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을 비워두고 며칠 외유를 했더니 방안이 냉골이다. 신발을 벗고 내딛은 첫발부터 찬기운에 까무라친다. 아이고 차가! 깜깜한 방에 불도 키기전 보일러부터 가동하고 온도를 최대한 높인다. 한 30분이 지났는데도 아직 차다. 좀 전까지 하얀 입김이 서렸는데, 지금은 가셨다. 그래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시리다. 한 2년간 이렇게 오래 집을 비워보긴 처음인 것 같다. 뭐 워낙 재미없는 인생이고, 귀찮고 하찮은 인생인지라, 어디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천상 게을러 터져 돌아다니는 건 딱 질색이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갈 곳 있으면 귀찮고, 오라는 데 없으면 지겹다. 그나저나 이놈의 방은 언제 찬 기가 가시려나. 추운 건 딱 질겁이다. 그렇다고 더운 것은 취미 없다. 그냥 땃땃한 것이 좋고 서늘한 것이 애뜻하다. 그래서일까? 예수도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이도 저도 아니면 뱉어버린댔데나, 어쨌거나 그래서일까 보다. 성미가 영 우유부단하고 뭐하나 시원스레 하는 것이 없다. 아 아직도 춥구나. 얼른 따땃한 구들장에 등짝을 뜻뜻허니 지저볼란다.
** 외유를 했다는 것은 구정을 쇠러 시골에 다녀온 것을 말한다. 외유란 말이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 이 외유란 말이 어울리는 명절길이다. 사실 다녀온 시골이 내 고향도 아니고 부모님은 고향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시절좋게 말하면 귀농인데, 말인즉 귀농이지 실은 낙향이다. 헌데 고향 찾아간 것도 아니니 낙향도 딱히는 아니다. 도시 살기 힘들어 어데 큰이모댁 옆에 내려가 그냥저냥 밭이나 갈아 먹자고 내려간 길에, 터 잡고 눌러앉은 셈이다. 근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니 부모님은 이웃도 생겨 마실도 다니시고 하신데, 나는 명절이라고 내려가 봐야 뭐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재롱피는 나이도 지나 고래 잠만 퍼질러 자고 차려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다가, 밤새 텔레비전만 보다 새벽에 잠들고, 그렇게 도야지마냥 굴러다닐 뿐이다.
그러니 명절이라고 부모님 계신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 영 신통찮다. 명절에 고향을 가면 오래간 못 본 친구놈들도 만나 술도 한 잔 떠들석하니 마시고, 시집간 순이 얼굴도 지나는 길에 보고 어릴 적 뒷동산에서 꽃 꺾어주던 추억도 눙치고 하는 것이 재미 아니던가. 그런 재미는 고사하고, 요새는 모이는 형제간이나 사촌들이 죄다 시집 장가들어 지네 짝들 데불고 와가지고 끼리끼리 노는 마당에야 내가 재미 볼 여지는 여간 없는 것이다.
이번에 내려간 길은 근 2년만이란다. 나는 셈이 잘 되지 않아 모르겠는데, 제작년 사촌 여동생이 시집갈 때에 내려가곤 첨이란다. 작년에 사촌 형도 장가를 가더니, 이번엔 내려가 보니 아들내미를 딱 놓았다. 누나는 4살짜리 딸내미하고 작년 가을 돌맞은 아들내미를 데리고 내려왔다. 시끌벅적 아이들 울고 웃는 소리가 즐겁지만, 그것도 한 때인 것이다.
*** 5일 저녁 늦게 집을 나와 시골엘 가려고 했더니만 차표가 없다. 그래서 몇 시간 늦게 근처 다른 곳으로 가는 고속버스엔 한 자리가 있어 그걸 타고 밤 늦게나 내려갔다. 근 새벽 2시가 되서야 도착했다. 내려가든마타 어머니는 내가 무슨 여자라도 데려오지 않을까 했단다. 이유인즉, 엊그제 인천 사는 작은 이모하고 통화하기를 내가 이제 여자 데려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별 말도 없었는데 무슨, 하지만은 은연중 기대를 한 눈치다. 나는 별반 말 없이, 못 먹은 저녁을 먹고는 티비를 보다가 늦게나마 잤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옆짚 큰이모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큰이모도 하는 말이 또 그거다. 이거 어른들이 무슨 작당을 하고 날 농칠려는 건지 원.
게다가 어머니는 내내 삼촌댁 아들내미 얘기만 한다. 외숙모가 만날 전화해 작은 아들내미 얘기에 재미를 붙였다는데, 이 아들내미가 네댓살 연상하고 사귀는데, 이 여자가 만날 집에 찾아온 온갖 아양을 떨고 음식도 만들고 하면서 아주 며느립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뭐가 어떻고 뭐가 잘하고 뭐에 좋은지 마냥 자랑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나보다 한참 아래인 이 사촌동생 얘기에 어머니가 영 부러워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젠장. 근데 왜 딴데 다 놔두고 외숙모는 우리 어머니한테 만날 그리 전화를 해서 자랑을 해대는 걸까? 하긴 그 자랑에 못내 부러워할 티를 낼 사람이 우리 어머니밖에는 없으니 고 재미가 외숙모에겐 쏠쏠할 게다.
**** 일정을 잡지 않고 무작정 내려간 길이다. 안 썼던 휴가를 몰아, 4일과 5일, 그리고 다음주 초 며칠을 냈다. 그러니 가서 내키는 대로 놀다가 올라올 참이었다. 근데 친척들도 모이고 누이 애들도 몰려들어 그저 마냥 제멋대로 놀기가 쉽잖아서, 올라가 할 일이 있다며 내처 오늘 올라온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함박눈이 내린 모양이다. 이거 올라갈 수 있겠나 싶었더니 날이 따뜻해 금새 길은 녹아내렸다. 눈이 더 오기 전에 올라가야겠다 싶어 낮 차를 타고 올라온 길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다보니 눈이 또 뿌린다. 날씨가 변덕 같기는 올라와 보니 저녁무렵 춥기가 쌀쌀맞다.
쌀쌀맞은 날씨 탓에 터미널 근처 서점에 들러 책들과 놀다가 몇 권 집어들고 이 밤에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또 한 일 이년은 못 내려가겠구나 생각한다. 내처 이번에는 여자를 하나 달고 내려갈 때까정 안 가리라고 생각한다. 올라오면서 읽었던 김유정의 「아내」란 단편을 읽으면서 마냥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또 이맘때고 저맘때면 어머니는 전화를 해서 내려오려므나 하겠지만, 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방도 오래 찰 날이 몇 년간 없을 것이다. 방이 항시 또 땃땃하면 담번 내려갈 길에도 내 옆에 달릴 건 아무도 없을 것인데. 하여간 생각은 영 허무하다.
***** 방은 아직 찬 모양일까? 자판을 두들기는 손에 시린 기는 가신지 오래다. 사실 할 일이 몇 개 있다. 올라와 마냥 방바닥과 궁상 떨기만은 못할 것이다. 어데서 맡은 글짓기 숙제도 있고, 대학생 애들 데리고 뭐 간단한 좌담에 사회도 맡고 그랬다. 책도 좀 진득하니 볼 시간이 며칠 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 올라오기 전 봉투에 돈 10만원을 여서 넌즈시 건네드리고 왔다. 사실 좀 많이 드리고도 싶었는데, 이래저래 버는 것도 없고 그렇다. 그래도 좀 아낀 셈이 없지 않아 미안스럽다. 아무튼 명절이 또 이렇게 같다. 이번 명절은 살 꽤나 쪘을 것이다. 기실 몇 년 명절 동안은 살이 쭉쭉 빠졌다. 대학가 주변에 살면서 명절이면 밥 먹을 곳 찾아 헤매기 일쑤다. 집에는 밥 해먹을 잡동사니는 거의 전무하다. 그러니 어데 밥집이라도 문 연 데가 있어야 그나마 풀칠을 할 수 있는 셈이다. 명절이면 밥집이란 밥집은 죄다 문을 닫아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걸로 떼우기가 종종이었다. 그러나 이번 명절 만큼은 삼시 세네끼를 꼭꼭 챙겨주어 먹었다. 살이 살짝이 올랐으리라. 아 이제는 방이 따땃해졌는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