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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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년도 더 된 대학 때의 일이다. 어느 번역본을 교재로 전공수업을 하였는데 배우는 우리들이야 잘 몰랐으니 우리글로 된 책 읽고 배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업이 진행되면서 담당교수님은 당황하여 의심스런 눈빛이 짙어졌다. 번역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공분야의 내노라고 하는 사람이 번역한 책이라 의심 없이 선택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학기 중간에 교수님께서 원전을 찾아서 일일이 번역본과 대조하여 어떤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 지적하기까지 했다. 학기의 마지막 시간에 그 교수님은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한사람의 교수로서 배우는 우리들에게 부끄럽다고 했다 . 그 번역자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틀림없이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을 통한 번역을 아마 자신의 이름으로 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든다고 했다.

나는 '병원이 병원을 만든다'를 보면서 그 때 일이 떠올랐다. 책 페이지 빼곡히 줄을 긋고 문맥에 맞게 고쳐 새로운 번역문을 적었던 일이 이 책에서도 필요한 일이라고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의료분야의 전문적인 용어가 많고 또 많은 주를 달고 내용을 줄이고 문장을 압축한 글이라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줄을 치고 우리말을 새로 해석해서 읽고 글의 행간을 분석하며 읽었다.

물론 원서에 담긴 이 책의 전체적인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의 결론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서 왜 그러한 결론이 가능한 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읽기 속에서 그런 논리의 전개과정을 얻을 수 없다면 두터운 책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시간을 들여 독서할 이유가 없다.

'번역은 때로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원서가 난해하면 그 난해한 문장을 곧이 곧대로의 직역이 아니라 의미를 풀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번역자의 몫이다. 번역기를 통한 것같은 축자적 번역으로 지은이가 주고자 하는 직접적인 주장을 번역자가 더욱 헷갈리게 만들어 독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아예 번역은 필요없다. 간단한 서평만으로 책의 정보를 전달하고 결론을 받아들이게 하고 차라리 원서를 읽게 유도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책을 소개하는 마음이 앞서 굳이 오역과 완전하지도 못한 번역으로 정말 읽고 싶었던 책으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 책은 벌써 10년도 전에 한번 번역한 책이고 개정판을 다시 낸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일리히의 명복을 빌며 이 작은 역서를 그의 무덤에 바치는 정도라면  더욱 명확하고 이해 가능한 번역을 해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의학적 치료라는 현대적 신화를 멋들어지게 파헤진 일리히의 매력적인 사유 때문에 이 책을 들었는데 지은이의 잘못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모자람인지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좋은 책을 닥치는대로 읽고사는 나를 무척 불편하게 만들었다. 본문을 힘들게 읽어야 하는 과정 때문에 일리히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 많고 자세한 주석은 챙겨볼 마음의 여유마저 갖지를 못했다. 귤이 장강을 건너면 탱자로 변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나는 먹기에 부담스러운 탱자가 되어버린 이 책을 어떻게 마져 읽을 것인가를 현재 고민중이다.

번역자가 지닌 이 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그리고 그의 화려한 학문적 이력에 혹 누를 끼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지만 이 책의 번역문을 읽고 나와 같은 불평과 고민이 없었다면 누구라도 다른 의견을 평해주시기를 바란다. 떫은 탱자라도 맛있게 먹었던 사람들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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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쓸쓸하냐 - 2004년 1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운문산답 1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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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상사나 삶의 전기에서 젊은 날의 누구누구 또는 만년의 사상이라는 구분으로 한사람의 생평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꺽어서 바라보는 그 사람의 내면적 변화를 우리가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변화의 전환점을 이현주 목사의 이 즈음에 나온 책에서 많이 보게 되었다.

사회의 참여적 종교 활동에서 열린 종교적 경험으로 홀로 걸어 나와 이제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종교적 깨달음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종횡무진 걸림 없이 바삐 걷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우리가 얼마나 숨이 가쁜지 우리는 이제 뒤쫓아 가기도 힘들게 그는 앞서 가버린 것 같다...그리고는 끊임없는 호흡처럼 쏱아지는 그의 말씀을 생명수처럼 퍼마시는 우리는 너무 수월하게 목마름을 채우는 것은 아닌지...

이아무개라고 이름 없는 이름으로 살 때부터 그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았어야 했는데...예수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자신의 종교 이야기를 내뱉을 때부터 그의 속내를 들어다 보았어야 했는데....

그리하여 '물과 나눈 이야기'에서 '내가 귀를 열면 돌이 입을 연다. 그리하여 그의 입이 하는 말을 그의 귀가 듣는다'라고 말을 할 때 이미 그는 자신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깨달음의 사람임을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그는 자신 속에서 답을 구해버린 사람이 아닌가? 모든 물음 앞에서 이렇게 쉽게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답 속에서 한 우주를 이루어 내고 운문산답(구름이 묻고 산이 답한다)이 우문산답(어리석게 묻고 흩어러진 답을 하다)으로 세상으로 오해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로서는 걱정된다. 세상의 오해나 몰이해로부터 진작 마음거둔 발걸음으로 홀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갈 지라도 말이다.

그가 묻고 그가 답하는 그 자리에는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적어도 그의 문답 속에는 그의 문답을 지켜듣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가 없다. 쓸쓸함을 이야기 하거나 사랑을 이야기 하거나 밥을 먹거나 지렁이 앞에 서거나 전쟁을 이야기하거나 간에 모두 매 마찬가지다. 남의집 잔치에 가서 할 일 없이 서 있다가 머슥하게 돌아 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배가 고파서 잘 차려진 뷔폐에 갔는데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고 왔다면 나의 입맛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주인의 음식 솜씨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차림이 옹색한 나의 모습이 얼어 붙게한 식당의 화려한 분위기를 탓해야 할까? 그의 물음이었기에 그의 답을 쫓아가는 나의 문답이 모자라는 탓인가?

그래서 “쓸쓸한 만큼 쓸쓸할 때 그래도 쓸쓸하냐?” “많이 덜해 졌습니다.”라고 운문산답한 지은이의 심정과는 달리 이 책을 읽고난 나의 심정은 “아직도 쓸쓸합니다....아니 더 쓸쓸해졌습니다. 이 손님이 오래 머물 예정인가 봅니다”라는 말이 자꾸 되뇌어 진다.

나의 기분이야 어떠하든 그래도 우주 간에 덜 쓸쓸해진 그의 미소진 표지 얼굴이 너무 반갑다. 정말 그와 함께 겨울밤을 새며 산과 구름이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의 노년을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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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가 있는 땅에는 핏빛 꽃들만 피어났다
수전 안토네타 지음, 박수현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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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책자체의 자랑을 담고 있는 것을 선전용 문구는 잔치를 소문내는 것이지 그 내용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의 표제에는 전미도서상이다 뭐다하는 자랑으로 장식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표제의 신뢰성에 이끌려 이 책을 구입했다. 구입한 정도가 아니라 모임에서 이책을 돌려읽기까지 권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땧을까..한마디로 참담하다.

최소한 환경문제가 연구적 수치나 사실적 환경보고서를 벗어나 문학적인 접근에 대한 감동을 기대했던 우리들을 실망케한 것이다. 어디에 잘못이 있을까..책을 익숙하게 읽지못한 독자의 잘못인가..아니면 작자의 레토릭이나 어법에 문제가 있는가..그것도 아니면 이책을 번역한 번역자의 부족함인가..책을 쉬이 읽지못하게 하는 이 모두의 총체적인 곤란함인가..책을 읽다보면 읽는 도중에 책방을 달려가 다른 책을 바꿔읽고 싶다는 감정에 들끓게 만드는 책이 있는데 최소한 나에게는 이 책이 그런 드문 책이 되었다.

이 가을날 머리 아프고자 하는 사람은 이책을 읽어보라 괜한 심술을 부리고 싶은 사람도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아마 내내 고개를 갸우둥거리면서 책장을 뒤적일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책의 전반이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뭔지를 모르겠다. 가족관계를 이해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환경 오염에 짓눌려 파괴되어버린 삶의 고통이 어쨓다는 것인지 책읽는 내내 줄거리를 온전히 따라갈 수가 없다. 먹을 만한 잔치상을 어질러 놓은 분위기다. body toxic이라는 원제를 '원자로가 있는 땅에는 핏빛~'라고 거창하게 바꿔놓은 것 부터 선정적인데 내용은 누가 잘못인지 모르지만 엉망이다.

이는 나의 총평이 아니라 우리모임의 총평이다.'이 좋은 가을날 오염된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아픔을 나누고자 했던 우리의 시도가 얼마나 허망하게 끝났는가!!'

나의 책읽기 인내력이 부족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출판의 가벼움을 원망해야겠다. 결국 우리 모임에서는 아무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내는 관대함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번역한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과 함께 하고 싶다. 그런 뱃속을 배우고 싶다. 그는 이책을 번역하는 내내 어느 글속에서 헤매고 있었을까 ..그게 궁금하다.

뒷부분은 괜찮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책의 전반부 이상을 읽어내지 못한 나의 독서평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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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새가 있다
김해창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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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새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힘든 세상이다. 새가 있는 곳에 또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세상이다. 알려지면 사람들의 발걸음에 모든 것은 죽는다.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하고 알려야할 것과 지키고 보호해야할 것의 사회학적 함수가 우리 시대에는 반비례한다. 그래서 알려지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데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분간의 오염과 파괴를 각오해야한다. 그곳에 가면 새가 있다고 알려주기 어려운 이유가 그곳에 가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새를 쫓아버리는 준비되지 못한 방문객이 될 가능성이 크기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가면 새가 있다고 김해창기자는 참으로 친절한 발걸음으로 우리들의 새로운 길에 눈뜨게 한다. 발전과 개발에 밀려 곳곳마다 이땅의 모퉁이마다 짜투리처럼 남아있는 습지를 찾고있는 새들의 모습을 정말 황홀하게 소개하고 있다. 서울 한강에서 제주도 성산포까지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인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찾아가는 방법을 공개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일반인의 전문탐조 경험을 정리한 책이 드물다. 도감정도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참고서적이다. 그러한 면에서 일반인들이 지니고 또 다르게 국토의 곳곳을 찾아누비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사회적으로 축적되어 사람과 자연의 관계의 질을 바꾸고 사람사는 사회의 올바른 비젼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게기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단순히 구경꺼리의 목마름으로 찾아가는 습지와 새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한권의 책은 정말 소중한 경험으로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세상은 아직 넓고 밝다. 새들만큼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이라면 말이다. 이 한권의 책을 따라 습지만큼 겸허해지고 새들만큼 고상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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