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일체의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곳이 의식인 까닭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공간적으로 나타나질 때만 이러한 모든 시현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개념적 이미지인 시간 - 공간이라는 정신적 구조물을 시현된 세계를 감지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첫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이는 시현된 우주가 지각될 수 없다. 따라서 시공에 확장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모든 사건들은 단지 개념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시현된 우주가 외양일 뿐이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우주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란 그 자신의 질서로 나타나는 무엇인가의 반영이다.

셋째, 현상이란 실체의 대상화된 측면이요, 전체적 가능성(잠재력)으로서, 알려지지 않음의 무한성 속에서 알려진 모두이다. 의식은 의식을 초월하는 데 이용될 수 없고, 그러므로 실체는 인식 범위 밖이다.

넷째, 실체(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그 자체, that - which - is)는 "존재(be)"할 수밖에 없고, 오직 지금 존재한다. 개념적인 시간 - 공간이 없다면 사물이 존재할 '때'라든가 '곳'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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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몸도, 그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의식주도,

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사회와 그 사회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갈등들,

그리고 그 갈등과 비극이 이루어지기 위해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적개심과 분노를 만들어내기 위한 음모도

모두가 마음 하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기고 사라지고 때로는 고착화되고 현상화되는 마음들이

모두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의 살터문제로 요즈음 마음이 산란하다

이런 문제를 내게 안겨준 그 사람이 너무 밉기도 하고

그 미운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커져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돌이키면

그래서 그 미운 마음을 앞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아진다. 놀랍다.

어찌 알까?

그 분이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해 온 분인지....

느닷없고 주체할 수 없이 올라오는 그 생각들이 쓸데없이 자꾸만 커져서

내 마음을 갉아먹고 내 가슴을 불태우지 않도록

마음 지향하는 바를 명심할 일이다

문득 "만법귀일 일귀하처"란 화두가 마음에 착 달라붙는 밤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내 마음이 더욱 밝아져 부처님전에 복많이 짓기를 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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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0-12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직장 생활 하다보면, 마음에 가시처럼 걸리는 사람이 있어요.
저도 그래서 힘들었던 기억이 많아요. 하지만 가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의 똑같은 유형의 사람을 싫어했던 것 같아요. 그게 아마 내 업장이 올라오는 것이라서 그런가봐요. 내게 가르침을 주러 온사람.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돌아봐질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냥 싫은 감정, 그건 어쩔수 없을때가 많아요.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파도가 잠드는 날이 빨리 오기를....().....

어둔이 2004-10-1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부인의 의부증때문에 고생을 한 한 사람이 부인과 함께 대행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혹시나 대행스님이라면 그 두 사람의 힘든 인연에 대하여 무엇이라도 해결책을 줄 것같았기 때문입니다. "스님 도대체 못살겠습니다. 무슨 업장 업보가 있기에 이렇게 이 사람에게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스님께서 좀 봐주십시오"라고 하자 스님이 웃으시면서 "처사님은 참 복이 많소. 이렇게 늘 남편생각만 하는 마누라를 두고 살고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오"라는 말만 했데요. 스님의 말을 듣는 그 순간은 농담하는 줄만 알았고 그져 이런 문제에 경험없는 스님이라 별묘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지나서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지더랍니다. '그래 마누라는 보이나 않보이나 늘 내 생각만하는구나. 하루내내 마음이 나에게만 붙어있구나'라고 생각이 들고나서는 마누라 대하는 마음이 측은하기도 하고 고맙기도하고..생각이 달라 보인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는 부인의 의부증에 대하여 예전만큼 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나요..

하무튼 어려운 일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사건과 세상과 인연의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세상의 비밀은 마음의 비밀입니다. 마음 고쳐먹는다고 한참에 세상이 낙원으로 변하고 원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서 부터 인연의고리를 풀고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더 이상 꼬이는 인연을 만들지 않습니다. 양화는 악화를 구축하지 않는다. 선한마음이란 선한 마음 그자체로 이미 우주법계의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결과는 바라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멸심은 두마음이지만 보리심은 한마음입니다. 생멸의 두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지만 그 한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는 의도하는 것이 아니고 가는대로 두고볼일이며 받아들일 일입니다. 천지는 불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도 단비를 내리고 선인에게도 가뭄을 줍니다. 악인은 단비라도 불평하지만 선인은 가뭄이라도 불평하지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은 어디로 가는 마음이 아닙니다.

다시 온갖 생멸심이 들끓는 그 마음에 대고 묻습니다. 세상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

누가 알겠습니까?.......옛탑은 허물어져도 서쪽으로 기웁니다. 서쪽은 방향이 어디입니까?

같은 물음입니다...알겠습니까? ^^!!

달팽이 2004-10-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직 모를 뿐...입니다..
 

자각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선행하는, 이유도 지지도 필요없는 근본적인 본래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본래의 상태에 의식의 개념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상대성을 야기시킵니다. 의식은 형태를 갖고 있는 물질의 표면에 부딪히는 자각의 반영입니다. 자각을 빼놓고서는 의식을 말할 수 없습니다. 태양이 없이는 그 빛이 반사되어 느낄 수 있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식없이도 자각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순간적으로 의식이 없는데(의식이 쉬는 상태임) 그 때에도 자각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깨고 난 후 잠을 잤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났을 때만 그것을 압니다.

마하라지는 의식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이렇게 말한다. 의식은 우리와 늘 함께하는 동료와 같다. 우리를 삶이요, 사랑이요, 환희의 기본적 존재인 자각으로 데려다 주는 것은 의식이라는 동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인 까닭에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마하라지에 의하면 존재의 의식은 벌써 자각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한다. 근본에서 비롯된 마음은 밖을 향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언제나 그것 자체 안에 있는 그것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그 안의 근원을 찾고자 방향을 바로 잡을 때, 그것은 거의 새로운 삶의 시작과 같다. 자각이 의식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나는 존재한다(I am)"가 중단된다. 자각 안에는 생각이 없다. 자각은 의식의 근원일 뿐이다.

마하라지는 훌륭한 정신적 수련은 조용히 앉아 마음의 표면에 무엇이 떠오르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권한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면 위의 잔물결과도 같다. 생각은 언제나 무언가를 자기와 동일시하여 자신의 근본을 왜곡시킨다. 생각이란 생각나기 이전의 산물일 뿐이다. 잔물결이 없을 때는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며 마음 또한 잔잔하게 된다. 마하라지는 말한다. 당신 마음의 거울에 온갖 종류의 영상이 생겨나 잠시 비추이다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저 그것들이 오고 가는 것을 여여하게 지켜보라. 방심하여 그것들을 놓쳐서도 안되지만 그것들에 얽매이거나 끌려다녀서도 안된다. 이러한 주시의 태도는 원치않는 손님들과도 같은 불필요한 모든 생각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의 내부, 즉 "내가 존재함(I am) 안에서 마음의 흐름과 싸우거나 판단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그것들의 흐름을 지켜본다면,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 없는 그 깊은 미지의 근본이 의식의 표면으로 드러나 당신으로 하여금 그 근본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무한한 에너지를 풀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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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10-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하라지 선생은 얼마나 친절한가!! 언어가 갈 수 있는 그 끝까지 왔다. 이제 우리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작금의 과제이다.
 

그 깊은 떨림.

그 벅찬 깨달음.

그토록 익숙하고

그토록 가까운 느낌.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껏 그날의 떨림은

생생합니다.

단지, 천 배나 더 깊고

천 배나 더 애틋해 졌을 뿐.

 

나는 그대를 영원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이 육신을 타고나 그대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운명.

우리 둘은 이처럼 하나이며.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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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0-0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 님이 올리는 시를 읽으면서, 내가 참 메마르게 살고 있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좋네요.
책장 한쪽에 몇년간 손길한번 주지 않던 시집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시집을 많이 가지면 시도 많이 아는 듯해서 시집만 사들이던 때가 있었는데......^*^

달팽이 2004-10-08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과 나 사이에서 떨림을 주는 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떨림, 마음과 마음사이를 오가며 느끼는 떨림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그런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아직은 보는 눈이 섬세하지 못해서 얕지만 조금씩 깊어감을 느끼는 재미도 있더군요...

까뮈와 릴케 2005-04-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전에 읽었던 시인데 지금 읽으니 또 느낌이 다르네요. 그 떨림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요..

달팽이 2005-04-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마음 속 어딘가에 그 의문의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ㅎㅎ
브라이스 와이스의 "기억"이란 책을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전출처 : stella.K > 이시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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