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


  지금의 우리는 많은 위기에 直面에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이 敎育의 문제이다. 명나라의 유학자 王陽明은 당시의 교육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세에 아이를 가르치는 자들은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에게 字句를 익히라 다그치고 품행을    방정히 하라고 요구하지만 아이들을 禮에 의거하여 지도하는 법을 모른다. 또 아이들이 총명하    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을 착하게 키우는 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때리고 벌    을 주기를 죄인 다루듯이 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를 감옥으로 생각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스승을 원수처럼 여겨 보려고 하지 않는다.1)


  그야말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豫見한 것이 아닐까할 정도로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못해 더욱 甚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육현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全般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까지 慘憺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慨嘆하고 覺醒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溫故知新’과 ‘法古創新’의 격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하겠다. 溫故와 法古, 즉 옛 聖賢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1) ꡔ王陽明全集ꡕ, 若近世之訓蒙穉者, 日惟督以句讀課仿, 責其檢束, 而不知導之以禮; 求其聰明, 而不知養之以善; 鞭撻繩縛, 若待拘囚. 彼視學舍如囹獄而不肯入, 視師長如寇仇而不欲見. 번역문은 박희병 편역, ꡔ선인들의 공부법ꡕ(창작과비평사, 1998), pp.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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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길을 向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



  Ⅰ. 序言


  ‘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明瞭하게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敎師와 學生, 나아가 모든 人間關係에서 우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형성한다. 일찍이 孔子는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1)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스승을 삼아 늘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게 경험과 지혜를 배우고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의 순수한 열정과     도전정신에 자극 받는다. 스승과 제자 간의 지적 긴장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가르치    면서 확실히 알게 되고, 배우면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2)


  ‘敎學相長’을 吟味하는 김영 교수의 말처럼 ‘서로의 발전’을 이루는 관계를 형성할 때 진정한 師弟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서로의 발전’을 이룬다함은 교사와 학생, 즉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의 指向點을 두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指向點은 무엇인가? 󰡔大學󰡕을 보면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애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3)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현대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계발하고, 민중들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고, 고도의 지적 ․ 도덕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4)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指向點을 向하는 교사와 학생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즉,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本稿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의미를 옛 聖賢들의 지혜에서 찾아보고 이를 현대적 의미에서 되새겨 보는 것은 교육의 위기에 直面한 현 우리사회에 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1) 󰡔論語󰡕 述而,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번역문은 김영 편저, 󰡔논어를 읽는 즐거움󰡕(인하대출판부, 1998). 이하 논어의 번역은 이 책에서 취함.
  • 2) 김영,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강의󰡕, 한울, 2005, p.86.  
  • 3) 󰡔大學󰡕,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 4) 김영, 上揭書,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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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제1부 제2장 <상상의 지리와 그 표상 : 동양의 동양화>이다.

  99쪽에서 "오리엔탈리즘은 1312년, 비엔나 교회회의에서 ... 각 대학에 아리비아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시리아어에 관한 일련의 강좌를 설치하는 것이 결정된 시점으로부터 서양의 기독교세계 속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00쪽과 101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분야는 매우 큰 지리적 야망을 갖는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잡다하고 엄청나게 거대하며 동시에 거의 무한대의 세분가능성을 오리엔탈리즘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인정하여야 한다."

  102쪽에서 "슈와브의 생각에 의하면 '동양'이란 말은 아마추어와 전문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열광과 같은 뜻이었고, 아시아적인 것이란 이국성, 신비성, 심원함, 생식력 등과 놀랍게도 부합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르네상스 극성기에 유럽에서 나타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정열이 그대로 동양으로 바뀐 것이었다."

  104쪽에서 "19세기의 중요한 작가 가운데 상당수가 동양열병에 걸렸다. 곧 위고, 괴테, 네르발, 플로벨, 피츠제럴드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오리엔탈리즘 저술의 한 장르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분명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06쪽 "사물이 구별되는 방식에는 언제나 어떤 정도의 순수한 자의성이 작용하고 있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자의적이다. 지리적 위치에 의하여 동양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은, 그 기준을 서양 지신들에 두었다는 자의성을 농후히 가지고 있다.

  107쪽에서 "사물 가운데 정신에 의해 판별되고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허구적인 실재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어서 "사람은 자신이 속하는 공간의 외부에 있는 생경한 공간을,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상이나 연상 또는 꾸며 낸 이야기로 가득 채우게 된다."

  결국, 동양은 서양의 외부로서 서양이 만들어낸, '상상의 지리와 표상'들로 가득 채워진다. 즉, 서양은 동양을 자의적으로 '동양화'하였다.

  이 장에서 이런한 상상의 결과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대상화, 표상화하였는지 입증한다. 110쪽에서부터 140쪽까지 동양, 특히 이슬람이 어떻게 서양에 의해 이미지화 되었는가를 입증하는데, 가히 어린아이들의 단순한 놀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이미지는 더욱 확고히 굳어져, 모든 동양에, 모든 동양인에게 상징적으로 부여되었던 것이다. 재미를 느껴도 된다면, 마호메트가 어떤 캐릭터로 상징화되고 이미지가 부여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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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책에 나오는 구절들을 적어 남기고 싶어 마이리뷰의 밑줄긋기를 이용하고 싶었으나, 별도의 자리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단은 이곳 마이페이퍼를 이용한다.

  오늘은 제1장 <동양인에 대한 인식>(pp.67~98)이다.

  아더 제임스 벨푸어

  "그는 '동양인'이라고 하는 말의 선택 그 자체가 이미 정해진 규범적인 것이라고 말했다."(p.69)

  "지식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지배한다는 것, 곧 그것에 대하여 권위를 미치고자 하는 것이다."(p.70)

  결국 서양은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동양을 지배했고, 권위를 미친 것이다.

  "이집트는 영국에 의해 병합되기까지 동양의 후진성을 말하는, 소위 학문적 사례로만 얘기되는 존재였다."(p.75)

  "밸푸어의 '오리엔탈리즘'에 상응한 것이 크로머의 '종속적 종족'이다."(p.77)

  "본질적인 지식의 핵심, 그 긴 발전의 궤적에 접근한다. 그 지식이란 크로머나 밸푸어가 1세기에 걸친 근대서양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계수한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며, 그것은 곧 동양인에 관한 그 인종, 성격, 문화, 역사, 전통, 사회 그리고 장래성에 관한 지식이었다."(p.79)

  "동양인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범죄였다."(p.81)

  "18세기 중엽 이후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가 생겼다. 그 첫째는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한 점이다. ... 둘째의 양상은,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는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는 점이다."(pp.82~83)

  "오리엔탈리즘이 제도의 면에서도, 내용의 면에서도 급속하게 진전된 시대는 유럽의 엄청난 팽창의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p.85)

  결국,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봉사한 오리엔탈리즘인 것인가?

  "19세기와 20세기에는 오리엔탈리즘의 여러 관념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 ... 소위 동양 르네상스가 생겼났다는 점이다."(pp.86~87)

  "나폴레옹의 이집트점령과 함께, 오늘날 우리들의 문화적, 정치적인 관점을 지금까지도 여전히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동서양 관계의 과정이 급격하게 시작되었다."(p.87)

  "오리엔탈리즘은 지금까지 제국주의, 실증주의, 유토피아주의, 역사주의, 다윈주의, 인종주의, 프로이트주의, 마르크스주의, 슈펭글러주의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p.88)

  "오리엔탈리즘이란 결국 현실에 관한 정치적 비전이며, 친구들(유럽, 서양, '우리')과 이방인(동양, 동방,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장하는 구조"(p.89)

  동양이라는 것은, 곧 동양에 대한 서양의 타자화인 것

  "오리엔탈리즘의 현실이란 반인간적인 것임과 동시에 지속적인 것이라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는, 그 여러 제도 및 광범한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오늘에까지 존속되고 있다."(p.89)

  "동양인에 관한 적합한 연구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이다."(p.91)

  "이국적인 것을 취급하는 사고양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그 근대적인 전개의 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엄격한 구분 위에 기초지워진 지식 특유의 지극히 개탄할 만한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p.92)

  "그의 구별은 동양인과 서양인을 분리하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정통적인 구별과 같다."(p.95)

  여기서 '그'는 전 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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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놓고도 아직 그 온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뛰어난 시인이다. 월북한 시인들이나 이북의 시인들이 해금되면서는 누구보다 정지용이 가장 크게 조명되었다. 하지만 백석은 근래에 들어 그 연구가 전개되고 있으나, 아직도 백석의 시적 가치를 온전히 밝혀내기에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백석의 시중에서 <여승>이라던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교과서에서 배워 알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온전히 백석의 시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여승>에서 보이는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 시적 경향이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의 시적 자아의 고독의 편지와 같은 경향은 백석의 많은 절창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백석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일순위로 꼽히는 김소월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김소월을 잇는, 그러면서도 가일층 변화된 발전을 보여주는 우리 시사의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왜 이런 평가를 단정하여 그에게 부여하는가?

    멧새 소리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위의 시를 나는 백석의 절창 중의 으뜸으로 꼽는다. 왜 그런가? 제목에 보이는 '멧새'는 시행 어디를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멧새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도 않다. 제목을 빼고 보면 이 시는 영락없는 명태타령이다. 시 제목을 명태라고 한들 이 시가 어디에 내 놓아도 기죽지 않음이 분명하다. 얼핏 제목을 잘못 지은 것만 같지만, 우리는 이 시를 더욱 뜻깊게 읽기 위해서는 행간 사이 사이 숨어있는 시인 백석의 위대성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목이 '멧새 소리'다. 처음 읽을 때는 들을 수 없던 그 소리가, 두 번, 아니 세 번째 읽을 때는 강원도 어느 바닷가 해변에 길게 널린 명태 사이 사이에 손가락 만한 멧새 한 마리가 숨어 날아다니며 울음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소리의 음향을 상상하며 이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 곧 왜 제목이 명태가 아니고 멧새 소리인가를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명태는 시적 화자 '나'와 동일시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겠다. 즉 '나'는 추운 겨울 바닷 바람 싸늘히 불어오는 해변가에 '파리'하게 널린 '명태'인 것이다. 그 사이에 시인은 한 편 대조적이면서도, 가일층 쓸쓸하게 하는 음향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과연 멧새 소리는 이 시의 의미를 최고조로 강화시키는 훌륭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석의 위대함이다. 김소월의 운율적 감각에 못지 않는 리듬이 있다. 우리 옛 이야기가 녹아나는 전통과 애환 또한 그의 시에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시가 한 개인의 고뇌의 산물임을 또한 드러내고 있다. 우리시의 근대성, 혹은 현대성을 또한 찾는다면, 그의 시는 훌륭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백석의 시집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살아 생전 내놓은 것은 단 한 권의 시집 뿐이다. 바로 <<사슴>>이라는 시집이다. 아직도 그는 우리에게 청년 백석으로 기억된다. 그는 우리에게 어쩌면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었던 거싱 아닐까? 백석의 위대함이 진정으로 조명되고 우리에게 기억되기를 나는 바란다.

 

 

  참고로 백석의 시 전집을 몇 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 나는 가운데, 이동순 선생이 편한 <<백석시전집>>을 추천한다. 부록으로 산문을 포함하고, 더욱 좋은 것은 백석의 시어들을 친절히 풀어놓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백석의 생애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책은 이미지가 없지만, 건국대출판부에서 문학의 이해와 감상 시리즈로 출간한 백석에 대한 해설서다. 간단히, 하지만 충실히 백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백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두번째 책은 백석의 애인 자야여사가 백석을 회고하며 쓴 책이다. 그리고 최근에 <<백석 시 바로 읽기>>라는 책이 나왔는데, 얼마나 바로 읽었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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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6-1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백석시전집...그의 시도 좋지만 편한이 이름도 반갑고..

멜기세덱 2006-06-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이란 이름은 참 멋진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반가우실 정도이면...

김희중 2015-01-2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생각이 나서 <멧새 소리>를 검색하던 중 닉네임이 낯익어 유심히 다시 보니 역시 형이었네요. 전에 세미나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명태처럼 삽니다.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