 ‘시인을 찾아서’ 한 권 쯤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즐거운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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